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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인생의 성소 聖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10. 18. 20:05

나무는 인생의 성소 聖所

나호열(시인)

 

과학의 시대에도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의 영향력은 여전히 우리의 삶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나무이다. 나무는 우리에게 숭배와 경외의 대상으로 지친 삶의 위안을 준다. 풍상에 구부러지고 휘어지면서 직립을 향해가는 꼿꼿함, 다른 수종樹種과의 치열한 생존경쟁을 가지와 잎과 뿌리로 치루어내면서도 오직 나이테에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침묵의 자세가 백년을 못 살면서 허우적거리는 우리에게 화두처럼 버티어 서 있는 것이다.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마을의 당산나무로부터 도시의 가로수, 구중궁궐의 위엄을 상징하는 나무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누릴 수도 있다. 울릉도 절벽 위에 바다를 바라보며 삼천 년을 살아온 향나무, 죽어서야 향을 내보이는 창덕궁의 칠백 년 된 향나무, 천 년을 건너오면서도 여전히 푸르게 잎 틔우고, 노랗게 물들며 열매를 맺는 용문산, 천태산의 은행나무, 구부러졌다는 이유로 베어지지 않고 육백 년을 증언하는 울진의 소나무, 영화榮華가 천 년 만 년 갈 것이라고 전각과 탑을 세웠으나 병화에 스러진, 저 원주 거돈사지 벼랑에 뿌리를 내린 느티나무가 내게는 풍진 내 삶을 위로하고 고백하는 성소가 되는 것임을 굳이 깨닫지 않아도 좋겠다.

 

 

일찍이 목월 선생께서 시「나무」로 이야기 하였듯이 ‘나무’는 우리가 짧은 시간을 지나가는 나그네(過客)임을 알아차리게 하고 수도승이 되거나,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나무」 마지막 부분)는 시인의 고백은 나무의 내재가 보여주는 침울과 고독과 영원을 염원하는 기다림의 자세가 오늘의 삶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한 때 속성수로 산림녹화의 앞 자리에 서 있던 아카시 나무가 그 왕성한 번식성으로 말미암아 벌목의 대상이 되어버린 상황이지만 반 세기 정도만 지나면 척박한 토질을 만들어주고 다른 수종의 나무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준다고 하니 느긋한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조급하게 결과만을 좆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나눔의 정신도 나무에 깃들어 있음을 깨우치게도 하는 것이다. 울울한 숲의 장엄과 언덕 위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가 주는 고독한 형상에서 나는 문득 평등한 세계, 평화의 세계와 마주치고는 한다.

 

나무들 모이면 숲이 되는데

사람의 숲에는 나무가 없다

나호열 -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