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읽기는 우리 정신의 임사체험이다
중앙일보
입력 2024.06.18 00:34
업데이트 2024.06.18 01:03
고전이란 무엇인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고전을 읽는 일은 정신의 작은 죽음이다. 고전은 우리 정신의 그릇을 뽀갠다. 마치 고래와 마주하는 것처럼 고전을 읽는 것은 거대한 존재를 마주하는 경험이다. 그 거대한 존재를 자신의 좁디좁은 정신의 그릇에 담으려다 보면 그릇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한다. 고전을 읽은 정신은 그렇게 상처 입는다. 그 상처로 인해 정신의 그릇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면, 광인이 되는 것이요, 그 부서진 그릇을 긴츠기(金継ぎ, 깨지거나 금이 간 그릇을 칠기를 활용해서 복원하는 기법)처럼 엮어 다시 그릇 모양을 만들어 내면, 전보다 큰 정신의 그릇이 되는 것이다. 고전을 읽고 난 뒤의 정신은 상처투성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전보다 더 확대된 정신이다.
고전 읽으며 느끼는 “이게 뭐야!”
좁은 정신의 그릇을 산산히 쪼개
그 조각으로 큰 그릇 만드는 과정
정신의 바다서 진리를 만나는 일
소일도 아닌, 정보 찾기도 아닌 독서
따라서 고전 읽기는 단지 정보를 위한 독서, 위로를 위한 독서, 공감을 위한 독서, 소일하기 위한 독서와 다르다. 정보를 얻기 위해 글을 읽을 때, 혹은 위로나 공감을 찾아 글을 읽을 때, 혹은 소일하기 위해 읽을 때 사람들은 각자 정신의 그릇에 안전하게 담아 둘 예쁜 혹은 유용한 물건을 찾는 중이다. 그러나 고전 읽기는 다르다. 고전은 그릇에 담을 것을 찾으려고 읽는 책이 아니라, 그릇을 뽀개기 위해 읽는 책이다. 그릇이 뽀개지고 나야 비로소 새로운 그릇을 만들 수 있다. 그 새로운 그릇은 전과 완전히 다른 새 그릇이 아니라 상처를 통해 더 넓어진 옛 그릇이다. 뽀개진 그릇, 확장된 그릇은 실로 상처투성이다. 긴츠키로 복원한 그릇에 상처가 새겨져 있듯, 고전을 읽고 난 마음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다. 그 상처를 아물게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마음이, 새로운 그릇이 탄생한다. 이처럼 고전을 읽는 일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고 가슴 뛰는 일이기도 하고 불편한 일이기도 하다. 마치 고래와 같이 거대한 진리가 헤엄치고 있다는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선원의 일처럼.
그 정신의 바다에서 만나는 진리는 반갑기만 한 것일까? 바다로 나아간다는 것은 친숙한 일상이 없는 곳으로 나아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두렵지 않은가, 친숙한 일상이 없다는 것은. 일상에는 따뜻한 잠자리, 가족과의 수다, 잘 데워진 음식, 안식을 위한 편의시설이 있다. 그러나 그 바다는 인간의 편의를 위한 공간이 아니다. 인간에게 무심한 존재, 인간에게 공포를 주는 존재다. 그 바다에서 죽을 수 있다. 왜 자청해서 정신의 죽음을 감수하려 드는가? 목숨보다 의미 있는 것이 있다고 보기에 죽음을 감수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자극과 불안과 혼란 속에서 삶을 이어가느니 죽음을 감수하며 진리를 찾아 기꺼이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다.
더 큰 존재의 파편이라는 느낌
그러나 진리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 있다 한들, 이 한심한 인간이 그 진리를 포착할 수 있을까. 설령 진리를 만나지 못해도 얻는 것은 있다. 정신의 임사(臨死) 체험으로 말미암아 그 이후의 생이 조금이나마 달라지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한 뒤에 새롭게 펼쳐지는 삶이 관건이라면, 실제 죽느냐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마주하는 것, 죽음을 의식하는 것,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면, 자기보다 큰 것을 체험하게 되고, 그 체험 속에서 자신은 자신보다 더 크고 나은 존재의 흔적 혹은 파편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 느낌이야말로 고전을 읽는 이유다.
고전 읽기를 통해 조잡한 정신이 죽는 체험을 한다고 한들, 인간이 곧 위대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위대할 수 있겠나. 물론 인간은 가끔 기특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멋진 가사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숭고한 감정을 품기도 하지만, 인간은 대체로 비열하다. 그러나 비열하지 않은 상태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상상은 엄청난 상대를 인정하고 마주할 때만 가능하다. 자기보다 허약한 상대를 짓밟음으로써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우월한 상대를 헐뜯음으로써 존귀해지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상대를 마주함으로써 인간은 간신히 잠시나마 비열함을 벗어난다.
