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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의 맛 (해장국편)

도봉산 아래 터 잡은 ‘영수네 감자국’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2. 13. 16:57

도봉산 아래 터 잡은 영수네 감자국

 

그럼, 영수네 감자국 아세요?

 

도봉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제 막 도봉에서 살게 되었음을 밝히고 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지인들과 나누고 있자니 화제는 자연스레 맛집으로 옮겨갔다. 역시나 지역에 대한 이해는 에서부터 시작하는구나 싶은 생각에 내가 아는 맛집 이야기를 이래저래 풀어놓았다. 그랬더니 자리에 함께했던 누군가가 말했다.

 

그럼, 영수네 감자국 아세요?”

 

도봉에서 이제 막 시작한 나는 저 한 문장만으로도 그 식당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우선 사람 이름을 떡 하니 걸어놓은 상호명에서는 그 자체로 강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걸린 이름을 보아하니 사장님 자녀의 이름일 가능성이 높은데 보통 자식 이름으로 장사하는 집은 임하는 자세부터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음으로는 감자국이라는 명칭이 신기했다. 감자탕이나 전골, 뼈해장국은 많이 들어봤지만 감자국은 도대체 뭔가. 탕 대신 국으로 이름한 음식은 어떤 특별한 맛을 간직하고 있을까 상상도 되지 않았다.

말한 이의 말투도 문제였다. 도봉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을 전제한 저 문장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일테니 그곳에서의 식도락 경험을 공유하자는, 벌써 다음 단계를 바라보는 말이었다. 아직 가보지 못했다고 하니 다른덴 몰라도 꼭 가보라는 말이 뒤따라왔다. 나의 호기심은 더 불타올랐다. 도봉하면 떠오르는 맛집, 그리고 상호명에서 느껴지는 자신감. 꼭 가보겠다는 다짐의 근거로는 충분했다.

도봉구하면 도봉산이다. 도봉구 이름의 유래이기도 한 도봉산은 그 자체로 도봉지역의 정체성이다. 도봉산이 있는 북한산 국립공원은 한 해 방문객이 수백만명에 달하며 이에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방문객을 가진 곳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예부터 사람들의 도봉산 사랑은 남달라 서울의 선비들은 경흥대로를 따라 도봉산으로 향하곤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이 도봉산을 오른다. 그리고 이 명산 도봉산 아래 오래도록 등산객을 맞이하여 음식을 내주는 영수네 감자국이 있다.

산행을 마치고 나면 허기진 속을 달랠 든든한 음식이 절로 생각난다. 고된 등산으로 몸도 많이 지치고 땀도 많이 흘렸을 테다. 뜨뜻한 국물과 부들부들한 고기로 속을 든든히 채우고 싶다면 하산 길에 보이는 영수네 감자국은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다. 가게 밖까지 퍼지는 육향肉香과 삼삼오오 모여 앉아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어느 순간 그 분위기에 스며들어 간다. 건강을 위해 등산을 했건만 술 한 잔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또 한 잔 생각이 간절해진다. 오랜 시간 등산객과 함께해 온 영수네 감자국의 생명력은 여기에 있다.

도봉산의 터줏대감

 

영수네 감자국은 도봉산 아래 서울가든 아파트 근처에 있다. 간선도로 도봉로를 따라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도봉산역 바로 한 정거장 전 도봉 한신 아파트 정거장에서 내리자. 서쪽으로 길을 건너 골목으로 향하면 다양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도심 속 번화가의 모습은 아니지만 왕년에 잘나갔던 가게들이 아직 모여있는 듯한 이곳은 80~90년대 도봉구의 번화가였던 곳이다.

