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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하지 못하는 사회의 끝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1. 24. 14:28

[박성희의 커피하우스]

절제하지 못하는 사회의 끝은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입력 2025.01.24. 00:02
 
 
 
일러스트=이철원

이런 신화가 있다. 신들의 왕 제우스가 하늘에서 인간 사회를 내려다보니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서로 죽고 죽이느라 사회가 늘 파탄 나고 종국에는 소멸되어 남아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제우스는 인간 사회를 구할 방도를 고민하다 전령사 에르메스를 시켜 두 선물을 내려보낸다. 하나는 ‘염치’를 뜻하는 ‘아이도스’, 또 하나는 ‘정의’를 뜻하는 ‘디케’다. 또 모든 인간에게 동물과 다른 특별한 기술을 부여하는데, 그게 ‘정치적 기술(arete politike)’인 ‘말(言)’이다.

세상은 대체로 강자와 약자, 부자와 가난한 자, 재능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섞여 산다. 그 둘이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려면 우선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 대해 부끄러움(염치)을 지녀야 한다. 돈이나 재능은 자신의 노력보다는 운에 따른 것이니,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약자에게는 정의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갈등은 총이나 칼이 아니라 ‘말’을 도구 삼아야 서로를 죽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로마 시대 키케로가 웅변을 가리켜 ‘고요의 동반자’라고 했고, 20세기 수사학자 케네스 버크도 저서 머리에 ‘전쟁의 정화를 위하여’라는 부제를 달았다. 외교가 전쟁을 막아주듯, 말이야말로 세상의 갈등을 잠재우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구속 수감되고, 그 지지자들은 법원에 난입하고 헌법재판소 담을 넘으며, 주말마다 도심 시위로 온전히 다닐 수 없는 어지러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 “자유(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구속(비상계엄을 선포)한다”는 희대의 모순어법(oxymoron)으로 세상에 충격을 준 대통령은 지도자 자리에서 내란죄 재판과 탄핵 판결 앞에 선 미결수 신분으로 떨어졌고, 사상 유례없는 입법 폭주와 국정 마비를 시도해 온 야당은 지금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자기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여념이 없어 보인다. 담을 넘고 창문과 기물을 파손해 현행범으로 체포된 시위대가 90명에 이른다. 이들은 불법행위, 교사 방조 행위 등으로 재판받고 사법 처리될 것이다. 그 어디에도 강자의 염치와 약자의 정의, 언어라는 도구 사용은 찾아볼 수 없다.

강자를 순서대로 보자면, 야당이야말로 몰염치의 극치다. 숫자만 많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그들은 그렇게 정국을 운영하고 나라를 흔들었다. 누구라도 방해되면 탄핵하고 아무 법이라도 만들었다. 할 수 있으니까 다 한 것이다. 염치란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미덕이다. 그들은 강자의 미덕을 지니지 못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지지율이 오히려 여당보다 못한 것은 사람들이 그런 야당의 행태를 훤히 보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자기 자리에서 쓸 수 있는 수많은 카드 중 계엄이라는 낡은 카드를 흔들어 분란을 초래했다. 최종적으로 탄핵이 인용되고 그의 행위가 내란죄로 기록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시대착오적이고 상상력 빈곤의 하수(下手)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경영 전략 용어에 ‘불타는 갑판(burning platform)’이라는 것이 있다. 갑작스럽게 배가 폭발해 불길이 치솟는 갑판에서 선원이 불기둥에 휩싸인 바다에 뛰어들어 살아남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위기 상황에서 ‘확실히 죽기’보다 ‘죽을지도 모르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선택하는 전략이다. 좋은 위기를 만들어 낭비하지 않고 성공으로 이끄는 전략이지만, 국가를 운영하며 배를 태운다는 발상은 너무 위험하다. 대통령은 야당이 발목을 잡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2년 더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국민이 원한 건 그런 상황에서 2년을 잘 버텨주는 것이었다. 버티고 관리하는 것도 능력이다.

 

대통령도, 야당도, 각자 조금씩 절제하는 미덕을 발휘했다면 지금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절제란, 모든 상황에서 현명하게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올바른 척도와 방식을 뜻한다. 절제는 어수선한 인간 마음을 질서 있게 다스리는 기술로, 말의 무게를 가능하고 적절히 조절해 사람들의 신뢰를 이끌어 내는 능력이다. 절제는 또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옳은 일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선택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절제를 아는 사람은 한 순간의 분노로 관계를 망치지 않으며, 탐욕을 부리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는 일을 하지 않는다. 마치 포도주를 제대로 즐기려면 벌컥벌컥 들이켜지 않고 한 모금씩 음미해야 하듯, 절제하며 스스로 다스리면 포도주의 맛과 향을 즐기며 인간도 포도주처럼 성숙해질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리 모두 행복을 원하는데 어째서 행복한 사람이 극소수인가’에 대한 답으로 ‘엔크라테이아(enkrateia), 즉 절제를 들었다. 그 논리대로라면 우리가 불행한 건 우리 사회에 절제되지 않은 힘이 너무 많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힘을 쓸 줄만 알지 절제할 줄 모른다. 더욱이 민주사회 정치 권력이란 자신들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이다. 위임받은 권력을 제 것처럼 마구 휘두르는 정치인이 이끄는 나라의 국민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행복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일찍이 제우스가 내려다보며 혀를 찬 원시 공동체처럼 우리 사회도 강자의 염치가 사라지고, 약자는 정의를 빼앗기며, 말 대신 폭력이 횡행해, 종국에 서로 죽고 죽이는 공멸의 길로 빠져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