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세상으로 내려가는시냇물(산문)

아직도 창동 살아요 !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11. 23. 23:20

아직도 창동 살아요 !
나호열


고향이 어디야? 그게 뭔데?

오래 전 생활문화사 시간에 ‘현대문명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소제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소련(지금의 러시아)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몽고에 자본주의가 유입되면서 유목민들에게 거의 자급자족의 형태로 영위되었던 목축이 재산 축적의 수단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들이 기르던 양(羊)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초지가 부족해지고 풀이 자라던 지역이 사막화되면서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에도 황사가 심해졌다는 이야기 끝에 몽고 사람들의 주거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아마도 수 천 년 동안 유목민들은 한 곳에 정주하기보다는 게르(Ger)나 빠오(包)라는 이동천막에서 생활하였기에 풀이 있는 곳, 광대한 자연이 그들의 고향이고 집이었던 셈이다. 고향이 어디냐고 한 학생에게 질문 했더니 그 학생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내게 다시 물었다. “그게 뭔데요?” 고향(故鄕)이 무슨 뜻인지 사전을 찾아보라고 하였더니, ‘태어나 자라난 곳. 또는 제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이라고 읽어준다. 그 순간 태어난 곳, 자라난 곳, 제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이 각각의 새로운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6.25 전쟁으로 피난지 부산에서 태어났으나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서울에서 살아왔다. 또 몇 백 년 동안 조상들이 대대로 살고 묻힌 곳은 금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충청도 어디쯤이다. 나의 아버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그 곳이니 내 연배쯤의 사람들에게 다시 물어보면 ‘그럼 당연히 당신의 고향은 충청도이지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아래 대(代) 연배, 그러니까 80년대 이후 태생인 세대로 내려가 보면 각기 다른 여러 대답이 나올 것이다. 태어난 곳은 병원이고, 이 곳 저 곳 옮겨 다니며 산 사람들에게 고향은 어딜까?, 오랫동안 한 지역에 정주한 부모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곳을 고향이라 할 수 있을까?

해방이후의 전쟁과 혹독한 가난 속에서 농업 위주의 삶은 급속하게 산업화 사회로 뒤바뀌었다. 70년대 6 할이 넘었던 농어촌 인구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20%가 안 되고, 이른바 도시화의 그늘 속에서 빈번한 이주(移住)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버렸다.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둘 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를 넘어 세 째 아이는 아예 건강보험에도 올리지 못하는 우스운 일도 있었고, 주식(主食)이었지만 턱없이 부족한 쌀 생산을 보완하는 혼식 장려 정책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지금이야 흔하디 흔한 라면은 고급식품이고 각급 학교나 음식점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한 끼를 보리나, 조, 콩을 섞지 않으면 벌을 받는 그 시대가 바로 몇 십 년 전 일이다.

아무튼 올 해에 들어 죽는 이 보다 태어나는 아이들이 적은 인구 감소가 시작되고, 쌀이 남아 곳간에 보관하기조차 힘든 풍요의 시대가 오리라 예상했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른 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이 풍요의 뒷면에는 정처 없는 삶, 마음에 돌아가고 싶은 곳이 없고, 돌아가고 싶어도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무상함에 어쩔 수 없어 하는 것이 오늘의 안타까움을 누가 헤아리겠는가?

