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술자리 重言復言을 닮은 겹말 표현들
목 축이느라 한잔, 반갑다고 한잔, 권하니까 한잔, 분위기 좋아 한잔, 취해서 한잔, 아쉬우면 또 한잔….
가까운 사람들끼리 수작(酬酌)하노라면 핑계도 많다. 사회생활로 팽팽해진 정신 줄 어지간히 풀어놓을 수 있어 좋다.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암만 떠들어도 큰 트집 안 잡혀 좋고. 시답잖은 입씨름이 달아오를라치면 알코올이 '필름'을 뺏어버린다. 하여, 그 자리에서 한 얘기 또 하고, 다음에 만나 또 하고. 말 그대로 중언부언(重言復言)인데….
말짱한 일상이라고 없을쏘냐. 특히 신문·방송의 중복 표현, 넓은 의미의 겹말이 그렇다. 지난번 다룬 합성어보다, 두 낱말 이상인 구조가 더 흔하다.
"이란 선수는 모두 체력이 다 방전됐군요." 지난여름 리우올림픽 남자 마라톤. 엉금엉금 결승선을 넘은 모라디 선수를 가리켜 중계방송 진행자가 한 말이다. 체력이 떨어졌다는 뜻으로 쓴 방전(放電)은 그렇다 치고 '모두/다'가 겹치고 말았다. 강조하는 뜻으로 그럴 수도 있으려니와, '~거나 또는, 한참 동안, 위에 올려놓다, 다시 돌아오다'처럼 엄연한 고유어 겹말이다.
흔하기로는 고유어와 한자어 겹치기가 으뜸이다.
'국가 경쟁력을 깎아 먹는 이유는 주로 노동 부문 경쟁력이 두드러지게 낮기 때문이다.'
'초여름부터 나오기 시작하는 다슬기는 주로 계곡-하천의 돌, 바위틈에서 자란다.'
'이유/때문, 부터/시작'이 부딪친다. 이럴 땐 '깎아 먹는 것은 ~ 때문' '초여름부터 나오는/초여름에 나오기 시작하는' 해야 자연스럽다. '다시 재발, 이미 예견, 서로 상생, 눈으로 목격, 매년 가을마다, 가속이 붙다, 접수 받다'가 같은 무리다.
'사전 예약, 각 회사별, 진위 여부, ~에 대해 대처, 최소 ~이상, 피홈런 허용, 전체가 만장일치로' 따위는 한자어끼리 겹친다.
문장부호의 뜻을 생각지 못한 중복도 있다. '주택 구입자가 가장 많이 늘어난 연령층은 55~59세 사이로 ….' 물결표(~)가 '어디부터 어디 사이'를 가리키므로 '55~59세로/55세와 59세 사이로'가 맞는다.
술꾼의 중언부언이 마음가짐 흐트러진 탓일진대, 대중매체의 중언부언도 바르게 말하고 쓰려는 마음가짐 흐트러진 탓 아닐는지. 그러고 보니 중언부언마저 겹말인데, 어쩌랴.
'양해원의 말글 탐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료시킨다'고, 누구한테? (0) | 2023.02.27 |
---|---|
'가을비 우산 속'에서 잊어버린 것 (0) | 2023.02.20 |
입소문과 소문의 차이 (0) | 2023.02.08 |
우리말글 탐험 (0) | 2023.01.20 |
'다르다' 하면 될 걸 왜 相異하다 하나 (0) | 2023.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