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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숙 시집 『손끝 체온이 그리운 날』:일상 속에 숨은 익살의 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7. 9. 14:02

일상 속에 숨은 익살의 시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윤혜숙 시인의 시집 『손끝 체온이 그리운 날』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클레오폰은 일상생활에서 취재한 일종의 서사시를 쓰면서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을 모방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한 구절을 상기하게 하는데, 이 시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버지, 어머니, 아들, 남편과 같은 친족이거나 조금 멀다 해도 몇몇의 친구, 아주 드물게 병원에 입원하며 잠시 같은 병실에서 마주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의 만남에 국한된다 – 시 「병원생활」 참조. 또한 이 시집에 펼쳐진 공간은 농촌으로서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도 아직 훼손되지 않은 공동체 삶의 미덕과 농경農耕의 느릿한 아름다움이 깃들여져 있는 곳이다.

 

이와 같이 『손끝 체온이 그리운 날』은 넓지 않은 공간 속에서 마주치는 살가운 사람들과의 교유의 기록이면서 ‘뿌린 대로 거둔다’는 소박한 삶의 교훈을 체득해가는 중년 中年의 연대기年代記라고 볼 수 있다. 이를 부연하자면,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면 그만인 일상의 언저리에서 파생하는 애환哀歡의 의미를 긍정의 시심詩心으로 승화시키는 ‘익살의 미美’가 시집을 관통하는 힘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것이다.

 

익살, 즉 해학諧謔은 시에 있어서 풍자諷刺와는 다른 표현의 도구이다. 풍자가 당면한 어떤 상황의 부정적 측면을 조소嘲笑하는 비판적 기법이라면 익살은 억압에 놓인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우스꽝스럽게 행동하게 함으로써 슬픔과 분노를 해소하고 간접적으로 삶에 필요한 교훈을 제시하는 표현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살펴볼 때 『손끝 체온이 그리운 날』의 시법詩法을 익살로 단정한다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구차하고 불필요한 언어의 장식을 배제한 직설적 화법話法과 각각의 시편에 담긴 체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가 끝내는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정화淨化의 웃음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시인의 공력을 익살로 치환하여 느낄 수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에 대한 회상과 계절의 변화에 따른 도저한 감성의 표출 , 도시화와 자연의 경계에 놓여 있는 농촌 경제의 어려움들을 다룬 여든여덟 편의 시가 서정시의 편린을 고스란히 펼쳐 보이면서도 애이불상哀而不傷에 빠지지 않는 것은 시인이 지니고 있는 조화로운 삶과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믿음의 근저에는 ‘익살’이라는 에너지가 살아 숨 쉬고 있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2.

 

그렇다면 이 ‘익살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불과 반 세기 전 만 해도 우리는 혈연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노동집약적인 농사와 열악한 의료체계 속에서 영아 사망율이 높았던 탓에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다산多産의 풍습,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희생과 인내로 삶을 이어나갔던 ‘어머니’가 보여주었던 슬프면서 강인한 모성母性이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우리의 많은 시인들이 부모, 특히 어머니를 모티브로 한 시들을 남기게 되는 것은 어머니가 희생과 인내의 역경逆境을 헤쳐나가는 상징의 원천으로 자리잡아 그 어머리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윤혜숙 시인도 『손끝 체온이 그리운 날』의 1부에서 집중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질펀하게 내려놓고 있는 것도 위와 같은 이유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오라비 얼굴에 손톱자국 냈다고

방비를 들었다

 

.., 중략...

