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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탐구에 대한 몇 가지 방식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5. 18. 22:20

  
존재탐구에 대한 몇 가지 방식

 

                                                                   나호열


  온통 가벼움이 점령해 버린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무거운 사유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찰라의 광휘에 열광하는 시대라 하더라도 정지의 미학과 침묵의 어려움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단정은 아직은 유보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문학은 이 무거운 사유와 정지의 미학과 침묵의 어려움을 대변하는 전위로서의 임무를 포기할 수는 없다. ‘문학의 위기’를 거론하거나 ‘저자의 죽음’을 의식하면 할수록 문학의 威儀는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것임을 쉽사리 간파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와 ‘탈 근대’ 의 중첩 또는 혼융 현상이 두드러지는 우리의 현실을 바라볼 때 문학의 위기는 영상매체와 그 기술 발전에 압도됨으로서 드러난다. 한편 저자의 죽음은 어떤 면에서 현실적으로 전면에 도래하지 않은 예견되는 상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작품과 작가를 시대적 환경과 그 의식에 관련 지우고 분석 평가하는 전통적 문학관이 아직은 우세하다. 이를 비판하는 구조주의, 해체주의, 푸코의 계보학적 비판에 따르는 독자적인 원본 부재의 주장의 옹호 내지는 상호텍스트성의 선호 , 작가와 작품의 연관성 부정과 저자의 의미 자체를 희석하는 조류는 우리 문학에서 폭 넓게 수용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이거나 이미 지나가 버린 한물간 유행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다시 문제되는 것이 속도의 이데올로기가 위세를 부리고 영상이 범람하는 현 세태에서 과연 문학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김병익이 “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에서 거론한 것처럼 문학을 소비하는 것이 아닌 불변하는 가치를 가진 것으로서 인식할 때 문학의 필요성은 뚜렷하게 그 실체를 드러낸다. 즉 인간을 사물화하는 기능주의, 사람을 기계로 전락시키는 속도주의, 인류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획일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유효한 방안으로 우리는 문학 행위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김병익이 말하는 반성적 사유와 창조적 영감과 초월에의 꿈, 인간다움의 덕성은 속도와 변화의 와류 속에서는 결코 끄집어낼 수 없는 정신활동이다,. 이 무거운 사유들은 정지와 침묵 속에서만 태어날 수 있다. 이 가벼움이 한껏 고양되는 시대에 무거운 사유를 들어올리는 작가들의 분투는 독자의 감소와 더 나아가서 독자의 부재상태에서도 그 의의를 훼손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가들의 그러한 희소성이, 무겁고 무서운 사유와 씨름하는 그들의 태도 그 자체로 대중들에게 충분한 자극과 반성을 유발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들이 의식적으로 설정된 문학적 의의를 염두에 두고서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과장이 있다. 작가들의 글쓰기는 그 형태가 시가 되었던, 산문이 되었던 정신과 의식의 분출을 욕구하기 때문이고, 그런 분출을 통해서 작가의 존재를 스스로 규명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망이 충족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작품은 작가의 존재의식을 드러낼 수밖에 없으며 독자는 작품에 나타난 존재의 양상과 미학을 향수 함으로써 존재의 지평을 넓힌다.

  정지와 침묵의 상태에서 문학 작품이 독자들에게 향유될 수 있는 기반은 위안과 새로움이다. 작가가 지닌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따듯한 눈빛과 조응할 때 우리는 빛나는 세계를 만나는 기쁨을 누린다. 상처받고 소외 받는 세계에서의 위안은 광포한 속도의 굉음 속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다. 다른 면에서 독자는 위안과 더불어 자신이 깨닫지 못한 세계의 경이로움을 맛보기를 또한 원한다. 그 새로움의 경지는 지난한 일이 될 것이다. 작가는 새로움의 화두를 놓고 한바탕의 전투를 거친다. 0.6초 사이에 지나가는 영상에서 상품을 선택한다는 광고처럼, 문학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계의 양상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는 없다. 작가의 세계에 대한 반응은 더디고 보다 암묵적이다. 양애경이 “관계의 해체”에서 말한 바처럼 완전히 새로운 시 형식은 없고, 달라진 것은 삶의 내용일 뿐이다.