나는 선친의 근무지를 따라, 군산과 광주를 거처 5 살 때 서울로 왔다. 시내에 잠시 살다가 6.25 전상(戰傷) 후유증으로 공기 좋고 휴양하기 좋은 조용한 곳을 찾던 아버지는 정릉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나라 공공주택 공급기관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일제에 의해 설립된 조선주택영단은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주택영단으로 개칭되었는데, 대한주택영단이 지금의 국민대학교 아래 산기슭에 조성한 양옥으로 지은 이른 바 부흥주택으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조금 설명을 보태면 오늘날의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전신이 대한주택영단이다. 그로부터 나는 청소년기를 그곳에서 보냈다. 아랫 마을은 전통적인 마을로 논과 밭을 일구며 사는 촌락이었기에 뒷산에는 꿩이 날고, 노루 뒷발질에 갈비뼈가 부러진 친구도 있었고, 한꺼번에 불어난 유입 인구 때문에 지금의 초등학교인 아리랑 고개 아래 숭덕 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만 명이 넘는 아시아에서 제일 학생 수가 많은 학교로 회자되기도 했다. 북악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지금의 국민대학교 건너편 마을이 배밭골이었는데 여름철 개울물이 넘치면 학교가 코 앞 인데도 등교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초여름에는 아카시아 꽃잎을 따 먹고, 논에서 메뚜기를 잡아 구워 먹었으며 북한산 보현봉(普賢峰)이 놀이터가 되는 전원생활(田園生活)의 즐거움을 누렸다. 아랫마을 어르신이 돌아가면 뒷산으로 상여가 올라가고 청수장 계곡의 맑은 물은 수영의 기초를 배우는 수영장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런 기억을 잊지 못한다. 내가 다녔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하교 교가(校歌)는 모두 ‘북한산’이나 ‘삼각산 묏뿌리’로 시작했음은 고희를 바라보는 이 나이까지 인자요산(仁者樂山)의 덕을 일깨우는 자양분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일 년에 몇 번은 선대가 잠들어 있는 성묘를 간다. 그러나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정릉 3동 681번지 61호, 가끔 모르는 척 그 곳을 지나쳐가면 내가 살던 그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장자(莊子)가 말한 이상향,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 그 곳임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쁘게 받아들인다.

아직도 창동 사세요?

택시를 탔는데 아는 분의 아내였다. 대학입학을 앞둔 자식의 학원비가 만만치 않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사는 곳이 어디냐는 말을 주고 받았다. 창동에 산다고 하였더니 “아직도 창동 사세요?” 라고 의아해 하는 말이 되돌아 왔다. 적어도 한 생애에 서너 번은 목 좋은 곳을 찾아 집을 옮겨야 재산도 늘어나는 법이라면서 아이들 교육을 위해 자신은 강남으로 이사를 했다고 하면서 나의 근황을 물었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33년째 창동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여야 하는 조금 특수한 상황 에 놓인 까닭에 직장 가까운 곳으로 옮기다보니 지금의 이곳으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내게는 값이 오를 것 같은 경제적 효용, 소위 8학군 같은 교육의 필요 같은 공간에 예속되기 보다는 집과 직장을 오가는 시간과의 싸움이 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야간통행금지에 걸리지 않고 빠른 시간 안에 집에 돌아와 눕는 일! - 해방이후 미 군정청에 의하여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일반인들의 통행을 금했던 야간통행금지는 1982년 1월5일에 폐지되었다.

1988년은 올림픽이 열리던 해였고, 상계지역과 창동역 동쪽에 아파트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현재의 서울 지하철 4호선 상계 – 한성대 입구 역 구간이 1985년 4월에 개통되고 성북 역(현재 광운대역)까지 운행되던 1호선 전철이 같은 해 8월에 창동 역 까지 연장되는가 하면 서울 북부와 강남을 관통하는 장장 33킬로미터에 이르는 동부간선도로가 착공되면서 새로운 주거지로서의 면모가 갖춰가기 시작하였다. 논과 밭이 있던 중랑천 너머의 노원 들판과 제지공장과 건축 자재를 만드는 공장이 드문드문 자리 잡았던, 그 옛날 개구리 잡으러 다녔던 동네에 새로운 주민이 된 것이 1988년 12월이었다. 단지 빠른 시간 안에 출근하고 빠른 시간에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그 이유 하나로 나는 창동 주민이 되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자식들이 자라고 그 아이들이 또 다른 주민이 되어 같은 동네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대를 이어 살아가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이 지역에는 우후죽순으로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몇 대에 걸쳐서 살던 어떤 원주민들은 토지 보상금을 받아 떼부자가 되었다고 하고 또 어떤 원주민들은 땅 한 뙈기가 없어 철새처럼 떠나는 희비(喜悲)가 교차하는 현장의 한복판으로 나는 아무 책임 없이 이주해 왔다. 창동을 포함한 상계지역과 사당동 지역이 새로운 베드타운으로 변모해 가면서 야기된 신도시의 우울을 보고 느끼면서 나는 시집『칼과 집』(1993)을 통해서 집의 의미를 나름 탐색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 연작시의 한 편을 소개해 본다.

