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김영민 칼럼

나는 상상한다, 고로 살아간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0. 10. 18:09

나는 상상한다, 고로 살아간다
중앙일보
입력 2024.10.08 00:39

업데이트 2024.10.08 10:26



불행을 건너가는 법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어느 날 도로에 바위가 굴러 내려와 당신 차를 전복시킬 수 있다. 어느 날 음주운전 차량이 길가에 서 있는 당신을 덮칠 수 있다. 어느 날 광인이 소파에 앉아 있는 당신에게 다가와 도끼를 휘두를 수 있다. 그것이 이 세계다. 운이 좋으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고, 또 그러기를 바라지만, 운이 나쁘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것이 이 세계다. 이 사태에 원인이 없을까. 그럴 리가 있나. 원인은 있다. 다만 그 원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게다가 이리저리 중첩되고 굴절된 원인들이다. 따라서 그 모든 원인들과 그 원인들의 상호작용을 충분히 파악하기도 어렵고, 그 같은 사태를 깔끔히 미연에 방지하기도 어렵다. 물론 불행이 닥칠 가능성을 줄일 수는 있겠지. 그러나 모든 불행으로부터 해방된 천국을 건설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그래서 인간은 기도한다. 제발 불행이 자신을 피해가 달라고.

불행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인생의 불행을 견뎌내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예술하라, 창작하라, 상상하라

애니메이션 ‘룩백’의 주인공들


생각의 공화국

그러나 쿄모토에게 그 불행은 비껴가지 않았다. 그는 광인이 휘두르는 도끼를 정통으로 맞았다. 그러니까 불시에 다가온 불행을 정통으로 맞았다. 쿄모토는 전직(?) 은둔형 외톨이다. 그는 타인이 두려웠다. 왜 두려워하느냐고? 그것을 몰라서 묻나. 인간은 인간에게 잔혹할 수 있는 존재다. 얼마든지 비열해질 수 있는 존재다. 남을 해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 두려워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두려우면 집에 틀어박히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쿄모토는 집안에 틀어박혀 만화만 그렸다. 한장 두장 세장…, 한권 두권 세권… 스케치북이 거실을 가득 채울 때까지. 등교도 하지 않고 오로지 만화에 열중하는 그의 그림 솜씨는 뛰어나다. 명성(?)이 알려져 쿄모토는 교내 신문에 네컷만화를 싣게 된다.

쿄모토의 네컷만화를 보고 동급생 후지노는 깜짝 놀랐다. 지금껏 교내 네컷만화를 담당해 온 자신의 만화보다 뛰어나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작화(作畫)가. 동급생들이 웅성거린다. 쿄모토의 그림에 비하면 후지노의 그림은 아마추어 같다고. 아마도 후지노의 장기는 작화보다는 이야기 전개나 발상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쿄모토의 작화에 자극받은 후지노는 자신의 그림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분투한다. 홀로 분투한다. 그린다, 그리고, 또 그린다. 그러나 아무리 그려도 쿄모토의 그림이 자기 그림보다 낫다는 사실을 피해갈 수 없었다. 열등감을 정통으로 맞았다. 그래서 만화 그리기를 그만두고, 어울려 놀던 친구들에게 돌아간다. 만화의 세계여, 안녕.

졸업이 다가오자 선생님은 집에 틀어박혀 있는 쿄모토에게 졸업증서를 가져다주라고 후지노에게 부탁한다. 쿄모토의 집에 도착한 후지노는 누구 없냐고 묻는다. 사람을 불러도 응답이 없자 졸업장을 두고 나온다. 단, 은둔형 외톨이 세계대회를 소재로 즉석 네컷만화를 그려 놓고 나온다. 바람결에 문틈으로 들어온 그 네컷만화를 본 쿄모토는 방을 박차고 뛰어나와, 후지노를 불러세운다. “저는 당신의 팬이에요!” 어쩌면 그렇게 잘 그릴 수 있느냐는 탄사의 연속. “당신은 만화의 천재세요!” 자신이 열등감을 느끼던 쿄모토의 극찬에 고무된 후지노는 만화 그리기를 재개한다. 쿄모토는 배경 그림을 맡고, 후지노는 나머지를 맡는 듀오 만화가가 탄생하고, 이들은 혜성처럼 만화계에 등장한다.

