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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죽음 사이에 걸린 무지개를 찾아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2. 28. 13:32

꿈과 죽음 사이에 걸린 무지개를 찾아서 -

 

                     이영유의 다섯 편의 시 나 호 열

 

 

‘시는 아름답다’는 입에 발린 말이 무색하다. 처음에도 그랬고 끝도 그랬다. 그가 저 세상에 있으니 아무 말이라도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말문이 닫힌다. 어찌 보면 오래 살았고, 또 어찌 보니 너무 짧았다. 生은 그래서 생각하기 나름이다. 완성이면서 불안하고 안심이 되면서 미완이다. 그러면서 이영유의 다섯 편의 시는 의식의 끝을 보여준다. 장식도 없고, 儀式도 없는 이 세상의 문법이 사라지고 난 후의 풍경. 고통, 회한, 증오, 아름다움...이 모든 감정을 질탕 버무리고 으깨고 난 뒤, 까칠하게 남는 개념 덩어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을 뿐이다. 그러고 나니 생생한 슬픔 한 덩어리가 찬 밥으로 남는다면 또 어쩔 것인가?

 

도대체 이 다섯 편의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인사동 골목 밥집에서 비빔밥을 비벼대다가 만난 그의 부음. 그의 生과 그의 詩를 분리하기가 어렵다. 비빔밥은 온갖 나물을 버무리고 고추장, 된장에 밥을 섞는 일인데, 어느 사람은 비빔밥을 시켜 놓고 나물 따로 밥 따로 먹기도 한다는 말이지. 생 따로, 시 따로 노는 일이 정법인 지금, 생에 시를 비비든, 시에 생을 비비든 그게 무슨 문제가 될 것이냐....다시 의식의 끝에 가본다. 달관도, 체념도 없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감정이라는 불순물을 제거하고 맹숭하게 바라본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다는 생각이 막막하다.

 

그의 시는 처음부터 그랬다. 그의 시집 『검객의 칼끝』까지 이영유는, 시인은, 독자들에게 매우 불친절했다. 한 마디로 그는 아나키스트였다. 끊임없이 중얼거렸고, 중얼거리다 보니 그의 생 또한 중얼거림으로 휘청거렸다. 더 나아가서 그는 시를 즐겼고, 그러나 즐김의 그 이상으로 시를 신격화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만의 문법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중얼거림은 그의 문법 그대로 이고, 그의 문법은 삶에 대응하는 방법과 일치한다. 한 마디로 말하자. 휘청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갈대의 음성을 담아내려고 하기 때문에 그의 시는 낯설고 지겨워진다. 낯설다니? 지겹다니?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만들어낸 온갖 제도들, 규칙들, 행복, 또는 행복의 조건들... 하다못해 종교까지도 게임의 룰을 만들어 놓고 인간을 부려먹고 있지 않은가? ‘경마장으로 가는 길’을 가면서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들, 자신이 경마 競馬인지도 모르면서 그 경마에 내기를 거는 사람들 그래서 삶은 적막하다고 주문처럼 외우는 우리는 또 얼마나 경건한 무지에 빠져있는가. 그래서 이영유의 시에는 편협한 이데올로기가 보이지 않는다. 한없이 세워지면서 한없이 무화하는 세계의 잔영이 문자 행위 속으로 삼투되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 무한한 동경이며 찬사에 다름 아니다. 생각해 보니 기억에 퇴적되면서 작동되는 이성의 힘은 자연스럽게 이데올로기의 함정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관습에 길들여지면서 얻는 쾌감의 지속을 위해 알게 모르게 우리는 관념의 노예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데, 이영유는 쾌감과 관습, 노예의 길목을 예리하게 차단하면서- 모범적 시인 또는 생활인이 되기를 거부하면서- 스스로 방랑인이 되기를 자처한 것은 아니었는지.

