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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리 물길 20년 오가며 북한 뗏목꾼들 삶 담았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2. 17. 14:26

“2000리 물길 20년 오가며 북한 뗏목꾼들 삶 담았죠”
중앙선데이 입력 2025.02.15 00:02서정민 기자 





‘압록강 뗏목꾼의 노래’ 사진전 여는 조천현

1997년부터 북중 접경지역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조천현 사진가. 그는 지금 압록강 뗏목과 뗏목꾼을 담은 사진전을 진행 중이다. 김상선 기자

거대한 강줄기를 따라 몸집이 큰 무언가가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다. 울퉁불퉁한 갈색 비늘로 온 몸을 덮은 물고기 같기도, 주둥이를 물속에 처박고 날개를 넓게 편 새 같기도 하다. 가까이서 보니 통나무들을 엮어 만든 수 십 척의 ‘뗏목’이다.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를 오가는 시대에 뗏목이라니!

2월 4일부터 3월 4일까지 인천 중구 공항서로에 위치한 스타파이브 갤러리에서 사진가 조천현의 사진전 ‘압록강 뗏목꾼의 노래’가 열리고 있다. 2004년 여름부터 2023년까지 압록강 2000리(약 800㎞) 물길을 따라 흐르는 뗏목과 뗏목꾼들의 삶을 기록한 50점의 사진과 영상을 전시 중이다.

백두고원 통나무로 만든 뗏목
“백두고원에서 겨우내 베어낸 통나무를 소발구에 실어서 강가로 옮겨오죠. 강의 얼음장이 풀리길 기다렸다가 봄이 되면 물에 불려 둥그렇게 만든 타리개(‘타래’의 북한말)로 나무와 나무를 묶고 그 위에 꺾쇠를 박아 뗏목을 만들어요. 나뭇가지에 물을 먹이면 질긴 끈이 되거든요. 그 위에 뗏목꾼 두 명이 올라타면 여행이 시작되죠. 다섯 군데 계벌장을 거치면서 계주를 하듯 뗏목꾼들이 바뀌죠. 빠르면 3~4시간, 날씨가 나쁘면 8시간. 뗏목군은 놀대(물길을 바꾸고 강의 깊이를 가늠하는 장대)로 방향을 잡으면서 앞으로 나가죠. 그래도 틈틈이 배낭에 싸온 도시락을 까먹고,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워요. 잎사귀 많이 달린 나뭇가지로 그늘을 만들어 쉬면서 노래도 부르고.”


압록강 상류인 동흥물동에서 출발한 뗏목은 중류인 운봉호에 닿는데, 계벌장을 거칠 때마다 뗏목이 덧붙여져 나중에는 거대한 나무섬이 된다. 사진 한 장 한 장마다 조천현 사진가의 설명은 바로 옆에서 주욱 지켜본 듯 상세하고 실감난다. 뗏목은 분명 북한에서 만든 것이고, 뗏목꾼도 북한 사람들이다. 사진 역시 압록강변 중국 국경 마을에서 찍은 것들인데 마치 오랫동안 뗏목꾼들과 함께 살아온 사람처럼 막힘이 없다.

상류에서 출발한 뗏목은 다섯 곳의 계벌장을 거치면서 수십 척씩 덧붙여져 마지막엔 마치 거대한 새의 날개처럼 보인다. [사진 조천현]

조 사진가는 1997년부터 북·중 접경지역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1년에 서너 번씩, 한 번 가면 월셋방을 얻어 한 달씩 지낸다. 중국 조선족 문학평론가 최산룡씨는 “1980년대 초기부터 수백 명의 한국 학자들과 문인, 예술인들을 만났지만 조천현처럼 중국에 200여 차례 다녀가고 수만 점의 사진을 찍은 사진가는 아직 보지 못했다”고 했다.

전라도 영암출신으로 동국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한 조 사진가는 탈북자들의 삶을 동영상으로 기록하는 VJ(비디오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K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북한은 지금’은 방송 대상도 받았다.

“KBS 일을 많이 했는데 계약직 PD였지만 직장인보다 월급이 더 많았어요. 영상미나 기술력이 뛰어났던 것은 아니고 처음에는 불량 청소년, 마약사범, 깡패들을 찍는 현장을 주로 뛰었는데 아무래도 이런 현장은 남들이 잘 안 하기도 하고, 내가 현장 파악이나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취재하는 게 좀 나았던 것 같아요. 대학 때부터 빈민봉사활동을 7~8년 하는 동안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투기꾼, 사기꾼 등도 많이 만났거든요. 내가 좀 험상궂게 생겨서 그런지(웃음) 내 앞에선 사람들이 술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더라고요.”

직업인으로서 탈북민과 조선족 영상을 담아 방송국에 납품하는 일을 때려치우고, 전업 작가가 된 것은 그들의 애틋한 사연이 뇌리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당시 탈북민들 중에는 돈 벌러 중국으로 넘어 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들이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애틋하고 예뻐 보이더라고요. 외아들인 나 하나 공부시켜 보겠다고 중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돈 벌러 갔던 누나들이 생각났죠. 지금도 북·중 접경지역에선 여전히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게 느껴져요. 체제나 이념과는 상관없이 ‘사람’을 보고 그들의 삶을 오래 끝까지 기록하자는 게 내 작업의 전부에요.”