몽고를 꿈꾸다
- 상계동· 25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
그들은 집을 사고 팔지 않는다
그들은 집을 가지고 이사를 다닌다
그들은 투기를 모르고
그들은 전세도 월세도 모른다
그들은 야크와, 양과 말들과 함께
초원에서 초원으로 이사를 한다
그들은 파오라는 집을 접어서 힘센 니귀에 싣고
철새처럼 무리지어 함께 이사를 한다
그들은 초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들의 양식이 되어주는 가축을 식구처럼 가까이 한다
그들은 하늘과 가장 가까이 사는 사람들
그들도 우리와 같이 몽고족이다

 

창동(倉洞)이라는 곳

지명(地名)은 선대(先代)의 삶을 깊숙하게 담고 있다. 창동 역시 여러 자료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양곡창고가 있어 붙여진 지명이지만, 신석기 시대를 비롯한 청동기 때의 유물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창동역 서쪽 출구(2번 출구)를 나와 안 쪽 골목을 더듬어 북쪽으로 올라가면 창동 초등학교가 있고 담장 앞에 창동리(倉洞里)표지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창동의 중심지역은 창동역의 서쪽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래 전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창동의 삼 사자로 불리는 정인보, 송진우, 김병로 선생이 거주했던 곳도 바로 그곳이다.

조선시대의 창동리 표지석

새로 세운 표지석

창동 이정표


나는 창동역 동쪽 출구를 나와 철로와 나란히 서 있는 아파트에 산다. 지금은 방음방지역이 높이 세워져 있어 옛날의 창동 역사(驛舍)를 볼 수가 없지만 1911년 일제에 의해 서울에서 원산으로 가는 경원선이 생기면서 함께 세워진 조그만 역사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1985년 4호선 지하철이 개통되면서 새 역사를 만듦으로서 철거된 이 역사는 군산의 임피역과 같은 구조이다. 일제 시대에는 우이동 계곡의 벚꽃놀이를 가는 종착역이었고 6,70년대에는 창동역 북쪽 지역의 한국제지 물류공장, 동아건설 창동공장의 화물을 운반하는 화물역이었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창동역 주변에 유난히 동아건설이 시공한 아파트가 많은 것도 그런 사연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창동역 예전 사진) 또는 (군산 임피역 사진)


내가 예전의 창동 역사를 처음 본 것은 70년대 초 신병훈련을 마치고 101 보충대 – 지금의 의정부시 호원동 건영아파트)로 가기 위해서 용산역에서 망월사 역으로 가는 전동차에서였다. 아담하고 하얀,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우리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시골역의 한적한 풍경은 사라지고 지금은 하루 평균 6만 명 이상이 오르고 내리는 번잡한 역이 되어버렸지만 내 마음 속에는 여전히 그 옛날의 창동역이 오롯이 살아 숨쉬고 있다. 그렇게 매일 오가는 창동역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인간의 탐욕으로 빚어진 보기 흉한 창동역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아쉬움도 크다. 역사 驛舍의 현대화를 모토로 2005년 1호선 승강장 위에 10층 규모의 건물을 세우고, 쇼핑몰을 필두로 한 각종 문화시설을 만들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15년이 지나도록 30%의 공정을 넘어서지 못하고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흉물(凶物)로 퇴락해 가는 모습을 대하여야 하는 안타까움이 더해가는 것을 어찌해야 할까!


