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처럼 고집 센 상남자, 그가 그린 웅대한 한국의 山
[아무튼, 주말]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근대 한국화단의 큰 봉우리
금강산의 화가 소정 변관식
한국화가 소정(小亭) 변관식의 별명은 ‘변고집’이었다. 하도 고집이 세서 그랬다. 일화는 수없이 많다. 1930년대 강원도 고성 석왕사에 있다가 마을로 내려가 술을 마시던 중, 주막 옆 역에서 기차가 들어오는 걸 보더니 갑자기 경성에 가고 싶어졌단다. 막 출발하는 경성행 열차를 잡아타려니 일본 순사가 뜯어말렸고, 힘 세기로 유명한 변관식은 그 순사를 때려눕혔다. 경성 태화관에서 열린 화가 모임에서 총독부 일본인 고위 관료가 기생을 농락하며 장난질을 치자 혼쭐내고 식탁을 뒤엎어 버린 일도 있다. 1950년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가 ‘나눠 먹기’식으로 운영된다며 신문에 폭로한 일, 국전 심사위원 간담회에서 제도권 화가의 젠체하는 언사가 싫다고 냉면 그릇을 얼굴에 집어던진 일….
외고집에 비타협적 성격으로 변관식은 손해 보는 일이 많았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해 방랑했고, 번듯한 대학교수 자리도 얻지 못한 채 평생 야인(野人)으로 살았다. 그런 변관식이 말년에 이르러 한국 근대기를 대표하는 한국화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청전 이상범과 더불어 근대 한국 화단의 양대 봉우리로 간주된다. 청전과 소정은 조선시대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에 각각 비유되기도 한다.
◇방랑의 기원
변관식은 1899년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한의사로 경성에서 활동하다가 낙향했고, 모친은 이름난 개화기 화원(畫員) 조석진(1853~1920)의 딸이었다. 꽤 성공한 중인(中人) 가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변관식은 옹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열한 살에 외할아버지 조석진을 따라가 서울에서 자랐다. 조기 유학이었다. 서울 어의동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했는데, 일본인 교장과 선생이 조석진을 찾아와 변관식을 일본으로 보내 그림 공부를 시켜보라고 했다. 그의 그림 재주는 어려서부터 눈에 띄었다.
안중식과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미술 교육기관 서화미술회를 개설한 조석진이었지만, 그의 손자가 ‘환쟁이’가 되는 것을 처음에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면 회초리를 들었다고. 그러나 손자의 재능과 굳센 의지를 확인하고는, 죽기 몇 해 전부터 변관식에게 몸소 그림을 가르쳤다.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내 손자가 천재라네”라고 자랑하곤 했다.
그러나 굴곡진 운명을 타고난 걸까? 변관식의 행운은 20대 초반에 끝난 것처럼 보였다. 옹진의 친부와 친모가 연달아 사망하고, 외조부이자 스승인 조석진도 1920년 숨을 거뒀다. 변관식이 사랑한 첫 아내(현씨) 또한 결혼 3년 만에 딸 하나를 남기고 별세했다. 연이어 재혼한 아내와는 금방 헤어졌다. 불행이 겹치면서 변관식은 마음 둘 곳을 잃었다. 그것이 변관식이 “영원한 여인과 절승(絶勝)을 찾아” 홀로 방랑을 일삼은 내면적 이유였을 것이다.
◇방랑이라 쓰고, 국토 순례라 읽는다
그의 방랑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기 싫었던 것이다. 원래 조선 서화가들이 힘을 모아 총독부의 조선미술전람회와는 차별되는 조선인 미술 단체(서화협회)를 조직하고 전시회를 열었으나 결국 1936년 자진 해체하고 말았다. 이 시기는 민족주의적 문화 활동까지 탄압 대상이었다. 게다가 ‘태화관 사건’으로 일본인 고위 관료를 골탕 먹인 일도 있었으니 변관식은 몸을 피해야 했다. 이듬해부터 해방될 때까지 변관식은 경성에는 가끔 들를 뿐이었다. 대신 금강산의 여러 절을 전전하며 산의 구석구석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며 관찰했고, 광주·전주·진주 등 남쪽의 ‘예향(藝鄕)’을 찾아다녔다. 잠만 재워주고 밥만 먹여주면, 숙식비 대신 그림을 그려줬다.
경성의 화가들은 총독부의 강압에 못 이겨 태평양전쟁을 옹호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한때 3·1운동에 가담했고, 비밀리에 독립 자금을 댄 화가들조차 이 상황을 피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변관식은 심산유곡(深山幽谷)을 떠돌며 ‘국토 순례’를 한 것이다. 각 지역의 훌륭한 인물도 많이 만났다. 진주의 청남 오제봉, 사천의 효당 최범술, 광주의 의재 허백련, 전주의 유당 김희순 등이 그 위인들이었다. 나중에 변관식은 화가가 기술만 배울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강하게 역설했다. 여기저기 방황하며 놀고 있는 것같이 보여도, 실제로 그는 이런 위인들 속에서 ‘시대정신’을 배우고 다졌으리라 짐작된다.
