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 시와 시집에 대한 평론

나호열의 시세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6. 28. 17:35

사단법인 시 와 산 문 문 학 회

 

 

2017년 6월 목요木曜 카페cafe 모임

 

일시 : 2017년 6월 15일 목요일 오후 7시

장소 : 사단법인 시와산문문학회 사무실

참가 : 사단법인 시와산문문학회 회원 및 문인

주제 : 나호열 [1953 ∼ 현재)┃ 시인의 시세계

토론 : 이충이 진행

교제 : 팸플릿, 작품, 기타

 

 

나호열 ┃1953 ∼ 현재 ┃ 시인의 시세계

 

 

존재의 내면들여다보기 또는 철학성을 위하여

김재홍(문학평론가. 전 경희대 교수)

 

 

나호열 시인은 1953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했다. 경희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무크지 우리 <함께 사는 사람들>(1981)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86년「월간문학」으로 등단했으며,「시와 시학」중견시인상( 1991), 한국녹색시인상(2004), 세계한민족작가상(2007) 수상했다.

 

시집으로 <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 하는가>, <망각은 하얗다>, <칼과 집>,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영혼까지 독도에 산골하고>, <칼과 집> 공동시집 <집에 관한 명상 또는 길 찾기> 등을 간행했다. 그 동안 울림시, 미래시, 시 우주 문학회에 참가했다. 한국예총 정책연구원장 겸 <월간 예술세계> 편집주간을 역임했다. 현재 인터넷문학신문 발행인, <시와 산문>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문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녁에 닿기 위하여 새벽에 길을 떠난다"라는 참신한 직관의 1행시 <집과 무덤>의 시인 나호열, 그는 1991년 이래 존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바탕으로 사람 사는 일에 대한 탐구를 깊이 있게 전개해 가고 있다. 특히 그는 1993년 봄 <상계동> 연작을 집중 수록한 시집 <칼과 집>을 통해서 갇힌 삶, 사막화한 오늘의 삶의 형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과 자기성찰을 펼쳐 보였다.

 

 

거대한 감옥이었다

 

마음속에 집을 다스리며 사는 사람과

마음 밖 먼 곳에 집을 지으려는 사람들

아무도 열쇠가 어디에 있는 줄 모른다

 

갇혀서 오늘을 산다

 

- 수락산하(水落山下) - 상계동. 27

 

그렇다! '오늘날 여기'에서의 삶이란 하나의 거대한 감옥에 갇혀 사는 수형생활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삶에 순응하는 사람이나 부정하는 사람들, 어디론가 떠나려고 갈등하며 방황하는 사람들까지도 그 모두에게 있어 '오늘, 여기'서의 삶이란 고통스런 사막의 삶이 아닐 수 없다."아무도 열쇠가 어디에 있는 줄 모르고// 갇혀서 오늘을 사는" 막막한 모습인 것이다. 그러기에 집은 바로 하나의 무덤일 수 있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차디찬 벽만이 가로놓여져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나는 어디에든/따뜻한 알을 낳고 싶다(상계동. 1 - 동상이몽-)라고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현실의 벽에 부딪쳐 "함부로 촛불도 꺼트리고/쉽게 마음을 조각내는/아무도 손 내밀지 않는 /칼이 될(칼과 집)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서로 너나 할 것 없이 칼이 되어 부딪치면서 칼의 삶, 광물질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나호열 시집 <칼과 집>의 의미가 선명히 드러난다. 광물성의 시대를 기계인간이 되어 살아가면서 불신과 단절의 벽을 더욱 높이 쌓아 가는 시대에 생명회복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집이란 존재의 주거이면서 죽음의 한 표상이고 동시에 부활의 집이자 창조의 터전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칼과 집'이란 바로 현대적 실존의 소외와 위기극복 의지를 영원한 집에 대한 갈구로써 형상화한 것이다. 집은 모든 존재의 원초적 삶이 시작되는 근원이며, 세상으로 열려 떠나온 것이고 동시에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장소에 해당한다. 현실에서의 집에서 살다가 모든 존재는 영원의 집으로서 무덤으로 돌아가게끔 운명 지워진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나호열의 시들은 현대적 실존의 모습을 칼과 집, 또는 감옥과 무덤으로 예리하게 상징화함으로써 이 근래 많은 신진시인들과는 달리 깊이 있게 철학성을 탐색하는 진지성을 보여준 데서 주목에 값한다. 신예평론가 박윤우의 지적대로 나호열의 시에서 삶이란 존재의 집을 찾기 위한 끝없는 방랑의 길이며 그 목적지에 무덤이 가로 놓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집 <칼과 집> 해설- 사회적 존재의 탐색과 휴머니즘의 길)

