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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와 시집에 대한 평론

타자 지향의 시 쓰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6. 30. 14:36

 

 

타자 지향의 시 쓰기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들어가며

 

나호열 시인은 수식어를 달기 곤란한 시인이다. ‘원로’ 시인이라 하기에 그는 너무 젊다. 정신도 육체도 아직 젊고 활달하다. 그렇다고 ‘중진’ 시인이라 부르기에는 그의 문단 경력과 시력이 이를 허용치 않는다. 우리 시단을 대표하는 ‘국민’ 시인이라 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대중적이거나 야단스러운 행보를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우리 문단의 한쪽에서 알곡같이 알찬 작품을 써온 시인이다. 그런 그에게 구태여 수식어를 붙이자면, 그는 ‘진짜’ 시인이다. 이번에 그가 2008년 이후 시들 중 중요 작품을 선별하여 시선집 2부를 묶었다. 이 작업에 해설자로 참여하게 되어 큰 부담도 되지만 한편으로 영광스럽기도 하다.

이번 시선집은 나호열 시인의 원숙기 시 세계를 보여준다. 오랜 기간에 걸쳐 쓴, 여러 시집에서 뽑은 시들을 묶어내는 이번 작업은 그의 시적 도정을 일목요연하게 알아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아주 큰 의미를 가진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선집에서 보이듯이 그의 시 세계는 어떤 경지를 향해 꾸준히 변화, 발전하고 있다. 그런 변화 속에서도 그의 시를 관통하는 일관된 가치관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에 대한 지극한 배려와 끝없는 애정이다. 필자는 이런 나호열 시인의 시 세계를 ‘타자 지향의 시 쓰기’라 부르고 싶다.

 

2. 타인의 무게

 

흔히 시를 주관적인 글쓰기라고 말한다. 시인 개인의 자아 성찰과 내면 의식이 가장 잘 드러난 장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 대한 성찰이 깊어질수록 그것은 나의 삶을 구성하고, 나의 삶과 관련된 타인의 존재에 대한 성찰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나호열 시인의 시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이런 성찰의 지점이 아닌가 한다.

나호열 시인의 시들은 스스로 끝없이 가벼워지고자 하는 시인의 내면을 보여준다. 욕망의 무게도 벗고 우리를 짓누르는 삶의 고통도 벗고 한없이 가벼운 정신의 경지를 시인은 꿈꾸고 있다.

 

다시 나를 저 야생의 숲으로 보내다오

삵에게 쫒기며 도망치다 보면

날개에 힘이 붙고

휘리릭 창공을 박차 올라

매의 발톱에 잡히지 않으려는 수 만 년이 지나면

쓸데없는 군살과 벼슬을 버린

새가 되리라

진화론의 서문이 너무 길어

달걀을 깨버리는

이 무심한 밤

- 「진화론을 읽는 밤」 부분

 

시인은 달걀을 보고 닭의 운명과 진화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시인은 이 닭에게 자신을 감정이입한다. 이미 날지 못한 새이지만 진화론을 거슬러 다시 날개를 사용하여 날 수 있는 새가 되기를 시인은 간절히 소망한다. 날지 못하는 닭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시인은 “달걀을 깨버리는” 행위 즉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과 글쓰기를 통해 이 숙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래서 가벼워진 몸으로 날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날개를 달고 가벼워진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냥 세상을 가볍게 여기고 낭비하는 것일까? 아니면 초월적인 것을 지향하며 현실도피의 삶을 바라는 것일까? 다음 시에서 시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날개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옷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동물에서 사람이 되었던 날은

부끄러움을 알게 된 그 날

감추어야 할 곳을 알게 된 그 날

옷은 그로부터 넌지시 위계를 가리키는

헛된 위장의 무늬로

입고 벗는 털갈이의 또 다른 이름으로

진화하였다

 

우화羽化의 아픈 껍질을 깨고

비로소 하늘을 갖는 나비를 꿈꾸며

나는 마음속의 부끄러움을 가렸던 옷을

벗고 또 벗었으나

그 옷은 나를 지켜주고 보듬어주었던

그 누구의 눈물과 한숨일 뿐

내 마음이 허물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

 

가만히 내리는 빗소리

나를 대신하여 허물을 벗는 이의

아픈 발자국 소리로 사무쳐 오는 밤

나는 벌거숭이가 되어

옷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싶다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가장과 위선의 허물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지는 문신으로

나를 향해 먼 길을 오는 이의 기쁨으로

이름 짓고 싶다

- 「허물」 전문

 