◇왜 금강산인가?
그가 생각한 시대정신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표현하면 ‘금강’이었다. 금강, 즉 다이아몬드는 단단하고 빛나고 부서지지 않는 정신을 상징한다. 우리 민족은 비록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해방 후에도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강인한 정신력을 지녔다. 그 강건한 정신을 한 실체로 맞닥뜨릴 수 있는 장소가 있으니, 바로 ‘금강산’이다. 변관식이 일평생 금강산을 그린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금강산은 실로 조선인의 기상을 상징하는 산이다. 최남선은 ‘금강예찬’(1928)에서 금강산을 “조선 정신의 표치(標幟)”라고 썼다. 조선의 정신이 바로 금강산과 같은 모양으로, 강건하고 웅혼하다는 의미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화가가 금강산을 순례하고, 학생들이 앞다퉈 수학여행을 떠난 것은 바로 금강산이라는 정신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변관식에게 금강산은 제2의 고향과 다름없었다. 훗날 변관식은 이렇게 썼다. “내 머리와 가슴속엔 금강산의 기억과 감격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나는 금강산의 어느 한 부분을 그릴 때마다 그곳 산세는 물론 바위의 생김생김과 물이 흐르는 방향과 물살의 세기까지 기억하며 그린다.”
◇마지막 불꽃
처음에 변관식의 그림은 별로 인기가 없었다. 먹을 쌓고 또 쌓는 일명 ‘적묵법(積墨法)’을 구사했는데, 나중에는 그림이 새까맣게 돼버렸다. 청전 이상범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그림에 비해, 소정 변관식의 작품은 삐죽삐죽 모난 바윗돌이 치솟아 올라 불안해 보였다. 1960년대 반도화랑에 청전과 소정의 그림을 같이 걸어놓으면 청전 작품만 팔렸다고 한다. 소정의 친구 이당 김은호가 작품이 너무 새까매서 그러니 바꿔보라고 하자, 소정은 고집스레 말했다. “나 죽으면 봐.”
그러나 변관식이 죽기 전에 그의 평판은 드라마틱하게 달라졌다. 1970년대에 접어들자, 한국화 붐이 일기 시작했다. 1970년 현대화랑이 인사동에 문을 열면서 시장 판도도 바뀌었다. 한때 반도화랑 직원으로 일한 박명자 회장은 화가 이대원의 권유로 변관식에게 약 3년간 그림을 배운 인연이 있었다. 변관식에게 제대로 된 개인전을 열어줘야겠다고 마음먹은 박 회장은, 소정의 아내와 의논해 변관식을 정릉의 절 대성사에 가두다시피 하고 그림만 그리게 했다. 약 6개월간 변관식은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1974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소정 개인전은 대성공을 거뒀다. 완판이었다. 생애 처음 거금을 손에 넣은 화가는 양옥을 하나 사서 대작을 그릴 아틀리에를 마련했으나, 이사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타계했다. 1976년, 향년 77세였다.
변관식의 마지막 개인전에 나온 작품이 금강산 ‘단발령’이다. 겸재 정선은 단발령에 올라 일만이천 봉우리의 금강산 전경을 그렸다면, 변관식은 더 넓고 높은 조망권을 확보했다. 그는 단발령과 그 너머 비로봉을 모두 한 시야 아래 뒀다. 뾰족한 금강산의 봉우리마저 우주의 자잘한 일부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 초월적이고 초탈한 느낌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모두가 금강이라네”
금강산을 그릴 때도, 진주·전주·담양 등 산천 구석구석의 절경을 그릴 때도, 변관식이 말하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였다. 우리 국토 예찬이었다. 무릉도원이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주변 곳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일. 죽기 직전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 할멈은 이따금 내 그림을 보고 있다가 ‘당신 그림은 모두 금강이오’ 하건만 나는 정녕 금강 그것만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정릉 골짜기를 흘러가는 물도 사랑스럽고 인수봉의 밋밋한 맨얼굴도 오히려 어여쁘다. 이 나라 삼천리에 금강 아닌 곳이 어디며, 일만 강줄기 그 모두가 금강에서 비롯하지 않음이 없지 않으냐? 먹을 갈아 놓고 내 늙은 눈을 감는다. 붓끝에 와 닿는 먹의 감촉이 가볍고 서늘하니 내 마음 또한 그윽이 쾌적하다. ‘이번에 당신 그림은 무어요?’ 우리 할멈이 물어오면 나는 그저 ‘금강이네’라고만 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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