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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옥죈 ‘너는 어느 편이냐’… 이젠 벗어나야”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2. 16. 17:14

“현대사 옥죈 ‘너는 어느 편이냐’… 이젠 벗어나야”

  • 문화일보
  • 입력 2024-12-10 11:40
  • 업데이트 2024-12-10 11:48

이근배 시인은 “인류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를 써야 한다는 게 평생의 화두였다”며 “죽기 전에 마음에 꼭 드는 시 한 편을 쓰고 싶지만. 그게 과연 가능할까 싶다”고 했다. ‘월간시인’ 제공



■ ‘64년 문단생활’ 육성 회고록 펴낸 이근배 시인

스승으로 모신 김동리·서정주
박정희를 박첨지로 부른 구상
김지하 숨겨준 이종찬 등 일화

“독립운동한 아버지가 평생 힘
지금도 소설로 신춘문예 꿈꿔”

그는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을 갖고 있다. 중앙일간지 신춘문예 7관왕. 1961년부터 1964년까지 시조, 동시, 시 분야에서 이룬 일이다. 그 사이에 문화공보부 신인예술상 3번을 받은 것까지 합하면 10관왕이다. 이후 그는 64년 동안 시단에서 활약하며 한국시인협회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지냈다. 올해 만 84세의 이근배 시인 이야기이다.

“소설을 써서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싶다는 꿈을 아직도 갖고 있어요. 90세 때쯤 이루면 괜찮지 않나요? 그러기 위해서 하루도 쓰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쓰는 열정은 60여 년 전 문청 때와 다름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가 이번에 육성 회고록을 펴냈다. 한국 문학계 어른으로서 문단 60년사를 증언해달라는 후학들의 권유를 따른 것이다. 장정판으로 560쪽에 달하는 책의 제목은 ‘독립유공자의 아들, 모국어의 혼불로 시를 피우다’(스타북스 발행).

9일 만난 그는 “내가 그동안 살아온 힘은 모두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그의 부친 이선준 선생은 일제 강점기 때 항일 투쟁으로 2차례 투옥됐고, 이로 인해 조부는 아들을 구명하기 위해 재산을 많이 써야 했다. 충남 당진의 조부 집에서 자랐던 이 시인은 10세 때 처음 부친 얼굴을 봤다고 한다. 그는 부친의 독립 활동이 대한민국 건국에 공헌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보내다가 뒤늦게 국가에 보훈을 신청했다.

“지난 2020년에 국가로부터 아버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됐어요. 저희 형제에게도 유공자 유족증이 왔지요. 제가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가 ‘애비를 꼭 닮았다’라고 꾸중하셨는데, 어찌 제가 목숨을 걸고 항일을 하신 아버지를 털끝만치라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아버지 덕분에 받은 영광이 크고 무겁기만 합니다.”

그는 스스로 ‘한글둥이’라고 칭한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국민학교에 입학한 덕분에 일본어를 배우지 않고 한글로 공부한 첫 세대라는 뜻이다.

그는 1953년 중학 2학년 때 아버지가 보던 일본책 여백에 펜촉으로 소설 습작을 시작했다. 6·25전쟁 통에 아버지가 행방불명되는 난리를 겪은 후였다. 고교 1년 때 소설가가 되기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가 조부의 호통으로 당진으로 내려와 상업고교에 진학했다. 고교 졸업 후 조부를 설득해 서라벌예술대학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는 학교에서 김동리 소설가와 서정주 시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명동 청동다방에서 만난 공초 오상순 시인을 사숙했다. “스승님들의 은혜를 어찌 갚겠습니까. 동리 선생님 영결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헌시를 읽고, 미당(서정주) 선생님 돌아가실 때도 시를 바쳤습니다. 공초숭모회를 맡아서 60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산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그의 회고록에는 조병화, 김광주, 김관식, 천상병, 이청준, 이어령, 김남조, 고은 등 한국 문학사를 빛낸 인물들과의 일화가 수북하게 담겨 있다. ‘기억력 천재’로 불리는 그는 평소에도 각 인물들의 생몰 연도와 활동 내용을 줄줄이 읊어 듣는 이의 감탄을 사곤 했다.

이번 책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대목은 정치, 이념 진영을 초월해 문학의 자리를 지킨 인물들에 대한 경의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박첨지’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웠으나 장관 등의 입각 제의는 사양했던 구상 시인, 군사 정권에 저항한 문인들과 함께 투쟁하면서도 우파 문인으로 공격받던 김동리에 대해 “나의 스승”이라며 죽는 날까지 제자의 도리를 지킨 이문구 소설가.

이 책에는 김지하 시인이 박정희 정권에 쫓겨 다닐 때 이종찬 당시 중앙정보부 과장이 잠시 숨겨줬다는 비화도 나온다. 백낙청 평론가가 김 시인의 한국작가회의 회장 취임을 반대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갈등이 더 커졌다는 주장도 있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이제 한국 문학은 새 길을 얻었습니다. 문학은 종교와 정치, 사상과 이념을 뛰어넘어 쓸 수 있어야 꽃을 피웁니다. ‘너는 어느 편이냐?’라고 묻는 압박이 우리 현대사를 옥죄었는데, 거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제가 백두산 천지를 근참하고 쓴 시 ‘대백두(大白頭)에 바친다’는 그런 정신으로 쓴 것입니다. 한국시인들은 이제 ‘좋은 시’를 넘어서 ‘위대한 시’를 지향해야 할 때입니다. 한국 역사를 직시하고 자기만의 문체로 우리 얼을 담는 작품으로 세계에 나아가야 합니다.”

장재선 전임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