 

바로 여기에 필자가 나호열의 시를 주목하는 까닭이 놓여진다. 요즈음 많은 신진시인들은 삶의 본질에 깊이 있게 육박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이 요설이나 신기한 이미지 또는 실험에 집착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이른바 소문난 신인일수록 머리로 쓰는 시 또는 손끝으로 쓰는데 몰두하여 쓰기 위한 시를 쓰는 모습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최근 많은 신진 시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깊이 있는 철학성의 빈곤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물었다

나무에게, 구름이며 꽃에게

흐르는 길이며 강물에게

그들은 말하지 않고

조용히 몸짓으로 보여주었다

일인극의 무대

굴뚝이 연기를 높이 피워 올렸다

절해고도 표류자의 독백처럼

표정이 없는 희망이 되는

사전에 없는 어휘가 되는

물음들

아직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

나는 본다

나무의, 구름의, 꽃의, 흐르는 길과 강물의

커져가는 귀를 본다

귀는 물음표를 닮았다

 

-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91

 

근작 시에서 시인은 그간의 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존재의 근원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를 더욱 심화해가고 있어서 관심을 환기한다. 실존적 삶의 표정성 또는 존재론적 징후 읽기에서 나아가 삶의 본질 또는 사물의 본성에 대한 진지한 들여다보기 작업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몸짓 자체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나무며 구름, 꽃이며 길과 강들은 모두 다 고유한 존재양식과 독자적인 법칙성을 지닌다. 개별자들이 지닌 존재의 독자성을 존재론적 환원을 통해서 사물의 본질로 육박해 들어가려는 시인의 내면적인 고심이 '커져 가는 귀' 또는 '귀는 물음표를 닮았다'라는 질문 제기로 형상화되어 있는 것이다.

 

아울러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97>에서는 사물의 본성이 어둠과 밝음, 생성과 소멸이라는 양면성, 모순성으로 파악될 수 있음을 통해서 삶의 본질을 비춰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쁜 화음'의 세계를 갈망하여 존재론적 초극을 지향하기도 한다.

 

아울러 이러한 실존의 본성탐색을 보다 내면적인 구도행위와 연결시켜서 인간이란, 아니 삶이란 무엇인가라는데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무거운 짐을 가득 지고

나귀는 앞질러 걸어갔다

뒤쳐져 따르는

일기장이나 편지 같은 것

녹슨 추억의 꾸러미는

쓸데없이 무겁다

지친 물음으로 나귀가 나를 부른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

 

- 왕오천축국전. 1

 

한마디로 말해 인간이란 진정한 자아를 찾아 헤매는 고달픈 순례자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는 인식이 새롭게 시작되는 연작 왕오천축국전의 내용으로 짐작된다. 녹슨 추억의 꾸러미를 지닌 채 무거운 짐을 지고 헐떡이며 사막을 가고 있는 낙타의 모습, 그것이 바로 인간의 근원적인 모습에 해당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를 향해, 어디를 지금 가고 있는가 묻고 있는 낙타의 모습이란 바로 존재의 근원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인간의 또 다른 형상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실상 "너는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잃고 헤매는 현대인의 모습에 대한 인식과 함께 그를 찾아 나서는 것이 삶의 진정한 의미이고 바로 시를 보는 일이라는 또 다른 인식이 함께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삶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전개하면서도 그의 시는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 실존에 대한 탐색을 게을리 하지 않는데서 시적 건강성과 탄력성이 드러난다.

 

 

하루에두세번씩

맹수의으르렁거림으로

거울앞에선다

 

바보스럽기는하지만

엄숙하게치솔을물고하얗게

하얗게번져나오는탐욕의거품을내뱉는다

초식과육식의갈림길(희망과절망의그사이)

송곳니와어금니의표정들을하나로묶으면서

내가살기위하여죽여야하는

불특정다수를향해

무기마냥소중하게이빨을닦으면서

 

- 판토마임

 

이 시는 이빨을 닦는 행위를 통해서 운명과 도전, 육식과 초식,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짐승처럼 으르렁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적 삶의 실존성을 예리하게 풍자하고 있다. 오늘의 삶에 대한 날카로운 회의와 반성을 아이러니컬하게 묘파(밝혀 그려냄)하면서 사람다운 삶이란 과연 어떻게 사는 일일까를 고뇌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호열의 시가 지닌 미덕 또는 건강성이 예리하게 부각된다. 그것은 오늘의 실존적 삶에 끊임없이 고뇌하면서 본질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본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일이 오늘에 있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는 길인가에 대한 진지한 모색과 성찰을 끊임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다시 말해 그의 시에는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 실존의 몸부림과 함께 존재의 본질 또는 자아의 진정한 발견과 실현을 향한 구도적인 안간힘이 제시됨으로써 이즈음 많은 신진 시들이 처한 철학 상실의 위기를 돌파해 나아가려는 진지한 노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드러난다.

