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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의 맛 (해장국편)

들어가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 26. 15:15

들어가며

음식飮食은 문화다. 하나의 음식에는 셀 수도 없이 다양한 것들이 들어가 있다. 그중에는 재료와 시간, 만든 이의 정성이 있고 오랜 시간 동안 정제되어 온 다양한 비법이 들어가 있다. 가문에서 내려오는 비전祕傳의 조리법도 있고 현대 과학기술의 정수가 녹아든 조미료도 있다. 또한 음식에는 시간과 공간도 있다. 잔치 음식, 명절 음식, 제사 음식처럼 특정한 때를 상징하는 음식도 있고 지역마다 집안마다 즐겨먹는 음식이 다르듯 공간을 대표하는 음식도 있다. 이러한 음식 여럿이 모여 하나의 상차림에서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는 모습은 과장 좀 보태서 작은 우주와 다름없다.

음식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만든 물건, 또는 마시고 먹는 행위 그 자체를 일컫는다. 음식이라는 단어 속에서 우리는 여러 의미를 엿볼 수 있는데 그 첫째는 바로 사람이다. 동물이 살아가기 위해서 먹어야 할 것은 먹이라고 불리지 음식이라 지칭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음식은 사람이 먹는 것이고, 먹기 편하게 맛이나 형태, 질감을 가공한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음식의 탄생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같은 재료라도 다양한 조리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음식에는 사람을 향한 마음이 담겨있다. 아픈 이를 위해 더 부드럽게 하거나, 오래도록 먹을 수 있도록 건조시키기도 한다. 재료가 가지고 있는 독기를 제거하기 위해 찌거나 삶고 다른 재료와의 궁합도 생각한다. 이 모두 먹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마시고 먹는행위이다. 마시는 것이나 먹는 것, 모두 입을 통해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이지만 그 느낌은 꽤나 다르다. 마시는 것은 거의 어디서나 가능한 간편한 섭취 방법이지만 뭔가 포만감 없이 허전한 느낌이다. 먹는 것은 무언가 씹어 삼켜 배를 채우는 것이지만 마실 것 없이는 생각만 해도 퍽퍽하다. 마시고 먹는 것은 하나의 짝으로 좋은 요리에는 그에 걸맞는 좋은 음료가 생각나는 법이다. 그리고 이 구성 속에서 행위는 틀을 갖춘다. 흔히 말하는 밥상머리 예절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같이 음식을 드는 사람을 배려하고 예의를 지키는 것은 동일하다. 숟가락이나 젓가락, 포크와 나이프 등 도구를 쓰는 방법, 요리와 음료마다 먹는 법이 있기도 하고 심지어는 대화하는 법이나 마무리 예절이 있는 경우도 있다. ‘마시고 먹는행위를 잘 하는 것은 얼마나 교양있는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쯤되면 음식은 문화의 정수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볼 때 어느 지역의 문화를 향유하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그 지역의 음식을 먹는 것이다. 거창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우리가 어디론가 여행을 가려고 계획을 세울 때면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맛집조사다. 12일 여행을 기준으로 기껏해야 3~4회 주어지는 끼니의 기회는 단 한 차례로 양보할 수 없는 행복 향유의 창구다. 좋은 음식을 만나면 그 지역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질뿐더러 그 음식을 먹기 위해 짧지 않은 길을 다시 오르기도 한다. 아무리 하루 생활권이 확대되고 전국의 유명 맛집이 프랜차이즈화되어 쉽게 만날 수 있게 되었어도 그곳에서 먹는 그 느낌까지 살아나는 경우는 희소하다.

정리하면 음식에 담겨있는 시간성과 공간성 그리고 먹는 행위까지 모두 그 지역의 고유한 문화이다. 때문에 우리 지역을 소개하는 일이 맛집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같은 음식이더라도 지역에 자리잡은 그 순간부터 음식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맛이 변하고 제공하는 방식이 변하고 곁들이는 음료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지역의 음식이 된다. 그 식당만의 정체성이자 지역의 자랑이 되는 것이다.

이 때문일까. 우리 동네의 맛집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는 것은 그 지역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와 유사하게 취급되곤 한다. 그 지역에서 오래도록 지역주민과 함께해 온 식당에는 지역의 삶이 묻어난다. 우리 지역에 남아있는 여러 맛을 소개하는 도봉의 맛은 맛을 매개로 지역의 삶을 조명하는 시도다. 지난 해에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인 도봉의 맛: 사찰음식편은 도봉산에 자리하고 있는 여러 사찰에서 계승되어 온 사찰음식과 그 속에 담겨있는 정신을 다뤘다. 그리고 올해 속세로 내려온 도봉의 맛이 주목한 것은 바로 해장음식이다.

좋은 자리에는 좋은 술, 그 다음에는?

 

술은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주요한 삶의 장면에는 술이 있기 마련이다. 기쁜 날에는 축배祝杯를 들고 슬프고 힘든 날에는 고배苦杯를 들 듯 인간의 희노애락은 술과 함께 했다. 전통사회 인간이 거쳐가는 큰 예식인 관혼상제冠婚喪祭에도 술은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일상 속에서도 줄곧 존재감을 드러낸다. 굳은 농사일을 달래는 막걸리 한 잔의 새참과 시끌벅적한 주막酒幕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옛날의 모습이다. 이러한 풍경에는 동서양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어느 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럽의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을 맥주로 달랬다고 하고 허름한 선술집에서 잔을 부딪치는 풍경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묘사되곤 한다.

