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딩, ~컨벤션, ~타워, ~스퀘어, ~하우스, ~가모, ~티움, ~블레스, ~몽드, ~펠리체, 더~, 아베~ …. 어쩌다 우리말이래야 끝자락에 달라붙은 '귀족' 정도다. 이름만으로는 대체 어느 나라 예식장인지 모르겠다. 외국 영화, 특히 어릴 적 보던 배우 얼굴이며 이름처럼 현란하다. 눈부시도록 찬란한 현란(絢爛)이 아니다. 정신 못 차릴 만큼 어지러운 현란(眩亂)….
이렇게 티라도 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어떤 말은 엉큼하게 한글로 차려입고 제법 행세한다.
'김정은은 북한 권력층을 해임하거나 숙청하는 이른바 '공포정치'를 통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해 왔다. … 자신의 고모부 장성택을 비롯한 고위 간부와 주민 340명을 공개 총살하거나 숙청하는 반인륜 행위를 자행했다.'
'자신의'를 빼고 읽어보자. 그런다고 김정은 아닌 다른 누구의 권력 기반으로 읽히지 않는다. 장성택도 다른 사람의 고모부일 수 없다. 두 사람 관계가 잘 알려져서가 아니라 우리말 씀씀이가 그렇기 때문이다. 하면 이 '자신'(自身)은 왜 들어갔을까. 일반적으로 소유 주체를 꼭 드러내야 하는 영어의 영향임이 분명하다. ▶기사 더보기
볼만했다.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 원칙을 어기지 않나, 사람인 국회의원 수를 반올림(사사오입·四捨五入)하지 않나.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기도 했다. 3연임도 모자라 영구 집권을 가능하게 한 시절도 있었으니. 그렇게 아홉 번을 뜯어고쳤건만, 우리 헌법이 여전히 몸에 딱 맞지는 않는 모양이다.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제27조 ①항이다. 헌법 전체에 이 '에 의하여'만 66번 나온다. '에 의한' 10번 '에 의하지' 6번 '에 의한다' 1번…. '~에 의하다' 구문(構文)이 합쳐서 83번이다. 영어와 일본어 영향이라 그런지 남의 옷 입은 느낌이다. 판에 박힌 말투가 따분하기도 하다. 살짝 달리 쓰면 어떨지.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게 법률에 따라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 흔히 이렇게 '~에 따라'로 하면 될 것을. 얼마든 다르게 할 수도 있다. ▶기사 더보기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중략)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이다. 341자 163단어를 한 문장으로 엮었다. 200자 원고지 2장이 넘으니, 다 옮기면 이 난(欄)의 근 40%를 채운다. 안 그래도 말 많은 헌법이 서두부터 참 길다. 걸리는 게 이뿐이면 좋겠는데….
헌법 전문(全文)은 1만4286자. 여기에 관형격조사 '의'만 429번 나온다. 전체 어절(語節)이 4401개이니, 띄어쓰기 열 번에 한 번꼴이다. 대통령제답게 87번 나오는 '대통령' 비할 바가 아니다. 다른 음절(하 405, 한 402, 에 367, 는 363, 다 354번)도 싹 제쳤다. 단지 많아서 문제라면야. 제69조를 보자.
〈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다음의 선서를 한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상투적으로 관형격조사를 붙이는 일본어 투가 짙다. 엄숙하고 매끄러운 맛도 떨어진다. 우리말 토씨 '의'는 가려 쓰지 않으면 군더더기인 탓이다. 한번 다듬어 보자. ▶기사 더보기
공휴일 아닌 설이 이상했다. 구정(舊正)이라 부르는 것도 영…. 모처럼 친척 집 오가며 명절(名節) 음식 실컷 맛보기가 마음 같지 않았다. 웬만해선 뵙기 어려운 세종대왕이 그래서 더 반가웠다. 신정(新正)처럼 사흘 쉬면 그 만원짜리 세뱃돈 얼마쯤 늘어나려나. 어린 마음은 얄팍했다. 겨울방학이 끝났는데 설이 오면 심통마저 났다. 학교 가야 했으니까.