 

현실의 깊디깊은 갱도 그 어둠 속에 갇혀 묵묵히 인간적 진실의 알갱이를 캐내는 고독한 시의 탄부로서 나호열의 시적 정진은 그 누가 알아주고 않고 간에, 세간의 명성과는 전혀 관계없이 참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작업임에 분명하다. 현실의식과 삼투되는 철학성의 획득, 사회의식과 길항(拮抗)하는 형이상적 구도의 진지성과 따뜻한 진실미 그 자체만으로도 그의 시는 이미 빛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을 편지 · 2

 

구월

바닷가에 써 놓은 나의 이름이

파도에 쓸려 지워지는 동안

 

구월

아무도 모르게

산에서도 낙엽이 진다

 

잊힌 얼굴

잊힌 얼굴

한 아름 터지게 가슴에 안고

 

구월

밀물처럼 와서

창 하나에 맑게 닦아 놓고

간다

 

 

해설 : 시인은 자연이 전해주는 가을편지 받는다. 파도소리로 낙엽으로 밀물로 자연은 섭리대로 자연의 얼굴을 바꾸어가면서 인간의 마음에 자연의 편지를 전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나는 물었다

나무에게, 구름이며 꽃에게

흐르는 길이며 강물에게

그들은 말하지 않고

조용히 몸짓으로 보여 주었다

일인극의 무대

굴뚝이 연기를 높이 피워 올렸다

절해고도 표류자의 독백처럼

표정이 없는 희망이 되는

사전에 없는 어휘가 되는

물음들

아직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아

나는 본다

나무의, 구름의, 꽃의, 흐르는 길과 강물의

커져가는 귀를 본다

귀는 물음표를 닮았다

 

-「나는 물었다」

 

 

평생을 배워도 되지 않을 것 같다 슬픔

병도 깊으면 친구가 되는데 슬픔

아니다, 아니다 북풍한설로 못을 박아도

푸르게 고개를 내미는 젊은 날의 부스럼 꽃

토막토막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강물에 피어

미워할 수없는,

잊을 수없는 슬픔은 문장이 되지 않는다

 

빈손을 내민다

나전에서 봉평 가는 길에서 마주친 물길

하늘 끝자락을 잡아당기자

속살 깊이 그려낸 몇 필의 비단

그저 끝없이 끝없이 풀려나가

뜬금없이 무늬지고 싶어도

생살로 또렷이 파고드는 꽃말

슬픔은 구절구절 꺾이고 젖혀지는 길 밖에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 1

 

 

 

 

 

나호열 ┃1953 ∼ 현재 ┃ 시인의 시

 

 


나호열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타인의 슬픔․1


 

 

문득 의자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의자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으므로

제 풀에 주저앉았음이 틀림이 없다

견고했던 그 의자는 거듭된 눌림에도

고통의 내색을 보인 적이 없으나

스스로 몸과 마음을 결합했던 못을 뱉어내버린 것이다

이미 구부러지고 끝이 뭉툭해진 생각은 쓸모가 없다

다시 의자는 제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다

태어날 때도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슬픔을 너무 오래 배웠던 탓이다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나호열

 

출렁거리는

억 만 톤의 그리움

푸른 하늘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혼자 차오르고

혼자 비워지고

물결 하나 일지 않는

그리움의 저수지

 

머리에 이고

물길을 찾아갈 때

먹장구름은 후두둑

길을 지워버린다

 

어디에서 오시는가

저 푸른 저수지

 

한 장의 편지지에

물총새 날아가고

노을이 지고

별이 뜨고

오늘은 조각달이 물 위에 떠서

노 저어 가보는데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주소가 없다

 

 

그 청둥오리는 어디로 갔을까

나호열

 

 

푸른 강물인줄 알고 텀벙 뛰어든 청둥오리

뒤뚱거리며

고속도로를 걷는다

가족들은 멀리 사라지고

무한질주의 대열은 좌우로 무섭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그저 살얼음판인 중심을 가눈다는 게