  반세기 전에 시와 지금의 시가 달라진 것은 글이 길어지고, 시각적인 강조가 두드러지고, 서술형식의 시가 빈번히 나타나며 실험적인 시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시의 형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크게 달라질 수가 없고 - 따라서 새로움의 화두를 놓고 고군분투하는 작가들이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은 일반적이면서도 특수한 삶의 내용을 보여주는 일이 될 것이다. 일반적이면서도 특수하다는, 이 상호 모순적인 상황 앞에서 작가들이 취할 행동은 무엇일까? 21세기의 첨단 과학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과거 오 백 년 전 조선시대의 정신을 답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오 백 년 전의 조선시대에도 오늘날의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살았음을 부인할 수만은 없는 사례도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앞 서 언급한 실험적인 성향의 글들은 새로움을 지향하는 작가들의 노력의 산물이다. 이상, 조향, 황지우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양애경은 이들 시의 실험적 특성으로 분열된 자아의 탐구, 인간관계의 단절과 소외감, 자유연상으로 인한 난해성, 형태적 실험을 들고 있다.

  수 백 편의 시가 생산되고, 발표되는 상황 속에서 시를 전문으로 읽는 사람이라 할지라도감상의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전문적으로 시를 읽어야 하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교양의 일환으로 시를 읽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시를 헤아려 읽는 기준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기준이 앞에서 말한 위안과 새로움이라는 안목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함축하면서 작품은 필연적으로 작가의 존재의식을 드러내게 된다. 다 같은 오늘의 지반 위에 서있으면서도 존재의 방식은 여러 가지 형태로 분화되어 나타난다. 글읽기의 즐거움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나무가
  가늘고
  기일게
  선 하나
  휘이익
  소오리
  나도록
  허공을
  그은 다음
  그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승기의  「 線 혹은 禪 」

  위의 시는 과감하게 오브제의 세밀한 묘사를 거부해 버린다. 시각적인 시의 형태는 직립이다. 線은 관념상으로는 존재하지만 선 자체로는 존재할 수는 없다. 이 말은 대한민국이 관념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체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나무가 나무 속으로 들어간다는 직관은 사유의 논리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경지를 포착하는 것이다. 시인은 나무의 여러 특성들을 사상 捨象하고 직관으로 파악한 線으로 나무를 인식한다. 나무를 나무이게 하는 것은 線이다. 나무를 나무답게 만드는 유일한 것을 線이라고 할 때 나무는 禪의 경지에 들게 된다. 「 線 혹은 禪 」은 존재의 방식을 깊은 유추로 우리에게 되묻는다. 이것과 저것을 가르는 수많은 조건의 미망 迷妄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에게 ‘너는 누구인가?’의 질문을 던진다. 이 시는 시 읽기가 끝난 후에 질문에 답하는 일에 우리를 사로잡히게 만든다.
 시인이 의도하는 오브제와의 이 간격은 존재와 존재간의 가 닿을 수 없는 거리이다. 線은 이어짐이지만 실제로는 점과 점의 연결이고, 이 점과 점의 연결은 뛰어넘는 것이다. 이와는
또 다른 인식으로 존재를 탐구하는 시를 읽어보자

  늘 비어있던 그릇에 어느 날 달빛이 그득 채워졌다
  앞서 가던 이에게도 달빛 한 그릇 부어드린다
  뒤에서 오던 이에게도 달빛 한 그릇 부어드린다
  거듭거듭 비워낼수록 그득히 채워지는 달빛 그릇
  어둡던 내 안이 환해지고 거친 숨결 고요해졌다
  어떤 이는 달빛을 흠뻑 받아 마시고 그윽해지고
  어떤 이는 달빛을 보지 못해 빈 그릇만 받았다
  늘 비어있던 그곳이 어느 날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김선희 「달빛 그릇」전문   
 