고등학생이 돼서야 알았던가. 이 신정·구정이 일제(日帝)의 간악(奸惡)한 노림이었음을. '식민지 조선의 얼이 담긴 전통을 내버려둘 수 없다. 설은 그냥 구정이라 불러라. 대신 우리처럼 양력 1월 1일을 신정 명절로 쇠라.'
되찾은 나라에서도 우리는 설을 오롯이 되찾지 못했다. 이중과세(二重過歲) 막는다며 정부가 여전히 양력 1월 1일을 명절로 강요했기 때문이다. 1985년에 겨우 '민속의 날'로 공휴일이 되긴 했지만, 제 이름을 공식으로 되찾은 때는 1989년. 악랄한 식민(植民) 지배기보다 긴 세월을 견뎌낸 것이다.
그 소중한 '설'이 또 이상해졌다. 국립국어원 온라인 사전이 지난해 8월 '설날'이라는 첫째 뜻풀이 다음에 새로운 뜻풀이를 달았는데…. '음력설과 양력설을 통틀어 이르는 말.' 예나 지금이나 설은 명절인 정월(正月·음력 1월) 초하루를 말한다. 음력설이라는 표현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기사 더보기
"아유 이 사람, 얼마나 마셨는지 문을 못 여는 거 있지? 내가 아주 그냥. … 우리 아들은 지금 ○○○○ 다니잖아. 딸내미는 ○○대 경제학과랑 ○○대 경영학과 냈어."
쉴 틈 없는 옆자리 두 승객의 대화. 온 식구 나이쯤은 저절로 알게 생겼다. 유난히 한 분 말씀이 끝도 없다. 목소리 크기도 전철 소음(騷音)에 댈 바 아니다. 이분만 좀 조용히 해주면 좋으련만. 그러거나 말거나 남들은 무덤덤해 보인다. 나 혼자만 귀 따가운 건가. 하필 그 자리에 앉은 내가 잘못이지. 어수선하던 머릿속에 전류처럼 한마디가 흐른다. "어제 시내 나갔다가 우연찮게 ○○이를 만난 거야 글쎄."
직업의식이 바로 꿈틀댄다. 말 속에 우연찮은(←우연치 않은←우연하지 않은) 단서가 없다. '우연(偶然)하게' 만났다는 얘기다. 젊은 층 말버릇인 줄 알았더니, 장년(長年)층까지…. 이러니 신문에서도 '우연하게'가 '우연찮게'로 뒤바뀌는 걸까. ▶기사 더보기
나가자, 우아미, 너나잘해….
흔히들 외친다는 새해맞이 구호다. '나라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 '우아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위하여' '너와 나의 잘나가는 한 해를 위하여'. 이 위하여, 꽤 묵은 말인데 아직은 정정(亭亭)해 보인다. 오죽하면 그 이름으로 숙취(宿醉) 해소제까지 있을까.
무언가를, 누군가를 위함은 좋은 일이다. 다만 불문곡직(不問曲直) 위할 때는 또 얼마나 위험한가. 지난가을부터 실컷 겪는 일이다. 그 통에 '위하여'를 빗댄 '위하야'도 새삼 기세를 탔다 하니….
'함 선생은 우리나라 마라톤 미래를 위해 어렵게 쓴소리를 꺼냈다.'
'측천무후는 인재를 몹시 아끼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다고 한다.'
이런 '위하다' 쓰임새는 자연스럽다. '사람(이나 사물)+위하다' 구문(構文)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하다'는 뜻으로 쓸 때다. '~하기+위하다'나 '동작성 명사+위하다' 형식이 그렇다. ▶기사 더보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11일 "중국이 무역 등의 문제에서 우리와 협상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왜 '하나의 중국' 원칙에 얽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 북핵과 무역 문제 등에서 중국이 협력하지 않으면 '하나의 중국' 원칙을 깰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중국은 미국의 수중(水中) 드론 낚아채기로 맞섰다. 이 양강(兩强)의 전초전 결과 말고 궁금한 점이 또 있다. '하나의 중국'은 영어로 'one China(policy)'다. 우리말로는 '한 중국'이 옳지만 어색하다. 만약 넷으로 쪼개진 중국이라면? '넷의 중국'보다 '네 중국'이 자연스럽다. 어찌 된 영문일까.
