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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석탑 복원 진두지휘한 배병선 단장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11. 13. 14:38

미륵사지 석탑 복원 진두지휘한 배병선 단장

 

서울에서 KTX를 타고 1시간30여분 달려 도착하는 익산역. 다시 차로 10여 분 더 가면 미륵사지가 나온다. 야트막한 전북의 산이 둘러싼 휑뎅그렁한 들판이다. 군데군데 옛 절터를 암시하는 주춧돌(정확히는 장초석)이 있고 입구에 당간지주가 서 있지만 눈길을 잡아끄는 건 뭐니뭐니해도 동서 양측의 두 탑이다.

한데, 둘의 동거가 어색하다. 9층짜리 동탑은 상륜부까지 ‘완전체’일지라도 하얗고 매끈한 게 기계로 찍어낸 느낌이다. 6층에서 멈춘 서탑은 일부 탑신(몸돌)과 옥개석(屋蓋石, 지붕 모양의 부재)이 없어 반쪽짜리 모양새지만 세월을 탄 때깔이다. 둘을 한 쌍으로 두는 게 맞나 싶을 정도다.

이들 가운데 비록 반쪽이라도 1400년 자취를 간직한 서탑만이 ‘미륵사지 석탑’으로 불린다(이하 미륵사지 석탑을 석탑이라고만 쓸 땐 모두 서탑을 말한다). 1993년 ‘복원’된 동탑을 문화재로 언급하는 이는 거의 없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상태의 동탑을 9층으로 설계하고 쌓는 데 3년 걸렸다. 반면 한쪽 벽면에 콘크리트를 덕지덕지 바른 채 버티고 있던 서탑을 해체·수리해 지금 모양으로 만드는 데는 20년이 걸렸다. 단일 문화재 수리로 최장 기록이다. 비용도 230억원이 들어 숭례문 복구(약 250억원) 다음으로 많다.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봉영기에 따르면 639년 백제 무왕의 왕후가 발원해 지었다. 1400년 세월 동안 원형을 많이 잃었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탑이다. 장진영 기자

육안에도 확 다른 동탑과 서탑의 복원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이를 들여다보기 위해 석탑(서탑) 복원사업 20년 가운데 14년을 관여한 배병선(63) 전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사업단장을 만났다. 석탑 복원은 1999년 문화재위원회가 해체 보수를 결정하면서 시작돼 2001년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재연구원)로 실무가 이관됐다. 연구소 건조물실장(현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이던 배 단장이 실무 지휘봉을 잡은 건 2004년. 탑 상부 해체가 이뤄지고 있던 시점이다. 이때부터 단장 직함만 통틀어 11년간 수행했다. 특히 2009년 탑 안에서 1400년 전 안치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면서 석탑은 대대적인 뉴스의 중심에 선다. “유물 복이 따로 있다고들 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흥분의 순간이었다”고 배 단장은 돌아본다.

사리장엄구 가운데서도 특히 금판으로 제작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는 “백제사를 다시 쓸 정도의 엄청난 발굴”(이병호 동국대 교수)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밝혀진 내용 때문에 익산의 자부심이던 서동요와 선화공주 설화는 낭패를 봤다. 무슨 일인 걸까. 동탑은 왜 천덕꾸러기가 된 걸까. 서탑 복원엔 왜 20년씩 걸린 걸까.

이에 답하는 과정에서 지난 수십년 새 문화유산 복원을 둘러싼 시대상의 변화가 읽힌다. 앞으론 어떤 복원이 바람직한지 생각할 거리도 안게 된다. 먼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탑, 미륵사지 석탑을 만나러 가자.

배병선 전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사업단장이 미륵사지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왼쪽(서쪽)의 미륵사지 석탑을 20년간 수리할 동안 14년을 관여하며 최대한 원형 복원에 힘썼다. 오른쪽은 1993년 완공된 동탑. 고증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9층짜리 완성형으로 쌓아올려 논란의 대상이 돼 왔다. 장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