80년대 후반 서울 올림픽의 개최로 서울 중심부에 위치하던 다양한 공장들이 외곽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도봉구에도 여러 공장이 새로 이사를 왔다. 옮겨온 공장을 따라 많은 사람이 도봉구로 이주했는데 그들이 고된 일을 마치고 하루를 위로하는 거리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 당시 서민 안주였던 삼겹살과 족발, 감자탕, 순대국 등 다양한 음식이 이곳에 있었다. 도봉구에서 공장들이 떠나면서 상권은 예전의 활기를 조금씩 잃어갔지만 아직도 이 공간에는 옛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올라가면 도봉산 3길이 나오는데 이 길이 바로 역사 속에 등장하는 경흥대로慶興大路. 우리가 지금 도봉옛길이라고 부르는 이 길은 예부터 수도 한양과 한반도 동북면을 잇는 주 교통로였다. 서울 동대문에서 시작해 수유, 다락원[누원점], 축석령, 송우점을 지나 함흥, 북청, 길주를 거쳐 경흥까지 이르는 이 길은 역사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걸었던 길이다. 조선 초 태종 이방원이 태조 이성계에게 보냈던 함흥차사가 걸었던 길, 그리고 조선시대 선비들이 도봉산을 유람하던 길이 바로 이 길이다. 도봉산역 인근에 자리하고 있었던 다락원은 한양으로 향하던 여러 상인들이 마지막으로 묵을 수 있는 숙박시설로서 그 근처에 큰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역사 이야기는 지루해지기 전에 그만하자. 어쨌든 이 길은 오래전부터 도봉산을 찾는 사람들이 걸어온 길이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더 올라가면 부부약국이 나오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나오는 길이 도봉산으로 올라가는 옛길이다. 현재 도봉산역이 세워지기 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도봉산을 오르내렸다. 그리고 이곳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영수네 감자국은 그 옛날부터 도봉산의 등산객을 손님으로 맞이해왔다. 도봉산을 찾는 사람들로 가득 붐볐던 이길에서 영수네 감자국이 가지는 의미는 대단했다. 말하지 않아도 어제의 친구들이 자연스레 모이는 곳, 영수네 감자국은 도봉산을 대표하는 공간이다.

영수네 감자국이 도봉산 아래에서 장사를 시작한 것은 1988년부터였다. 모든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그 시절, 허기진 등산객을 위해 저렴하고 맛 좋은 음식을 든든하게 내어주던 식당이었다. 원래는 지금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빌라 건물에서 시작했던 식당은 감자국뿐 아니라 다양한 음식을 취급했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사장님은 따로 장사의 경험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생계를 위해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음식이라는 생각에 무작정 식당을 열었는데, 좋은 솜씨 덕분에 날로 손님이 늘어갔다.

인기가 많아지자 별의별 진풍경이 벌어졌다. 식당 내 식탁이 모자라 건물 밖에 간이 테이블이나 돗자리를 펴놓고 식사를 하는 손님이 생기기도 했고 가게 밖에는 연일 대기인원이 줄을 섰다. 어떤 트럭기사는 본인 트럭을 몰고 와서 가게 앞에 주차한 후 음식을 받아다 짐칸에서 먹고 가기도 했다. 매일 같이 문전성시를 이루던 식당은 주변의 시샘도 많이 받았다. 몇몇 이웃들은 구청에 민원을 넣기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성업을 이어가던 식당은 갑작스레 건물주가 다른 사람에게 매도하면서 한순간에 자리를 잃었다. 그렇게 급하게 가게를 알아보던 사장님은 결국 규모를 넓혀 현재 자리로 이사했다. 넓어진 공간으로 단골 손님들은 너도나도 좋아했지만 그때 그 당혹감은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다행히도 가게를 넓힌 만큼 손님도 많아져 아직도 영수네 감자국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특별한 이름 영수네 감자국

사장님이 가게를 처음 시작할 땐 딱히 이름도 없었다. ‘그땐 다들 그랬어~’하고 시작하는 이야기는 지금 들으면 하나도 평범하지 않다. 이름도 없는 빌라 한 편에서 생계를 위해 시작한 무허가 가게. 그런데도 매일매일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 좋게 말하면 고수의 풍모가 느껴지는 곳이고 나쁘게 말하면 뭔가 심각한 범죄가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다. 앞서 말했듯 시샘 많은 이웃이 민원을 넣는 바람에 벌금도 자주 내셨다고 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영수네 감자국의 왕년을 말하자면 이 식당 때문에 주변 교통이 마비된다고 신고가 들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매일매일이 잔치집 같은 날이었지만 산 밑에서 가게를 하던 탓에 밤에는 벌레 불이 필수였다. 하지만 벌레 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불을 꺼놓고 장사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이 들이닥쳤다. 다짜고짜 무슨 일이냐고 하니 이곳이 색싯집이라는 신고가 들어왔다고 한다. 불 꺼진 집에 남자들이 수시로 드나드니 그런 모양이었다. 억울했던 사장님은 가게 안과 자식 셋을 다 보여주면서 결백을 증명했던 에피소드가 있다.