우리는 흔히 '한 잔의 커피'라고 쓴다. 영어 'one(a) cup of coffee'를 고스란히 옮긴 표현이다. 허울만 한국어일 뿐, 영락없는 영어다. 입으로는 아직 '커피 한 잔'이라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 직역(直譯) 딱지가 신문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
세 명의 학생, 20억원의 비용, 두 곳의 업체, 10발의 미사일…. 자연스러운 우리말에서 웬만하면 안 쓰는 조사(助詞) '의'가 어김없이 들어간다. 자연스럽지 않은 어순(語順·수관형사+단위명사+보통명사)이니 그럴 수밖에. ▶기사 더보기
간호사가 누구를 부른다. 엑스레이부터 찍으실게요. 어떤 동작이나 상태의 주체(환자)를 존대(尊待)하는 선어말어미(先語末語尾)가 '-(으)시-'다. 이걸 말하는 이(간호사)의 의지를 나타내는 어미 '-ㄹ게'와 마구 버무렸다. 보조사(補助詞) '-요'까지 붙여 환자를 존대하려는 뜻을 보였지만, 말하는 자신도 높이고 말았다. 찍으세요나 찍을게요 하면 좋으련만.
삼십 분 만에 차례가 온다. 엉덩이 아래가 땅겨서요. 음, 척추관 협착증(狹窄症)이 오면 그럴 수 있어요. 우선 사진 찍고 보실게요. 아예 환자를 보는 의사 자신을 높이는 말이다. 심심찮게 진료받은 원장(院長)이라, 그럴 사람 아님을 안다. 볼게요 하면 되지만, 하도 갑질들을 해대니 붙이지 말아야 할 '시'가 입에 붙은 건 아닐까.
방사선실에서 나오니 잘못, 심판, 절차, 특검, 국민, 대선, 엄중 같은 말이 TV에서 쏟아진다. 안 그래도 디스크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돌덩이가 쌓인다. 다시 들어간 진료실. 디스크가 심하지는 않고, 고관절염(股關節炎)이란다. 약 처방해 드릴 테니, 물리치료 받으시고 열흘 뒤에 오실게요. 아~ 원장님 제발…. ▶기사 더보기
몇 해 지난 올 수능(修能)시험. 어느 수험생 도시락에서 울린 휴대전화가 또 사람을 울린다. 딸이나 엄마나, 얼마나 속상했을까. 날벼락을 맞고도 그 재수생은 같은 시험장 수험생들한테 죄송하다는 글을 올렸다. 보기 드물게 경위(涇渭) 바르다. 무경위한 어른이 쌔고 쌘 판에.
한데 이 경위 비슷한 뜻으로 '경우(境遇)'를 올린 사전도 있다. 수상한 것은 '무경위하다' 대신 '무경우하다'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쩌면 경위에서 단모음화(單母音化·여기선 ㅟ→ㅜ)가 일어났는데 다른 한자 境遇에 갖다 붙인 것은 아닐지. ▶기사 더보기
'불황이 오래가고 실질 가계소득이 줄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점점 많은 사람이 해외여행을 즐기고 있다. … 가격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상품별로 꼼꼼히 비교하기에, 경기가 나쁠 때 가성비 높은 해외여행을 오히려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외국 여행이 아니라 '가성비' 얘기다. 몇 년 새 부쩍 많이 쓰는 신조어로 '가격 대비 성능'을 줄인 말이다. 그런데 성능(性能)도 성능 나름. '여행의 성능'은 몹시 거북하다. 주로 기계, 넓게 잡아 어떤 물건의 성질·기능이 성능이니 여행하고는 거리가 멀다.
흔히 대상으로 삼는 음식도 그렇다.
'가격 대비 성능을 따지는 가성비는 불황 속 시대정신이나 마찬가지. 30종 넘는 쌈채소와 … 삼겹살까지 곁들인 한 상을 받으니 솔직히 뿌듯했다. 강남 한복판에서 9000원에 이토록 푸짐한 식사를 할 줄이야.'