정말 무겁다

떠날 때를 놓친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철새에게 고향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달아오르는 지열에 털을 뽑는다

날개를 벗어 던진다

다시 겨울이 왔는데

그 청둥오리는 어디로 갔을까

 

 

 

용문산 은행나무

나호열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문득 내 앞을 가로막아 서는

저 거대한 침묵이

마지막으로 내가 마주할 외로움이라면

두 팔로도 껴안을 수 없고

고개 들어도 아득한 그런 외로움이라면

차라리 사랑하기로 했다

 

네 앞에 서면 말을 배운 것이 부끄러워진다

천천히 늘어뜨리는 향내나는 치맛자락처럼

그림자 하나가 마당을 덮고

담장 무너뜨리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높은 산을 넘어간다

 

너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너는 소리내지 않고 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너는 우주의 중심이 어딘지 내게 알려주었다

 

이렇게 멀리 서서야 온전히

너를 바라보며

사랑할 수 있다니!

 

 

 

 

그리운 옛집

나호열

 

 

나는

나의 옛집이다

 

이른

봄나무

얼굴에

꽃 피지 않고

잎 올리지 않고

펄럭이는 그것

 

견인이동통지서

 

나를 끌고 가겠다는 그를

기다리고 있다

오십 년 째



엘리베이터

나호열

 

 

또 누군가 무겁게 영혼을 들어올리고 있나 보다

마그마가 들끓는 소리

깊은 밤을 헤매며 산 하나에 가득 차는 발자국소리

북의 살을 찢으며 흘러나오는 공의 하얀 피

일 층과 십오 층 사이

무덤과 천국의 그 사이를

마치 내 목에 걸린 올가미

상승과 추락의 오르가즘을

누가 조종하고 있는가

이 도시가 키우고 있는 그 짐승이

이제는 내 머리를 밟고 지나간다

그 짐승은 울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짐승은 육식성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무정란의 생각을 낳는다

밤이면 나는 피가 당긴다

 

 

 

가시

나호열

 

 

그 말이 맞다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아프다

내 가슴 떼어내어

너의 가슴에 닿는 순간

가시가 되어야 하는 것을

그래서 네가 눈물 흘리는 것을

 

이번에는 네 가슴 떼어내어

나에게 다오

찡긋 한 쪽 눈 감고

나는 웃겠다

그 말이 맞다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기쁘다

 

 

 

매화

나호열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젊어서 보이지 않던 꽃들이

이제야 폭죽처럼 눈에 보인다

향기가 짙어야 꽃이고

자태가 고와야 꽃이었던

그 시절 지나고

꽃이 아니어도

꽃으로 보이는 이 조화는

바람 스치는 인연에도

눈물 고이는 세월이 흘러갔음인가

피는 꽃만 꽃인 줄 알았더니

지는 꽃도 꽃이었으니

두 손 공손히 받쳐들어

당신의 얼굴인 듯

혼자 마음 붉히는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발자국

나호열

 

 

마현에서 분원리로 건너오는 불빛이

흩날리는 꽃잎처럼 서러울 때

걸음을 멈추어 선 강물

얼어붙은 가슴 위로

희뿌리는 눈은 쌓이고 또 쌓였다

살얼음이었을까

가만가만 다가가지 못하는 저 너머로

이번에는 분원리에서 마현으로 넘어가는 불빛이

그예 눈물을 참지 못하고

발자국 몇 개 서성거리며 되돌아왔다

말뚝을 박아도

넓게 넓게 그물을 던져놓아도

뒤돌아보지 않고 흘러가버릴 것들은

그만하구나

오늘은 깊은 울음 내려앉는 듯

순결했던 그 눈도

작은 발자국들도 함께 몸을 섞어

풀린 강물에

갈대들만 무성하게 투신하고 있구나

갈대답구나

 

 

 

나호열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어디로 가야 하는지

붉게 타오르는 서녘 노을 속으로

새들은 느낌표 같은 몸을 하늘에 새겨두고 사라진다

뚝뚝 그 느낌표들은 어둠을 받아 별로 빛나기도 하고

아득하게 지상으로 차갑게 낙하하기도 한다

흙으로 빚어진 몸은 무너질 때도 아름답다

아무 것도 남아있을 것 같지 않은 동토에도

살아 꿈틀거리는 빛의 양식이 있을 거라고

겨울 들판에 내려와 앉는다

하늘 가득하던 느낌표들이

지상으로 다가설수록 물음표로

마치 못이 완강한 그 무엇에

구부려지듯이

바람에 나부끼며 휘어지고 있다

 

