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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 이괄의 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6. 10. 14:30

 

 

[박종인의 땅의 歷史]

"나에게 팥죽을 쒀준 저 유생을 금부도사로 임명하노라"

조선일보입력 2020.06.09 03:10 | 수정 2020.06.0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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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1624년 이괄의 난과 인조의 황당한 도주행각

 

참으로 정신없는 정권 초기였다. 벼르고 벼른 끝에 현직 왕을 폭군으로 몰아 쿠데타에 성공했으나 이어 터진 것은 쿠데타 동지의 반란이었다. 어제까지 동지였던 반정 공신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칼을 들었고 왕은 도주했다. 도주하며 듣도 보도 못한 지역 유생을 금부도사로 임명했다. 굶주린 자기에게 죽을 쒀 배를 불려줬다고. 엉망진창 논공행상, 엉망진창 국정. 조선 16대 국왕 인조와 이괄의 난 이야기다.

반란, 그릇된 논공행상, 또 반란

1624년 1월 24일 평안병사 겸 조선군 부원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능양군 이종이 무리를 이끌고 광해군을 끄집어 내린 지 열한 달 만이었다. 반정 당일 대장으로 임명된 김류는 '모의가 누설됐다'는 소문에 집을 나서지 못하고 뭉그적댔다. 군사들이 웅성대며 불안해하자 또 다른 지휘관 이귀와 이괄이 "누구든지 규율을 어기면 나부터 목을 베라"며 반군을 이끌었다.('연려실기술'23 인조조 고사본말 '계해정사-연평일기') 반정 다음 날 이괄은 "김류를 베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류는 반정 이전부터 능양군 최측근이었다. 공신 명단 작성을 맡은 김류는 이괄을 2등 공신에 책봉했다. 명분은 '부대를 나누어 군용을 갖추는 공이 컸으나 반정 계획에 늦게 참여했으므로'였다.(1623년 윤10월 19일 '인조실록') 이괄은 매우 억울해했고, 공론 또한 그러했다.

이미지 크게보기1624년 반정공신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인조와 조정 대신은 공주로 도망가 공산성에 5박 6일 동안 피란했다. 인조가 큰 나무 두 그루 사이에서 숨을 돌렸다고 해서 훗날 그곳에 쌍수정(雙樹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산성 도착 이튿날 인조는 대신들과 함께 산성 군사 시설을 점검했다. 관군이 이괄을 처형해 위험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은 다음이었지만, 왕과 관리들은 산성 점검을 강행했다. 반란 이유는 논공행상 불만이었고 도피 과정은 블랙코미디였다. /박종인 선임기자

 

이괄은 한성부 판윤을 거쳐 평안병사로 임명됐다. 평안도로 떠나던 날 인조가 칼을 채워주고 수레바퀴를 밀어주었다. 위로하는 1등 공신 신경진에게 이괄이 말했다. "나를 내쫓아 보내는 것이오. 영감은 속이지 마시오."('연려실기술'24 인조조 고사본말 '이괄의 변-일월록')

1624년 1월 21일 이괄의 아들 이전이 반역을 꾀했다는 첩보가 올라왔다. 이귀가 이괄 또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조는 "그대가 반역자라고 말한다면 내가 믿겠는가"라 반문했다. 다음 날 또 같은 보고가 올라왔다. 인조는 "다시는 나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또 무시했다. 다만 그 아들 이전은 조사하라고 명했다. 이틀 뒤 이괄이 아들을 붙잡으러 온 금부도사 고덕상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1624년 1월 21~24일 '인조실록') 없던 명분도 칼을 잡으면 생겨나는, 진흙탕이었다.

정적 대학살과 헛된 호언장담

1월 25일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김류가 인조에게 말했다. "역모 동조자들을 서둘러 처형해야 후환을 없앨 수 있다." 좌찬성 이귀가 재판 없이는 불가하다고 반대했다. 인조는 김류 청에 동의했다. 반정에 참가하지 않았던 기자헌은 사약을 받고, 다른 37명은 참수됐다.(1624년 1월 25일 '인조실록') 나머지 공신들도 모두 죽이기를 청했다. 이를 본 재신 권첩은 "김류는 자손이 끊어지고 이귀는 번창할 것"이라고 말했다.('연려실기술' 이괄의 변)

이미지 크게보기공산성 쌍수정 아래에 있는 쌍수정기적비. 비석 뒤편 음기(陰記)는 1668년 송시열이 썼다. 송시열은 "이괄에 대해 공정함을 잃어 난을 초래했고 그 난이 병자호란으로 연결됐다"고 인조를 비난했다. 이에 소론 영수 남구만은 "인조가 살아 있을 때 상소를 하지 않고 두 세대가 지나고서야 비겁하게 구는가"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인조가 도원수 장만에게 말했다. "내 친히 삼군을 거느리고 기일을 정하여 섬멸하리라."(같은 날 '인조실록') 2월 2일 인조는 명나라 사신을 맞는 모화관(慕華館)에서 군사훈련을 예고했다. 말만 했을 뿐 실제 훈련은 없었다.