갑자기 닥친 인생의 불행을 맞아


                                   영화 '룩백' 중 쿄모토(왼쪽)와 후지노의 모습. 메가박스중앙

아마 거기까지가 그 둘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거다. 어쩌다 한 번씩 인생을 비추는 맑은 햇살 같은 시간. 그러던 어느 날 쿄모토는 동굴같은 방으로부터 벗어나 미대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은걸.” 후지노의 어시스탄트이기를 그치고 그 자신 독립적인 예술가가 되기를 희망한다. (은둔형 외톨이에게) 그런 행보는 무리라고 만류하는 후지노를 뒤로 하고 쿄모토는 용기 있게 세상으로 나아간다. 은둔형 외톨이에게 그것은 다른 은하계로 가는 것처럼 엄청난 일이 아니었을까. 쿄모토는 그렇게 미대생이 된다. 한결 성숙해진 모습으로 그림에 열중하는 쿄모토는 몰라보게 멋져 보인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미대 건물로 광인이 걸어들어온다. 도끼를 들고 걸어 들어온다.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거주지 불명의 남성. 그는 인터넷에 올린 자기 그림을 화가들이 베꼈다고 생각해서 분노에 가득 차 있다. “나를 깔봤겠다!” 그는 영문을 모르는 쿄모토에게 다가와 도끼를 휘두른다.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광인의 탈을 쓰고 나타난 난폭한 불행의 모습. 그 역시 그 자신을 넘어선 어떤 힘의 희생자였으리라. 그를 미친놈이라고 호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 미친놈의 불행을 설명하고 방지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결국 그 곡절많은 불행은 그렇게 쿄모토를 습격했고 쿄모토는 그 불행으로부터 살아남지 못했다.

살아남은 후지노에게도 그 나름의 불행이 닥친다. 햇살 같은 인생의 시간을 상징하는 동료가 죽었으니까. 주인이 떠나버린 쿄모토의 방에는 후지노의 히트작 ‘샤크킥’의 전작이 빼곡히 꽂혀 있다. 상대를 그리워하던 그 둘은 결국 다시 만날 예정이 아니었을까. 충격과 회한을 정통으로 맞은 후지노는 상실감에 빠져 더 이상 만화를 그릴 수 없다. 내가 그 은둔형 외톨이 세계대회 네컷만화만 그리지만 않았어도 쿄모토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텐데! 죽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회한은 끝이 없다. 후지노의 출세작 ‘샤크킥’의 휴재 공고가 뜬다. 후지노는 슬픔 속으로 가라앉고 또 가라앉는다. 과연 후지노는 다시 만화를 그릴 수 있을까.

이처럼 느닷없이 닥쳐오는 인생의 불행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쁜 사람에게는 불행이 닥치고 좋은 사람에게는 행운이 오면 좋으련만. 그러면 착하게 살아 불행을 피할 수 있으련만. 어쩐 일인지 행불행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어쩌면 좋은가. 인과응보라고 생각하면 위안이 될까. 전생의 잘못 때문에 이 불행을 겪고, 전생의 선행 때문에 저 행운을 누린다고 생각하면 위안이 될까. 이번 생에 착하게 살았으니 다음 생에 보답 받으리라고 믿으면 위안이 될까, 이번 생의 악당은 내세에서라도 벌 받는다고 믿으면 위안이 될까. 쿄모토는 도끼에 찍혀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반드시 천국에 갔을 거라고 믿으면 위안이 될까.

상상하는 시간이 곧 구원이다

                           영화 '룩백'의 주인공 후지노가 만화 그리기에 열중하는 모습. 메가박스중앙

그렇게 믿는 것도 불행을 건너가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후시노의 방법은 아니다. 후시노의 방법은 상상하는 거다. 그는 상상하고 또 상상한다. 자신이 무술의 달인이 되어 광인을 격퇴했다고 상상한다. 그리하여 쿄모토가 그렇게 죽지 않아도 되었다고 상상한다. 두 사람이 듀오가 되어 햇살 같은 시간을 다시 한번 누렸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쿄모토와 후지노가 주인공인 이 애니메이션의 제목은 ‘룩백’이다. 이 제목은 영국 록 밴드 오아시스의 “Don’t look back in anger”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분노에 차서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면, 대체 어떻게 돌아보아야 하나? 이 ‘룩백’은 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룩백이란 이미 벌어진 불행을 다른 상상 속에서 돌아보는 일이다. 후지노는 쿄모토의 죽음 앞에서 그런 식으로 다른 것들을, 대안현실들을, 상상했다. 그 상상 속에서 후지노는 결국 불행을 이겨냈을까. 이겨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불행은 이미 당도했고, 사태를 실제로 되돌릴 방법 같은 것은 없으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이미 도착한 불행을 건너가야 한다. ‘룩백’의 마지막 장면은 후지노가 전처럼 작업대 앞에서 만화를 그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계속 살아가고 있다. 그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나. 창작을 통해서 살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룩백’은 어떻게 하여 작가가 불행을 딛고 창작을 계속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처음에 예술가는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 창작하고, 타인의 인정에 고무되어 창작하고, 먹고 살기 위해 창작하고, 그러다가 결국 불행으로 인해 창작을 못 하게 되기도 하지만, 상상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창작하기도 한다.

그러한 예술가는 사회가 원하는 미래 산업을 위해 상상하지 않는다. 국가가 원하는 창의와 융합을 위해 상상하지 않는다. 공모전에 당선되기 위해 상상하지 않는다. 지적 재산권을 얻기 위해 상상하지 않는다. 아니다, 그 역시 그러한 목적으로(도) 상상한다. 다만 그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상상한다. 불행으로 죽지 않기 위해 상상한다. 일단 살아있기 위해 상상한다.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믿기 위해 상상한다. 그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아도 좋다. 상상하는 시간이 구원이니까. 상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구원이니까.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는 영화를 만들고 극장에 가고, 책을 쓰고 책을 읽고, 음악을 작곡하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 전시에 가고, 만화를 그리고 만화를 읽는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2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