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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좋은 시의 기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5. 1. 14:47

좋은 시의 기준

 

 1.

 

  어림 잡아 한 해에 발표되는 작품 수를 헤아려 보면 족히 만 편이 넘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향 각지에서 발행되는 잡지와 동인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들을 평론가들이라고 해서 어찌 다 읽을 수 있겠는가? 해마다 ‘올해의 좋은 시’라는 표제를 달고 출간되는 시들을 읽으면서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좋은 시가 되었는지 궁금해 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제한된 여건이라면 작품 선정의 기준을 명확히 알려주는 것도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인 것이다. 과학적으로 계량화할 수 없는 것이 문학작품이기에 선정한 이의 주관적인 입장이 반영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므로 차라리 우리는 이런 저런 기준으로- 그러나 選者들의 일관성만은 버리지 않고- 작품을 선정했다고 이야기 해주는 것이 독자들의 혼란과 의구심을 덜게 해주는 일이 될 것이다. 잠시 두 편의 시를 감상해 보자.

 

심해 물고기

 

구름에 걸터앉아 심해 낚시꾼들이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를 끌어올리고 있다

눈높이까지 꼬리를 치렁대면서

흥건하게 퍼덕거림을 쏟아놓는 저 물고기

찢긴 아가미 사이로 파도 조금 내비치고 있다

심해는 어떤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다는데

어떻게 잡혔을까 발광의 몸 둥글게 말아

천 길 캄캄한 무덤 사이로

고요히 헤엄쳐 다녔을 저 물고기

수압을 견딘 무거운 납의(衲衣)를 벗고

한 번도 들어올려보지 못한 듯 천근 공기를 밀치고 있다

심해는 크고 작은 운석의 산실이어서

두터운 고무옷 껴입고

머리에 철뢰를 두른 잠수부들도 다녀올 수 없는 천심(千尋)

물고기 한 마리가 하늘 길이로 끌고 간다

서슬 푸른 비늘 한 잎 꽂아두려고

저 물고기 천애(天涯)위로 솟구쳐 오른 것일까

 

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졍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심해 물고기」는 2004년 문예중앙 겨울호에 발표되었던 김명인의 시이고, 「가재미」는 시인. 평론가 120명이 2004년도의 가장 좋은 시로 뽑은 문태준의 시이다. 이 두 시의 경향은 매우 다르다. 이 두 작품은 수작 秀作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독자들의 성향에 따라서 선호하는 바는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꼭 들어맞을 수는 없지만 요즘 들어 시가 길어지고 산문화 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인구에 회자되는 시들은 하나같이 이야기 구조를 가진 산문형이다. 우리는 그런 현상에 대해 몇 가지로 추려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가장 설득력 있고 그럴싸한 예를 하나만 들어보겠다. 그것은- 시가 산문화 되는 경향은- 속도를 중시하는 시대적 흐름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과거의 삶은 停止의 일상에 가까웠다. 농경의 일상은 가속보다는 기다림에 가까웠다. 때에 맞춰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수확을 하는 農耕은 자연 현상에 촉각을 세우고, 관조의 미덕과 여백의 의미를 곱씹는 일상에 매달리게 했다. 농경시대의 시간은 역설적이게도 현대보다는 매우 느리게 흘러갔을 것이다. 정지에 가까운 일상은 어떤 일의 의미를 오래 음미하는데 적합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삶은 속도를 중시한다. 음미나 관조는 가속화된 시대에 찰라적 殘像과 감각적 반응으로 대치된다. 참을성 없는 현대인들은 정지에서 비롯되는 침묵에 손사래를 친다. 시가 노래와 등가를 이루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을 수 없었던 시대에 시는 낭송하기에 적합하게 리듬을 얹음으로써 기능적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반면에 오늘의 시는 들어서 의미를 깨우치기보다는 - 읽음으로써 의미를 이미지화 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이제는 다 틀어져버린 솜씨로, 틀어진 항아리를 만든다. 내가 주둥이를 최대한 작게 마감할 동안 그녀는 약을 먹는다.

 

나는 노래를 듣는다. 약에 취한 그녀의 노래. 음악대학을 다닌 솜씨로, 그녀는 내 항아리를 노래한다. 나는 항아리 속으로 들어간다. 항아리 속에 그녀의 이름을 새긴다.

 

 

그녀가 아픈 날, 나는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그녀를 묻은 뒤에도 나는 가로수만 생각한다.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노란 가로수, 불타는 가로수, 그속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가로수, 노래하는 가로수.

 

 

이제는 다 까먹어버린 솜씨로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다, 담겨질 거대한 항아리를 만든다. 담겨질 사람이 없다. 나는 다시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거꾸로 서는 가로수, 날개 달린 가로수, 돌덩이를 삼킨 가로수, 항아리를 삼킨 가로수.

 

 

나를 긴 줄에 묶어 책꽂이 뒤로 끌고 가는 가로수, 나를 잡아먹는 가로수, 온몸이 다 항아리처럼 불어난 나의 가로수.