   「 線 혹은 禪 」이 고립된 존재의 양상을 형태상으로 보여주고 있다면 김선희의 「달빛 그릇」은 존재와 존재 간의 관계성에 의미를 두고 있다. ‘늘 비어있던 그곳’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이 세상은 어둡다. 달빛이 의미하는 것은 햇빛과 달리 희생과 봉사의 상징이다. 햇빛이 생명의 잉태와 성장에 기여한다면 달빛은 어둔 밤길을 걸어가는 이들을 밝혀주는 생명의 보존에 투신한다. 달빛은 기울고 찬다. 우리의 생명처럼, 살아 있을 때 그 빛을 나 아닌 타인에게 담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달빛 그릇」은 화해와 봉사의 관계로서 인간의 존재 양상을 파악한다. 「 線 혹은 禪 」, 「달빛 그릇」과는 또다른 차원에서 존재를 인식하는 시를 찾아보자. 박강순의 「너무나 단순한 진리」는 보다 철학적인 -논리적인 - 차원에서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사실 나는 내 얼굴이 어떻게 생긴 줄 모른다
   어떤 거울은 길쭉한 나를 보여주고
   어떤 거울은 뚱뚱한 나를 보여준다
  (중략)
   내 얼굴은 나와 바로 선 사람만이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일갈했을 때, 그는 이미 내성 內省의 의미를 간파하고 있었다. 인간은 자신만큼 자신을 잘 아는 존재는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는 ‘ 내 얼굴은 나와 바로 선 사람만이 볼 수 있다’ 는 구절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나 아닌 타인이다. 거울은 길쭉한 나를 보여주거나, 뚱뚱한 나를 보여주는 가변적인 상식의 거울이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기준들은 사실 불변하는 진리가 아니라 조작된 거울에 불과하다.

  내가 볼 수 없는 허상의 나를 만들어 놓고
  한숨 짓고 있을 뿐
  영원히 볼 수 없는 나를 누군가에게 각인시키기 위하여
  오늘도 화장을 하고, 운동을 하고, 목욕을 한다
  참 웃기는 일이다

           「너무나 단순한 진리」마지막 부분

 인간이 만든 문화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웃기는 일이다. 영원히 내가 볼 수 없는 ‘나’를 볼 수 있는 타인에게 각인 시키기 위한 ‘관계성’은 「달빛 그릇」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달빛 그릇」이 보여주는 공생 共生의 미학은 박강순의 시에서는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하게 되는 ‘웃기는 일이다’ 

 이와는 다른 방향에서 존재의 탐구를 추구하는 시들이 있다. 위의 세 편의 시가 장식성을 배제한 진술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면 전통적인 기법으로 존재를 형상화하는 통로를 가지고 있는데 이런 기법들은 메시지의 전달보다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질감과 비유에 비중을 둠으로서 새로움의 강도가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곳엔 바람이 있고 길이 있고 꿈이 있다

   가끔은 하늘을 보라 그리고 바람을
   태풍으로 날아가 내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바람은 폐부 깊숙이 새로운 기운을 잉태하는 법
   끝없는 우주 하필 이 땅에 태어난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어떤 존재인가

   가끔은 하늘을 보라
   길은 여러 갈래 때로는 방황할지라도
   새로운 나의 길을 찾을지니
   지금 가는 길만이 길임을 고집하지 말라
   길들여진 앵무새와 무엇이 다르리

   가끔은 하늘을 보라 가없는 아름다움을
   사나운 비 내려 내 모든 것 쓸어가도 
   그보다 인간이 뿜어낸 내연 표독함마저 정화해
   오색 무지개 꿈을 만들지 않은가
   희망의 태양은 언제나 다시 떠오리니