어머니의 죽음도 큰 계기가 됐다. 촌부인 어머니는 외아들이 중국을 드나들기는 하지만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랐다.

“조카들 방학이라고 함께 서울에 올라오신 어머니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제 자취방에 혼자 남았죠. 어느 날, 아는 꽃제비(북한의 가출 어린이들을 이르는 말) 남매가 ‘춤추고 싶다’길래 연변의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신나게 춤을 추다가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죠. 잘 계시냐고, 아무래도 귀국이 며칠 늦어질 것 같다고. 그리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게 어머니와의 마지막이었어요.”

어머니는 아들의 자취방에서 홀로 세상을 떠나셨다. 소식 없는 모친이 궁금해 동생 집을 찾아온 누나가 어머니의 주검을 발견했다고 한다.

                                 놀대로 물살의 방향을 바꾸고 있는 압록강 뗏목꾼들. [사진 조천현]


“중국에 다시는 안 간다고 땅을 치며 결심했지만 어머니를 보내고 열흘도 못 가서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더라고요. 내가 엄마를 기다리게 해놓고, 그래서 결국 돌아가시게 만들었는데…. 중국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다시 돌아오겠다’ 약속했는데 그들을 또 기다리게 할 순 없었어요.  결국 다시 짐을 쌌죠.”

압록강변을 오가며 보낸 28년 간 중국 공안에 걸려 한 달씩 취조를 받은 것도 두 번이나 된다. 2004년에는 범죄자로 찍혀 5년 간 입국금지도 당했다. 4년 만에 입국금지가 풀리자 조 사진가는 또 한달음에 중국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은 묻죠.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곳에 가야 하냐고. 한마디로 정의 할 순 없어요. 기다림, 약속, 그리움, 고향, 사람, 국경선, 압록강의 사계…. 그저 그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찍고 싶어요. 2008년부터는 압록강변 너머 북한쪽 풍경과 사람들도 찍게 됐죠. 강가에 나와 빨래하는 아낙들, 물놀이 하는 아이들, 장마당 풍경 등등. 예나 지금이나 국경선 사람들에게선 좀 더 애틋한 민초의 삶이 느껴져요.”

조 사진가는 그 풍경들을 담아 사진집 『압록강 건너 사람들』, 사진 이야기 책 『압록강 아이들』, 탈북자의 실상을 담은 『탈북자』를 출간했다. 다음 출간 주제는 아마도 압록강변 마을의 지붕이 될 것 같다.

“조선족 사람들도, 탈북민도 내가 남한에서 왔다는 걸 몰라요.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연길에서 왔다고 대답하니까요. 한국에서 연길을 거쳐 온 것은 맞으니까.(웃음) 오래 보면서 내가 남한 사람인 걸 눈치 챈 사람도 있지만 서로 모르는 척 해요. 그들이나 나나 그게 중요하진 않으니까요.”

탈북민 다큐 PD서 전업 작가로
압록강변 마을들을 다닐 때도 조 사진가는 혼자 다닌다. 조선족 가이드를 잘못 만나면 공안에 신고를 하기 때문이다. 한족들도 한국 간첩이라고 신고할 때가 있다. “여러 차례 다닌 길이라 눈에도 익고, 가끔은 한족이 모는 택시를 타지만 그때도 말은 거의 안 해요. 손짓발짓으로 마을 산꼭대기에 데려다 달라고만 하죠.”

조 사진가가 마음 놓고 말을 건네는 사람들은 뗏목꾼들이다. 처음에는 산꼭대기에서 소리치듯 ‘어디까지 가세요?’ 목적지를 물었다. 다음에는 ‘어디서 왔냐’ ‘얼마나 가야 하냐’ 물었다.

“이쪽서 손을 흔들면 저쪽도 손을 흔들어요. 저쪽서 웃으면 나도 웃죠. 어느새 얼굴이 익은 뗏목꾼도 서너 명 있는데 가끔은 그들이 강변 기슭에 뗏목을 대고 담배 있냐고 물어요. 담배를 주면 한 대 피워 물고는 ‘독하다’ ‘싱겁다’ 평을 하죠.(웃음) 그렇게 맞담배를 피우며 그저 사는 이야기를 해요. 강쪽에서는 길이 보이니까 어떤 뗏목꾼은 ‘공안이 온다’며 피하라고 알려주기도 하죠.(웃음)”

조 사진가는 압록강 뗏목과 뗏목꾼을 찍으면서 참 많은 걸 배웠다고 한다.

“사라져가는 뗏목과 뗏목꾼의 일상을 기록하고 싶었고, 그 어떤 꾸밈이나 기교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저도 인생을 배웠죠. 고단해도 그들이 웃을 수 있는 건 흐름에 몸을 맡길 줄 알기 때문입니다. 뗏목은 강을 따라 앞으로 가야만 해요. 뗏목은 거꾸로 갈 수 없으니까요. 거슬러 오르지 않고 흐름에 맡기는 것, 흐르면 언젠가는 닿게 되는 것. 그게 인생 아닐까요.”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4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