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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홍대용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4. 28. 14:59

[박종인의 땅의 歷史] "중화와 오랑캐 모두 사람인데 어찌 구분이 있겠는가"

조선일보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04.28 03:14 | 수정 2020.04.28 09:49

[210] 反중화파 실학자 홍대용과 주춧돌만 남은 그 집터

실학 북학파 선구 홍대용, 청나라 연경 여행하며 폐쇄적인 중화주의에 반기
"청나라 선비들은 조선의 주자 맹신론을 후련하게 씻어버렸다"
"중화와 오랑캐는 같다" "공자가 조선에 살았다면 조선 춘추를 썼을 것"
혁명적 주장 담은 문집 '담헌서', 사후 156년 지난 1939년 출판… 사상도 전파 안 돼
1834년 일본 장인 구니토모, 망원경으로 일식 관찰
1869년 일식날 새벽 고종 하늘에 "용서를" 제사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에 있는 한 집터 주인 이야기다. 주인 이름은 홍대용이다. 1731년 태어나 1783년 죽은 실학자다. 그가 살던 그때는, 조선판 문예부흥기였다는 영정조 시대였다. 그 찬란한 시대에 그가 말했다. "중화와 오랑캐가 따로 있다더냐."(홍대용, '의산문답') 찬란한 시대를 이끄는 지도자 정조가 선언했다. "오랑캐가 중화를 멸하여 짐승의 시대가 되었다."(1779년 2월 14일 '정조실록')

석실서원과 노론 홍대용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석실서원은 병자호란 때 척화파 김상헌을 모신 서원이다. 김상헌은 극단적인 중화주의자였지만 그 후손들은 조금 달랐다.

나라가 안정되고 노론(老論)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충청도 화양서원의 송시열 파(호론·湖論)와 경기도 석실서원 파(낙론·洛論) 사이에 논쟁이 시작됐다. 낙론은 "짐승과 인간 심성이 같다"고 했고 호론은 "금수와 인간은 당연히 구분된다"고 했다. 같다고 하면 오랑캐 청나라와 중화 모국 명나라도 같아야 하고, 다르면 오랑캐와 중화는 당연히 달랐다. 반청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호론은 낙론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를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 한다.

이미지 크게보기충남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서길 95-16번지에 있는 담헌 홍대용(1731~1783) 생가터. 무성한 풀밭에 주춧돌들이 놓여 있다. 홍대용은 청나라 여행을 통해 조선 지식인 세계에 만연했던 교조적 중화론에 반기를 들었다. 요컨대 중국이나 오랑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 지도자들은 청나라 선진문명을 부정했고, 홍대용은 초야에 묻혀 살며 자기 주장 또한 초야에 묻어버렸다. /박종인 기자

 

홍대용은 천안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석실서원으로 찾아가 공부했다. 그리고 1765년 34세 때 작은아버지 홍억을 따라 청나라를 여행했다. 1774년 늦은 나이에 훗날 정조가 된 세자를 보필하는 정8품 말단 시직(侍直)이 되었다. 그 사이에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같은 개혁 노론과 불우하되 영민한 서얼들과 교류했다.

홍대용부터 박제가까지, 이 넷은 모두 청나라를 다녀온 사람들이다. 서울-경기의 비교적 개방적인 학문 풍토와 청나라 선진 문명 경험이 결합해 이들은 훗날 북학파(北學派)라는 중상주의 실학자들이 되었다. 홍대용은 박지원보다 여섯 살 많았다. '아버지는 항상 조선 사대부들이 이용(利用)과 후생(厚生) 학문을 소홀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홍대용이 평소 간직하고 있던 의견 또한 이와 같았다.'(박지원 아들 박종채, '과정록')

오랑캐 수도에서 각성한 홍대용

 

청나라 친구 엄성이 그린 홍대용 초상.

