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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의 상상력과 ‘내밂’의 시학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9. 1. 19:15

불화의 상상력과 ‘내밂’의 시학

박 진 희

 

나호열 시인은 얼마 전 그의 열여섯 번째 시집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시인동네, 2017)를 상재했다. 시집을 내고 나면 은행에 잔고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말을 몇몇 시인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데 나호열 시인은 연이어 신작 열 편을 새로 내고 있으니 실로 왕성한 창작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랜 시간 시인이 천착하고 있는 주제는 불화의 세계와 그 세계에서 주변화된 존재들에 관해서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를 비롯하여『타인의 슬픔』(연인M&B, 2008), 『눈물이 시킨 일 』(시학, 2011), 『촉도』(시학, 2015) 등 최근 십 년 동안 시인이 상재한 시집의 표제명만 보아도 확인되는바, 그의 시를 관류하고 있는 모티프는 '촉도'로 표상되는 불화의 세계와 그 세계에서 삶을 영위해가고 있는 슬픔의 존재들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에서는 특히 스스로에 대한 주변화가 능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특징적이다. 이 시집의 시적 주체는 세계의 질서로부터, 모두의 욕망이 향하고 있는 자리로부터 끊임없이 스스로를 주변화하는 존재이며 스스로 몰락하는 자이자 모든 몰락하는 것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새로 발표한 신작시들에서도 불화의 세계와 슬픔의 존재라는 모티프는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지만 불화의 세계에 응전하는 시적 자아의 위치 내지 세계와 자아의 관계 구도는 사뭇 다르다.

 

손이 그리워져 본 적이 있는가

휘청, 몸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 할 때

내가 그토록 믿었던 다리도 소용이 없고

허공을 쓴 웃음으로 붙잡으려 할 때

내게 간절한 것은 또 하나의 손이다

 

어디에선가 불쑥 아무도 모르게

돋아오르는 여린 싹처럼

저도 어쩔 줄 모르면서

어쩌자고 내게 내미는 손

 

그러나 처음 나를 잡아준 것은

방바닥이나 벽처럼 무정한 것들

기억하지 않으려고

도리질한들

상처는 쓰담을 수 없어

슬며시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던

마음을 만나는 날

넘어지고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날

날카로운 송곳이라 해도

온기가 스며있다면

내게는 그리운 손이다

 

-「손」전문

 

몸을 지탱하는 데에는 ‘손’보다 ‘다리’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몸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 할 때"는 튼튼한 다리도 소용이 없다. 외부에서 잡아주는 힘, 즉 “또 하나의 손”이 필요하다. 그런데 위 시에서는 시적 자아가 간절한 마음으로 내민 손을 잡아주는 "또 하나의 손"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시적 자아는 자신을 잡아준 것이 "방바닥이나 벽처럼 무정한 것들"이었음에 절망한다. 이는 상처로 남아 일상 속으로 불쑥불쑥 틈입해 들어오게 되고 자아는 결국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슬며시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던 마음"이라든가 "넘어지고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날"이란 바로 이 닫힌 “마음의 문”에서 연원하는 것이다.

억압된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회귀하게 마련이다. 독립운동가와 그 유가족들, 일제 강제 노역자와 위안부, 국가폭력 희생자와 유가족,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과 유가족 등등 우리 사회에서 그 예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의도적으로든 아니든 이들의 상처와 고통은 외면과 왜곡, 잊혀짐을 통해 더욱 가중되어왔을 터이지만 결코 사라지지도, 사라질 수도 없을 것이다. 진정성 있는 화해와 위무가 따르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위 시의 2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정적 자아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대상은 결코 권력이나 중심이 되는 주체가 아니다. 그가 간절하게 기다리던 것은 "어디에선가 불쑥 아무도 모르게/돋아오르는 여린 싹처럼/저도 어쩔 줄 모르면서/어쩌자고 내게 내미는 손"이다. 어쩌면 무너지고 쓰러지고 있는 자아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무력하고 주변화된 존재의 '온기'가 바로 서정적 자아가 간절히 염원하는 바라는 의미이다. 슬픔을 위로하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슬픔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내가 사는 하루하루는

늘 타향이었고

내가 닿는 곳이면

모두 이국 異國이었다

분명히 아는 사람이었는데

전생이나 후생 어디쯤에서라도

만나고 옷깃 스친 인연이었는데

모두들 안녕?