2월 8일 반군이 파주 벽제까지 진군했다.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이 인조에게 서둘러 세자를 책봉하자고 건의했다. 허둥대는 왕을 지켜보던 예리한 눈들이었다. 인조는 거부했다. 대신 그날 인조는 신주를 앞세우고 공주를 향해 도망갔다. 닫혀 있는 남대문은 승지 홍서봉의 하인이 돌로 부쉈다. 한강 나루에서는 무사 우상중이 강 건너 숨어 있는 사공을 베고 배를 끌고 왔다. 달도 지고 없는 깊은 밤, 강 한가운데 떠서 북쪽을 보니 궁궐에 불길이 치솟았다.(1624년 2월 8일 '인조실록')

팥죽도사 김이(金怡)와 일본 청병(請兵)

간신히 강을 건넌 인조가 양재역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에게 유생 김이(金怡)가 팥죽을 올렸다. 인조가 말 위에 타서 죽을 마셨다.(1624년 2월 8일 '인조실록'·21세기 서울 강남 '말죽거리' 지명 유래 가운데 가장 유력한 주장이다) 이틀 뒤 수원에 도착한 인조에게 몇 신하가 동래 왜관에 있는 왜인 1000명을 원병으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26년 뒤, 옛 적군에게 내란 진압을 맡기자는 것이다. 인조는 "관백(關白·도쿠가와 이에미쓰) 허가를 받으려면 시간이 걸리고,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며 거부했다. 12일 천안에서 인조가 한숨 돌리고선 양재역에서 팥죽을 진상한 김이를 죽은 고덕상 후임 금부도사에 임명했다.(2월 12일 '인조실록') 팥죽 한 사발에 벼슬 없는 유생이 종5품 벼슬아치가 되었다. 본인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미지 크게보기1624년 1월 이괄 군사가 서울로 진입한 창의문. 1년 전 인조반정 군사가 사용했던 문이다.

 

오만했던 이괄

2월 11일 파죽지세로 남하한 이괄 군사가 무악재에서 관군과 맞닥뜨렸다. 그런데 선발대 병력이 생각보다 적었다. 이괄이 부하들에게 말했다. "저것들을 다 깨뜨리고 밥을 먹자. 백성은 성 위에 올라가 구경하게 하고 저 오합지졸을 무너뜨린다. 인심은 우리 것이다." 풍향이 바뀌고 관군이 급증하며 반란군은 대패했다. 관군이 베어온 반군 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이괄은 반란을 포기하고 도주했다.

12일 밤 시구문(광희문·훗날 인조가 병자호란 때 도망갔던 문이다)을 빠져나간 이괄은 삼전도를 거쳐 광주와 경안을 지나 이천으로 도주했다. 이괄의 졸개들이 이괄 무리 아홉 명 목을 잘라 관군에게 바쳤다. 반란은 진압됐다.('연려실기술' '이괄의 변-일월록')

아마추어 지도자 인조와 그 무리

13일 인조가 공주에 도착했다. 인조 무리는 공포 속에서 산성 수비책을 논했다. 그때 군관 한 명이 와서 이괄 참살 사실을 보고했다. 인조는 이 군관에게 술을 먹이고 6품 벼슬을 내렸다. 반란이 끝났지만 수비책 논의는 이어졌다. '왕이 산성에 올라 형세를 살피니 총독군문 김류는 앞봉우리에 복병을 설치하자고 했다. 왕은 남쪽은 공격받기 쉽다고 했고 이에 김류는 성 밖이 거리가 있어 화살이 닿지 못한다고 보고했다. 인조가 성곽을 오르려고 말에 올랐다. 주위에서 말렸다. 그러자 인조는 북루에 올라 살피며 취약 지대라고 설파했다.'(1624년 2월 14일 '인조실록') 없는 적을 향해 쇼를 한 것이다.

이미지 크게보기창의문 문루에 걸린 인조반정 공신 명단. 이괄은 빠져 있다. 김류는 일등공신 첫번째다.

 

15일 이괄의 목이 공주에 도착했다. 다음 날 공주 선비들을 위무하기 위해 특별 과거시험이 벌어졌다. 충청, 전라 선비를 응시자로 시험을 치러 합격자 5명을 선정했다. 그런데 다섯 명 가운데 공주 사람만 없었다. 인조는 서둘러 공주 사람 강윤형을 추가로 뽑았다. 18일 인조가 서울로 환궁했다.

쌍수정과 또다시 송시열

1708년 숙종 때 공주 공산성에 '쌍수정사적비'가 세워졌다. 인조가 산성에서 쉬었다는 큰 나무 두 그루 사이에 정자를 세우고, 그 이력을 쓴 비석이다. '공주산성 쌍수정기적비(신흠)' '쌍수정비 음기(송시열)' '쌍수산성기사비 추기(남구만)' 세 글이 적혀 있다. 1668년 송시열이 쓴 '음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쌍수(이괄의 난)를 잊었기에 정묘호란이 터졌고 병자호란이 터졌도다.'

요컨대, 이괄을 잘못 대우한 인조가 죄인이라 는 비난이었다. 남에게 한없이 냉혹하고 스스로에게 한없이 관대한 정치가다웠다. 1708년 추기를 쓴 소론 영수 남구만은 "인조 생전에 비판 상소를 올리지 왜 비겁하게!"라고 비난했다.(남구만, '약천집'34,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여기까지다. 이괄에서 능양군, 능양군에서 송시열로 이어지는 이전투구, 권력이 권력을 잡아먹는 아마추어 권력자들 이야기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08/202006080363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