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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6. 8. 11:58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555m 롯데월드타워 옆 3.95m 삼전도비 '패권 싸움 흑역사'

[중앙일보] 입력 2020.06.08 00:42 수정 2020.06.08 10:10 |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공원에 세워진 삼전도비(3.95m). 조선시대 청나라에 항복한 굴욕의 역사를 상징한다. 불과 100여m 거리에 롯데월드타워(555m)가 치솟아 있다. 중국몽과 신중화주의를 앞세운 중국은 사드를 핑계 삼아 한국 측에 부당한 보복을 가했다. 사드 기지를 제공한 롯데는 큰 보복을 당했다. 장세정 기자

충북 괴산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황제(신종 만력제)와 마지막 황제(의종 숭정제)를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조선시대 친명 사대주의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장세정 기자

지정학이 초래하는 구조적 비극은 언제든 되풀이될 위험이 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은 예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미·중 패권 경쟁이 과열되는 지금, 대륙 패권을 놓고 명·청이 다투던 400년 전 17세기 조선에 눈길이 쏠리는 이유다.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에서 교훈을 얻자는 '다크 히스토리(흑역사) 투어' 차원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관련된 두 유적지를 답사했다. 하나는 임진왜란(1592~1598) 당시 군대를 보내준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보답하겠다며 친명 사대주의 의리를 다짐한 만동묘(萬東廟)다. 다른 하나는 병자호란(1636~1637) 때 남한산성의 굴욕을 생생하게 기록한 삼전도비(三田渡碑)다.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명-청 패권 전쟁이 남긴 역사의 상처 '다크 투어']
임진왜란 때 도운 명에 사대 집착
정세 오판해 병자호란 굴욕 겪어
명·청 교체기와 미·중 대결 오버랩
역사의 거울에 우리를 비춰봐야
"자칫 갈라파고스 증후군 우려"
"자유가치 공유 해양세력 연대를"

양난(兩亂)으로 불리는 두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 왕조는 건국 200년 만에 뿌리부터 크게 흔들려 당장 망해도 이상할 게 없는 지경이었다. 왜군과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힌 백성은 어육(魚肉)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명·청 교체기에 대외 전략 오판이 자초한 삼전도비와 만동묘는 동전의 양면이다.

①만동묘, 조선시대 친명 사대주의 상징
지난 3일 충북 괴산의 만동묘를 찾아 나섰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로 2시간, 다시 차로 30분을 달렸더니 조선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은거하던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당도했다.

충북 괴산 만동묘를 오르는 마지막 계단은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아홉 칸으로 가파르게 설계돼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중국 명나라 황제의 은혜에 대한 예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라고 한다. 장세정 기자

사실 송시열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이 발탁한 인재였다. 하지만 최명길의 대척점에 있던 척화파 김상헌처럼 숭명배청(崇明排清) 노선을 걸었다.
병자호란 이후 1644년 명나라가 멸망했는데도 송시열은 화양구곡( 華陽九曲)의 명당자리에 만동묘를 짓도록 했다. 선조 때 터진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 만력제와 마지막 황제인 의종 숭정제의 위패를 송시열 사후인 1704년 만동묘에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경기도 가평 조종암(朝宗巖)에 선조가 남긴 만절필동(萬折必東) 네 글자를 송시열이 화양구곡의 첨성대 바위 절벽에 새겼고,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따서 만동묘라고 이름 붙였다. 만절필동은 황하 흐름이 수없이 꺾여도 결국 동쪽으로 간다는 뜻뿐 아니라 충신의 절개로 의미가 확장됐다.
만동묘로 올라가는 계단은 균형을 잡고 걷기 힘들 정도로 위태로웠다. 아래로부터 위를 향해 계단을 3칸, 5칸, 3칸, 5칸을 오른 뒤 맨 위에 황제를 상징하는 9칸 계단을 오르도록 배치했다. 임진왜란으로 망할 위기에 처했던 조선을 살려줬으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명나라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라는 의도가 숨어 있다.

충북 괴산 만동묘 옆 화강암 절벽에 송시열이 선조의 글귀(萬折必東,만절필동)를 새겨 친명 사대주의를 드러냈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구해준 은혜(再造之恩,재조지은)를 그는 유달리 강조했다. 장세정 기자

만동묘 유적을 몇 년 전에 답사한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전 한국정치사학회장)는 "계단 경사가 70도를 넘을 정도로 가파르고 계단 폭도 매우 좁다"며 "황제를 모신 사당이니 개처럼 기어서 올라가서 개처럼 기어서 내려오라는 무언의 압력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허영란 괴산군 문화해설사는 "계단이 하도 가팔라서 흥선대원군이 하인의 부축을 받고 올라가자 옆에 있던 문지기가 밀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고 전했다. 봉변당한 분풀이 차원인지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리면서 1865년 만동묘를 가장 먼저 철거했는데 이에 반발한 유림이 1875년 다시 세웠다.
명나라의 임진왜란 개입에 반감을 가졌던 일제는 1942년 만동묘를 불태우고 비석 건립 유래를 새긴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 글자를 정으로 모두 훼손하고 땅에 묻었다. 하지만 1983년 대홍수 때 비석이 다시 드러났고, 2004년 괴산 지역 유지에 의해 만동묘와 만동묘정비가 복원됐다.
공교롭게도 만동묘의 존재를 널리 알린 것은 '친중 정권'이란 지적을 받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다. 2017년 12월 5일 당시 노영민 주중대사(현 대통령 비서실장)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인민대회당 방명록에 '만절필동(萬折必東) 공창미래(共創未來)'라는 글을 남겼다. 그의 본뜻은 우호 강조였겠지만 사대주의를 상징하는 용어 사용은 부적절했다. 더군다나 대사 부임 불과 8개월 전인 2017년 4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시진핑은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망언하지 않았던가.