내가 내뱉은 말이 사투리이었나

나그네의 흰 소리였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들은 말한다

누구시더라?

 

-「누구시더라」전문

 

위 시에서도 동일한 구도를 확인할 수 있다. 시적 자아는 "내가 사는 하루하루는/늘 타향이었고/내가 닿는 곳이면/모두 이국 異國이었다"라고 토로할 만큼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타자화되어 있는 존재다. 이러한 고립적 상태는 ‘나’와 ‘그들’ 간의 대립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분명히 아는 사람이었는데" 서정적 자아의 '안녕'이라는 인사에 '그들'은 "누구시더라"라고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심과 주변의 대립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같은 고향, 같은 민족으로 표상되는, 동일성의 범주에 속하는 대상들 간의 타자화, 불통, 불공감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서정적 자아에게 있어서 ‘그들’은 “분명히 아는 사람”, 즉 자아의 슬픔을 나눌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외면하고 만다. 슬픔을 위로하는 것은 또 다른 슬픔, 슬픔을 겪어본 사람이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다는 언표가 위 시들에서는 통용되고 있지 않은 셈이다.

 

자본주의 현대사회에서는 사람들 간의 위계질서가 점차 세분화되어 가는 듯하다. 심층의 차원에서 보면 인간은 모두 동일한 범주에 속하지만 현실에서 인간은 잠시 입고 있는 옷과 같을 뿐인 다양한 층위의 권력을 자신 고유의 것인 양 전유하며 타자와의 차별성을 끊임없이 모색한다. 그 결과 소위 ‘갑’과 ‘을’이라는 구도가, 또한 ‘을’ 사이에도 또 다른 ‘갑’과 ‘을’의 구도가 생성 되는 등 위계질서가 세분화되고 견고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진정한 소통이란 요원한 일이 되어버린다. "저도 어쩔 줄 모르면서/어쩌자고 내미는 손"이 아니라 "저도 어쩔 줄 모르"는 까닭에 "누구시더라" 하고 돌아서는 '등'이 시인이 감각하고 있는 세계의 표상인 것이다.

 

시집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의 시적 주체가 스스로를 능동적으로 주변화하면서 온갖 주변화된 대상들에 대한 애틋함을 발현하고 있다면 위 시들에서는 서정적 자아가 타자화된 대상이며 타자화하는 주체와의 명백한 대립구도가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차질적이다. 이러한 경우 의미의 명징함과 계몽성을 획득할 수는 있겠지만 풍요로운 정서와 아름다움이 틈입할 가능성은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기실 나호열 시의 탁월함은 중층되거나 균열을 일으키는 이미지, 유보되는 의미, 상충하는 정서의 공존 등 여러 층위에서 발현되고 있는, 대상에 대한 불확정적이고 다성적인 감수성에 있다 하겠다. 이러한 겹쳐짐과 균열, 머뭇거림과 상충에서 시적 긴장과 아름다움이 발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동문서답」이라는 시편을 보자.

 

나에게는 문신으로 남은 어둡고 긴 골목이 있다. 그 골목을 드나드는 문장은 혹독한 겨울바람이다. 울음과 눈물을 겨누는 비수 같은 그 골목은 너무 비좁아 쓰러질 수 없는 골이고 하늘을 향해 길어져만 가는 목이다.

아무리 걸어도 우리는 동녘을 만날 수 없고 뒷걸음쳐 서쪽으로 가도 서역을 만날 수 없다. 달이 이울다 차고 다시 여위는 동안 문신은 뼈로 파고들었다

 

-「동문서답」전문

 

이 시에서 불화의 세계는 “어둡고 긴 골목”으로 표상되고 있다. 사실 나호열 시인에게 있어 이 “어둡고 긴 골목”은 시의 세계일 수도, 정신의 영역일 수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골목을 드나드는 문장”이란 시의 말이거나 사유의 비유일 터이다. 분명한 것은 이 불화의 세계가 “울음과 눈물을 겨누는 비수 같”다거나 ‘뼈로 파고드는 문신’으로 비유될 만큼 서정적 자아에게 깊게 각인된 슬픔이라는 점이다.

