跋文
만물萬物이 추구芻狗임을 배우는 시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장현두는 누구인가
나에게 시인 장현두는 늘 새롭게 다가오는 사람이다. 몇 년 전 시를 함께 공부하는 모임에 얼굴을 비쳤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그 이후 본 적이 없으니 얼굴도 희미한데 어느 날엔가 느닷없이 고구마 한 박스가 배달되어 충청도 괴산 땅 주소가 적혀 있어 어리짐작으로 귀촌歸村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또 몇 년 후 이번에는 몇 년간 필진으로 참여했던『산림문학』의 지면을 통해 그가 시인으로 등단했음을 알 수 있었고, 이윽고 이번 여름에는 백 편의 시를 묶어 내게로 찾아왔던 것이다.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이런 것인가! 시집『몰래보는 영화』의 첫 독자가 되어 다시 시인 장현두의 면면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 어찌 남다르지 않겠는가.
시「나의 격차」에 드러나는 바. 그는 과거에 은행원이었고,「동네 갑장」이나 「괴산 장날」을 읽어 보면 지금 그가 살고 있는 곳은 그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타지 他地였음을 알 수 있다. 어째든 가족이 있는 도시를 떠나 혈혈단신 농촌에 정착한다는 것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열한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삭막한 도시를 떠나 전원생활을 꿈꾸며 거처를 옮기지만 농촌의 인심도 예전과 달리 외지인에 대한 배려가 녹록치 않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것을 볼 때, 장현두 시인의 시골살이는 나름 성공적으로 보여진다. 분명한 것은 시인의 귀촌이 생계를 도모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사회에 대한 불만이나 혐오에서 비롯되는 도피가 또한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많은 시편에서 사람들과의 교감을 꿈꾸고, 부재하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정서를 표출하는 것을 보아 그의 귀촌은 자연自然, 더 나아가서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경계에 다다르려 하는 열망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우선 짐작할 수 있다.
“나무와 풀들 꽃과 새들과 얘기를 나누”(「개운하다」부분)는 일은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 망 Indra 網 - 모든 개체는 따로 있으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을 체득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도시생활의 편리함을 포기하고 자연의 시스템인 생태生態의 세계에 투신한다는 것은 도道의 경지에 이르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홍천강에서 주경야독 20년』의 저자 최영준 교수는 퇴직 후의 전원으로의 귀환을 위해 50대부터 10년을 길도 없는 땅을 주말마다 오가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자연의 생태에 적응시키기 위한 연습(?)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농촌은 막연한 이상향이 아니다. 생산과 노동의 삶이다. 농사야말로 욕망을 내려 놓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겸손하게 사는 법을 실천하는 일이다.
자연을 공부하다
시집『몰래 보는 영화』는 사계四季에 대한 관찰 일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크나큰 선물인 사계절의 변화는 나이 들어감에 따라 몸과 마음의 적응에 어려움을 준다. 잠시 북미北美의 인디언들의 계절감각을 상기해 보자. 그들은 봄은 한결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삼월로(생명의 돋아남), 여름이 시작되는 7월은 열매가 빛을 저장하는 달이며(과육이 성장하는), 가을은 큰 바람이 불어오는 10월로( 겨울을 예감하는), 겨울은 침묵하는 12월( 생명의 종식)로 인식하는 감각적 예지가 가득하다. 이는 우리 농촌의 사계 풍경과 별반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농촌은 이런 계절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며 생산과 노동이 연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까닭에 도시의 낭만적 완상玩賞과는 거리가 멀다. 그 대신 인공의 도시에서 맛보지 못하는 생명의 약동을 누구보다도 가까이할 수 있는 기쁨이 있다.