 

그는 통념상의 ‘아름다움’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당연히 ‘아름다움’의 증언자가 아니며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거나 묘사하는 제작자가 아니다. 오히려 시인은 망치를 들고 관념의 허망함을 깨부수기 위해 이리저리로 분주히 도망치는 존재이다. 시인의 앞에는 관념이 있는데 배후로는 끊임없이 기억과 시간이 시인을 향해 달려들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시인은 한없이 무력하지만, 방랑으로 인해 시인은 한없이 강해질 수 있다. 섣부른 달관과 체념은 설익은 잠언과 가식으로 얼룩진 꿈을- 끝내는 쓰레기보다도 못한- 남기지만 방랑은 정신의 자유와 자유의 고통을 증언하면서 참다운 시인의 탄생을 힘겹게 기다린다. 이영유는 죽음으로써 시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짜가’로 살면서 끊임없이 원본을 꿈꾸는 삶을 뒤집어 보임으로서 삶이라는 관념의 허구성을 드러내 보이는데 성공했다. 그의 시가 지겨운 만큼, 그의 시가 낯선 만큼 이영유라는 한 객체는 사상되고, 지겹고 낯선 삶의 방랑자로 살았던 한 시인은 새롭게 떠오르는 것이다. 이제 이영유라는 인간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그의 중얼거림만이 남게 되었다. 그 중얼거림이 아프다. 그 중얼거림이 망치이기 때문이다. 상식의 허울을 깬다. 이데아도 없고, 유토피아도 없고, 판타지아도 없다는 망치의 생각이 찌렁거리는데 그 찌렁거림이 시인의 헛헛한 웃음과도 같다. 시는 과연 아름다운가!

 

아름다움은 앎에서 출발한다. 안다는 것은 癌이다. 안다는 것은 본능을 넘어서는 것이데. 그것이 문명이 되었든, 문화가 되었든 간에 동물적 본능을 넘어서는 순간 파멸을 수반한다. 「나는 암이다」는 대자적존재로서의 ‘나’의 앎이 동시에 인식의 대상- 그 어떤 것-이 癌이 되는 것을 천명한다. 癌은 외부로부터 침입한 세균이 아니라 원래 몸을 이루던 것의 반란과도 같은 것이다. 癌은 몸과 함께 멸망한다. 몸이 사멸함으로써 암 세포도 함께 죽는 것이다. 먹히고, 씹히고, 짓밟히고, 빼앗기는 순환은 ‘믿음을 잃고// 유혹에 빠지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의 과도한 앎이 불신과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물질과 물질 간의 과도한 억압은 ‘스스로 즐기지 못하는데,/ 어찌 암이라 이름 부칠 수 있으랴?’는 자문 自問을 일으킨다. 세상은 변증법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 거대한 앎은 극소한 癌들의 반란을 야기하고 결국은 그 극소한 것들에 의해서 멸망한다. ‘나는 암이다’는 이성적 동물로서의, 아니 인간으로서의 자기 확인이면서 동시에 인간 자체가 우주를 멸망시키는 癌 이라는 통렬함까지 이끌어가는 단발마의 외침이다. ‘황무지’라는 부제가 붙은 「나는 암이다. 2」에서는 ‘모래 한 알 한 알이 모여/ 癌의 山을 펼친다 ’라고 부연되어 있다. 현세의 삶은 황무지 앞에서 끝난다. 무릇 생명들은 ‘오래 전부터 달려온/ 알 수 없는 / 길’을 달려와 황무지가 된다. 모래 한 알로 거명된 개체는 황무지를 이루고 癌의 산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인식의 끝이다. 맹숭거리는 앎의 끝에서 인간은 더 이상 벗을 허물이 없다. 이제야 말 할 수 있는 것이지마는, 여기까지의 이영유의 사유는 눈물겹다. 아직 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 때가 아니라면 자신의 병든 몸을 넘어서서 앎과 癌의 사유를 더 넓게 펼치면서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탐색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상에 남겨진 5 편의 시는 시간적 편차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편에 이를수록 생을 마감하기 직전의 작품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나는 암이다 」의 두 편은 마치 니체가 서양 문명의 아폴론적 성향을 비판하면서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추구하는 것과 같이 문명사적 입장에서 비교적 넓은 공간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대립적이고 상징적인 구조- 나머지 시들은 시야가 자신, 자신의 몸으로 축소되어가는- 병이 깊어가는 만큼- 이행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묻는다’ 는 매장과 질문의 양가의 의미를 지닌다. 묻히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묻는(매장하는) 존재, ‘봄이 언 땅을 녹이며 올라오는’ 생명과 죽음이 만나는 지점에 ‘숨죽이고/ 웅크리는 ’ 물음표의 자세를 상상해 보라. 섣부른 달관과 체험의 시가 아니라고 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시인의 웅크린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웅크린 자세는 자궁속의 태아의 자세이며, 무한회귀의 자세이다.