옷은 나를 드러내기 위해 입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부끄러움과 허물을 감추는 ‘허물’이기도 하다. 흔히 옷이 날개라고 말을 한다. “우화의 아픈 껍질을 깨고 / 비로소 하늘을 갖는 나비를 꿈꾸” 듯이 옷은 우리에게 위계를 만들고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는 날개로서의 기능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위장”일 뿐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그럴 경우 옷은 벗어야 할 허물이 되고 만다. 진정한 우화는 날개라고 생각하는 이 옷을 벗어버린 데서 이루어진다. 시인은 이 허물로서 옷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지는 문신”으로서의 옷을 생각하고 그럴 때 옷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날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을 이어 날개를 얻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거기에는 타인의 무게가 얹혀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득 의자가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의자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으므로

제 풀에 주저앉았음이 틀림이 없다

견고했던 그 의자는 거듭된 눌림에도

고통의 내색을 보인 적이 없으나

스스로 몸과 마음을 결합했던 못을

뱉어내버린 것이다

이미 구부러지고 끝이 뭉툭해진 생각은

쓸모가 없다

다시 의자는 제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다

태어날 때도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슬픔을 너무 오래 배웠던 탓이다

- 「타인의 슬픔 1」 전문

 

이 시의 의자는 시인 자신이기도 하고, 타인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우리 모두이기도 하다. 낡은 의자처럼 우리를 주저앉히고 허물어지게 만드는 것은 내 자신이다. “제 풀에 주저앉았음이 틀림이 없”는 이 시의 의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낡은 의자처럼 한 존재가 무너져 내리는 것은 그에게 가해진 오랜 시간의 타인의 무게 때문이다. 시인은 그 무게를 “타인의 슬픔”이라 표현하고 있다. 진정으로 타인을 감내한다는 것은 그가 가진 슬픔의 무게를 함께 견디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시인은 낡은 의자처럼 우리 모두가 늙고 병들고 결국 죽어가는 것은 우리의 삶에 깊이 침윤되어 우리에게 내상을 입히고 있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연민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모든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런 존재의 슬픔을 다음 시가 간결하게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단 하나의 기둥 위에

단 하나의 깊고 단단한

하늘을 얹기 위해

나무는

수많은 주석을

눈물 대신 달아 놓았다

- 「나무」 전문

 

나무는 홀로 서 있는 존재이다. 높은 하늘을 지향하며 “단 하나의 기둥”을 세우며 꿋꿋이 “깊고 단단한” 자세로 자신을 성장시킨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나무는 수많은 잎을 매달고 있다. 시인은 그것을 “수많은 주석을 / 눈물 대신 달아 놓았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고매한 정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타인의 슬픔을 자신 안에 껴안아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 타인의 무게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개에게 공손히 공양을 바치는 마음과

무거운 업보를 홀로 견디고 있는

작은 돌멩이의 마음이 무엇이 다른가

그저 말없이 이름 하나를

심장에서 꺼내어 놓는 밤이다

 

당신

- 「당신이라는 말」 부분

 

개나 돌멩이 하나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인은 나 아닌 타자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또 받들고자 한다. 자신의 심장을 꺼내놓을 만큼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자 한다. 시인이 꿈꾸는 삶은 바로 이 타인의 무게를 견디며 허물어지지 않게 나를 지키는 일이다. 시인은 그것을 다음 시에서는 춤으로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직립을 꿈꾸면서도

햇살에 휘이고

바람에 길들여지는 나무들의

허공을 부여잡은 한 순간

정지의 날숨이

춤의 꿈이라고 나는 배웠다

 

그러나 또한

동천 언 하늘에 길을 내는

새들의 날갯짓과

제 할 일을 마치고 땅으로 귀환하는

낙엽들의 가벼운 몸놀림이

아름다운 춤이라고 나는 배웠다

 

천 만 근의 고요 속에서

스스로 칼 금을 긋고 내미는

새 순과 꽃들의 아픔을 보았는가

바위에 온몸을 부딪고

천 만 개의 꽃잎으로 산화하는

파도의 가슴을 보았는가

벅차올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용암처럼

끝내 바위가 되기 위하여

기꺼이 온 몸을 내던지는

 

멈춤

그 찰라의 틈을 보여주기 위하여

바람을 불러 모으는

혼신의 집중

보이면서 사라지는

사라지기 위하여 허공에 돋을새김을 하는

묵언의 정釘 소리

들판에 내려앉는

노을이 뜨겁다

- 「춤」 부분

 

시인에게 시를 쓰는 일은 춤추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무처럼 직립을 꿈꾸면서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존재들과 호흡으로 소통하여 낙엽같이 가벼운 몸놀림을 얻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지하는 고요함 속에서 “찰라의 틈”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을 통해 세상의 소리를 듣고 “새 순과 꽃들의 아픔”이라는 타자의 슬픔에 공감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춤꾼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시 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억압과 구속을 벗어던지는 가벼운 언어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바람을 불러 모으는 혼신의 집중”을 통해 타자들의 세계에 마음을 열고 그 슬픔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지키고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3. 거리와 사이의 미학

 

앞서 나호열 시인의 시 세계를 타자 지향의 시 쓰기로 설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호열 시인의 시들은 나와 타인과의 공감을 강요하거나 나와 타인과의 경계를 무화시켜 손쉽게 동일화를 꾀하지 않는다. 나호열의 시는 그런 감상주의를 거부한다.

