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나 죽으면 눈알을 빼서 문루에 걸어라. 망국 꼬라지를 보리라"
조선일보 박종인 선임기자입력 2020.05.26 03:14 | 수정 2020.05.26 10:57
[214] 소현세자 부부의 일생 ③강빈의 저주와 김홍욱의 기개
소현세자 사망 두 달 뒤 봉림대군 세자로 책봉
인조, 강빈과 주변 인물 제거… '강빈'은 언급 못 할 금기
효종 5년 극심한 가뭄에 "뭐든 말해도 좋다" 교지
황해감사 김홍욱 "가뭄은 강빈의 恨" 상소
곤장 맞고 죽으며 "내 눈알을 문루에 걸라… 나라 망하는 꼴 보겠다"
서인 세력, 줄기차게 김홍욱 복권 요구
효종 8년 송시열 상소 "8년 동안 나라 개판 됐다" "김홍욱 복권하라"
서인 협력 필요한 효종 결국 굴복하고 협조
2년 뒤 효종 죽으며 완성된 서인 세상
김홍욱은 훗날 노론 벽파의 정신적 시조
효종이 등극하고 5년째인 1654년 조선에 변괴와 재난이 잇따랐다. 하늘에서는 대낮에 금성이 수시로 나타나 태양처럼 빛을 발했다. 영남에는 붉은 비가 내리고 관동에는 붉은 눈이 내렸다. 홍수로 궁궐 안까지 도랑물이 넘쳐 사람이 숱하게 죽었다. 수백 리를 사이에 두고 가뭄과 홍수가 이어졌다. 그해 칠월칠석 날 황해감사 김홍욱이 보낸 재난 대책 보고서가 조정에 도착했다. 받아든 효종이 이리 말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 자를 잡아오라."(1654년 7월 7일 '효종실록') 엿새 뒤 창덕궁 인정문 앞에서 황해감사는 물론 감사 이송에 시간을 지체한 금부도사 이이형까지 고문을 받았다. 사흘 뒤 감사 김홍욱은 곤장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그날 제주에 큰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봉림대군 세자 책봉 회의
1645년 2월 18일 심양을 떠난 소현세자 일행이 서울에 도착했다. 4월 26일 세자가 급사했다. 5월 14일 심양에 있던 둘째 봉림대군이 귀국했다. 그가 아버지 인조에게 인사할 때 금중(禁中·궁궐 안)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보았다. 실록에는 '국본(國本·새로운 세자)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데다 본디 훌륭한 명성이 있어 상이 그에게 뜻을 두고 있다'고 적혀 있다.(1645년 5월 14일 '인조실록')
두 달 뒤인 윤6월 2일 봉림대군이 차기 세자로 전격 결정됐다. 인조는 소현세자 맏아들 석철 대신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리겠다고 했다. 이날 인조는 조정 대신 16명을 출석시키고 회의를 열었다.
인조가 말했다. "원손(元孫)이 자질이 밝지 못하여 결코 나라를 감당할 만한 재목이 아니다." 원손을 가르치는 스승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가르칠 때 재기가 보였다"(이식) "아직 어려서 잃을 덕망이 없다"(김육) "어린 소년에게서 어찌 미래를 미리 볼 수 있나".(이경석) 그러자 인조가 말을 바꿨다. "현명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를 말한 것이다." 원손 석철은 아홉 살이었다. 똑똑하다고 하면 인조는 어리다고 시비를 걸었다. 어려도 충분하다고 하면 총기가 없다고 대꾸했다. 정해진 결론을 포장하는 무논리였다. 그 무논리에 회의 참석자 16명 전원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이미지 크게보기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에 있는 학주 김홍욱 부부 묘소. 지난달 발생한 산불에 송림(松林)은 누렇게 타고 나뭇가지는 숯덩이가 됐다. 묘소는 타지 않았다. 김홍욱은 가뭄이 극심하던 효종 5년 강빈 옥사 재조사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곤장에 맞아 죽었다. "가뭄 극복을 위해 무슨 말이든 상소하라"는 효종 교지에 따른 상소였다. 김홍욱의 마지막 말은 "(무슨 말이든 수용한다는 교지에 따라 상소한) 내가 죽으면 내 눈알을 파내 문루에 걸라"였다. "죽어서도 나라 망하는 꼬라지를 지켜보겠다"고 했다. /박종인 기자
느닷없이 김자점이 끼어들었다. "깊고 원대한 성상 생각에서 나온 뜻이니 미룰 필요가 있겠습니까." 인조는 "그 말이 옳다"며 크게 기뻐하더니 결론을 내렸다.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노라." 김자점이 기다렸다는 듯이 "승전(承傳·비서)을 받들까요?"라고 하니 좌우에서 모두 속으로 웃었다. 실록 사관은 이들을 '임금 뜻을 미리 알아 비위를 맞추는 소인들'이라고 불렀다.(1645년 윤6월 2일 '인조실록') 그렇게 봉림대군은 세자가 되었고 4년 뒤 봄날 왕이 되었다. 이날 어전회의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대표적인 아첨배 회합이었다.