   인생을 슬퍼하지 말고 지는 노을에 아름다움만을 보라


                                주병오  「하늘」 전문
 
  ‘길들여진 앵무새’로 표징되는 인간과 하늘은 대비되는 상징을 가지고 있다. 하늘은 새에게는 갇힌 공간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하늘이 필요하지만 죽음은 지상의 것이다. 그런데 앵무새는 이미 길들여져서 그 나마의 하늘도 스스로 포기하고 망각한 존재이다. 하늘은 가없고 길 없는 길을 가지고 있고 무지개가 뜨고 노을의 아름다움을 가진 절대공간이다. 유한한 생명과 무한한 우주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서 존재 의지를 표명하는데, 권유와 명령의 어투를 사용함으로써 유추를 통한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공고해진 의미의 재현이라는 점이 ‘새로운 시’ 의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점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 전통적인 시학 -서정 -으로 존재를 노래하는 한 편의 시를 읽고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잎이 큰 나무 곁에서」는 시인의 연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잎이 큰 나무’ 는 온갖 풍상을 감내한 오래된 나무이거나 아니면 나무의 연륜과는 상관없이 ‘잎’ 만 큰 나무이다. ‘크다’ 와 ‘잎’이 결합됨으로서 연상되는 심상의 파문은 결코 작지 않다. 한 예로 잎이 큰 나무는 키가 큰 나무를 연상시킨다. 키가 큰 나무는 키가 작은 나무에 비해 고독해 보이고, 잎이 크다는 진술은 슬픔을 가득 담은 마음 여린 ‘눈’을 연상시킨다.

   잎이 큰 나무 곁에 서면
   소나기도 글썽이던 목소리를
   제 키보다 나지막하게 내려놓는 것이 보인다

   산자락 젖은 치마폭을 들춰대던 바람도
   푸른 발자국을 찍어내며 나뭇잎을 흔들 때마다
   잎이 큰 나무는 자지러지는 아픔을
   누구 앞에도 꺼내놓지 않았다.

   다만 잎이 크다는 죄스러움 때문에
   조금 남겨둔 가을볕의 빛나던 웃음들이
   그 웃음 끝을 조심스럽게 여미는게 보인다.

   잎이 큰 나무 곁에 서면

                          조영수 「잎이 큰 나무 곁에서」 

  이 시는 話者가 잎이 큰 나무 곁에 서서 나무를 관찰하는 주관적인 시이다. 그럼에도 화자의 일방적인 진술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정서는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잎이 큰 나무는 화자이면서 동시에 인간 존재의 원형을 오롯이 감싸안고 있기 때문에 소품이면서도 유장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자지러지는 아픔을 누구에게도 꺼내놓지 않는’ 존재, ‘잎이 크다는 죄스러움과 그 웃음 끝을 조심스럽게 여미는 모습’을 지닌 존재는 시인 자신일수도 있고, 시인이 규정하는 인간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나무가 지니고 있는 외로움, 꿋꿋함, 초월의 의지 등등의 상징성이 내면화된 풍경은 새롭지도 않고, 그렇다고 낯 선 것이 아니다.    이 시의 미덕은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억제하거나 아예 의식의 밑으로 가라앉히는 데 있다. 필요하지 않은 진술은 여백으로 남겨두고, 아주 사소한 몇 개의 인상만으로 나무의 의미를 구체화시킨다. 이 억제와 사상을 통해서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그 존재의식을 강화한다. 전통적 서정시를 읽는 재미와 맛은 난해한 언어의 진열장으로 빠진 실험시를 읽는 곤혹감을 상쇄시킨다. 어떤 면에서 새로움이라는 유혹에 빠져들지 않는 정신이 ‘詩言志’의 함의를 되새기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디지털 시대의 문학 행위는 험난한 일에는 틀림이 없다. ‘문학의 위기’와 ‘저자의 죽음’은 오늘날의 문학을 난경 難境에 빠뜨린다. 어째든 작가는 이런 시대적 상황에 맞서는 의지와 더불어 독자들에게 - 작가 자신을 포함하는- 위안과 창조라는 선물을 돌려주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이런 노력의 과정 중에, 알게 모르게 생존을 넘어서는 존재의 의미가 작품 속에 각인되고 있음을, 정신의 피와 살이 묻어나고 있음을 몸서리치며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