조팝꽃 향기를 먹었다
달다
잉어가 튀는 물방울 맛을 보았다
짜릿하다
새색시 발걸음처럼 돋아나는 뽕잎
새순 따다 나물 무쳐 주신 울 엄니
단풍나무 새 이파리 속에 빨간 꽃
사시나무 그것처럼 늘어진 수꽃
벌 나비 오지 않아도 꽃이다
잔잔한 강에 오리가 숨바꼭질한다
나 어릴 때 둠벙에서 그렇게 놀았다
여기저기 애기똥풀이 “나 똥 안 쌌어요” 외친다
금낭화 기다란 활대에 복주머니 주렁주렁
가득 채워 갖다 드릴 어무이 계셨으면
세상 눈부시게 밝혀 놓은 벚꽃
이제 꽃비로 진다
그 아래 홀로 서서
내 속의 소리를 듣는다
봄은 나 혼자 몰래 보는 영화
연둣빛 이파리에 새 힘이 솟는다
문득, 휘익휘익 새소리 실은 바람
옆구리 한 편 뻥 뚫린다
-「몰래 보는 영화」 전문
이 글의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장현두 시의 독특함은 생활에서 우러나온 진정성과 그 진정성을 직각적 直覺的 언어로 풀어내는 솜씨에 있다. 시를 한 마디로 정의 할 때 “시는 은유이다”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때의 은유 隱喩는 의도 意圖의 감춤과 다르게 말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장현두 시에서는 순간적 감정의 표출이 어떠한 장식도 없이 자연스럽게 튀어오른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예기치 못한 샅에 직면했을 때 내지르는 “아!”, “아이고 어머니!”와 같은 표현들이 리드미컬하게 표출되면서 묘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향기를 먹을 때’의 전율이 ‘달다’로 전이되고, ‘물방울 맛을 보았을 때’의 시각視覺이 ‘짜릿함’으로 치환되며 그 풍경 속에서 ‘내 속의 소리를 듣는다’라고 할 때의 그 ‘들음’은 우리가 무심히, 그리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생명의 소리를 감지한다는 고백인 것이다.
왜 ‘몰래 보는 영화’라고 하는가? 그 누구에게 ‘나는 살아 있어!’라고 외친다고 할 때의 떨떠름하게 그를 쳐다보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장현두 시인도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이루지 못한 사랑에 애틋해 한다. 그러나 “기다린다고 그리운 사람 오지 않고 가고 싶다고 함께 갈 사람 있을까 / 이제는 혼자가 편하다 / 어차피 우리는 혼자가 되지 않는가”(「오월은 가고」부분)라고 아프게 자문한다. 이런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장현두 시인에게 슬픔이나 절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오히려 진정성이 돋보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은 그 때 그 때 멋지게 사는 거
죽음은 멋진 때가 끝나는 거
- 「대구 매운탕」 부분
그렇습니다.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살아 있으면 나날이 새날이니까요.
- 「팔십에 나무심기」첫 행
삶의 진정성은 명상에서도 찾을 수 있고 학문적 식견의 연마를 통해서도 얻을 수 있겠지만 장현두 시인은 자연에 면벽한 채로 불통의 인간계를 아쉬워하고 그리워 하면서 불시에 찾아오는 고독을 연습하면서 체념이 아닌 ‘몰래 보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법, 법 하는 세상에 틀린 법으로 / 살아가는 사람이 있”(「틀린 법」 부분)음을 믿고자 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몰래 보는 영화」의 많은 시편들 – 꽃들을 관찰하면서 얻은 삶의 숨결을 기록한 2부와 3부 –은 인간의 잣대로는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무모해 보이는 생명의 에너지에 경외를 보내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뽑고 나서 돌아보면
놈이 올라오네
돌아서 뽑고 나면
다른 놈이 올라오고
옆으로 돌아서면
또 다른 놈이 올라오네
또 뽑아버리고 뒤돌아보면
또 올라오는 놈 있네
고무망치로 저 놈의 대가리를 개 패듯 패고 말리라
꽃이 없어 향기가 없어
달콤한 열매가 없어
숨길 것도 잃을 것도 없어
비울 것도 없어라
그저 삶이라는 희망 하나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고 늘어저
내 마음 밭에 무한히 심는다
늘 싱싱한 희망이란 이름의 잡초
- 「잡초」전문
사실 엄밀히 말자자면 이 세상에 잡초는 없다.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 단지 인간이 만든 유용함의 잣대에 따라 베어지는 운명에 처할 뿐이다. 배추도, 무도 꽃을 피운다. 감자도 여름이면 예쁜 꽃을 피우는데 인간은 튼실한 수확을 위해 꽃들을 여지없이 꺾어 버린다. 그 잡초를 시인은 ‘삶’이 곧 ‘희망’이라는 등식으로 해석하면서 ‘사람다움’의 의미를 우리에게 냉소적으로 되묻는다.
당신은 희망이 잡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이와 같은 인간 일반에 대한 냉소적 관점은 시「불나방」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불나방의 눈엔
죽음은 안 보이고 불만 보여
죽고 나면 불인지 죽음인지 알 길이 없어
죽기 직전까지 황홀한 불빛에 행복했을 거야
그럼 된 거 아냐?