금지된 이름, 강빈
그날부터 그해 9월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되기까지 석 달 동안 강빈의 남자 형제 4명은 제주, 진도, 흡곡(歙谷·강원도 통천), 평해(경상도 울진)로 뿔뿔이 유배형을 받았다. 강빈을 시중하던 궁녀들도 귀양을 가거나 맞아 죽었다. 강빈은 인조가 먹을 전복에 독을 집어넣고, 무속을 끌어들여 인조를 저주한 혐의를 받았다. 임금 수라상에 어떤 방식으로 독을 넣었는지는 아무도 밝히지 못했다.
이듬해 2월 강빈이 사약을 받았다. 이후 재조사에 들어간 강빈 사건에서 추가로 처형된 사람은 애순, 가음금, 복기, 돌쇠, 옥남, 끝덕, 끝향, 자근춘, 자근개, 종생, 순례, 최득립, 종례, 예옥 14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불복하고 죽었다.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인조가 말했다. "지난해 강빈 무리가 곤장 맞고 죽은 뒤로는 환절기면 으레 아프던 증세가 재발하지 않아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1647년 4월 25일 '인조실록') 손자 셋은 모두 제주도로 쫓아버렸다. 두 아이는 거기서 죽었다. 이후 강빈 사건은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금기가 되었다.
효종의 즉위와 서인들의 반격
강빈은 인조가 낙점한 남인 윤의립의 딸을 배척하고 서인이 실질적으로 간택한 세자빈이었다. 선친 강석기는 율곡 이이의 수제자로 서인(西人) 혈통을 만든 사계 김장생 문인이었다.〈2020년 5월 19일 '땅의 역사' 참조〉 궁궐에 진동하는 피비린내와 간신 김자점 혓바닥이 침묵을 불렀지만, 서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재위 3년째인 1652년 4월 26일 부교리 민정중이 상소를 올렸다. 효종이 내린 교지에 답하는 상소다. 국왕이 의견을 수렴하는 교지에 답하는 상소를 '응지상소(應旨上疏)'라 한다. 응지상소자에겐 면책특권이 부여된다. 민정중은 "형제 인륜을 위해 강역(姜逆·역적 강빈) 사건을 재조사하라"고 했다. 효종은 민정중을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중죄를 면하기 어려우나 내가 구언(求言)을 했으므로 용서한다." 강빈이 신원되면 제주에서 살아남은 막내 조카 석견과 왕권 다툼이 벌어질 위험이 있었다. 두 달 뒤 효종은 두 번 다시 강빈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엄명했다.(1652년 6월 3일 '효종실록')
넉 달 뒤 승정원 승지 겸 참찬관이 왕에게 이리 말했다. "성상께서 화가 나시면 지나칠 때가 많다. 말에 난 흠은 고칠 수 없으니 분노에 대해 더 노력하시라." 이 간 큰 승지가 김홍욱이다.
황해 감사 김홍욱의 죽음
1654년 조선에 큰 가뭄이 들었다. 효종은 전국에 교지를 내리고 재난 극복 대책을 물었다. 효종은 "말이 거칠거나 참람하더라도 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미지 크게보기경기도 여주에 있는 효종릉 영릉(寧陵). 세종대왕릉인 영릉(英陵)과 맞닿아 있다.
그때 황해도 감사였던 전 승지 김홍욱이 응지상소를 올린 것이다. "(재해 원인으로) 강옥(姜獄·강씨 옥사)이 가장 의심스럽다.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녀가 불측한 역모를 했겠는가. 지어미가 품은 원한에도 3년간 가뭄이 들었는데, 지금 강씨 가족이 당한 죽음은 지어미 원한 정도가 아니다."
