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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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톤에서의 하루(5)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8. 20. 23:35
5. 촛불을 끄며

742호의 촛불

불을 당기면
가만가만 어둠을 밀어내는
손이 보인다

멀리도 말고
손끝에서 발름대는 향기 스치듯
호접란이 방금 날개를 펼치듯
펄럭이는 긴 소매 속에서
한 타래의 이야기가
둘둘 풀린다

누구를 생각할 때나
혼자서 술잔을 기울일 때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혼자 식탁에 앉아
부칠 수도 없는 편지를 쓸 때
촛불은 이인칭의 슬픔이 된다


나에게는
점점 키 작아지는
양초 몇 개가 있다
손길 닿으면 언제든지
꽃이 되는
손길 닿으면 금방
무너져버릴 것 같아
이만큼 바라보는
사랑이 있다


742호의 촛불을 쓰면서 742호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742호는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아파트 호수인가? 아니면, 병원의 병실? 객사? 나는 사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사랑이라는 행위의 분출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나는 단언코 말할 수 있다.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해도 두렵지 않은 마음이 사랑의 첫 출발이다. 목숨을 내놓고도 불안해하지 않는 그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랑은 가짜다. 올초에 金時羅 시인이 작고했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거지들의 삶을 그린 품바를 기획하고 민중들에게 마당극으로 알린 인물이다. 대학로에서 그의 추모공연이 있어서 간 김에 머리에 남는 대사 하나를 옮겨 적는다. 거지 왕초가 거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거지 왕초: 너희들 거지에 대해서 정의를 내려 봐라!
...중략
거지 왕초: 거지란, 있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연습을 시키는 사람을 말한다. 알았냐?

거지 아닌 존재는 없다. 우리는 서로 서로 구걸하는 존재다. 갈구만 하고, 소유만을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742호의 촛불은 742호의 장소성에 따라서 여러 갈래의 심상을 불러일으킬 것인데, 나의 의도를 이 땅의 광인狂人 송명호 시인은 적확하게 짚어내어 이런 글을 보냈다. 모골이 송연할 만큼 그는 예리하게 나를 찾아내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짜 시인은 언제든지 탄로가 나기 마련이다.

이 시는 빠스쩨르나끄의 「의사 지바고」를 연상시킨다. 지바고는 라라가 잠들었을 때 그녀와 그녀의 딸 옆에서 울면서 기도한다. ‘신이여, 이 아름다운 여인이, 이 순결한 것이 모두 저의 것입니까’
작품에 나타난 라라는 러시아 대지를 상징하고 러시아 대지는 시인 철학자를 사랑한다 뜻의 지바고를 사랑한다. 이 시에서의 촛불은 시인의 고결한 내면을 비추는 불꽃이다

그의 글을 읽고 나는 확실하게, 내가, 아직까지도 가짜 시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의사' 지바고'의 기도를 읽고 그 아름다움에 반해 끝내 러시아어를 독학했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촛불을 끈다. 얼마간은 말을 잃어버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