한편 위 시에서는 가장 핵심적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기표인 ‘골목’이 ‘골’과 ‘목’으로 분리되는 대목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분리로 “너무 비좁아 쓰러질 수 없는 골”에서 보듯 ‘골’은 ‘고랑’이라는 기의에, “하늘을 향해 길어져만 가는 목”에서처럼 ‘목’은 신체의 일부인 ‘목’이라는 기의에 연결되게 된다. 사전적 의미의 차원에서 이 분리된 ‘골’과 ‘목’을 다시 붙인다고 하여도 ‘골목’의 의미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시적 의미의 차원에서는 가능해진다는 것을 위 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골목’이 ‘너무 좁고 길게’만 느껴지는 시적 자아의 정서를 형상화한 것이 ‘골’과 ‘목’이기 때문이다.

 

이를 언어의 불투명성 내지 불안정성으로, 혹은 의미의 미끄러짐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적 의장을 통해 ‘골목’이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뒷걸음질 칠 수도, 쓰러질 수조차 없는 아포리아로 표상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골목’이 아포리아라는 것이 드러났으므로 우리는 이 ‘골목’을 통해 진리 내지는 이상향에 이를 수 없을 것이라는 시적 자아의 절망감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아무리 걸어도 우리는 동녘을 만날 수 없고 뒷걸음쳐 서쪽으로 가도 서역을 만날 수 없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이때 비로소 “울음과 눈물을 겨누는 비수”라거나 ‘뼈로 파고드는 문신’이라는, 슬픔과 절망의 강도가 신빙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신을 버리는 것보다

발을 버리는 것이 어렵다

신 때문에 발이 뭉그러진 것인지

발 때문에 신이 해진 것인지

신의 발이 새초롬하다

닳고 해진 발을 위하여

신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가

 

-「그믐달 낙관」전문

 

위 시 또한 ‘신발’이라는 기표를 ‘신’과 ‘발’로 분리하여 의미화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위 시는 ‘신’과 ‘발’을 신체와 관련된 사전적 의미 그대로 읽어도 의미는 통하지만 다른 기의를 차용하고 상징으로 읽어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즉 ‘신’을 초인간적 존재인 ‘신(神)’으로 읽게 되면 ‘신’과 ‘발’의 관계는 하늘과 땅, 정신과 육체, 이상과 현실 등의 대립구도로 상정될 수 있다. 이러할 때 “신을 버리는 것보다/발을 버리는 것이 어렵다”는, 너무도 당연해 어눌하기까지 한 이 진술은, 이상이나 신념 내지는 어떤 정신적인 것과 현실이 대립할 때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더 어렵더라는 삶의 태도에 대한 고백이 된다. 위 시에서 불화의 상상력은 이상과 현실의 대립에서 발현되고 있는 셈이다.

기실 이상과 현실의 대립, 그리고 이와 관련된 삶의 태도에 대한 성찰은 문학에서 그리 참신한 내용은 아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상과 현실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 “신 때문에 발이 뭉그러진 것인지/발 때문에 신이 해진 것인지/신의 발이 새초롬하다”는 대목이 그것인데, 이상과 현실의 괴리와 이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감각되는 현실의 비루함이 이상 때문인지 현실 때문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압권은 아무래도 마지막 두 행 “닳고 해진 발을 위하여/신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가”라는 시구이지 싶다. 이상을 좇는 현실이라는 보편적 구도를 뒤집어 이 비루한 현실을 ‘위하여’ 이상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현실에 얼마만큼 가까이 오고 있는지 반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대목에서 ‘신’은 초월적 존재인 ‘신(神)’의 의미에도 걸쳐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동문서답」이나 「그믐달 낙관」은 전술한 바대로 나호열 시의 매력이 의미나 이미지의 균열과 중층, 유보, 전복 등에서 발현되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불화의 세계를 건너가는 시인의 방편은 무엇일까. 단 열 편의 시에서 어떤 시정신의 흐름을 읽는다는 것이 요원한 일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거칠게나마 간취되는 의미있는 행위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미는’ 행위이다. “어떤 꽃은 제 몸을 사루면서 빛을 내밀고”(「몽유」), “저도 어쩔 줄 모르면서 어쩌자고 내게 내미는 손”, “슬며시 내밀었던 손”(「손」),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내미는 것”(「천수관음」) 등 신작 시편들에서 ‘내미는’ 행위는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는 그만큼 강조되어야 할 중요한 행위라는 의미이다.

