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가 쓴 시인론·시평

새로움, 메시지와 이미지 사이에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5. 21. 20:52

새로움, 메시지와 이미지 사이에서

나 호 열


   동지 冬至가 지나면 새로운 기운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한 겨울이지만 음력으로 보자면 동지는 새로운 봄의 시작인 것이다. 작년의 봄과 올 해의 봄은 같은가 혹은 다른가? 나무에 돋아나는 저 잎은 작년에 달려 있던 그 잎이 아닌데, 저 자리에 서 있는 나무는 올해도 저 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반복에서 비롯되는 동일성의 착각은 미혹에 불과할지 모른다. 운동과 변화, 그 대척점에 있는 부동과 본질에 대한 복잡한 사유,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다는 운동론자와 관념만이 존재한다는 부동론자의 철학적 논쟁은 사실 우리 주변에서 신념의 문제로 다루어지는 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간은 변화를 꿈꾸면서도 변화 속에 웅크리고 있는 본질적 요소에 대한 기대를 한시도 버린 적이 없지 않은가. 일례로 역사 歷史란 인간에게 주어진 정신의 축복이자 동시에 저주이다. 역사는 기억이고, 자연스럽게 이것과 저것을 나누고, 나누면서 반복된 요소를 제거하는데 그 나눔의 잣대가 ‘새로움’이라는 편리한 관념인 것이다. 기억과 새로움의 틈새로 예술은 슬그머니 주저앉는다. 자연스럽게 경이驚異 라는 색다른 체험을 기대하는 관중이 합세하고 시간의 흔적인 예술은 상징으로 역사를 치환한다. 그리하여 새로움과 경이는 동전의 양면처럼 예술을 의식하는 사람들을 괴롭힌다. 새로움이란 진정으로 전인미답의 경지를 이르는 말인가? 과거의 유산과 단절한 채 자립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수 있는가? 놀라움은 필수적으로 새로움으로부터 빚어지는 사태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새로움에 대한 화두는 예술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새로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는 예술 행위는 영원성永遠性이라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다.

  추운 겨울일수록 봄에 대한 열망이 크다. 올 겨울은 큰 추위가 없을 것이라고 기상관측자들은 자신 있게 말했다. 올 겨울에는 시만 읽자고 생각했다 -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 87 편의 시를 읽고 19명의 시인과 만날 수 있다는 것으로도 칩거의 이유는 충분했지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삼한사온은 사라지고 계속되는 강추위와 남녘의 폭설은 이 겨울을 우울하게 했다. 몇 번의 몸살감기가 왔다가 가고, 여전히 쓸데없는 일상의 바쁨은 반복되었다. 새로움은 없고, 예상은 빗나갔다. 한 해는 불안과 초조로부터 시작되었고 시는 좀처럼 나에게 다가와 주지 않았다. 시끄러운 세상과의 불화는 분노와 적개심, 한탄과 자조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안경을 새로 맞추니 세상이 밝아져 보였다. 침침한 눈으로는 침침한 세상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인데, 안경이 밤거리의 표지판을 똑똑하게 보여주고, 차선을 반듯하게 보여 주었다. 현미경도 아니고, 망원경도 아닌 이 안경 하나로 세상이 바뀌었다. 견자見者의 의미가 이런 것이 아닐까. 동일한 사물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사물의 본질을 끄집어내는 것, 그 사물의 본질을 끄집어내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리하여 이 세상의 질서를, 구조를 새롭게 구성해 내는 것. 1917년에 다다이스트 뒤쌍 Marcel Duchamp이 남자 변기에「샘」이라는 제목을 붙여놓은 작품을 출품했을 때를 생각해 보라. 어느 관람자는 격분 했을 것이고, 어느 사람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것이며, 어느 사람은 작품의 의도를 간파했을 것이다. 모든 예술 행위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는 상상력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혁명적인 상상력은 세상의 가치를 전도시키고 세상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이는 창작자 자신의 희열일 뿐 만 아니라 관중들에게도 새로움과 함께 놀라움을 선사한다. 상상력의 경지를 매개해주는 것이 메시지의 역할이다. 메시지는 다른 말로 주제라고 불러도 상관없겠다. 메시지 없는 작품은 있을 수 없다. 새로움이란 이 메시지가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이냐 아니냐로 따져볼 수 있겠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법이 새로운 것이야 아니냐로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메리제인.
우리는 요코하마에 가본 적 없지
누구보다 요코하마를 잘 알기 때문에