 

오일 장날

아버지가 사 오신 꽃신을

한 파스 기다려

검정 고무신으로 바꿔온 엄마

 

- 「꽃신」 부분

 

몸빼 바지 입고

해도 안 깬 꼭두새벽부터

호미들고 나갔다 오시던 어머니

 

- 「거짓말쟁이」 1연

 

저만치

뜨거운 햇볕을

비료 푸대 넘치도록 담으시던

어머니

 

- 「자꾸만 생각 나」 3연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는

사랑채 뒷방 윗목에

엄마가 걸려 있다

 

- 「메주」 1연

 

사실 모성 –어머니 –을 다룬 시들은 가부장家父長의 권위에 대한 순응, 자식에 대한 헌신과 가난에 힘들어하는 애처로움의 상징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했다. 본인이 여성이면서도 성차性差를 인식하지 못하고 남아선호의 관습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꽃신」), 가난을 이겨내지 못하는 노동의 가여움( 「거짓말쟁이」, 「자꾸만 생각 나」)과 자식에 대한 가없는 헌신으로 ‘뒷방’과 ‘윗목’의 존재로 만족했던( 「메주」) ‘어머니’의 덕목은 요즘의 젠더 이슈에 민감한 젊은 세대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유물遺物로 받아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늘날의 사나운 마음들은 오래 전 우리의 어머니들이 지녔던 측은惻隱과 겸양謙讓을 몸으로 체득하지 못했던 까닭에 빚어진 것이다. ‘서로를 끌어안아야 / 한 송이가 되는 / 인연의 꽃이 피’는( 「여섯 자매」) 결연結緣은 맹목적 혈족에의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한 생을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모진 풍파를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은 난관을 헤쳐나가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배양되는 것이 아니다. 나눔과 배려의 마음과 불행한 세상을 익살로 눙칠 수 있는 근력이 군중 속에서의 고독을 넘어서는 지름길이라는 믿음이 하나로 합쳐질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윤혜숙 시인이 거두어들인 ‘서로를 끌어안아야 한 송이 꽃으로 핀다’는 이 빛나는 시구 한 줄만으로도 『손끝 체온이 그리운 날』의 시작과 끝을 풍족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릴케는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며, 시가 만약 감정이라면 젊은 나이에 흘러버릴 정도로 시를 갖게 될 것이다. 진실로 시는 체험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시는 체험만으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체험으로부터 빚어진 절실함과 상상력이 더해질 때 강력한 이미지를 던져줄 수 있는 것이다. 말하지면 체험의 육화肉化와 더불어 비명悲鳴에 가까운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절실한 욕구야말로 휘황찬란한 비유의 장식성 粧飾性을 무력하게 만드는 익살로 승화되는 것이다.

 

3.

 

『손끝 체온이 그리운 날』에 드러난 비유의 장식을 덜어낸 화법話法은 보기에 따라 그 단순함으로 말미암아 호평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생한 생활에서 건져 올린 체험과 그 체험으로부터 간구한, 진실한 삶으로 이어지는 여정에 대한 탐문은 문장의 화려함과 애매성으로 무장한 시의 위의를 일거에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강하면 부러진다고

차라리 휘어져라 당부하던

지인 문병에

 

만근이나 되는 무게의 사연들을

눈물에 담아 길바닥에 덜어내며

돌아오는 길, 휴게소 들러

기진한 속 채울 끼니를 때우려는데 밥이 달다

 

방금 전까지

백리 길 추월하며 달려드는

슬픔을 삼키던 목구멍이

쓰러진 절망 일으키는 지팡이라며

밥알을 넘기고 있는 것이다

 

엄니, 아버지, 오라비를 뉘어 놓고도

오늘처럼 밥을 먹었다

 

그런 꼬락서니를 보고

하늘이 헤실헤실 웃고 있다

 

- 「참으로, 오라지다」 전문

 

어느 유명 가수가 시한부 암 선고를 받고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문병을 왔다고 한다. 다들 위로의 시선을 주었지만 그 가수는 그 사람들의 눈빛을 보고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겉으로는 걱정의 말들을 내놓지만 속으로는 ‘나는 저렇게 암에 걸리지 말아야지’하는 그들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과 슬픔을 나누고자 하는 진실한 눈빛을 구별하는 심안이 생겼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세태에 자신도 모르게 끌려 들어가서 겉과 속이 다른 행위를 반복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런 세태에 물들지 않고 ‘사람의 귀함’을 잊지 않고 동병상련을 항심恒心으로 지니며 살아간다. 시 「참으로, 오라지다」는 바로 후자의 마음을 절절하게 드러낸 시라고 볼 수 있는 가편으로 읽힌다. 슬픔을 토하던 목구멍으로 허기를 채우는 밥이 술술 들어가는 자신을 돌아보며 시인은 참으로 쓴 한 마디를 내뱉는 것이다.