효종 가슴속에서 강빈 금기령이 응지상소 무죄 원칙을 이겼다. 김홍욱은 그날로 서울로 끌려와 효종이 보는 앞에서 고문을 당했다. 효종은 거침없이 말을 토해내는 김홍욱을 서둘러 고문하라고 명했다. 김육(영의정), 이시백(좌의정), 심지원(우의정)이 "성상의 덕에 손상이 간다"며 만류했다. 효종이 대꾸했다. "후세에 악명이 있더라도 내가 책임진다." 왕은 주저하는 수사관들에게 고문을 재촉했다. 김홍욱이 주변에 있던 정승과 대신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너희들은 왜 말하지 않는가!" 다음은 실록 기록이다.
'홍욱이 곤장을 견디지 못하여 대신과 삼사를 부르면서 부르짖었다. "말한 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 나 죽거든 눈을 빼내 도성 문에 걸어라. 나라 망해가는 꼬라지를 보리라(自古殺言者 而國有不亡者乎 死後抉吾目 懸都門 見國家之危亡矣·자고살언자 이국유불망자호 사후결오목 현도문 견국가지위망의)."' 고문 사흘 만에 김홍욱이 죽었다. 효종은 스스로 김홍욱과 절친하다고 한 보덕 이상일을 파면하고 김홍욱은 관직 삭탈, 가족과 친척은 임용 금지 처분을 내렸다.(1654년 7월 17일 '효종실록')
서인의 권력 장악과 효종의 죽음
이후 서인들 상소와 발언이 이어졌다. '김홍욱이 죽은 뒤 모두들 두려워하여 언로(言路)가 끊기려 한다'(11월 2일 '효종실록')는 내용이 주였다. 효종은 서인에게 폭군으로 낙인이 찍혔다. 추진했던 북벌(北伐)은 엔진이 꺼져갔다. 타개책이 필요했다.
3년 뒤인 1657년 1월 마침내 효종은 서인 태두 송준길을 조정으로 불렀다. 화해 제스처다. 송준길은 등용을 거부했다. 송준길은 그해 8월에야 찬선으로 입궐했다. 함께 임용된 송시열은 등용과 사직을 반복했다. 갑과 을은 바뀌어 있었다.
8월 16일 마지막 사직과 함께 송시열이 봉투를 풀로 붙인 봉서를 보냈다. 이른바 '정유봉사(丁酉封事)'다. 본문 내용은 "지난 8년은 왕이 조그마한 공효도 없는(無尺寸之效·무척촌지효) 개판"이었고, 18개 개선 사항이 부록으로 붙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항목이 김홍욱이었다.
'좋은 말을 구한다고 해놓고 죽인다면 뒷날 나라가 망할 일이 닥쳐도 누가 말을 하겠는가.' 두 달 뒤 효종은 김홍욱 일족에게 내렸던 임용 금지처분을 해제했다.(1657년 10월 18일 '효종실록') 2년 뒤 눈보라가 치던 봄날 김홍욱 관작을 회복시켰다.(1659년 3월 27일 '효종실록') 석 달 뒤 효종이 죽었다.
효종을 내려다본 서인들
서인에게 조선 왕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왕은 명나라 황제밖에 없었다. 조선 국왕은 제1사대부에 불과했다.
송시열은 효종이 죽었을 때 이조판서였다. 준비된 관을 꺼내보니 너비는 두 치가 부족하고 길이도 효종 몸보다 작았다. 송시열은 널판을 덧대 급조했다. 사관(史官)은 "덧판으로 관을 만들면서 자기 실정이 탄로날까 봐 염을 다시 하자고 청하지 않았다"고 했다.(1659년 5월 6일 '현종실록') 이듬해 송시열은 "효종은 둘째 아들이므로 3년상이 아니라 1년상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해 관철했다.(1660년 4월 18일 '현종실록') 산 서인이 죽은 효종을 굴복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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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욱의 7대손이 추사 김정희다. 김홍욱은 노·소론으로 갈라진 서인 세력에서 노론 벽파의 정신적인 시조가 됐다. 숙종 때 기사환국(1689년) 5년을 제외하고는 실세는 노론이었고, 끝까지 그리되었다. 한번 잘못 뿌린 씨앗이 온 밭을 칡넝쿨 천지로 만들어버렸다. 강빈의 저주도 그리 깊었다.
〈'소현세자 부부의 일생' 끝〉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26/20200526000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