아무리 물건이라지만 음식의 성능이라니. 너무 나갔다. 만족도란 말이 버젓이 있는데. ▶기사 더보기
영화 '베테랑' 주인공은 막돼먹은 재벌 3세. 트레일러 기사를 죽을 지경으로 만들곤 죄 뒤집어씌울 구멍을 찾는다. 이런 망나니한테도 거꾸로 배울 점이 있다. 사람 대하는 일이 중(重)하다는 것이다. 그 주요 수단인 말과 글을 우리는 그럼 어찌 대할까. 바로 이 '대(對)하다'부터 알쏭달쏭한데. 마침 교육부는 지난달 초등 교과서에 가장 자주 나오는 일본어 투로 '~에 대하여'를 찍었다.
'최 총장과 함께 일괄 사퇴 의사를 밝힌 교무위원 44명에 대한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다.'
사표를 남이 썼으면 혹시 몰라도, 누구에 대한 사표라 할 까닭이 없다. '44명의 사표' 하면 그만이니 '대한'은 군더더기다. '국정 운영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두고' '북한에 대해서는 그런 전략이 안 먹힌다'도 마찬가지. '국정 운영에 미련을' '북한에는 그런 전략이'처럼 '대한' '대해서'를 고스란히 빼야 자연스럽다. ▶기사 더보기
알리가 시합하면 왜 맨날 레퍼리란 사람이 심판을 볼까? 그나저나 저 안에 어떻게 사람들이 들어갔지? 광고는 괜히 침이나 흘리게 하고. 열두 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좋은 사람 만나면 나눠 주고 싶어요…. 네 발 달린 미닫이 장(欌) 속 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학교에서 배우는 동요(童謠)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여로(旅路) 같은 연속극이야 말할 나위도 없었지만.
이러구러 한 10년, 총천연색 화면에선 노래 대신 글귀가 귀를 잡아당겼다.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사나이 대장부가 울긴 왜 울어,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특히 짧고 강렬하기로는 '맞다 게보린'이 으뜸 아니었을까. 오래도록 사람들 머릿속에 남은 비결은 '맞다'였을 터. 한데 이 말에 비밀 아닌 비밀이 있다. 광고주한테는 은인이되 우리말에는 무법자, 정체(正體)가 뭐기에. ▶기사 더보기
'태국 국민들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으로, 특히 가장 어렵고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 깊은 존경을 받아온 푸미폰 국왕의 영면을 기원한다.'
지난달 태국 국왕이 서거하자 우리나라 대통령이 애도 성명(聲明)을 냈다. 국무총리도 태국 대사관으로 조문 가서 방명록에 썼다. '… 영면을 기원합니다.' 영면(永眠)은 영원히 잠듦, 죽음을 이른다. 그러니 남의 나라 국왕한테 '숨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한 꼴이다. 그것도 이미 숨진 분한테. 숱한 언론 매체가 이걸 받아쓰고 말았다. 망발(妄發)이 따로 없다. 외교 문제로 번지면 어쩌려고…. 일본이 툭하면 과거사를 놓고 우리한테 유감(遺憾)이라 하지 않던가. ▶기사 더보기
'바닷물 색깔은 코발트 색 같기도 하고 로열블루 같기도 하다. 에게해는 물 색깔이 사람을 매료시킨다.'
'매료(魅了)하다'는 목적어를 끌고 다니는 타동사(他動詞). 목적어인 사람이 물 색깔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이미 사동(使動)의 뜻을 지녔다. 한데 다시 사동 접미사 '-시키다'를 붙이는 바람에 의미상 이중 사동이 된 셈이다.