이마트 E-mart

(이마트 사진 )


80년대 이후 창동의 신 시가지는 창동역 동쪽 지역, 즉 중랑천을 끼고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유휴지에 집중되었다. 공장이나 공터로 남아 있던 1호선 녹천 역에서 부터 도봉산 역에 이르기까지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중랑천을 사이에 두고 노원지역과는 이격되어 있었기에 같은 생활권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중랑천을 건너다니게 되는 다리들도 건설된 시기는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도봉동과 상계동을 잇는 노원교는 1970년, - 그 이전에는 나룻배?- 방학동 사거리에서 상계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는 상계교는 1979년에, 창동역 동측에서 노원구청 방면으로 이어지는 창동교는 4호선 전철 개통과 동부간선도로 착공과 함께 1988년 8월에야 개통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초창기 창동 지역의 상업지역은 창동역 동측보다는 서측에 집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맞이했다는 오늘날의 경제적 풍요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급격하게 바꿔 놓았다. 아파트로 상징되는 거주문화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소비문화 또한 서양의 양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시장, 또는 장터로 뜻풀이가 되는 이마트(E-mart) 또한 그러한 발전된 생활문화의 결과물로서 승용차의 보급 확대로 다량의 상품을 한꺼번에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다는 매력과 과거의 전통시장이 보여주지 못했던 상품의 다양성, 접근의 편리성, 청결함을 함께 갖춘 소비의 장소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마트 창동점을 이용하면서도 이마트 1호점이 창동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1993년 11월 12일 아마트가 개장되었던 그 날을 기억해 보자. 예전에 보지 못했던 천장까지 닿아있는 창고형 할인 매장은 싼 값으로 원하는 상품을 대량구매를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취향으로 경이롭게 다가왔다. 하루하루 장을 볼 필요 없이 일 주일에 한 두 번 나들이 겸 쇼핑을 즐긴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세계화의 영향으로 자본이동의 다국적화가 일상이 되어버린 오늘과 달리 아시아 최초로 순수 우리 자본으로 할인 매장을 열었다는 민족적(?) 자부심이 한 것 부풀어 오르기도 하였다. 앞 다투어 월마트, 킴스클럽, 프라이스 등 외국 기업들이 속속 등장하였으나 이마트는 한국인의 생활 방식에 알맞는 대형 할인매장으로 당당히 매출 1위의 매장으로 우뚝 서게 되었던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 온라인 쇼핑과 같은 새로운 소비 행태가 자리잡으면서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는 위기에 처해 있고, 지금은 인근에 창동점보다 몇 배나 큰 이마트가 있긴 하지만 왠만한 생필품을 구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또한 이마트를 중심으로 형성된 주변에는 음식점, 병의원, 옷가게 등 많은 점포가 들어서 있어 늘 활기찬 인파로 넘실거린다. 어느덧 삼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창동 이마트는 오늘도 그 자리에 오래된 친구로 넉넉하게 서 있다.

창동이 왜 좋아요?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면 삼각산(인수봉, 백운대, 만경봉)이 한 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 도봉산 만장봉이 하얀 절벽의 기개를 보여준다. 저녁이면 서쪽 하늘에 노을이 산자락에 걸쳐 하루의 피로를 씻어준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는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의 이야기는 내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평생을 북한산과 도봉을 바라보며 살면서 비록 어진 사람은 되지 못하였으나 어진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발심(發心)을 잊어본 적이 없다. 산이 내게 주는 우뚝한 기개는 삶의 풍상(風霜)에 노여워지는 마음을 가라앉혀준다. 어릴 적 보현봉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저 너머엔 어떤 마을이 있을까?’ 궁금했었다. 그리고는 그 호기심을 버리지 못해 그 너머로 갔을 때 그곳에도 마을이 있었고, 일찍이 보지 못했던. 또 다른 북한산의 모습을 목도하면서 이 세상을 외눈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되겠다는 얼치기 깨달음을 얻게 된 것도 나에게도 기쁜 일이다. 세상은 숨 가쁘게 변화하고 있다. 창동역 주변에 문화창업단지가 생기고, 대형공연장이 들어서며, 광역철도가 창동역을 경유한다고 하면서 삼십년이 넘은 아파트가 금값이 되어간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본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이 자리에 멈추기를 바라는 순간 늙어가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반드시 변화가 삶의 기쁨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래 전 케나다의 어느 마을에 발걸음을 멈추었을 때 마을의 전경을 담은 사진을 보았다. 백 년 전의 흑백사진에 담긴 마을은 오늘의 마을 모습과 비포장 흙길이 아스팔트길로 바뀐 것 이외에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삼십년이 지나면 노후 되었다고 재건축을 서두르는 우리의 삶,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인지 나는 모른다. 단지 나는 경제적 이유로, 자연이 주는 위안 때문에 창동에 사는 것이 아니다.