 

 

  이 시는 박상순의 「자네트가 아픈 날. 2」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순식간에 이동이 이루어지는 현대인들에게 시를 읽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영상매체의 발달은 현대인을 감각적 이미지에 몰입하게 한다. 기계적으로 조합된 음향과 변화무쌍한 영상적 트릭은 언어의 애매성과 상징을 배제하게 만든다. 아마도 산문화된 시의 양식은 이러한 시대적 조류를 좇아가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맞서기 위한 무의식적인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위의 시의 전략은 무엇일까? 시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독자들의 낭패를 시인은 즐기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의미가 아닌 이미지의 잔상,,, 그 잔상의 무의미성,,, 그러므로 산문화된 시가 좋은 시의 반열에 들 수 있는가 없는가하는 점을 쉽사리 판가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시를 가름하는 다른 기준은 없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창작에 있어서의 태도로서 좋은 시를 가름하는 경향이 있음을 놓칠 수 없다. 흔히 형식주의적 관점과 역사주의적 관점의 대립이라고도 볼 수 있다. 형식주의적 관점이란 작품을 생산하는 주체가, 오직 주체에게서 파생된 문제를 형상화하는 관점을 말한다. 이에 반해서 역사주의적 관점이란 창작자는 창작자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와 환경조건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고, 따라서 창작자는 당대의 시대적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창작자의 정서에서 우러나오는 서정시보다 당대의 문제, 이를테면 환경파괴, 민족통일, 전쟁과 평화 노동 문제 등등의 거대 담론을 취급하는 것이 암묵적으로 좋은 시의 조건을 갖추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시단은 다양한 갈래로 형성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형식주의적 경향과 역사주의적 관점 이외에 대중의 정서에 호응하는 일군의 시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군의 시들은 읽기 쉽고, ‘사랑과 이별’ 또는 ‘외로움과 그리움’ 이라는 트랜드로 독자들을 끌어모은다. 인터넷의 성장과 더불어 이른바 카페 문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운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었다. 그렇지만 감정에 호소하는 것만으로 창작의 임무를 다했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내게서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해 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내 눈 속에서

그 말을 보지 못했다면

혹은 내 손길에서 그 말을 느끼지 못했다면,

 당신은 내 입술에서 그 말을

듣게 될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요.

 

 

  예반의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 」라는 위의 글을 시의 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논란은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정도의 문학수업, 시창작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 위의 글은 시로 읽혀지지 않고 감정의 나열로 보여질 것이다. 시 창작은 현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밑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가라앉아 있는 것들의 근원을 캐묻는 것, 근원을 캐묻되, 형상화하는 방법이 남다른 것- 구조의 독창성, 문체를 포함한-과 더불어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세계관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위와 같은 대중적 문학 경향은 얼핏 보기에는 형식주의적 문학관과 유사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른바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서정성은 형식주의적 문학관의 중요한 덕목이지만, 그 서정성은 주어진 보편적 현실에 대응하는 진보적 태도이지 결코 退行的이고 過去로 회귀하는 비생산적인 양태가 아님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형식주의적 경향의 시들은 탐미적인 요소가 강하고, 역사주의적 관점의 시들은 운동성과 계몽성이 두드러지면서 형상화의 밀도가 옅어지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만을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그러니, 하나 더 좋은 시를 가름하는 기준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많은 시인들은 시대적 조류를 간과할 수 없고, 그 조류에 싫든 좋든 간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훌륭한 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서 시를 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행동을 하는 존재인가?를 따져 물을 때 시인은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전통적인 동양의 시학인 개성론의 핵심이다. 시는 인격 수양의 도구인 까닭에 시인의 명칭은 자신의 비루함, 천박함, 오만과 편견을 낱낱이 발견하는 순간의 절망감을 극복하고 헤쳐나갈 때 얻어지는 또 하나의 남루인 것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교과서에 나오는 정답을 적어내고 있을 때 훌륭한 시인은 자신의 참담한 반성에서 우러나온 비명과 눈물로 원고지 칸을 채운다. 많은 시인들이 시를, 시집을 내고서 말한다.

 