그러니 바보처럼 죽을 줄도 모르고
불빛에 달려든다고 멍청하다 말하지 말게
생은 오직 연장이 아니고 순간이야 순간 살아있는 순간
그 순간까지 행복하면 행복이야
생은 죽음으로 완성 되는 것
죽은 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다만 네 생은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는다는 것
그러니 그 기억이 남아 있든 말든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 「불나방」전문
우리는 방하착放下着을 늘 읊조리며 산다. 명예도, 부富도 죽음 앞에서는 무용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은 그러한 욕망에서 탈피하거나 극복한 존재라고 떠들어댄다. 불을 향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부나방을 손가락질 하거나 말거나, 아니면 멋진 삶을 살았다고 기억되기 위해 과장된 몸짓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어디 남의 일인가?
앞에서 언급한「대구 매운탕」이나「오월은 가고」와 같은 삶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설익은 해탈이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 까닭은 노자 『도덕경 제 5장 첫 머리에 나오는 ‘천지불인 만물위추구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를 배우고자 하는 시인의 근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 내, 나이 들어도 고개 숙인 해바라기가 될 수 있을까”(「가을에 머물고 싶습니다」부분)하는 겸손함, “그렇지, 화이부동和而不同 그동안 내 마음의 지표로 삼았던 것”(「글귀」부분) 과 같은 화해와 결기의 정신을
제사가 끝나면 가차 없이 없애버리는 지푸라기로 만든 개의 운명에서 감지하고자 하는데서 찾음으로서 끝내 “언제부턴가 조씨 노씨만 사는 우리 동네에 유성처럼 떨어진 외계인이 ‘형님’ ‘동생’이며 ‘장씨 아자씨’가 되”(「우리 동네 장씨 아저씨」 마지막 부분) 는 것으로 귀결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시인 장현두의 시 쓰기
『몰래 보는 영화』의 마지막 4부에는 장현두 시인의 시 쓰기의 얼개가 드러나 있다. 시의 무용無用을 토로한「파지」를 비롯하여 「시 공부」,「문학하는 이유」, 「퇴고」,「윌리암 워즈워드의 말」등이 그러한 시편이다. 오래 전 고려의 문인 이규보는 시를 ‘시언지 詩言志’ 라 정의했다. 즉, ‘마음 속의 뜻을 밝혀 말하는 것’이 시인 것인데, 이 때의 시는 마음을 갈고 닦는 도구가 되는 셈이다. 이 때 절차탁마 切磋琢磨의 수련을 통해서 문득 마음이 밝아지고 맑아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윌리암 워즈워드는 시를 ‘감정의 어쩔 수 없이 흘러넘침’이라고 설파했다. 이러한 낭만주의적 경향은 오늘날의 시대적 경향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암 워즈워드의 말」이 장현두 시편에서 강한 설득력을 갖는 것은 그의 귀촌이 자연 속에서 생명의 의의를 찾고, 자연의 작동원리를 배우고 순응함으로서 진정한 주체적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론으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일견 타당하면서도 시류을 벗어난 워즈워드의 시론은 화이부동의 세계를 관통하는 지름길이기도 한 것이다.
짧게 장현두 시인의 첫 시집 『몰래 보는 영화』상재를 축하하면서 삶의 진경 珍景을 노래하는 시들이 무궁무궁 꽃으로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인생은 놀다 가는 것
잘 놀다 가는 것
- 「소요유消謠遊」 첫 부분
'내가 쓴 시인론·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승수 시집 『그대와 사는 이유』: 탈 속에 숨은 삶의 애환을 해학諧謔으로 풀다 (0) | 2022.10.27 |
---|---|
이효시집 『당신의 숨 한 번』: ‘숨’과 ‘쉼’의 풍경을 읽다 (0) | 2022.10.23 |
정빈 시집 : 『칸나의 독백』: 시간의 향기를 사랑으로 담다 (0) | 2022.09.06 |
은월 김혜숙 시집 『끝내 붉음에 젖다』:시공 時空을 꿰뚫는 생명의 길을 묻다 (0) | 2022.06.19 |
임승훈 시집『꼭 지켜야 할 일』:임서기 林棲期를 지나가는 생명의 응시 (0) | 2022.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