메리제인. 가슴은 어딨니

우리는 뱃속에서부터 블루스를 배웠고
누구보다 빨리 블루스를 익혔지
요코하마의 거지들처럼.
다른 사람들 다른 산책로

메리제인. 너는 걸었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
항구의 불빛이 너의 머리색을
다르게 바꾸어놓을 때까지

우리는 어느 해보다 자주 웃었고
누구보다 불행에 관한 한 열성적이었다고

메리제인. 말했지

빨고 만지고 핥아도
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겠니?

슬픔이 지나간 얼굴로
다른 사람들 다른 산책로

메리제인, 요코하마

  위의 시는 황병승의 「메리제인 요코하마」란 시이다. 황병승은 이 시의 의도를 묻는 질문에 아무 답변도 하지 않은 채 웃기만 하였다.- 그 웃음의 이유는 각자 가늠해 보기 바란다 - 메리제인이 누구인지를, 요코하마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도시인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시는 메시지를 던져줄 수 없다. 전통적인 시의 틀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 시는 메시지의 해체를 보여주고 이 메시지의 해체가 바로 시인의 메시지라는 사실은 허망에 가까울 것이다. 정서의 정화라든지, 이념이나 사회적 이슈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는 시 읽기의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킬 것이다.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 김명인의 시 「침묵」전문

  굳이 이 시의 소재를 들어보자면 ‘침묵’ 이라고 할 수 있다. 침묵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시로 형상화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형이상학적 주제이기도 하다. 시를 노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 시는 너무나 딱딱하고 경험할 수 없는 내재적인 고립된 의식을 보여주기에 매번 읽을 때마다 해석이 다르고 느낌이 다른 곤혹감을 안겨준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시란 시를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라는 네루다의 말을 상기해 보자. 황병승의 시나 김명인의 인용 시는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 매우 불친절하다 못해 불쾌감까지 불러일으키지만 등불처럼 먼 길을 가는 사람들의 나침반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면 이미지의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위의 인용시들이 선뜻 다가오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선연한 이미지가 포획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언어, 특히 문자를 도구로 하는 시에 있어서 이미지는 시를 감상하는데 중요한 통로이다. 이미지는 말하자면 메시지의 시각화에 다름 아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미지는 김춘수의 언어가 무의미화 되는 파편적 이미지가 아니라 김영태나 김종삼이 추구하는 직관적이면서 응집적인 미화 美化된 이미지를 말한다. 메시지는 이미지화 되어 아름다움을 획득할 수 있고, 이미지가 메시지 그 자체가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시인에게 새로움의 문제는 메시지와 이미지에 대한 태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들을 떠받치는 힘은 상상력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간추려 말한다면 상상력은 우연 偶然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상상력은 그 자체에 논리적 함축을 수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논리적 구성력이 갖춰져 있지 않은 상상력은 시에서 파편화되어 메시지나 이미지를 소멸시켜 버린다.

  시는 상상력의 결정체이며 정서와 감동을 동반하는 언어 예술이다. 시속에 함축된 비의가 독자의 심금을 울리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시인은 머리와 가슴으로 시를 써야 한다. 가슴으로만 시를 쓰던 시대는 갔다. 오늘의 시는 가슴 외에 머리로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신작시 다섯 편을 내놓으면서 시력詩歷 오십 년을 헤아리는 강인한 시인이 시작 노트에 올려놓은 글은 변變 과 화化 의 요의를 집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이 세상의 중심을 인간에 두고 냉철한 비판의식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견자見者의 진정한 자세가 아니겠는가

「가까운 미래」는 현대문명을 비판한 시이다. 파멸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앞으로 오십 년 안에 석유가 고갈될 것임을 알면서도 그 석유를 먹이로 하는 공장들, 자동차들이 더 많이 만들어지는 광기 狂氣의 끝을 고발하는 시들은 많다. 환경고발, 열악한 노동 현장의 고함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큰 목소리의 시들은 더 이상 우리를 분기탱천하게 만들지 않는다. 시인은 사라지고 메시지만 공허하게 남는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이다. 끝을 보아야만, 광기의 종말을 보아야만 도래하는 원시의 시대가 바로 인간적인 삶이 구현되는 시대이며, 지연에 복속된 인간의 자유를 누리는 시대라는 것을 노래함으로서 도식화된 현대문명의 비판을 아우르고 한 걸음 더 나아간 깨달음을 보여준다.