 

엄마의 젖가슴은 언제나 山이었다

엄마의 젖가슴은 언제나 구름이었다

그리고 바다였다 속 깊은 하늘의 속살이었다

 

                            시 -「불귀의 객」첫 연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게 ‘엄마’는 떠나지 않는 기억, 산이다. 젖가슴, 구름, 바다, 하늘의 속살이 상징하는 부드러움, 잡을 수 없음, 물의 이미지는 웅크린 태아를 영원히 잠들게 하는 무덤이며 꿈이다. 육친인 어머니는 멀리 떠나고 나이 들어서도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은 천지를 이루고 있는 자연이다. ‘불귀의 객’은 말 그대로 돌아올 수 없는 손님이며 나그네이다. 이 세상에 찾아온 손님, 다음 세상으로 떠나서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나그네를 품어내고 내둘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연 밖에 없다. 즉자적 존재인 자연은 노자의 말을 빌리면 인정사정이 없다. 유이면서 무인 것, 스스로 살고 스스로 죽으므로써 영원을 보장받는 자연은 이름 붙일 수도, 부를 수도 없다. 오직 유한한 것들이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덧대는 것, ‘네가 없어도 너고 / 내가 없어도 나다 / 이름을 지우자 / 불귀의 손님들’ (「不歸의 客」, 마지막 연)처럼 의미를 부여받는 대자적 존재의 이름은 자연의 큰 틀 안에 힘없이 융합되고 마는 것이기에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그만이다. 엄마의 품속으로 되돌아가는 의식, 그것 보다 더 성스러운 의식이 또 있을까.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몸의 아픔을 다스릴 수는 없다.

 

시 「덮어놓고, 口語體」는 고통의 극한까지 다다른 話者의 몽유를보여준다. 이 시에서의 ‘너’는 헛소리일 수도 있고, 그 헛소리는 어쩌면 가장 진실된, 문법을 뛰어넘는 고백일 수도 있다.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체면을 차릴 때, 그럴 듯 하게 가장할 때의 文語體가 아니라 지시, 명령, 한탄 등의 기능을 할 때 구어체는 강력하게 절실하다. 열에 들떠 있을 때 헛소리는 의식의 억압으로부터 뛰쳐나와 의식의 표면으로 솟구친다. 구어체의 단발마, 구어체 속의 ‘너’는 지금의 ‘나’ 가 아니라 과거의 ‘나’이다. ‘홀로 병신이 되기도 하고, 바보가 되기도 하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홀로 병신이 되기도 하고 바보가 되기도 하지만 과거의 나는 밝은 얼굴을 하고 있고 뜬금없이 강릉을 배회하기도 하는 존재이다. 정신으로 지탱하는 나와, 나이면서 내가 아니게 만드는 몸과의 싸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이간질하는 시간의 간교함은 망치로 기억을 깨뜨리려는 화자를 압도한다. ‘얼마나 처량하면/ 밥숟갈을 들다말고, 무연히/욕을 하겠느냐/지랄을 하겠느냐/생난리를 치겠느냐‘ (「덮어놓고 구어체 」4연) 갑자기 쏟아지는 비처럼 찾아온 병마를 어쩌지 못하지만 헌 신문지로 표상되는 기억을 의식에 씌우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외로움으로 변명되는 것이다. 작년에 그는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에게 얼굴이나 한 번 보자고 소식을 전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해를 넘기고 유명을 달리하기 며칠 전에야 전화를 했다. 그러나 끝내 통화를 하지 못했다. 그런 미안함 때문은 아니지만 다섯 편의 시를 읽으면서 그의 시에 대한 불편을 덜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전통적인 시법- 시는 이미지다- 에 익숙해져 있던 내게 그의 시는 너무 깊은 유추와 도약을 요구했다. 『검객의 칼끝』말미에 붙은 “무의미화라는 삶의 운명적 행로가 내모는 바를 따라 살면서 슬며시 거기에 지속적으로 의미화의 운동 에너지를 부여하는 것이다”라는 정과리의 해설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그의 시적 전략에 동화되지 못했던 것이 ’자신의 목소리를 가져야 하는‘ 시인의 책무를 가볍게 여겼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이영유는 자신의 전면에 박두한 현실을 회피하거나 도피하지 않았다.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이 설령 죽음이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시 「덮어놓고 구어체 」는 이렇게 끝난다.

 

흔한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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