물론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다만, 물 색깔이 제3자를 시켜 사람을 홀려야 한다. 또 다른 주체(제3자)가 생기는 것이다. 다만 여기선 제3자가 드러나지도 않고, 문맥상 있을 수도 없다. 타동사에 '시키다'를 잘못 붙이면 그렇다. '교육, 단련, 배제, 소개, 연결, 적용, 충족, 포함, 환기' 따위 어근(語根)이 같은 성질. 한자어 뜻을 제대로 알면 풀릴 일이다. ▶기사 더보기
'그리움이 눈처럼 쌓인 거리를/ 나 혼자서 걸었네 미련 때문에/ 흐르는 세월 따라 잊혀진 그 얼굴이….'(최헌 '가을비 우산 속')
40년 다 됐어도 마음을 적시는 이 노래, 옥에 티가 있으니 '잊혀진'이다. '잊다'의 피동형(被動形)은 '잊히다'인데, 같은 피동을 나타내는 보조동사 '지다'가 덧붙어 이중 피동이 됐다. 듣기 좋으면 됐지 노랫말까지 뭐 그리 퍽퍽하게? 대중가요면 몰라도, 언론 매체가 버젓이 어법을 거슬러서 문제다. ▶기사 더보기
가까운 사람들끼리 수작(酬酌)하노라면 핑계도 많다. 사회생활로 팽팽해진 정신 줄 어지간히 풀어놓을 수 있어 좋다.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암만 떠들어도 큰 트집 안 잡혀 좋고. 시답잖은 입씨름이 달아오를라치면 알코올이 '필름'을 뺏어버린다. 하여, 그 자리에서 한 얘기 또 하고, 다음에 만나 또 하고. 말 그대로 중언부언(重言復言)인데….
말짱한 일상이라고 없을쏘냐. 특히 신문·방송의 중복 표현, 넓은 의미의 겹말이 그렇다. 지난번 다룬 합성어보다, 두 낱말 이상인 구조가 더 흔하다.
"이란 선수는 모두 체력이 다 방전됐군요." 지난여름 리우올림픽 남자 마라톤. 엉금엉금 결승선을 넘은 모라디 선수를 가리켜 중계방송 진행자가 한 말이다. 체력이 떨어졌다는 뜻으로 쓴 방전(放電)은 그렇다 치고 '모두/다'가 겹치고 말았다. 강조하는 뜻으로 그럴 수도 있으려니와, '~거나 또는, 한참 동안, 위에 올려놓다, 다시 돌아오다'처럼 엄연한 고유어 겹말이다. ▶기사 더보기
'한국 양말이 싸고 질(質)이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양말 전문점을 찾는 외국인이 늘고 있다.'
'잡지(기자)는 바닥이 좁다 보니 맡은 분야에서 얼마나 두각을 나타냈는지 입소문이 중요하다.'
신문에서도 심심찮게 눈에 띄기에 설마 했는데 이'입소문(所聞)'이 버젓이 올림말이 된 것이다. 1999년 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없던 말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이 소문이다. 입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소문'이라 풀이했다. 말 자체가 겹말이요, 풀이는 동어반복이다. 그럼 소문이 달리 번지기라도 한다던가. ▶기사 더보기
'나라말이 중국(中國)과 달라 한자(漢字)로는 서로 통(通)하지 않으니….' 세종대왕이 손수 쓴 훈민정음(訓民正音) 머리말을 현대어로 표기한 것이다. 요즘 국가 지도자라면 아래처럼 쓰지 않을까?
'국어(國語)가 중국(中國)과 상이(相異)해 한자(漢字)로는 소통(疏通)이 불가능(不可能)하니….' 당시보다 한자어가 훨씬 많다. 대왕은 훈민정음 말뜻 그대로 글 모르는 백성을 깨우치고자 했다. 어려운 한자와 한문에서 해방하려 한 것이다. 예문대로라면 오늘날 해방은커녕 옥(獄)에 갇힌 꼴이다. 억지나 과장일까. 신문 기사를 들춰보자.
'고객에 대한 장기적 신뢰를 획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지인과 오랜만에 휴식을 취한 선수는 김예지뿐이 아니었다.'
다시 이렇게 쓰면 어떨까.
'손님에게서 오랜 믿음을 얻는~.' '아는 사람과 오랜만에 쉰~.'
말뜻은 다르지 않다. 어느 쪽이 거북하고 어느 쪽이 매끄러운가. ▶기사 더보기
젖먹이가 잠들면 아버지는 으레 머리맡에 앉았다. 오르로 돌아가는 머리통이 행여 너부죽해질세라 반듯이 눕히고자 함이었다. 바로 해 놓으면 돌아가고, 바로 할라치면 또 뽀드득…. 그예 짱구가 된 놈이 아장댈 무렵부터 장난감 굴리듯 하며 공것(空-)이라 놀려댔다. 말뜻으로는 '거저 얻은 물건'인데, 예전 어른들은 막내를 더러 그리 불렀다.
