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있지 않은 것을 기대하는 ‘실패자’의 운명
중앙일보
입력 2024.12.03 00:37
소설 『스토너』 - 어떤 인문학자의 초상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논문을 양산하기 위해 부심하는 일, 연구비 수주에 전전긍긍하는 일, 대학 랭킹에 민감한 일, 행정 보직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일, 학술기관 회원이 되어 보조금을 타는 일, 정계에 진출하는 일, (준)연예인이 되는 일. 이런 일들이 그 자체로 나쁜 일은 아니지만, 인문학 교수가 하는 특징적인 일은 아니다. 당신이 경험한 한국의 인문학 교수들은 주로 저런 일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고? 혹시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어떤 유형의 인문학자를 만나보지 못한 것이다.
세상과 불화하며 성공·인기 무심
사라진 전형적 인문학자상 조명
인문학 핵심은 삶에 대한 에로스
그 에로스 다시 꽃피울 수 있을까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알에이치코리아 출판·사진)는 20세기 미국 대학사회에서 존재했던 꽤 전형적인 인문학자를 그린다. 주인공 스토너는 내가 미국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일군의 인문학자들과 상당히 닮아 있다. 특정 시기 미국 인문학중심대학에서자리잡고 있던 그들은 스토너처럼 논문 대량 생산과 행정 보직과 조직적 명예와 정치적 성공과 대중적 인기에 대체로 무심했다. 적어도 그런 야심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스토너처럼 괴팍했고, 스토너처럼 세상과 불화했으며, 스토너처럼 교육에 열정적이었다. 당신이 이런 부류의 인문학자를 만나보지 못했다면, 『스토너』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만나보기 바란다.
존 윌리엄스 소설이 그려낸 인문학자
스토너에게 인문학자가 된다는 것은 부모와 다른 인생을 산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모는 빈농이었다. “노동으로 인해 몸이 구부정해진 아버지는 아무 희망 없는 눈으로 식구들을 근근이 먹여 살리는 척박한 땅을 지긋이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는 삶을 인내했다. 마치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 내야 하는 긴 한 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인내와 동의어로서의 삶. 그의 부모는 그런 삶을 살아내고 어느날 죽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즐거움이 없는 노동에 평생을 바쳤다. 그들의 의지는 꺾이고, 머리는 멍해졌다. 이제 두 분은 평생을 바친 땅속에 누워 있었다.…그렇게 해서 두 분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을 바쳤던 이 고집스러운 땅의 무의미한 일부가 될 것이다.”
가난하고 과묵했던 스토너의 부모는 자식이 자기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스토너를 대학에 보냈다. 자신들보다 낫지만 비슷한 길을 걸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자식을 농대에 보냈다. 그러나 스토너의 대학 진학은 부모와 결별을 의미하게 되었다. 스토너는 농대 수업뿐 아니라, 영문학 수업을 듣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수업은 스토너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만약 한국의 어느 대학에서처럼 셰익스피어의 생몰연대를 시험문제로 냈다면 그의 삶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영문학 개론 강의를 다른 강의들처럼 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저자들의 이름과 작품, 연대와 영향력 등을 모두 외웠는데도 그는 첫 번째 시험에서 거의 낙제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그 괴팍한 담당 교수는 작품 연대나 작가의 생몰연대를 묻는 대신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이 소네트의 의미가 뭐지?”
그는 스토너에게 다가와 재차 물었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이 질문을 받은 스토너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운명처럼 문학작품을 읽는 일에 매료되었다. 해가 갈수록 달라지는 스토너의 글과 말을 본 교수가 마침내 그에게 대학원을 권했다. 스토너가 두려워하자 교수가 말했다. “모르겠나, 스토너 군?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어?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
이런 부류의 인문학자들은 자신을 연구자로 여긴다기보다는 교육자로 여긴다. 한시적인 가치밖에 없는 연구논문, 몇 사람이나 읽을지 알 수 없는 연구논문의 양산을 경멸한다. 실적을 쌓기 위한 연구비 수주에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학생들이 위대한 텍스트를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자신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들을 연구자라기보다는 교육자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을 하는 이유, ‘사랑’
인문학에 매료된 스토너는 왜 자신이 가업을 잇지 않고 인문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어하는지 스스로 납득할 수 없다. 오늘날까지 유행하는 그 많은 인문학의 명분들은 그의 동기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사회의 정신적 인프라를 위해서 인문학을 공부한다? 그럴 리가. 학문의 다양성을 위해서 공부한다? 그럴 리가. 그런 명분을 대기에는 스토너와 그의 친구들은 충분히 냉소적(?)이다. “군대에 가더라도, 제발 부탁이니 하느님이나 조국이나 친애하는 미주리 대학을 위해 가지는 말게. 자네 자신을 위해서 가는 거야.”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국가나 하느님이나 대학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문학을 왜 한단 말인가. 그 괴팍한 담당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 군.”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아주 간단한 이유지.”