 

아무 곳에도 닿지 않는 천 개의 손이 있다.

 

움켜쥐기 위한 손이 아니라면 차라리 허공의 틈새를 찾는 눈이 맞겠다.

그렇다면 나뭇가지 하나가 허공을 더듬거리며 하는 일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내미는 것이리라

 

먼 길 떠나 돌아오지 않는 어미를 기다리는 아이의 눈빛으로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여 독약에 닿으려는 혀처럼

 

여린 가지는 나무에게

새가 되어 날아가고 싶은

꿈의 길이다

 

-「천수관음」전문

 

시인은 나무에 이리저리 뻗어 있는 ‘여린 나뭇가지’를 보고 천수관음을 떠올린 듯하다. ‘천수관음’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대자비심(大慈悲心)의 보살이다. 따라서 이 천 개의 손이 “움켜쥐기 위한 손”이 아님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에 기반하여 시인은 나뭇가지가 뻗어가는 지난한 과정을 “나뭇가지 하나가 허공을 더듬거리며 하는 일”로 묘사하고 이를 자신을 위해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해 “길을 내미는 것”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데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이 ‘여린 가지’가 ‘내미는 길’이 “먼 길 떠나 돌아오지 않는 어미를 기다리는 아이의 눈빛”이나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여 독약에 닿으려는 혀”로 표상되는 절실한 존재의 “꿈의 길”이 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호열 시인의 시정신이라 할 만한 어떤 일관적 면모를 간취할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여린 가지’와 같은 주변적 존재의, 무력하기 짝이 없는 ‘내미는 행위’가 또 다른 어떤 이에겐 간절한 ‘꿈’일 수 있다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저도 어쩔 줄 모르면서/어쩌자고 내게 내미는 손”(「손」)을 간절히 기다리는 서정적 자아의 마음 같은 것 말이다.

 

나호열 시에서 자아는 불화의 세계에 놓여 있다. 자아와의 불화, 타자와의 불화, 세계와의 불화, 언어와의 불화 등등. 시인은 이 불화의 세계를 가로지르며 끊임없이 주변적 존재에 천착해왔다. 기왕의 시집에서 시적 자아가 능동적으로 스스로를 주변화시키면서 타자화된 존재와의 연대, 이들에 대한 애틋함을 드러내고 있다면 이번 신작 시편들에서 자아는 타의에 의해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렇게 불화하는 자아, 고립된 자아는 부단히 손을 ‘내밀며’ 소통을, 합일을 염원한다. 그런데 특징적인 것은 고립된 자아를 구원해 줄 염원의 대상이 어떠한 중심이 되는 힘이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저도 어쩔 줄 모르는” 주변화된 존재라는 점이다. 고독과 슬픔 속에 침잠해 있는 자아가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무력한 존재의 ‘어쩌자고 내미는 손’인 것이다. ‘내미는’ 손에 또 다른 손이 놓이고 마주 놓인 두 손이 꽉 잡아질 때 존재의 고립은 해제되고 슬픔은 해소될 것이다. 그러나 나호열의 시에서는 ‘내미는’ 행위와 이에 함의되어 있는 간절함과 고독, 슬픔만이 드러나고 있을 뿐 그것이 해소될 기미, 즉 합일의 제스처는 보이지 않는다.

문득 이 ‘무력한 존재’가 나호열 시인에게는 시(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아와의 불화, 타자와의 불화, 세계와의 불화, 언어와의 불화 등등 이 모든 불화의 상상력은 결국 시와의 화해를 위한 것이 되는 셈이다. 의미와 이미지의 질서를 파기하는 그 균열의 지점에서 아름다움이 발현되는 나호열 시의 특징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불화는 지속되어야 하고 심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호열의 시에서 동일성 내지 합일의 정서를 찾아보기 힘든 까닭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겠다. 화해에 이르기 위한 불화, 진정한 합일에 이르기 위해 끝끝내 합일을 유보하는 정신, 이것이 나호열의 시를 이끌어가는 힘의 요체가 아닌가 한다.

 

-계간 『시와 시학』 2017년 가을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