 

의자

나호열

 

 

의자를 보면 슬프다

애써 고통을 참아내는

저 자세

생 마리 성당

돌바닥에 무릎꿇고

고개 숙인 채

오래 기도하던,

초승달 아니면 그믐달처럼

휘인

오랜 시간 혼자 있어 외롭고

또 하나의 외로움으로 내가 얹히면

그 무게로 더욱 외로운 의자

나도 기도를 배우고 싶다

그 전에 나는 얼마나 많은

하루살이 꽃들의 이름을 외워야 하나

아무도 앉지 않아도 의자는 무너져가고

바람이 지나가도 의자는 무너진다

숲으로 건너가는 네 발 짐승의 꼬리처럼

여름 해는 얼마나 긴 그림자를

채찍으로 휘두르나

의자는 딱딱하다

딱딱할수록 나는 경건해진다

 

 

 

 

백지

나호열

 

 

백지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백지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뿐이다

네가 외로워서 술을 마실 때

나는 외로움에 취한다

백지에 떨어지는 눈물

한 장의 백지에는 백지의 전생이 숨어있다

숲과 짐승들의 발자국

눈 내리던 하늘과 건너지 못하는

강이 흐른다

네가 외로워하는 것은 그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만

네 옆에 내가 갈 수 없음이 외로움이다

그러므로 나는 숲에다 편지를 쓴다

길에다 하염없는 발자국에다 편지를 쓴다

백지에는 아무 것도 없다

눈만 내려 쌓인다

 

 

 

 

그 신호등은 나를 서게 한다

나호열

 

 

산으로 들어서는 그 길목에 신호등이 생겼다.

파란 불이 들어와도 건너가는 이 없고

붉은 불이 들어와도 멈춰서는 이 없는

신호등은 저 혼자 붉어졌다, 노래졌다 파래진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파란 신호등이 들어와도 서고

붉은 신호등이 와도 멈추어 선다.

어느 날은 울컥 쏟아지는 눈물 같은

바람이 저 혼자 달려가고

요즈음은 산에서 날려보낸 낙엽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가다

제풀에 주저앉기도 한다

내 앞을 지나가는 저 무상한 것들

손길 한 번 주지 않고 휘적거리는 저 것들

정작 내가 힘주어 브레이크를 밟는 것은

멈추어 서야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멀리 돌아와

내 가슴에 호수로 고이는

그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스트 룸 지53 (Guest Room G53)

나호열

 

 

누군가 머물다 간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열쇠를 비틀면 딱딱한 빵 같은 풍경 속에

나그네는 잠겨버린다

그 누군가의 흔적은

새로운 나그네가 도착하기 전에

완벽하게 닦여져 나갔을 것이다

이 방은 많은 상처를 안고 있다

걸레질에 밀려나간 사람의 냄새

소독 알코올처럼 빛나는 조명등이 서늘하다

이 방은 완벽한 여행자를 원했다

수건 하나조차 걸려있지 않은 옷걸이

검은 비닐로 싸인 휴지통은 하품하듯 비어있다

이 방은 미련없이 떠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다

여행자들은 15개 항목의

게스트 스잇 팔리시스(Guest Suite Policies)를 읽는다

떠날 때 보증금이 깎이지 않기 위해서

모든 손길은 조심스럽다

 

나는 이 밤

이 방의 손을 찾고 있다

그래도 따뜻한 손은 있을 것 같아서

손잡고 잠들고 싶어서

 

 

 

 

가까이 앉아서 이야기하다

나호열

 

 

풍경이 흔들린다

바람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아, 화약 냄새

풍경소리 대신 사랑꽃이 봉오리를 연다

바람이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가까이 앉아서 귀를 열어

산을 듣는다

보듬을 수는 없으나

보면 볼수록 목소리가 청량하다

나뭇가지에 걸터앉았던 새의 발자국이

무성한 잎으로 반짝이고

무심한 줄만 알았던 시냇물이

날다람쥐로 고개를 넘는다

바람난 몇 그루의 나무

물그림자에 혼이 나가고

풍경소리에

사랑꽃 벙그는 분홍빛

시냇물 속에

가까이 다가앉는다

온기가 닿을 듯 말 듯한

모닥불 그 아슴한 거리에

들릴 듯 말 듯한

이야기가 한 구절씩 타들어간다

시간의 결 속에 문신으로 새겨 넣었던

가까이 앉은 주인공은 누구인가

풍경이 다만 흔들린다

바람이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숲에서 기적소리를 들었다

나호열

 