위대함을 상상할 수 있다고 해서, 아무 대가 없이 위대함을 운운했다가는 감상주의자가 될 뿐이다. 모름지기 높은 곳은 더러운 것을 거쳐야, 험난함을 거쳐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법. 그 누구도 손쉽게 그냥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밑에서부터 쉽지 않은 경로를 거쳐서 비로소 도달하는 위대함이 바로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서 말하는 “민주적 위대함”이다. 그것은 민주적이라는 구호 아래 그 어떤 탁월함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나, 위대함이라는 허울 하에 삶의 밑바탕을 깔보는 태도와 다르다. 비천함과 위대함을 결합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 바로 민주적 위대함이다.
『모비 딕』에 나오는 ‘민주적 위대함’
그 모든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엿볼 수 있는 세상이란 어떤 모습일까. 그 상태를 그저 나른하게 선한 세상 혹은 인간적인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 세상은 불온한 소설을 썼다고 작가를 감옥에 보내는 세상이 아니다. 데스메탈 음반을 발매했다고 악마 취급을 하는 세상이 아니다. 자신의 정의관에 맞지 않는다고 남을 악마화하는 세상이 아니다. 미지근하게 옳은 말들이 상처 입은 기분을 핥아주는 안이한 세상이 아니다.
그 세상은 통상적인 선악의 범주를 넘어서 있을지 모른다. 그 상태를 꼭 선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입에 발린 선함이 아니라, 강력한 악과의 대결 속에서 단련된 선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 상태를 꼭 악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약자를 괴롭히는 조잡한 악이 아니라, 매혹적인 아름다움마저 구현하는 강렬한 악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니 궁극의 상태는 그저 장엄하고 아름다운 상태. 진리라는 이름의 거대한 고래가 물 밖으로 나와 몸을 비틀 때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 거기서 악을 볼 사람은 악을 보고, 선을 볼 사람은 선을 볼 뿐.
살다 보면 자기 자신의 비열함에 지쳐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올 것이다. 어디론가 훌쩍 도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올 것이다. 삶 전체와 과감하게 직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올 것이다. 새삼 뭔지 모를 자유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올 것이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올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인생을 에워싼 만리장성과 마주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보자. 그 벽을 넘어서면 무엇이 있나? 그 벽을 넘어선 곳에는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 만리장성보다 더 큰 공허가 기다릴지도 모른다. 비열함의 구속을 벗어나는 자유가 그저 달콤하기만 할 리가 있겠는가.
부서진 자아의 파편이 낭자한 곳
그곳이 비록 텅 빈 곳이라고 할지라도 협애한 자신을 넘어선 보다 넓은 자리, 보다 전체에 가까운 자리이기는 할 것이다. 그곳은 누군가 찾아주기를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던 자아의 거실이 아니다. 차라리 그곳은 부서진 자아의 파편이 낭자한 곳이다. 그러니 그곳은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 그러니 그곳은 얼마나 차가운 곳인가. 그러나 달착지근한 말들이 횡행하는 지금 여기보다는 덜 비열한 곳, 그리하여 더 자유로운 곳일 것이다.
『모비 딕』에서는 그러한 자유를 고요히 견디는 모습을 북극에 떠 있는 고래에 비유했다. “인간만큼이나 몸의 온기가 필수적인 이 거대한 괴물이 북극해에 입술까지 담근 채 평생을 편안히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모비 딕』, 문학동네, 53쪽) 인간이든 고래든 체온을 유지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데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은 각종 난방을 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난로란 부자들이 편안함을 방해하기 위해 사들이는 멍청한 사치품 중 하나다. 이런 종류의 감미로움을 만끽하려면 자신과 자신의 아늑함 그리고 차가운 바깥 공기 사이에 담요 한장 말고는 그 무엇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북극의 수정 같은 얼음 한가운데에서도 한 점 따스한 불꽃처럼 누워 있을 수 있다.”(125쪽)
도서관에서 경험하는 ‘작은 죽음’
수정 같은 얼음 속에서 불꽃처럼 누워 있는 일만큼 매혹적인 일이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라면 이 세상이 지옥이라고 해도 이 세상을 굳이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대도 얼음 사이에서 온기를 유지하라. 그대도 이 세상에 살되 그곳에 속하진 마라…. 그 어떤 계절에도 그대만의 체온을 유지하라.”(53쪽) 이 고래는 이 세상에서 살되 자기 고유의 삶을 살다가는 존재를 닮았다.
고전을 많이 읽으면 곧 이처럼 매혹적인 고래, 극한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내적 역량만으로 스스로를 지키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고전 읽기는 삶과 세상을 읽기 위한 시작일 뿐이다. 영화의 훌륭한 점에 대해 묻자, 일본의 영화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이게 뭐야!’ 같은 순간을 만나는 것.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안전하게 접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고전도 마찬가지다. 차가운 북극해가 아니라 안온한 도서관에서 안전하게 고전을 읽는 마음은 소스라친다. “이게 뭐야!” 고전을 읽는 일은 정신의 아주 작은 죽음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7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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