 

어디 쉬운 일인가

나무를, 책상을, 모르는 사람을

안아준다는 것이

물컹하게 가슴과 가슴이 맞닿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대, 어둠을 안아보았는가

무량한 허공을 안아보았는가

슬픔도 안으면 따뜻하다

미움도 안으면 따뜻하다

가슴이 없다면

우주는 우주가 아니다

- 「안아주기」 전문

 

안아준다는 것은 타인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물컹하게 가슴과 가슴이 맞닿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이런 서로 맞닿는 가슴이 없다면 “우주는 우주가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시인은 그것이 세상의 어둠과 삶의 허무까지 다 견디며 또한 타인의 슬픔과 미움까지 다 받아들이는 행위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런 진정한 소통과 공감은 나와 타인과의 거리를 무화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거리를 인식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다음 시가 그것을 말해 준다.

 

안부를 기다린 사람이 있다

안부는

별일 없냐고

아픈 데는 없냐고 묻는 일

안부는

잘 있다고

이러저러하다고 알려주는 일

산 사람이 산 사람에게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고백하는 일

안부를 기다리는 사람과

안부를 묻는 사람의 거리는

여기서 안드로메다까지 만큼 멀고

지금 심장의 박동이 들릴 만큼 가깝다

...(중략)...

어두울수록 밝게 빛나는

개밥바라기별과 같은 것이다

평생 동안 깨닫지 못한 말뜻을

이제야 귀가 열리는 밤

안부를 기다리던 사람이

내게 안부를 묻는다

기다림의 시간이 구불구불

부끄럽게 닿는다

- 「안부」 부분

 

안부는 한 존재와 다른 존재 간의 최소한의 소통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나와 그 사람과 남남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런데 시인은 이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깝고 또한 멀다고 말하고 있다. 안부를 묻는 사이는 가깝지만, 또한 안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그와 내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밀착과 분리의 사이를 깨닫는 것, 여기에서 타자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 시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유와 속박 사이의 관계와도 같은 것이다.

 

자유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고 배웠다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갈구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깨우쳤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말없이 행하는 사물들을 업신여기고 값어치를 치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의 속박과 결탁하면서

수인에게 던져주는 메마른 빵을 굶주림과 바꿨다

발목이 부러지고 나서

내게 온 새로운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나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어

그런데 친구야

네가 나를 의지한다는 것은

오로지 나에게 너의 온 힘을 전해 준다는 것이지

언젠가 너에게 버려질 날이 오겠지만

그날이 기쁜 날이지

그날까지 날 믿어야 한다는 것이지

 

아, 절뚝거리는 속박과 함께

비틀거리는 목발

- 「목발 1」 전문

 

속박과 자유는 정반대 의미의 단어들이다. 시인은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고 비틀거리는 속박과 불편함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친구”라는 목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타인에게 목발 같은 존재이고 나 또한 목발 같은 타인이 있어 비틀거리면서라도 걸을 수 있는 자유를 얻고 있는지 모른다. 서로가 목발이 되어 서로 돕기도 하지만, 또한 버려지기도 하는 하지만 서로를 믿어야 하는 이 기막힌 관계를 통해 시인은 나와 타자와의 사이를 아주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시인의 깊은 사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렇듯 나호열 시인의 시들은 나와 타자, 존재와 존재들 간의 거리와 사이에 주목하는 시들이 많다. 그런데 위의 작품들이 차이에서 오는 사이에 주목했다면 다음 시는 유사한 것들 간의 사이를 생각하게 해 준다.