 

홍대용이 쓴 연경 여행기 '연기(燕記)'에는 홍대용이 겪었던 충격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서점가인 유리창(琉璃廠)에서는 한 점포 책만 수만 권이나 돼 책 이름을 다 보기도 전에 눈이 먼저 핑 돌아 침침해질 정도였다.(홍대용, '담헌서 외집'9 유리창) 가톨릭 성당에서 신부들과 만나 대화를 했고 파이프오르간을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 신부들은 홍대용에게 태양 흑점을 관찰하는 망원경과 나침반과 자명종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기도 했다.('담헌서 외집'7 유포문답)

그리고 홍대용은 연경에 과거 시험을 보러 온 선비 엄성, 육비, 반정균을 만나 성리학과 양명학과 서양 학문에 대하여 토론했다. 귀국한 홍대용이 기행문에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 유학자들의 주자 숭봉은 중국인이 따라올 바가 아니다. 그러나 의심되고 논란되는 점에 대해서는 그저 부화뇌동하여 한결같이 엄호하기만 하고 사람 입을 막으려고만 한다. 저들은 이 고루한 습성을 깨끗이 씻어 버렸다.'('담헌서 외집'3 건정록후어(乾淨錄後語)) 오랑캐 수도 연경에서 각성(覺醒)한 것이다.

'의산문답'에 담긴 불온한 사상

그 각성한 선비 홍대용이 쓴 글이 '의산문답(毉山問答·담헌서 내집 4권)'이다. 지구가 돈다는 지전론(地轉論)부터 우주는 끝이 없다는 무한우주론까지, 의산이라는 허구 산에서 허자(虛子·헛공부한 선비)와 실옹(實翁·참된 현자)이 대화를 나눈 우화집이다. 우주론과 세계론을 총동원해 한자 1만2395자로 쓴 이 글 결론은 불온하기 짝이 없다.

'서양이나 중국 할 것 없이 모두 옳은 나라(正界·정계)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어찌 내외의 구별이 있겠는가. 중화와 오랑캐는 같다(自天視之 豈有內外之分哉 華夷一也·자천시지 기유내외지분재 화이일야). 공자가 조선에 와서 살았다면 조선의 춘추(域外春秋·역외춘추)를 썼을 것이다.'

 

천안에 있는 홍대용 묘소.

 

'화이일야'와 '역외춘추'. 송시열이 구축한 소중화 조선에서는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아니 될 선언이었다. 게다가 역대 권력자들은 오로지 부귀영화를 누리며 이를 자손에게 전하기 위해 백성 이름을 들먹였다는 주장까지 들어 있었다. 자칫하면 사문난적과 역적으로 몰릴 지극히 불온한 사상이며 선전 선동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대용은 큰 벼슬없이 초야에서 무탈하게 살다가 1783년 10월 23일 중풍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세상 그 누구도 그 혁명사상을 읽지 못한 탓이다.

사후 156년 만에 출판된 혁명론

훗날 '의산문답'이 수록된 문집 '담헌서'가 납활자로 인쇄 출판됐다. 문집을 편집한 사람은 5대손 홍영선이다. 교열을 한 사람은 벽초 홍명희다. 서문을 쓴 사람은 위당 정인보다. 출간한 날짜는 서기 1939년이고 출판사는 '신조선사'다.

그가 죽고 156년 뒤, 조선이 망하고 식민시대가 근 30년이 흘러간 뒤에야 출판됐다는 말이다. 그전까지 이 혁명적인 선언문이 세간에 돌아다녔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연하 친구 박지원은 '책을 짓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未及著書·미급저서)'라고 추모했다.(박지원, '홍대용 묘지명') 박지원 아들 박종채 또한 홍대용이 학식이 정밀하고 심오했으나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한가롭게 지냈다고 했다. 따라서 그 논의가 미친 영향을 가늠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문중양, '천지와 인물에 대한 일탈적 우화', 의산문답, 2019, 아카넷) 그가 이끌었던 북학파 실학자들 주장도 마찬가지였다. 노골적으로 깨뜨리기에는 노론 교조주의자들이 구축한 소중화 조선이 너무 거대하고 굳건했다. 그리하여 홍대용이 죽기 4년 전, 세자 시절 홍대용과 함께 책을 읽었던 정조가 선언한 것이다. "짐승의 시대가 되었다."