석유도 석탄도 사라진 자리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딸들이
한 집에서 텃밭을 가꾼다
먼 옛날 지진과 해일이 쓸어간 뒤
전쟁이 끝나고
샘물을 길어 밥을 짓는
인간의 손이 꽃처럼 아름답다

「가까운 미래」, 마지막 부분


인간의 손이 꽃처럼 아름다우려면 얼마나 노동에 익숙해져서 옹이가 박힌 투박한 손이 되어야 할까? ‘가슴으로만 시를 쓰는 시대는 갔다’고 했지만 강인한의 신작 시편들은 가슴으로 쓰는 시와 머리로 쓰는 시를 따로따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슴으로 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관찰하고 난 다음에야 머리로 (상상력으로) 시를 완성하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아랫 것은 불편하다」는 자신의 불편한 다리를 아내의 다리위에 올려놓는 통증의 밤을 이야기하면서, -눈 위에 눈이 쌓여도/ 그림자 위에 그림자가 겹쳐져도/ 아랫 것은 아무래도 위엣 것의 반성 없이는/ 하염없이 부담스럽고 불편한 것을/ 윗돌 밑의 아랫돌도 /그래서 천근 만근 무겁게 흐르는 것을 「아랫 것은 불편하다」마지막 부분 - 처럼 우리네 정치, 사회의 문제를 넌지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에서의 중층적인 구조는 시의 논리성을 튼튼하게 하고, 상상력의 경지를 넓게 확장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밤이 깊어서 투캅스의 죽음을 안다
그가 죽은 것이다
나는 별로 놀라지 않고
소주 한 잔을 목구멍에 턴다
원래 투캅스란 쓰러지는 법
권력의 암투에 의해서 해체되던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어이없이 쓰러지던
투캅스는 정의의 이름으로 쓰러진다
며칠 내내 국지성 폭우가 내린다
병곡의 계곡들이 물로 가득 차 골골이 소리쳐 내리면
어둠의 밤자리에서 수상함을 예감한다
무슨 일이 있겠군
면민체육대회에서 병곡은 우승한다
면장도, 농협직원도 마을 이장들도 찾아와 축하한다 남자 투캅스와 그의 부인 여자 투캅스가 온다
아니, 시인 선상님 아니신가
이장 어르신들, 우리 병곡 마을에 시인이 삽니다
시골 마을에 시인이 살고 있으니 이 마을 최곱니다
이런, 이런 오늘 투캅스 실수한다
시골 마을은 오로지 인정 많고 시다운 시골 마을로 남는 게
그게 영원 대대 잘 사는 비법이라요
그 말을 남긴 채 그날 밤 투캅스는 병곡에서 사라진다
험난한 마을을 찾아 투캅스 부부는
로시난테를 타고 다른 마을로 떠난 것이다
시를 이해한 투캅스
나는 그와 같은 투캄스를 또 어디에서 만날 것인가