 

마땅히 있어야 하는 그곳에서 사라진 시계와 지갑 같은 것 청춘도 그리하여서 빈 자리에 남은 흠집과 얼룩에 서투른 덧칠은 잊어야 한다는 것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손에서 놓아버린 아쉬움이라고 하여도 새 순으로 돋아오르는 잊어야지 그 말

문득 열 일곱에서 스물두 살 그 사이의 내가 잃어버린 것인지 놓아버린 것인지 아슬했던 그 이름을 며칠째 떠올려 보아도 가물거리는 것인데 왜 나는 쓸데없이 손때 묻은 눈물에 미안해 하는가

 

낮달처럼 하염없이

- 「잊다와 잃다 사이」 전문

 

‘잊다’와 ‘잃다’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말이다. 하지만 글자 모양도 발음도 비슷하여 종종 혼동하여 사용되기도 하는 말이다. 이 잘못된 사용이 이 두 단어 사이의 의미를 닮게 만들기도 한다. 시인은 바로 그 점을 예리하게 포착해서 그것을 시의 소재로 삼았다. 잃어버린 것이 놓아버린 것이기도 하고 또한 일부러 잊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지난 세월의 모든 이별들에 미안해 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면서 스스로 낮달과 같은 존재가 된다. 낮달은 눈에 띄지 않아 잊혀지거나 잃어버린 존재이다. 나이가 들어서 잊어지고 잃은 것이 많아지면서 자신의 삶이 아니 바로 자기 자신이 통째로 잃거나 잊은 것이 되어가고 있음을 시인은 깨닫게 된 것이다.

다음 시는 지금의 자신과 자신이 꿈꾸는 자신과의 사이를 보여준다.

 

불쑥

당신 앞에

나무로 서는데 반생

문득

당신 마음에

꽃으로 피는데 반생

 

불쑥에서

문득까지 천리 길

길 없는 길

- 「토마스가 토마스에게 9」 전문

 

“토마스”는 시인 자신의 세례명일 것이다. 결국 이 시는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독백이다.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오래 걸리는 일인지를 얘기하고 있다. 반생을 나무로 섰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성숙한 안 인간의 삶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어느 날 불쑥 자신의 삶이 익어갔다고 시인은 생각한다. 하지만 문득 꽃으로 완성된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또 다른 반생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길 없는 길”인 지난한 형극의 길임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인은 “불쑥”과 “문득”이라는 부사를 적절히 사용하여 이 시의 의미와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다. ‘불쑥’이나 ‘문득’이나 다 한 갑작스러운 한순간의 어떤 것의 나타남을 표현하는 말이지만 ‘불쑥’은 나 아닌 다른 것이 나타났을 때 주로 사용하고 ‘문득’은 내 안의 어떤 것이 일어났을 때 주로 사용한다. 반생은 타인의 욕망에 지배받으며 그것에 맞추려고 살았다면 이제 반생은 꽃으로 피어나는 “문득”의 깨달음을 얻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사이를 좁히고 다가가는 일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멍멍
멍멍멍

한 단어로
희노애락을 드러내는
이 기막힌 은유를
그냥 개소리로  듣는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냐
아무리 울어대도 울림을 주지 못하는
개소리

- 「개소리」 전문

 

우리는 타인과의 사이를 좁히고 서로 소통하기 위해 말을 한다. 하지만 말이 말이 되지 못한 경우가 너무도 많다. 시인은 그런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을 “개소리”로 풍자하고 있다. 하지만 이 풍자는 시인 자신의 내부에도 향해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시인이 애써 시를 쓰더라도 그것은 결국 개짓는 소리에 불과하다. 자신의 시에 감정과 깊은 의미를 담겨 있다고 시인은 생각하지만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한 불구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울어도 울림을 주지 못하고 아무리 말해도 전달되지 못한다. 단지 멍한 의문만 남을 뿐이다. 하지만 이 어려운 길이, 분열된 언어로 존재와 존재 사이를 메꾸려는 이 지난한 길이 바로 시인이 가야만 할 길이다.

 

4. 맺으며

 

시인의 운명은 가혹한 것이다. 이 시선집은 이 가혹한 여정을 보여준다. 예민한 시인의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들의 무게와 슬픔을 시인은 그의 따뜻한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에 불온한 뿔을 들이댈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한숨과

눈물로 범벅이 된 분노는

높은 굴뚝을 타고 오르는 연기가 되거나

못으로 온몸에 박히는 뿔이 된다

나도 뿔났다

- 「뿔」 부분

 

하지만 이 분노가 사랑으로 승화될 때 나호열 시인이 꿈꾸는 시가 존재한다.

 

사랑

 

이 짧은 시를 쓰기 위해서

너무 많은 말을 배웠다

- 「토마스가 토마스에게 1」 부분

 

“사랑해”라는 말은 이 시선집, 나아가 나호열 시인의 시적 여정을 대변해주는 한마디이다. 타인과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 따뜻한 한마디를 진정으로 말할 수 있기 위해 그는 수많은 언어와 사유의 숲은 헤매며 왔다. 이제 그가 말한 사랑의 힘을 믿기로 한다.

 

 

* 이 글은 나호열 시선집 2부 평론으로 수록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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