 

오라질!

 

국립어학원에 풀이에 따르면 ‘오라지다’는 ‘오라를 지다’에서 목적격의 ‘-를’이 생략된 후 어휘화한 단어라고 한다. ‘오라’는 ‘도둑이나 죄인을 묶을 때 쓰던, 붉고 굵은 줄이다. ‘지다’는 ‘물건을 짊어서 등에 얹다’의 뜻이다. 그러니 ‘오라지다’는 ‘오라를 손위에 얹다’의 뜻이라고 한다. 오라를 손위에 얹다? 이 풀이보다는 상당히 마음에 맞지 아니함을 비속하게 이르는 표준어로 오라질, 우라질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참으로, 오라지다’는 그러므로 자신의 어긋한 행동을 자책하는 혼잣말로 제 격이 아닐 수 없다.

 

신독愼獨이라는 말이 있다. 오래 전 유학자들이 머리맡에 놓고 자신을 경계하는 두려운 말로 새겼던 단어이다. ‘혼자 있을 때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

 

우리는 사교에 있어서 자신의 경박한 교양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한다. 체면이라는 위장술로 다른 이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고자 하는 욕구를 마다할 수는 없다. 굳이 불편한 속마음을 드러낼 필요도 없다. 그러니 신독은 타인과의 교유보다 홀로 있을 때의 몸과 마음의 흩트러짐이 화禍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이다. 시인은 그런 신독에서 어긋난 행위를 스스로 꾸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 「질투」는 신독을 잊어버린 행위를 제시한다.

 

요즘 들판에서 야생화를 보기 힘들다. 옆에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에 슬쩍 뿌리채 뽑아 집안으로 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서이다. 그까짓 들국화 한 뿌리 가져온들 뭐 어때! 어째든 야생화를 들판에서 캐내어 집에 들여놓는 일은 사소한 일이다. 무릇 모든 생명은 자신이 살아야 할 곳에서 살아야 마땅하다. 들판에서 자란 들국화는 세찬 풍우를 견디며 향기를 뿜어낸다. 그런데 집안으로 들여놓으면 오래지 않아 시들고 만다. 그런 결과를 예견하지 못할 바는 아닌데도 우리는 순간의 유혹과 욕구를 참지 못하는 것이다.

 

난 숙맥처럼 모르는 척

시치미 뚝 떼고 향기를 슬쩍슬쩍

훔쳐 마시는 것만으로도

옆에 두는 것이 좋은 걸

 

- 「질투」 마지막 연

항심을 지키기는 힘들다. ‘참으로 오라지다!’라고 마음 속으로 외치다가도 순간 그 항심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시인은 결코 자신에게 향하는 꾸짖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마음의 물집이 터지면

밤에 더 쓰라리다

 

- 「삼복에도 추위가 찾아든다」 첫 연

 

4.

 

문명국가의 척도는 도시화에 있다. 생활에 필요한 관공서, 마트, 병원, 은행 등등의 편의시설이 도보이든 탈 것을 이용하든 적어도 한 시간 이내 거리에 위치하면 도시화가 진행된 지역으로 보는 것이다. 산간벽지를 제외하고 도시는 성큼 우리 가까이에 다가와 있다. 농촌, 산촌에도 아파트가 들어서고, 대형마트가 오일 장場을 무너뜨린다. 오가며 눈길을 주고 받던 얕은 담장은 사라지고 아파트라는 거대한 벽이 가로 막는 형국이다.