 

발자국 소리가 행여 덫이 될까봐

가만가만 천천히

신호등도 없고

기억해야 할 번지도 없는

모든 목숨들의 보금자리

숲은 점점 겨울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먹고 먹히어도 슬픔이 없고

죽어도 장례식이 없는

서로의 집이며 무덤인 이 숲은

살면 죽어야 한다는 더딘 약속을

하나씩 보여주고 있다

새로이 태어나는 들꽃의 발자락에

어제의 나뭇잎은 썩어가고

내일을 향해 가는 열매는

단단한 눈물로 맺혀있는 곳

혼자 걷기에는 정적이 무서워

징검다리 건너듯 둘이 걸어야

숲은 조금씩 길을 내준다

흐린 하늘이 빠진 냇물 속으로 오래

고개 숙인 오리들과

그 누구의 억센 손아귀도 마다한 채

사라지는 냇물

너무 오래 살아 등피 벗겨진 참나무와

참나무가 키우는 청설모와

거룩한 가을의 소멸을 향해 합장한

갈대 무리와

그 모든 것들이 소리를 낸다

그 울음과 웃음소리가

숲을 깊게 채우고

숲은 이윽고 기적소리를 낸다

발걸음을 멈추어도

우리는 자꾸 어디론가 떠나고 있는 것 같아

오랫동안 포옹을 풀지 않았다

숲은 다시 한 번 기적을 길게 울리고

그럴수록 맞잡은 영혼은

사슬처럼 단단히 묶여졌다

 

 

 

그 길은 저 혼자 깊어간다

나호열

 

 

직선으로 달리는 길이 뚫리고

길눈 어두운 사람만이 그 길을 간다

어깨가 좁고

급하게 꺾어들다가

숨차게 기어올라가야 하는 그 길은

추억같다

쉴 사람이 없어 폐쇄된 휴게소

입구의 나무의자는 스스로 다리를 꺾고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들이 길을 메운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참을성 있게 그 길은 저 혼자 깊어간다

저 혼자 적막을 채우고

그 길은 이윽고 강이 된다

그 길을 가보고 싶다

사랑이란 어깨를 부딪치며 피어나는

이름 모를 풀꽃

굴곡진 길을 돌고 돌아야 얼굴 보여주는

수틀에 얹혀진 안개

멀리 멀리 돌아서 보면

직선으로 달려갔던 그 길도

알맞게 휘어 도는 것을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그 길을

오래 터벅거리며

걸어가고 싶다

노래 부르고 싶다

모든 자물쇠는 숨통을 가지고 있다

나호열

 

 

삽날조차 허락하지 않는 동토

그 얼음 속에서

파랗게 숨대롱을 밀어 올리는

새싹들을 보면

아무리 굳게 닫힌 절망의 문에도

열쇠가 있을 것 같다

가두어두어야 할

숨겨놓아야 할 것이 많음이

어찌 부끄러움이 아니랴

날카롭게 부딪치는 육중한 열쇠꾸러미

가쁘게 뛰어갈수록 요란해지는

물음표와 같은 저것들을

죄다 버리고만 싶구나

어디에 있느냐

이 한몸 열쇠가 되어

문을 열면 아! 거기

푸르게 펼쳐진 초원으로 달려올

그 사람은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나호열

 

 

세상이 싫어 산에 든 사람에게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떠들고 싶으면 떠들어라

힘쓰고 싶으면 힘을 써라

길을 내고 싶으면 길을 내고

무덤을 짓고 싶으면 무덤을 지어라

산에 들면

아무도 내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제풀에 겨워 넘어진 나무는

썩어도 악취를 풍기지 않는다

서로 먹고 먹히면서

섣부른 한숨이나 비명은 들리지 않는다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바람의 문법

물은 솟구치지 않고 내려가면서

세상을 배우지 않느냐

산의 경전을 다 읽으려면

눈이 먼다

천만 근이 넘는 침묵은

새털보다 가볍다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죽어서 내게로 오라

 

 

 

보름달

나호열

 

 

보름달이 가고 있어요

둥글어서

동그라미가 굴러가는 듯

한 줄기 직선이 남아 있어요

물 한 방울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너고

울울한 숲의 나뭇가지들을 흔들지 않아

새들은 깊은 잠을 깨지 않아요

빛나면서도 뜨겁지 않아요

천 만개의 국화 송이가 일시에 피어오르면

그 향기가 저렇게 빛날까요

천 만개의 촛불을 한꺼번에 밝히면

깊은 우물 속에서 길어 올리는

이제 막 태어난 낱말 하나를

배울 수 있을까요 읽어낼 수 있을까요

보름달이 가고 있어요

둥글어서 동그라미가 굴러가는 듯

말없음표가 뚝뚝 세상으로

떨어지고 있어요

입을 다물고 침묵을 배우고 있어요

 

 

 

 

 

 

 

 

정선 강물

나호열

 

여량 사람 구절리 사람들은 다리를 건넌다.