②삼전도비, 청나라에 항복한 굴욕 상징
지난 2일에는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와 함께 삼전도비를 찾아 나섰다. 김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남한산성'의 여운이 강렬했던 이유도 있지만, 굴욕의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가 서울 석촌호수 공원에 세워진 삼전도비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장세정 기자

석촌호수가 넓어 비석을 찾으려면 애를 좀 먹겠거니 생각했는데 뜻밖에 너무 쉽게 찾아냈다. 잠실 광역환승센터 2번 출구에서 석촌호수 공원 안으로 불과 20여m 걸어 들어가니 대한민국 사적 101호 '서울 삼전도비'가 눈앞에 들어왔다.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 새겨진 이 거대한 비석은 귀부(龜趺, 거북 모양의 받침)를 뺀 몸체 높이만 3.95m다. 32t 화강석을 충북 충주에서 캐낸 뒤 한강을 통해 배로 실어 날랐고 인부 400여명이 육지로 끌어서 옮겼다고 한다.
명·청 교체기에 실리외교를 폈던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 세력들은 아무런 대비 없이 기울어가던 명나라를 섬기다 신흥 세력 후금(청)의 눈 밖에 난다. 김상헌의 척화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치열하게 대립했지만, 묘수를 찾지 못했고 끝내 굴욕적 군신 관계를 받아들여야 했다.
삼전도비 주변을 둘러보는 심정은 여러모로 불편했다. 병자호란이 터진 1636년 겨울 남한산성에서 약 50일간 농성하던 인조가 오랑캐로 여겼던 청 태종 앞에서 항복했다. 세 번 무릎 꿇고 아홉번 이마를 땅에 조아린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한 굴욕의 역사가 지금도 생생해 속이 불편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주화파 최명길(이병헌 군)과 척화파 김상헌(김윤석 분)은 대외 전략을 놓고 치열하게 대립한다. 하지만 인조는 결국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을 굻고 항복한다. [CJ엔터테인먼트]

사실 삼전도비는 건립 과정과 건립 이후에도 수차례 수난을 겪었다. 청 태종은 비문을 조선이 직접 작성하도록 강요했고, 비석 크기를 문제 삼아 중간에 다시 제작하도록 했다.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의 관리들은 청나라에 머리 숙인 굴욕적 비문을 쓰지 않으려고 서로 떠넘겼다. 결국 문신 이경석이 쓴 비문에서 인조는 "내가 어리석고 미혹되어 하늘의 벌하심을 자초해 만백성이 어육이 됐으니 죄가 내 한 몸에 있다"고 했다.
청·일 전쟁에서 판세가 일본으로 기울자 고종은 사대주의를 상징해온 삼전도비를 아예 뽑아버리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1917년 일제가 다시 세웠고 해방 10주년이던 1955년 이승만 정부가 땅에 묻기도 했다.
이런 절절한 역사를 있는 그대로 설명해주는 유적 안내가 너무 부실했다. 부끄러운 역사라 감추고 싶었다면 근시안적 '역사맹(盲)'이다. 석촌호수에 놀러 나온 20대 젊은이들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배웠는데 유적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 어두운 역사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삼전도비 현장을 촬영하다 카메라 앵글에 삼전도비(3.95m)와 롯데월드타워(123층, 555m)가 동시에 들어와 깜짝 놀랐다. 무력으로 조선을 짓밟은 청나라의 강압으로 세운 삼전도비, 신중화주의로 무장한 중국에 의해 사드 보복을 당한 롯데가 세운 대한민국 최고층 빌딩. 인연인지 악연인지 그 둘이 지금 불과 100여m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서 있으니 이런 역사적 아이러니가 있을까.
삼전도비는 고증을 거쳐 2010년 4월 현재의 위치에 옮겨졌다. 2016년 7월 주한 미군의 사드 배치 방침이 발표되면서 중국의 사드 보복이 시작됐다. 롯데월드타워는 그해 12월 완공됐지만, 중국은 사드 기지 부지를 제공한 롯데를 부당하게 괴롭혔다. 군사 주권과 기업의 자율을 무시한 중국의 폭거였지만 한국 정부는 저자세다. 이 판국에 대통령은 "중국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 "한·중은 운명공동체"를 역설했으니 갸우뚱해진다.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장은 '망국의 군주' 고종이 머물던 덕수궁을 가리키며 생존 외교 전략을 강조했다.

신복룡 전 석좌교수는 "대한민국 최고층 빌딩을 배경으로 삼전도비를 바라보니 정보기술(IT) 최강의 나라가 아직도 소(小) 중화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갈라파고스 (거북) 증후군'에 빠져 있는 듯해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장은 "미·중 패권 경쟁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외교·안보가 까막눈이면 자칫 인조의 길로 갈 수도 있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해양세력과 연대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만동묘와 삼전도비가 우여곡절을 겪은 것처럼 한반도는 국제 질서 재편 때마다 시련과 능욕을 경험했다.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능력을 갖춘 나라가 됐다"(이수혁 주미대사)는 발언은 성급한 자만이다. 주요 11개국(G11) 가입을 거론하며 김칫국부터 마시지만, 망국의 그림자는 자만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태종과 세종 치세를 논하기에 앞서 선조·인조·고종의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역사의 거울에 지금의 우리를 차분하게 비춰봐야 한다.

청나라 사신을 맞던 사대주의의 상징 영은문(迎恩門)을 허문 자리에 독립협회는 1897년 독립문을 세워 자주 의식을 드러냈다. 하지만 국력이 뒷받침 되지 못해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다. 장세정 기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555m 롯데월드타워 옆 3.95m 삼전도비 '패권 싸움 흑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