고것, 부엌것, 상것, 아랫것, 어린것, 요것, 저것, 젊은것, 잡(雜)것, 좀것, 촌(村)것, 행랑(行廊)것…. 귀여워서든 낮잡아서든 사람을 이를 때 이렇게 '것'을 섞어 쓴다. 홀로 쓸 때도 쓰임새가 푸지다. 헤퍼 보이는 '것' 또한 제법이어서 그렇지.
'6급 별정직 연봉은 4000만 원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기는 서아프리카 지역에 기반을 둔 조직의 주요 수법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SLBM 개발 수준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전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000만 원대로, 수법으로, 때문으로' 이렇게 바꾸면 어떤가. 하나같이 괜스레 들어간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사 더보기
들썩이는 일본 탓에 우리나라 지진이 잦아졌을까. 한 해 걸러 한 번꼴로 난다는 '파괴적 지진' 얘기가 아니다. 일본 의회 개헌(改憲) 세력이 3분의 2를 넘겼다. 유권자도 두 달 만에 찬성파가 더 많아졌다. 개헌 핵심은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나라가 되는 것. 태평양전쟁으로 판 제 무덤을 또 파려는가. 그 야욕(野慾)에 디딤돌을 놓은 지난 7월 참의원 선거 때로 가 보자.
'이날 열린 참의원(총 242석) 선거에서 자민당이 118석 이상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개표가 진행 중인 11일 0시 30분 현재 상황이다. 과반에 육박하는 수치이다.' 과반(過半)은 절반이 넘는다는 뜻이니 여기서는 딱 121석이 아니라 122~242석에 해당한다. 그런데 특정 수치가 대상이라야 어울리는 육박(肉薄)과 함께 쓰는 바람에 알쏭달쏭해졌다. '절반에 육박'이나 '최소(最少) 과반에 육박'이 옳다.
이 과반은 툭하면 겹말을 데리고 다닌다. '상반기 한국 영화 점유율(46.3%)은 과반을 넘지 못했다.' 그냥 '절반을 넘지 못했다'거나 '과반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면 될 것을…. ▶기사 더보기
"요즘 백화점이나 마트 가보면 명절 선물을 준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올 추석에는 수입산 선물 세트가 인기라고 하는데요.(뉴스 진행자) ~ 양은 수입산 선물 세트가 2배 많은데 값은 절반이 조금 넘습니다. 어려운 경기에 올 추석 저렴한 수입산 선물 세트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기자) ~ 국산이 너무 비싸서… 수입산을 작게나마 할까도 싶습니다.(소비자)"
넘쳐 나는 외국산도 모자라서 수입산(輸入産)까지 판친다. 이 '산'은 어디서 또는 언제 난 물건을 나타내는 접미사다. 칠레든 아프리카든, 아니면 2015년이든, 마땅히 장소나 시기가 앞에 와야 한다. 굳이 '수입'을 드러내려면 '산' 없이 '수입 선물 세트' 하면 된다. 그런데 '수입산' 했으니 '수입이라는 곳에서 온 물건'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본 없는' 것이 뭍에도 물에도 널렸다. ▶기사 더보기
'여러 시인의 좋은 시를 가려 묶는 컴필레이션 시집이 다시 증가하는 추세다.'
'이 제품의 특징은 저렴한 가격과 트렌디한 디자인이다.'
'수학도 스토리텔링식으로 바뀌면서 한글을 모르면 수학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다.'
'저를 계파라는 프레임에 가두지 말아 달라.'
모음(또는 선집·選集), 최신 유행, 이야기, 틀, 본보기라고 하면 쉽고 편할 텐데. 외려 의식(意識) '없어' 보인다면, 모국어에 집착하는 교열쟁이의 착각인가. '버스, 컴퓨터, 아웃, 서비스, 에너지, 샐러드' 따위를 베어내자는 게 아니다. 진작 토착(土着)한 낙엽송 같은 말 아닌가.
이런 외래어 말고, 언중(言衆)한테까지 번진 생태계 교란어(攪亂語)는 늘어놓기도 버겁다. '힐링, 펀더멘털, 리스크, 글로벌, 레시피, 미스매치, 헬스케어, 터닝포인트, 테라피, 콜라보….' 치유(위안), 기본적, 위험, 세계적, 조리법, 불일치, 건강관리, 전환점, 치료법, 합작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목숨을 내놓으라 하는지. 테라피(→세러피), 콜라보(→컬래버레이션)는 하다못해 표기법에도 어긋난다.