사나흘 묵다보면 줄행랑 칠

전설이 없는 도시 사람들 강을 건너고

사공 황씨는 오늘도 아우라지 처녀와

뗏목 이야기로 삯을 받는다

더도 없고 덜도 없는 밍밍한 이야기에

하루를 또 보탠다

전설 속으로 사라지듯 나루에 빈 배가 남을 때

그 때 정선 강물은 말문을 연다

어미 소가 제 새끼 등을 천천히 핥아 주듯이

강가 주막이 강물에 몸을 던지고

둑 위의 포플러 나무들이

낮은 앞 산 그 뒤의 높은 산들이

윤회를 믿는 인디아 그 땅 사람들처럼

차례로 강물로 뛰어든다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어미의 따스한 손길처럼

그림자들은 흘러가는 강물에게

고요하고 적막한 고향의 이야기를 심어주는 것이다

멀리 떠나온 자에게 그리움이 없을 리가 없다

정선 강물의 이야기는

먼 바다에 가서야 들을 수 있다

 

 

 

 

밤길

나호열

 

 

화적떼처럼 달려드는 바람을 휘휘 저으며 간다

그의 느린 발걸음은 쫓겨 가는 자의

밤을 도와 줄행랑을 치는

비겁한 사내의 초조와는 거리가 멀다

우두커니 서서 되새김질 하는

소의 눈망울을 닮은 신호등 앞에서도 공손하다

한 번 껌벅일 때 마다 점멸하는 몇 번의 신호를 흘려보내는 것이

마치 소의 생 속으로 들어갈 듯 하다

밤이 깊을수록 거세지는 바람에

살을 내주고 이윽고 그림자만이 남은 듯하다

멈춤과 결코 뒷걸음질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소의 긴 한숨이 그림자를 포도 鋪道 위로 날려 버리자

그는 사라지고 뭉툭해진 열쇠 하나가 스키드 마크 위에 얹혀졌다

무언가 급정거한 불온한 생 위로 마치 새 싹처럼 돋아 오른 열쇠

그의 천천한 발걸음은 아마도 사라져버린 방을 찾기 위해서일까

온통 굳은 자물쇠로 채워진 세상의 어딘가에

사라져버린 방은 이미 남의 수중에 들어갔던 것인데

그는 그렇게 밤길을 갔다

가장 행복한 얼굴로 바람의 매를 맞으며

웃으며 물음표를 닮은 열쇠를 지상에 남겨두고

새벽을 향해 걸어갔다

 

 

 

 

 

 

너에게 묻는다

나호열

 

 

유목의 하늘에 양떼를 풀어 놓았다

그리움을 갖기 전의 일이다

낮게 깔려있는 하늘은 늘 푸르렀고

상형문자의 구름은 천천히 자막으로 흘러갔던 것인데

하늘이 펄럭일 때 마다

먼 곳에서 들리는 양떼 울음을 들었던 것이다

목동이었던 내가 먼저 집을 잃었던 모양이다

잃었거나 잊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도망쳤던 그 집

아마도 그 집은 소금이 가득했던 창고

아버지는 비와 눈을 가두어 놓고 바다를 꿈꾸었던 것인지

밤새 매질하는 소리 들리고

눈과 귀 그리고 입을 봉한 소금처럼 우리는 태어났던 것

유목을 배우고 구름의 상형문자를 배웠으니

하늘이 바다이고 바다가 하늘인 것 또한 알 수 없는 일

내가 잠깐 이 생의 언덕 위에 올라 발 밑을 내려다 볼 때

울컥 목젖이 떨리면서

깊게 소금에 절여 있던 낱말을 뱉어낼 수 있었던 것

여기에 없는, 누구와도 약속하지 않았으나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고 믿어버린 약속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강열한 햇볕 속에 태어나 그 햇볕으로 사라져가는

소금 등짐을 지고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나

 

 

 

 

 

 

나호열

 

미간 사이로 이제는 지워지지 않는 주름살이 깊이 패여 있다

웃어도 지워지지 않고 눈을 감아도 흐려지지 않는다

메리 고 라운드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탄

웃을 때마다 꽃무더기 무너져 내리던 주인공

아프지 않게 시간이 할퀴고 간 흔적이다

그 검을 찾아라, 내어 놓아라!