 

젊은 나이엔 창피한 게 하나도 없었어.’

 

사장님은 그때를 생각하면서 하신 말이다. 자식 셋을 잘 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렸다. 꽃다운 청춘은 물론이요, 수치심과 건강도 다 팽개쳤다. 오직 가족의 생계를 위해 끊임없이 일했다. 여자 혼자서 처음 여는 식당이 무서울 법도 하건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무서워할 새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가족 같은 손님들이 하나둘 곁을 채우기 시작했다. 식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 손님은 이제 한 가족처럼 느껴진다.

이름도 없는 가게에 영수네 감자국이라는 특별한 이름이 붙은 이유는 무엇일까. 다들 지레 짐작하듯 영수는 사장님의 첫째 이름이다. 처음 가게 이름을 정할 때 어떤 이름을 딱히 정해놓진 않았다. 하지만 영업을 하려면 간판을 달아야해서 간판집 사장님을 불렀는데 그 사장님이 가게 이름은 뭘로 할까요?’ 했을 때까지도 정하지 못했다. 이름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린 안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온라인 ID나 게임 캐릭터명을 뭘로 할지 고민 안 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여하튼 고민이 길어지자 간판집 사장님이 영수엄마, 그러지 말고 그냥 영수네라고 해라는 말에 영수네 감자국이름이 정해졌다.

그렇다면 감자탕이 아닌 감자국이 된 이유도 궁금하다. 사장님께 물어보니 뚝배기가 없어서라고 하셨다. 아니, 이런 난해한 선문답이 있나. 다시 여쭤보기도 뭣하고 네네, 그렇군요하고 돌아와서 한참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도대체 왜 탕이 아니라 국일까. 또 이런 질문은 머리 속에서 잘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한참을 공부한 끝에 드디어 나온 결론은 다음과 같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은 국의 높임말을 의미한다. 주로 국물보다는 건더기가 많은 국물요리나 제사상에 올라가는 요리를 탕이라 한다. 그리고 그 옛날 조선시대 양반가에는 지금처럼 겸상兼床이 아닌 독상獨床의 문화가 일반적이고 격조 높은 것이었다. 사극을 보면 임금이 베푸는 주연酒宴자리도 모두 독상이지 않은가. 정리하면 1인상에 올라가는 개인용 국물요리를 탕이라 했던 것이다. 그런 탕은 오래도록 따뜻하게 먹을 수 있도록 뚝배기에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갈비탕, 설렁탕, 추어탕 등 역사가 오래된 탕들은 모두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 1인용이다.

지금이야 탕이나 국이나 서로 섞여서 쓰이기 때문에 이런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하지만 돼지 등뼈로 끓인 음식이 뚝배기에 나오면 뼈다귀 해장국이요, 냄비에 나오면 감자탕으로 반대로 이름 붙은 게 재밌다. 아무튼 뚝배기가 없어서 이름을 감자국으로 했다는 사장님의 말씀은 무슨 말인지 이제 어렴풋이 알았다. 아무렴 어떨까. 비록 우연의 산물이지만 특별한 이름 영수네 감자국은 왠지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릴 수 없다.

자식 이름을 붙인 가게에 묻어나는 애정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오죽하면 사장님은 당신이 이 가게를 그만두고 물려준다고 해도 영수네라는 이름만은 바꾸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영수는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라 오히려 요즘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 당시에는 평범했던 무언가가 시간이 지나며 특별해지는 과정을 영수네 감자국에서 엿본다. , 참고로 영수는 따님이다. 그리고 지금 영수네 감자국에서 함께 일하고 계시니 장난삼아 영수야라고 부르는 건 자제하자.

 

집밥같은 슴슴한 매력, 감자국

 

사장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재밌어 소개하다보니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왔다. 이제 가장 중요한 순서인 감자국의 맛을 이야기할 차례다. 처음 감자국을 받으면 하얀 국물에 담긴 등뼈가 냄비째로 나온다. 양념은 주방에서 넣어 나오는 게 아니라 자리에서 직접 넣어준다. 입맛에 따라 양념을 조절해서 넣을 수 있어 좋다. 여기까지는 다른 식당과 비슷하지만 특별한 점은 냄비 안에 있다. 갖은 채소 위로 수북이 올라가 있는 하얀 곡식 같은 무언가. 자세히 보니 간 콩이다.