 

이렇게 『손끝 체온이 그리운 날』의 공간은 도시와 농촌의 경계 그 어디쯤이다. 「이제부터 발라드야」에 드러난 층간소음의 갈등, 소비가 미덕인 자본주의의 생생한 현장인 마트에서 벌어진 세일의 유혹에 넘어간 낭패를 그린 시 「빈 말인 줄 알면서도」가 보여주는 불편한 소비가 있는가 하면, 마트 건너편, 세일이 아니라 덤이라는 정이 오가는 오일장의 풍경도 있다. 「설 대목장」 시를 읽어보자.

 

소담한 햇살 속

장꾼들이 몰린 생선가게에 들어섰다

혈색과 반쯤 감긴 눈은 없는지 살피는데

사모님, 사모님 하며

봉긋하게 담긴 바구니에 덤을 얹는다

젊은 사장의 넉살이 생선만큼이나

신선하고 물이 좋은 듯하여

흥정에 값을 치르고

양손에 봉지를 나눠 들며

어깨의 수평을 맞춘다

한옆의 아저씨가 호들갑스럽게

호루라기를 불자

튀밥 냄새와 한 줌 더 얹어준 인정이

바람 안고 장골목을 달린다

발 디딜 틈 없는 사람과 사람의 사이로

버들가지 눈뜨게 하는 봄이

까르르 웃고 있다

 

- 「설 대목장」 전문

 

오래된 장터에는 마트에서 찾아볼 수 없는 흥정이 있고, 에누리가 있으며, 덤이 있다. 흥정은 번거로운 마음의 줄다리기이지만, ‘밑지고 판다’는 밉지 않은 거짓말에 짐짓 속아 넘어가는 애틋한 교감이 살아 있다. 애써 가꾼 채소가 제값을 받지 못하여 그대로 땅에 묻히는 아픈 이면에는 자본이라는 이전투구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고 있다. 장터에는 흙냄새 나는 노동의 손때가 스치지만 마트의 진열대에는 대량소비의 유혹만이 싸늘한 것이다.

 

「통장의 무게」, 「시간이 약이다」, 「엇부릉이」, 「어쩌다가」와 같이 ‘소’를 다룬 시들에서 언뜻 보이는 농촌경제, 축산의 어려움과 상품으로 팔려가는 소들이 보여주는 혈육의 정이 시인의 진솔한 마음과 맞닿아 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손끝 체온이 그리운 날’이 함축하는 바와 같이 시인이 바라보는 삶은 ‘나와 너]의 체온이 맞닿아 그 체온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껴야 하는 삶이다. ‘너가 있음으로 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인식은 오늘날의 가족관과는 점점 멀어지는 듯 하지만 동행, 또는 이해관계로 얽매이지 않는 연대의식은 결코 버려서는 안되는 삶의 양식이다.

 

이 글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남편과의 일상을 그린 여러 편의 시는 갈등하면서도 미워하지 않고, 미워하면서도 사랑의 마음을 놓지 않는 즐거움을 유쾌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들로서 그 융숭 깊은 속내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그 시편들은 사랑은 본능으로 품수되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사랑은 부모와 같은 선대로부터 이어 받아야 하고 그 내리사랑을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베품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손끝 체온이 그리운 날』을 관통하는 겸애兼愛는 자연과 자연이 품고 있는 무구無垢한 생명의 에너지를 마음의 식량으로 채우는 일이 될 것이다. 도시가 놓쳐버린 자연의 품을 더 이상 잊어버려서도 잃어서도 안되는 오늘, 이쯤서 만나는 아래와 같은 시는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이 윤혜숙 시인의 다음 행보의 첫걸음이 될 것임을 기대하게 하는 시로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있지요, 있지요

누구나 탐내는 밤나무가

봄바람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덧 없이 배가 불러요

 

시샘하는 여름 장마

거친 바람이

담장을 넘으며 쑥덕거려도

 

밤나무는

가시 돋아 보늬로 품으며

꿋꿋하게 진통을 견뎌 내지요

 

그러다 가을이 오면

툭툭 출산하여

두루미병처럼 목을 빼게 합니다

 

- 「참아내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