황소개구리나 가시박처럼 환경부가 고시한 '생태계 교란 생물'이래야 고작 스무 가지다. 대중 매체부터 조심해야 한다. 우리말에도 황소개구리가 산다. ▶기사 더보기
'18~24세의 젊은 유권자는 75%가 EU 잔류를 택했지만, 65세 이상은 61%가 탈퇴를 지지했다. 젊은 층들은 SNS에 "기차에서 어른을 봐도 절대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있다"는 글을 올리는 등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 (…) 영국 일간 가디언은 "젊은 세대들은 부모 세대가 자신들의 미래를 망쳤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젊은 층'에 왜 '들'을 붙였을까. 층(層)은 '무리'를 나타내는 말이라 복수(複數) 접미사가 필요 없다. '젊은 세대들'도 마찬가지다. 세대 역시 무리를 가리키니까.
흔히 쓰는 '우리들' '여러분들'도 마땅히 우리, 여러분, 하면 그만이다. 대중(大衆), 일행, 소장파(派), 국민, 취재진(陣), 세력, 시위대(隊) 따위가 다 그런 말이다.
여럿임을 뜻하는 말이 꾸며주거나 뒤따라오기에 사족(蛇足)인 '들'도 있다.
'처가 쪽 농지법 위반은 과거 인사청문회에서 여러 장관 후보들이 낙마(落馬)했던 사안이다.' '여러'가 있으니 '후보가'가 자연스럽다. '모든, 많은, 대다수, 숱한' 같은 말이 있을 때도 매한가지다. '대부분, 줄줄이, 모두, 속속' 같은 말이 뒤따라와도 복수 접미사가 없어야 매끄럽다. ▶기사 더보기
"언론은 거짓말쟁이." 진실을 목숨처럼 여기는데 웬 애꿎은 소리냐고? 그럼 한번 해보자, 기사 속 숨은 거짓말 찾기.
'이 도로 신설로 출퇴근 시간이 2배 이상 줄어들 전망이다.' 2배 이상이 줄어든다면, 걸리는 시간은 무조건 마이너스가 된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시간 여행이 정말 있는 걸까. 시간이 2분의 1 이하로 줄어든다는 뜻이겠지.
혹시 이 모두가, 부풀리기 좋아하는 세태(世態)와 그러려니 하는 무신경이 빚어낸 거짓말 아닌 거짓말 아닐까. 이래저래 늘 사람이 문제다. 숫자는 거짓말을 안 하니까. ▶기사 더보기
마침내 올해 신생아(新生兒)가 6·25 이후 가장 적으리라고 통계청이 최근 발표했다. 최악인 2005년이 43만5031명이었는데, 자칫 41만명대로 주저앉을 판이란다. 나라 앞날 걱정할 만큼 귀해진 새 생명, 그 엄마도 귀하게 모셔야 할 시대다. 전철 안 문구가 그걸 말한다. '지하철 전 차량 중앙 좌석 양끝은 임산부 배려석입니다. 주변의 임산부를 위해 자리를 비워두시는 배려를….'
잘 나가다 '임산부(妊産婦)'에서 삐끗했다. 임부(妊婦=임신부·아이를 밴 여자)와 산부(産婦=산모·아이를 갓 낳은 여자)를 아울러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낳느라 애쓴 산모도 보살피자는 뜻 아니냐 한다면 객차 방송이 반증(反證)한다. "우리 열차는(…) 특히 배가 부르지 않은 초기 임산부도 이용할 수 있도록…." 여기에 교통 약자 배려석 영문(英文)이 거든다.
'Seats for the handicapped, old, weak, pregnant woman, or accompanied with baby.' 영어로는 pregnant(임신한)라고 제대로 쓸 줄 알면서…. 성치 않은 한국어를 외국어(이 영문 역시 일부는 성치 않지만)가 확인해주다니, 서로 민망하다. ▶기사 더보기
성질이 순한 사람을 흔히 양(羊)이라 한다. 호랑이는 거꾸로 몹시 사납고 무서운 사람을 빗대는 말이다. 미련하거나 행동이 굼뜨면 곰, 능청스러우면 구렁이다. 간사하거나 꾀 많기로는 여우가 으뜸이다. 말에도 이런 '여우'가 있다.