영수네 감자국 음식 일러스트

한껏 올라간 콩은 비지보다 두꺼운 입자다. 콩의 식감은 살리면서 맛을 내기 위한 선택같다. 충분히 끓인 후 국물 한 입 떠넣으니 익숙하긴 한데 돌이 켜생각해 보면 먹어본 적은 없는 것 같은 오묘한 맛이다. 하지만 한 입 두 입 계속 먹게 되는 강한 매력이 있다. 양념을 많이 풀어도 자극적이지 않고 슴슴하게 느껴지는 맛은 감자국이라는 이름에 딱 어울린다. 감자탕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강하고 자극적인 맛하고는 거리가 먼 이 요리는 건강을 위해 어머니가 끓여준 음식 같은 느낌이다. 이런 담백한 맛의 비결은 역시나 콩이다.

앞서 영수네 감자국을 찾기 위해서는 도봉한신아파트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야 한다고 했었다. 이 아파트는 옛날 삼양라면 공장이 있던 자리로 도봉구의 산업화를 이끈 공간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근무하던 직원 중 하나가 바로 영수네 감자국의 단골이었다. 사장님은 이전부터 감자국에 콩가루를 넣었었는데 어느 날 그 직원이 사장님, 콩가루가 아니라 콩을 갈아서 넣어보세요하고 권한 것이 오늘 이 감자국의 시작이다. 옛 설화에는 지나가던 선비가 아무렇지 않게 근심거리를 해결해 주고는 다시 떠나지 않던가. 영수네 감자국에는 단골 삼양라면 직원이 만능 나그네였던 것이다.

콩이 가져오는 고유한 고소함이 참 좋다. 시중에 파는 감자탕은 조금 먹다보면 그 자극적인 맛에 입이 지치기 마련인데 영수네 감자국은 그런 피로감이 없다. 슴슴한 맛으로 인해 오히려 고기 맛이 더 잘 느껴지기도 한다. 고기가 가지고 있는 풍부한 육즙에서 퍼지는 고기 고유의 맛은 흡사 수육을 먹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렇다 보니 전날 술 한잔했던 애주가에게 이만한 해장국이 또 없다. 부담스럽지 않은 국물이 따뜻하게 지친 속을 어루만져주는 기분은 일류 해장국만이 낼 수 있는 맛이다.

함께 나오는 반찬도 맛이 좋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깍두기는 옛날에 흔히 먹던 바로 그 맛이다. 함께 나오는 겉절이는 신선한 고춧가루의 맛이 그대로 느껴져 입맛을 돋운다. 더불어 날씨가 추워지는 겨울철에는 겉절이에 굴을 넣어주시는 데 그게 또 별미다. 가게에서 직접 담그는 맛있는 김치는 손님들이 이 가게를 찾는 이유 중 하나다.

오래도록 도봉산 아래에서 자리를 지켜 온 영수네 감자국. 사장님께 그 비결을 물으니 손님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이라 대답하신다. 어려서 생계를 위해 무턱대고 시작했던 식당, 철 없는 나이에 주변 모든 것을 스승으로 삼으며 오늘까지 살아오셨다고 했다. 나보다 못난 사람 하나 없다는 생각에 한 분 한 분을 진심으로 대하다 보니 감사하게도 많은 분이 사랑해주셨다고 말씀하는 사장님을 보며 인생을 배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분야든 높은 경지에 오르면 그 철학이 상통한다고 했다. 영수네 감자국에서 흐르는 겸손의 미덕이 음식에도 담겨 있는 것만 같다.

 

도봉산역이 생긴 후로 도봉산 입구까지 향하는 길이 새로 뚫렸다. 영수네 감자국 앞을 지나는 길에는 예전처럼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다. 어느덧 한적해진 길임에도 불구하고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은 굳이 이 길을 걸어 영수네 감자국으로 향한다. 땀 흘린 지친 몸을 보듬어주는 맛있는 감자국, 한 잔의 술이 다시 생각날 법도 하다. 도봉을 찾는 이라면 한 번쯤 시간 내어 영수네 감자국을 먹자. 그러고 나면 다음에 도봉 사람을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럼, 영수네 감자국 아세요?’

 

1) 위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1818

2) 찾아가는 길

- 지하철: 도봉산역 1번 출구에서 도보 16

- 버스: 도봉산입구에서 도보 4

141, 142, 1127,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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