술은 전 세계 어디서도 찾을 수 있는 음료로 그 지역성 또한 특별하다. 당장 생각나는 종류만도 서양의 와인, 위스키, 맥주, 브랜디, 보드카가 있고 중국의 황주, 백주 그리고 일본의 사케 등이 있다. 우리나라 역시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술이 있다. 막걸리, 동동주의 탁주부터 청주, 소주같은 맑은 술도 있다. 제사에는 술이 빠질 수 없었던 만큼 유교국가였던 조선에는 제사에 술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이름난 가문마다 저마다의 전통으로 빚어내는 가양주家釀酒가 있었다.

이렇듯 우리네 삶과 함께해 온 술은 친구 같은 존재다. 하지만 마냥 좋은 친구는 아니라는 게 문제다. 과한 술은 다음날의 고통을 동반하고 장기적으로는 몸과 정신을 상하게 한다. 술은 팍팍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지만 일상으로 돌아올 때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행복했던 만큼 겪어야 하는 숙취와 전날의 행동이 가져오는 부끄러움은 견디기 힘들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어제를 후회할 때면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해장解腸이다. 숙취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 좋은 해장국 한 숟가락이 가져다주는 평안함 만큼 극적인 것은 없다. 국물이 식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아픈 속을 달래주는 경험은 웬만한 술꾼들이 모두 빠짐없이 겪어본 일이다. 옛말에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고 약과 음식의 근원이 같다고 하였는데 해장음식만큼 이 말을 실감하게 해주는 것은 없다. 먹는 순간 치유되는 경험은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사소한 기적이다. 가끔은 그 기적이 너무나도 대단해 술 한 잔을 또 생각나게 한다는 게 문제지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저마다의 해장법을 따로 가지고 있다. 그뿐 아니라 자기만의 해장법에 자부심도 대단하다. 얼큰 시원한 국물을 고집하는 정통파가 있고 평양냉면처럼 슴슴하고 차가운 국물을 고집하는 양반들도 있다. 피자나 파스타처럼 느끼한 음식으로 속을 푸는 서구파도 있는가하면 커피로 빈속을 채우는 고행자 스타일도 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어떤 음식이든 해장의 효과가 있다면 해장음식이 될 수 있다.

해장이 필요한 상태인 숙취는 몸이 많이 지쳐있는 상태다. 알콜을 대사하는 과정에서 탈수가 생기기 쉽고 그로 인한 몸살과 두통, 근육통도 동반한다. 심한 경우 구토와 설사 등 속이 망가지기도 하는데 이럴 때 회복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해장음식이다. 따라서 해장음식은 꼭 해장이 아니더라도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고루 갖춘 보양식이 많다. 전날 음주의 여부와 상관없이 맛있고 든든한 한 끼 식사를 찾는다면 해장음식은 좋은 선택지다.

도봉의 역사와 함께해 온 식당들

 

서울시 도봉구에는 지역 곳곳에 자리한 수많은 맛집이 있다. 도봉구 도봉동에 위치했던 다락원[樓院]은 조선후기 수도 한양으로 향하던 사상私商과 보부상褓負商이 모였던 곳으로 큰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조국의 현실을 비탄하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술잔을 기울였고 그토록 기다리던 광복을 맞이했을 땐 한마음의 축배를 들었다. 시간이 흘러 1980년대에는 도봉의 산업화와 함께 일거리를 찾아온 공장 노동자들이 피로를 달래기 위해 술을 마셨다. 그 공장들이 다 떠나간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퇴근한 직장인이 하루를 정리하는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이렇게 술을 마신 도봉사람들의 다음 날을 보듬는 것은 바로 도봉의 맛집들이다. 하나의 식당이 지역에 자리 잡고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숨 쉬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요새는 2, 3년이 멀다 하고 이직하는 바야흐로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시대인데 도봉에서 20년 이상 가게를 이어온 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이다. 번화가의 휘황찬란한 가게들이 명멸을 반복할 때 세월의 더께를 간직한 채로 그 자리에 있는 식당들을 보면 도봉의 터줏대감을 만나는 느낌이 든다.

오랜 세월은 그 식당의 맛을 보장하는 더할 나위 없는 증거다. 맛있는 식당도 사라지기 일쑤인데, 오랜 세월을 이겨냈다는 것은 그만큼 보장되는 맛이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 맛이 요즘의 유행을 반영한 그런 성격은 아니다. 조금은 투박하고 순한 느낌의 옛 맛은 첫입엔 밍밍하지만 다시 찾게 하는 매력이 있다. 짧지 않은 시간을 넘어 현재까지도 맛집이라 불리는 식당은 도봉에서 이어져 온 맛을 보관하는 맛의 수장고이기도 하다.

그렇게 도봉사람들이 사랑하는 해장음식을 엄선하여 이 책 도봉의 맛: 해장음식편에 담았다. 도봉구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8곳의 식당은 도봉의 역사와 함께해 온 노포도 있고 비교적 최근에 생긴 곳도 있다. 하지만 모두 도봉사람들이 사랑하는 식당으로 식사 시간이면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들이다. 이 책을 쓰고자 처음 결심했을 때엔 도봉의 자랑거리를 널리널리 알리고픈 마음이었다. 하지만 막상 맛집들을 만나고 나니 오히려 사장님들은 지금 손님으로도 충분하다며 더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도 간곡한 설득 끝에 조심스럽게 도봉의 자랑거리를 내놓아 본다. 도봉을 방문하는 여러분, 도봉의 맛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은데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면 이 책을 안내자로 삼길 권한다. 음식과 공간 곳곳에 담겨있는 사장님의 아련한 옛 이야기는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