짐승의 시대에, 그렇게 홍대용은 선구적인 주장을 펼치고 하늘로 갔다. 그가 살던 천안 옛집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집 뒤에는 대한민국시대에 만든 홍대용과학관이 서 있다. 그는 집에서 멀지 않은 언덕에 잠들어 있다. 불온한 선언 또한 함께.

"망원경은 내가 깨버렸다."

이야기는 끝이 아니다. 역사는 어쩌면 시작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대하는 자세와 변화하는 세계에 대처하는 자세는 놀랍도록 유사하다. 이제 중화와 조선과 오랑캐 일본의 하늘과 땅에서 벌어진 일들을 비교해본다.

12세기 초 어느 날 북송 황제 휘종이 조서를 내렸다. "옛사람들은 역법에 어두워 일식과 월식을 괴이한 변고라 했으나, 이는 자연현상이다. 이변이라 하기에는 부족하다(言此定數 不足爲災異·언차정수 부족위재이)."(주희, '주자어류' 천지下) 괴물이 해와 달을 집어삼키는 변고로 여겼던 일월식이 12세기 송나라 이후 중국에서는 자연현상이 되었다.

1834년 일본 조총 장인 구니토모 잇칸사이가 그린 달 표면도(왼쪽)와 태양 흑점 지도. 잇칸사이는 영국에서 들어온 망원경을 개량해 직접 망원경을 제작했다. 18세기 이후 조선에서도 세계에 대한 관점이 바뀌고 있었지만, 바라보는 눈이 세상을 바꾸는 행동으로 발전하는 속도는 더뎠다.

 

송에 이어 원과 명, 명에 이어 오랑캐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했다. 수많은 조선 학자와 관료들이 청나라 수도 연경을 찾아 신문물을 접했다. 자명종에서 지도와 망원경까지, 주자성리학 세계관을 뒤흔드는 온갖 물건이 조선으로 들어왔다.

1745년 5월 12일 영의정 김재로가 영조에게 물었다. "지난번 연경에서 들여온 책들과 측후기와 규일영(窺日影·태양 관찰용 망원경)과 지도를 아직 폐하께서 관상감에 내리지 않았나이다." 영조가 답했다. "태양빛을 직접 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규일영은 좋지 못한 무리들이 위를 엿보는 기상이 되니 이미 명하여 깨뜨려버렸다. 책과 지도도 모두 물에 풀어 씻어버렸다." 이에 여러 신하가 모두 '찬탄(贊歎)'하였다.(1745년 5월 12일 '영조실록')

1834년 조총 장인들이 모여 살던 일본 구니토모에서 구니토모 잇칸사이(國友一貫齋)라는 장인이 굴절망원경을 개발했다. 잇칸사이는 이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찰해 태양 흑점 지도를 작성하고 달을 관찰해 분화구 지도를 작성했다.

그로부터 35년 뒤 1869년 7월 1일 인시(寅時·새벽 3~5시) 조선에 일식이 있었다. 국왕 고종은 연옥색 제복을 입고 경복궁 월대에 올라 제사를 올렸다. 재앙을 막기 위해 왕이 석고대죄하듯 하늘에 용서를 비는 '구식(救蝕)'이다.(1869년 7월 1일 '승정원일기')

13년 뒤 서연관 이상수가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천문가들이 서양 이론을 배워 일식을 사람 일과는 관계없다고 합니다. 실로 나라가 패망할 시초를 열어놓은 일이니 엄하게 배격하고 쫓아내소서." 고 종이 답했다. "그대 상소를 접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렵구나."(1882년 9월 20일 '고종실록')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한 지 6년(강화도조약), 1년 넘도록 월급을 못 받은 구식군대 병사들의 임오군란을 청나라 군사가 진압하고 석 달 뒤였다. 조선을 개항을 시킨 자는 남쪽 오랑캐였고 조선 반란군을 진압한 자는 북쪽 오랑캐였다. 과연 짐승의 시대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28/202004280003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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