사랑이라니, 대체 무엇을 사랑한단 말인가? 맛있는 음식을? 유혹적인 육체를? 아니다. “문학, 언어, 정밀하고 기묘하며 뜻밖의 조합을 이룬 글 속에서 그 무엇보다 검고 그 무엇보다 차가운 글자를 통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과 정신의 신비”를 사랑한다. 이 사랑은 식욕이나 성욕과는 다르다. 식욕이나 성욕은 그에 탐닉할 때조차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욕망이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본능이다. 스토너 같은 유형의 학자들이 보기에, 인문학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도 아니고 사회공헌 수단도 아니다. 그들은 인문학이 수단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공부를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는 모습”이 바로 그들의 모습이다. 그들에게도 공부는 고된 노동이지만, 즐거움이 있는 노동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자들이 모여 있는 대학이란 어떤 곳인가? 미래의 먹거리를 탐구하는 곳인가? 이른바 발전을 위한 창의와 융합이 일어나는 곳인가? 국가를 선도해갈 인재를 기르는 곳인가? 천만에. 그런 말을 믿기에는 스토너와 그 친구들은 충분히 냉소적(?)이다. “대학은 보호시설이야. 아니, 요즘은 그걸 뭐라고 하더라? 요양소, 환자, 노인, 불평분자, 그 밖의 무능력자들을 위한 곳”이다. 그들 스스로 생각하기에 인문학을 하는 자신들은 “처음부터 실패자로 만들어졌다.” 왜 실패자인가? “항상 세상에게 실제로는 있지 않은 것, 세상이 원한 적 없는 것을 기대하니까.” 그러니 세상에 그들을 위한 자리는 희소하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기이한 자부심이 있다. “우리는 남을 해치지도 않고,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지.”
사라져가는 ‘스토너’들
이것이야말로 “꿀 빠는 인생” 아니냐고? 꼭 그렇지는 않다. 죽음을 앞둔 스토너에게 딸이 말했다. “아버지가 가엾어요. 편안한 삶이 아니었잖아요.” 스토너가 대답했다. “그랬지. 하지만 나도 편안한 삶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인문학자는 대개 까칠하고 비타협적이다. 그들은 무골호인이 아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을 싫어한다. 그러니 삶이 편했겠는가. 그들은 세상과 불화하고, 세상은 전쟁으로 불타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뭔가가 죽어버린다네. 사람이 전쟁을 많이 겪고 나면 남는 건 짐승 같은 성질뿐이야.” 스토너가 살던 시대, 한국에도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이후에도 전쟁 같은 삶이 계속되었다.
세상과의 지속적인 불화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을 희구한다. 그러나 우정은 쉽지 않다. 세월이 흐르면서 “젊은 시절의 어색함과 서투름은 아직 남아 있는 반면, 어쩌면 우정을 쌓는 데 도움이 되었을 솔직함과 열정은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기적적으로 생긴 소수의 친구는 때 이른 죽음을 맞거나 속물이 되어간다. 우정을 얻는 데 실패했다면, 평생 추구했던 지혜는 얻었는가.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무지라도 발견했으니, 그는 역설적으로나마 어떤 지혜에 도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지혜는 자본주의 사회를 질주하는 이들이 원하는 종류의 지혜는 아니다.
인문학의 쇠락이나 대학의 위기는 이제 거의 전 세계적 현상이다. 기존 인문학의 쇠락이란 삶과 텍스트에 대한 에로스가 사라져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기존 대학의 위기란 그 에로스에 자신을 맡겼던 스토너 같은 인간이 깃들 곳이 사라져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미래의 먹거리를 탐구하고, 창의와 융합을 진흥하고, 국가를 선도할 인재를 기르고 싶어 안달하는 한국에서 점점 더 스토너 같은 인문학자는 대학에 발붙이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것이 꼭 스토너 같은 인문학자들이 한국에 한때 집단적으로 존재했다는 뜻은 아니다. 어쩌면 한국에 충분히 존재한 적이 없던 것을 옹호하고 지지하고 비판하고 대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6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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