오래된 친구들

600세대의 우리 아파트에 준공 때부터 거주하는 이른바 원주민은 몇 세대 되지 않는다. 파릇한 삼십대에 들어와서 고희를 앞둔 지금에 이르러 아파트도 낡아가고 여기저기 수선할 곳이 많아진다. 낯 선 젊은 세대들이 다수를 차지하면서 예전의 풋풋하고 정감이 있는 이웃들은 만나보기 힘들다. 사소한 발소리 층간 소음으로 다투고, 차를 밀기 싫어 빈 주차공간이 있어도 일열 주차를 하며,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리고, 가래침을 퉤퉤 뱉으며 부끄러워 하지 않는 사람들, 같은 엘리베이터에서 몇 년을 마주쳐도 인사 한 번 하지 않는 안타까움이 나를 자꾸 먼 옛날로 나를 데리고 간다. 아래의 시는 익명의 삶, 이기적 삶에 길들여지면서 무너지고 사라지는 두레의 기억을 되살리게 해준다.

상계동 . 24

옆집 아무개씨가 이사를 간다삼 년 동안 내왕이 없었으므로 그가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는 지 알리가 없다단지 트럭에 실리는 장농을 보며천 만원 짜리 통영자개장이라는 수근거림에그가 부자였다는 사실과 그런 부자와 나란히삼 년을 살았다는데 신기함을 느낀다불편함 없이, 기죽는 일 없이그가 고깃국을 먹을 때 김치찌개를 먹었다 하더라도우리는 얼마나 편안 했던가잠시간이었다 하더라도 얼마나 평등 했던가우리의 죽음이 그러하듯홀로 먹이를 찾아 허공을 배회하는 독수리처럼평생을 이고, 지고 다닐 짐들이작별의 아쉬움도 없이 떠나가는손 없는 날의 오후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본다. 몇 명 남지 않은 원주민 어르신이 타고 있는 휠체어를 밀기도 하고, 도어 록의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아랫 집 할머니를 대신해 멀리 있는 아드님에게 전화를 대신 걸어주기도 한다. 30년 동안 한 자리에서 구두수선을 하며 풍문으로 듣기로 자식들을 의사로 키웠다는 이야기와 이동트럭에서 단속반원에 이리저리 쫓기며 만두를 빚어 팔다가 이제는 구청의 허가를 받아 반듯한 이동점포를 얻어 동네의 명물로 떠오른 즉석만두집 띠 동갑 상계동 아주머니와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기도 한다. 내 머리의 특징을 알고 능숙하게 머릿결을 다듬어주는 최 사장도 머리가 희끗해지고 이제 회갑이 다가온다. 쉽게 떠나고 쉽게 잊어버리는 익명의 사회에서 나는 그들에게, 그들에게 나는 함께 남은 인생을 걸어가는 든든한 동행인 것이다. 개미처럼 부지런하게 살아온 사람들!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새벽 첫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험하고 힘든 일을 노동이 아니라 놀이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들이 창동에 산다. 그래서 창동은 나의 고향이고 고대광실 나의 집이다.


자수성가 自手成家

어쨌든 집은 튼튼해야 하며
온갖 풍상에도 견뎌야 한다고
마치 뜻을 세우고
미래를 자로 재듯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으리라
호언했다

법이 바뀌고
바퀴가 없는 역사는
파괴와 건설의 널뛰기를
계속해도
어느 시대에도 변덕이 없는
집이 있다
개미떼들!
그리고 노동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