'입장(立場): 당면하고 있는 상황. 처지(處地)로 순화.' 하지만 이 정도 사전 풀이로 곱게 잡힐 여우가 아니다. 신문에 나타난 여러 모습을 살펴보자.
'딸의 불륜에 충격을 받았을 김민희 어머니 입장을 이해해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사전 풀이대로 '처지'와 딱 맞아떨어지는 '입장'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표정을 바꿨다. '홍 감독과 김민희는… 불륜설에 대해서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헷갈리기 시작한다. 생각은 어울리지 않고, 경위(經緯)나 해명이 그나마 가깝지 싶다. 차라리 '불륜설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했으면 어땠을까. ▶기사 더보기
'검사장 승진 대상자가 특정 기업의 비상장 주식을 88억원어치나 갖고 있다면 (중략) 그 규모가 워낙 큰 만큼 누가 봐도 자금 출처 등에 대해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의심을 꼭 '가져야' 하는지 의심스럽다. 공직자의 의무, 도덕성 같은 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가진다'는 표현을 참 좋아해서 하는 말이다. 보기 몇 가지 들어보자.
'전화 회담을 갖다, 접촉을 가지다, 긴급회의를 갖다.' 영어로는 have a telephone talk, make contact with, have an urgent meeting 정도가 되겠다. 우리말로 다시 바꿔보자. 전화로 회담하다, 접촉하다(만나다), 긴급히 회의하다.
이렇게 서술어만 써야 자연스러운데 왜 거추장스러운 목적어를 붙였을까. 명사나 명사구(名詞句)로 이뤄진 목적어가 서술어와 결합하는 구조가 같아 영어 영향을 의심할 만한 표현이 많아도 너무 많다. ▶기사 더보기
'유승민 복당… "쿠데타" 반발한 親朴.'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 여당 간판을 얻지 못한 7명이 당을 뛰쳐나갔다. 그들의 금의환향(錦衣還鄕)을 허용한 '비대위' 결정에 당내에서 일어난 반발을 신문이 그렇게 표현했다. 실제로 '한 친박 핵심 관계자는 (중략) "이건 쿠데타와 다름없다"'고 했다. 간신히 당권(黨權)을 다시 쥐었다고 여긴 쪽에서는 위험천만하다고 여겼겠다. 그러니 무법(無法)하다느니, 탈법(脫法)적이라느니 하는 말로 성에 찰 리가. 가뜩이나 신문 안 읽는 세태인지라, 이런 강렬한 제목 마다할 언론사 또한 얼마나 있겠나.
종전(終戰)이 아니라 정전(停戰) 중인 나라답다고 해야 할까. 우리 대중 매체의 말과 글은 늘 험악하고 전투적이다. 쿠데타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전쟁(戰爭)'놀이도 심심치 않게 구경할 수 있다. ▶기사 더보기
껌으로 크기 시작한 어느 대기업집단이 바로 그 신세가 됐다. 국내에 거느린 회사만 열 손가락을 아홉 번 넘게 꼽아야 한다는데, 그 위세와는 딴판으로 남우세스러운 속살을 거듭 드러냈다. 기어이 창업주 맏딸인 그룹 장학재단 이사장이 구속됐다. 그는 '4개 계열사 사내이사와 ~ 3개사 기타 비상무이사를 맡고 있다.'
여기서 뭔가 걸리는 말, 4개 계열사, 3개사, 어색하다. 왜 그럴까. 국립국어원 사전은 예시문의 '개(個)'에 해당하는 풀이를 '낱으로 된 물건을 세는 단위'라고 했다. 물건은 '일정한 형태를 갖춘 모든 물질적 대상'이다. 하지만 기업이 물건은 아니다. 말이나 글을 늘 축자(逐字)적으로만 따질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계열사를 학생으로 바꿔 쓴다면 '네 학생'을 '네 명 학생'이라고 한 꼴이다. 입으로는 하지 않는 표현이다. 글이라고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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