  위의 시는 문복주의 「아따, 병곡 투캅스 3」의 전문이다. 김종화라는 시골 순경을 소재로 한 세 편의 연작시 중 마지막에 해당되는 시이다. 이 연작시는 전체가 하나의 알레고리로 구성되어 있다. 대화체의 장황한 서술은 단숨에 읽어 내리게 하는 시원함과 즐거움을 맛보게 하지만, 그 시원함과 즐거움 이상으로 시의 경계를 이탈하는 아슬함을 감수해야 한다. 지면의 제약으로 인용하지 못하지만 시인이 시작노트에 수록한「철학자 산들이」나 「불안한 산골」이 훨씬 시로서 음미할 가치가 높다. 그럼에도「아따, 병곡 투캅스 」는 알레고리가 지니는 이미지의 퇴화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의미를 환기하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경찰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좋은 평가를 받는 직업이 아니다. 시인 또한 이상하게도 유교의 영향으로 존중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무력한 존재로 인식되어 있다. 또 한 편으로 우리의 농촌은 순박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사람들의 영원한 고향이지만, 실제로 오늘날의 농촌은 낭만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생각만큼 순박한 사람들만 모여 사는 곳이 아니다. 시의 주인공인 순경은 병곡이라는 마을에서는 이것저것 참견하기 좋아하고 시를 이해하는 낭만주의자이다. 공권력과 위압의 상징은 사라진다. 시의 화자는 시인이지만,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십 여 년이 넘게 교편생활을 한 전직 교사이지만 현재는 농부이다.

시골 마을은 오로지 인정 많고 시다운 시골 마을로 남는 게/ 그게 영원 대대 잘 사는 비법이라요

그러나 오늘날의 농촌은 두레의 풍습이 사라지고 도시화와 자본주의의 물결이 밀어닥치고 있는 냉정한 현장이다. 도시의 근로자나 사업가의 기질을 가지지 않으면 농민들은 망한다. 이 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따라서 자신들의 역할과 본분을 망각한 존재들일 수도 있다.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병곡’ 이라는 공간에서의 삶은 인정이 사라지고 시다운 풍경을 잃어버린 우리의 자화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순경의 죽음은 권위의 죽음이거나 뿌리 뽑힌 채 현실 저 너머로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결말일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시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또 하나의 풍경을 읽어 내리지 못할 때 이 시는 한없이 구겨져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김미애는「만해」외 아홉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신인이다. 김미애의 시들은 다시 한 번 새로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해 준다. 시를 구성하는 틀, 즉 기법과 형식이 새로운가? 시로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새로운가? 우선 그 형식에 있어서 10편의 시 중에서 일곱 편이 신문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사실 아직까지 명확한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은 채로 모호하게 쓰여지고 있는 산문시의 경계가 어디쯤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김미애의 시에 드러나고 있다고 보여진다.「악기점에서」,「꽁치」,「쟁반」과 같은 시들이 어느 정도 명확한 오브제를 가지고 있는데 반해 산문시로 쓰여진 시들은 주제나 소재가 대체로 포괄적이고 상징의 외연이 크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형식의 쓰임새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는 시인 스스로에 의해 판명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유리’나 ‘화구’와 같이 속성이 쉽게 드러날 수 있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산문시의 형식을 취하게 될 때 그 필연성을 주지해야 하는 것은 시인 자신이다.

불로 다시 태어난다 불이라야 몸 허문다 용광로 가득 불을 넣어 딱딱한 몸 푹 담근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살얼음처럼 투명한 살갗에 금을 긋는다 유리인 병들이 화덕 속에서 몸 풀던 그 때 성 바꾸고 이름 바꿔 트럭 타고 떠난다 불 속에 들기 전 깨지고 있던, 부서지고 싶던 갈증을 참아내고 이전에 불려졌던 이름 위패 없이 떠돈다 결국 유리 일 수밖에 없었으나 천명이라 토닥이며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떠나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전입신고는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 「유리」 전문

위의 시는 불 속에서 태어나는 유리의 속성과 어디론가 떠나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빗댄 시이다. 만일 시인이 의도적으로 메타포어를 회피하기 위해서 산문의 형식을 취했다면 어쩔 수 없이 과도한 의도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미애의 산문시들은 지금껏 시도되지 않았던 주제를 큰 붓으로 그려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새로움이란 창작자가 늘 모험을 수행하면서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성취되는 기쁨이다. 창작자 뿐 만 아니라 시를 필요로 하는 독자들에게도 고스란히 그 기쁨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세상은 영원히 미완성이다

 

 


새로고침꾸미기

 

'내가 쓴 시인론·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에 대한 시인의 태도  (0) 2006.07.31
삶의 증명 또는 반성으로서의 시  (0) 2006.07.10
존재탐구에 대한 몇 가지 방식  (0) 2006.05.18
좋은 시의 기준  (0) 2006.05.01
사랑의 힘  (0) 2006.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