 “부끄럽다!” 그렇다. 좋은 시는 부끄러움이 질펀하게 깔리고 시 전체가 홍당무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시이다. 시인의 고뇌가 한 눈에 보이고 고뇌를 벗어나려는 몸짓이 절제된 언어를 통해서 환하게 빛나는 시야말로 진실로 좋은 시의 반열에 드는 시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2.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 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 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위의 시는 함민복의 시 「눈물은 왜 짠가」이다. 오월이 오면 맨 처음 머리에 환하게 다가오는 시이다. 이 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산문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형식주의적인 관점으로 개인사를 진술한 시이다. 요즘 시의 산문화를 이야기하면서 놓친 부분을 부연해 보면 산문화 된 시들은 대부분 하나의 사건을 이야기한다. 하나의 사건은 짧은 시간 동안 전개고 그 흐름 속에서 시인은 그 사건의 의미를 유추해 내는 것이다. 사건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객관적 정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修辭的인 언어의 조형보다는 스피디한 전개에 중점을 둔다. 이 시의 주제는 가난과 어머니의 사랑이다. 많은 시인들이 어머니를 노래할 때 가지게 되는 정형과는 이 시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의 어머니는 자식에게 고깃국물을 더 먹이기 위해 국물이 짜다고 거짓말을 하는 잘못된(?) 행동을 한다. 이 행동은 아들이 보기에 창피한 일이다. 창피하면서도 어머니의 마음을 읽는 가난한 아들의 슬픔은 우리가 자주 접하게 되는 미화된 어머니의 시들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오히려 더 진솔하다. 그러나 이쯤에서 이 시가 마무리된다면 이 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정형화한 또 하나의 그렇고 그런 시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이 시의 미덕은 어머니의 사랑과 등가를 이루는 설렁탕집 주인의 넉넉한 마음씨를 보여줌으로써 각박한 세상에 꽃 피는 인정으로 확대되어 감을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다. 母子가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조심조심 깍두기를 내놓고 가는 설렁탕집 주인의 마음씨야말로 자식을 감싸안는 어머니의 사랑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이다. 이 시에서 또 하나 놓쳐서는 안될 부분이 마지막의 ‘눈물은 왜 짠가’이다. 이 마지막 행은 하나의 연으로 독립되어 있으면서 다소 장황하게 전개된 이야기의 핵심을 압축하면서 우리에게 다시 한번 고단한 삶을 둘러보게 하고 그 고단한 삶의 보석인 눈물이 썩지 않는 소금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밑줄로 강조해 놓은 부분들이 음식점 주인의 넉넉한 마음씨를 드러내어 줌으로써 시가 한 쪽으로 쏠리는 위험을 경감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주제를 통해서 중층적 인식의 구조로 확장해가는 능력이 진정으로 좋은 시의 덕목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습작기에 있는 사람들이 단번에 주제의 중층적 구조를 장악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 어려움의 극복 방안으로서 택하게 되는 것이 감정의 토로이다. 감정의 토로는 시의 중요한 기능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감정의 직설적 토로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낀다. 엘리어트는 “시는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감정의 도출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시인의 (화자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그치지 않고 독자의 (청자의) 자발적 감정의 유로 流露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감정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독자로 향하는 시의 의미가 회화적 이미지로 떠올라야만 비로소 시의 구조를 갖게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갑자기 생각나는 사람

느닷없이 생각 속에 나타나

 하루 왼종일

멈칫, 하게 만드는 사람

멈칫한 후

 아무 일도 못하게 하는 사람

 

 

 원태연의 「올가미」는 그리움의 대상과 올가미를 대칭으로 놓아 사랑의 감정을 현실감있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예반의 시(?)와 마찬가지로 감정에서 시작해서 감정으로 끝나는 폐쇄적 통로를 보여줌으로써 시의 품격을 가진 작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3.

 

   한 편의 시를 빚을 때에는 먼저 무엇을 쓰고 싶어하는지를 확실히 알아야 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도구- 시 속의 이야기나. 구조-를 차용해야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을 담그듯이, 포도주를 맛나게 하듯이 자신의 생각이 충분히 농익을 수 있도록 기다리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죽어서 달이 되었다

바람에게도 가지 않고

길 밖에도 가지 않고,

어머니는 달이 되어

나와 함께 긴 밤을 같이 걸었다.

 

 

  위의 시는 1978년에 간행된 감태준의 시집 『몸 바뀐 사람들』의 마지막 편으로 수록된「思母曲」이다. 「사모곡」은 「눈물은 왜 짠가」와 비교해 보면 굉장히 짧은 5행에 불과한 시이다. 제목 그대로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이 가득한데, 이 시 또한 단순히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정서뿐만 아니라 현대의 삶을 사는 수많은 어머니들에게 던지는 하나의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자신의 영육 靈肉을 송두리째 내어준 자식에 대한 사랑은 본능이다. 그 본능적인 요소가 순기능으로 작용하지 못할 때 맹목적인 교육열, 이기적인 경쟁심을 부추기는 역작용을 가져온다. 정의를 가르치고, 사회구성원으로의 역할과 책임을 체득케 하는 것이야말로 부모가 자식에게 전수해야할 중요한 덕목이 이니겠는가? 「사모곡」을 쓴 시인이 오늘날의 현상을 예견하면서 시를 지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바람에게도 가지 않고’ , ‘ 길 밖에도 가지 않고’는 한 시대를 꿋꿋이 살아가는 전형으로 뇌리에 깊이 박힌다. 시류가 어떻게 흘러가든 연연해하지 않고 올곧게 사는 모습이 바람에게도 가지 않고, 길 밖으로 가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한 조건은 허다하다. 그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작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시인은 평생 동안 한 작품을 놓고 첨삭을 거듭했다고 한다. 먼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맑아야 한다. 맑다는 것은 모든 풍경을 투명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山頂에 오르기를 희망하는 자이다. 산정에서는 사방을 멀리 조망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을 깊고 넓게 조망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사색의 내공이 필요하고 그 사색의 결과를 담아내는 그릇인 스타일(문체)의 조련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에게는 늘 2% 부족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