몽환 속을 들락거리는 혀가 낼름 검을 받아먹는다

검이 뭔지 도가 뭔지도 모르는 혀가

단물을 빨아 먹고 난 뒤 이빨들은 혀를 씹기 시작했다

언제 이 검을, 이 도를 뱉어내야 할까

미간 사이의 주름살이 생각 속으로 깊이 파들어 가기 시작했다.

 

 

나호열

 

그가 문을 닫고 떠날 때마다 나의 생애는 오래 흔들거렸다

위태롭게 걸려 있던 별들이 우수수 떨어지기도 했고

정전의 암흑이 발자국들을 엉키게도 했다

세차게 닫히는 쿵하는 소리가 눈물을 한웅큼씩 여물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

두렵고도 즐거운 일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역방향으로 빠르게 사라졌지만

문은 늘 우리에게 약속의 열쇠 같은 것 이었다

안에서는 잠겨지지 않는 그 문은 오직 그가 열고 닫을 수 있었던 것

문이 열릴 때 잠깐씩 햇살이 비치고 바람이 들어오고

그 햇살과 바람으로 나는 사막을 키웠다

문이 닫힐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두통이 역겨웠지만

나는 그가 왜 그렇게 문을 세게 닫는 지

그를 만나기 전부터 알고 있다

내가 키우고 있는 사막이 더 커지지 않도록

햇살과 바람이 틈입할 수 없도록 환영만을 남겨두는 것

언젠가 그는 나에게 길을 낼 것이다

거룩한 순례자의 발자국을 화인처럼 내 가슴에 새길 것이다

오늘도 그는 세게 문을 닫고 떠났다

지상에서 살다 간 사람들은 별이 되었다는데

하늘엔 장막 같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청풍에 가다

나호열

 

불현듯 앞을 막아서는 안개 때문이라고

뒤늦은 발걸음 뉘우칠 수는 없겠네

한 계절 꽃 피우던 얼굴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까맣게 타버린 씨앗

눈물 대신 발밑에 뿌려두었으니

함부로 밟아서도 성급히 손으로 거두어도 되지 않을 일

청풍은 잠시도 발길 멈추지 못하게 하였으나

나는 보고 말았네

옥순봉 호수에 제 몸을 던졌으나

수심 깊어 기암절벽을 물 위에 그려 놓으니

또 푸른 하늘이 그림자를 비추어 주네

선경이라 한들 하루 이틀 삼일이면 시들하다는

나그네의 말씀을 한 귀로 흘리려 하네

오래 바라볼수록 내 몸에 스며들어

없는 듯 살아 숨쉬는 그대여

 

 

 

나호열

 

절은 사라지고

홀로 남은 강가의 탑처럼

조금씩 허물어지는 육신의 틈이라고

나는 배웠다

 

직립을 꿈꾸면서도

햇살에 휘이고

바람에 길들여지는 나무들의

허공을 부여잡은 한 순간

정지의 날숨이

춤의 꿈이라고 나는 배웠다

 

그러나 또한

동천 언 하늘에 길을 내는

새들의 날갯짓과

제 할 일을 마치고 땅으로 귀환하는

낙엽들의 가벼운 몸놀림이

아름다운 춤이라고 나는 배웠다

 

천 만 근의 고요 속에서

스스로 칼금을 긋고 내미는

새 순과 꽃들의 아픔을 보았는가

바위에 온몸을 부딪고

천 만 개의 꽃잎으로 산화하는

파도의 가슴을 보았는가

벅차올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용암처럼

끝내 바위가 되기 위하여

기꺼이 온 몸을 내던지는

 

멈춤

그 찰라의 틈을 보여주기 위하여

바람을 불러 모으는

혼신의 집중

보이면서 사라지는

사라지기 위하여 허공에 돋을새김을 하는

묵언의 釘 소리

들판에 내려앉는

노을이 뜨겁다

 

 

 

낙엽에게

나호열

 

 

나무의 눈물이라고 너를 부른 적이 있다

햇빛과 맑은 공기를 버무리던 손

헤아릴 수 없이 벅찼던 들숨과 날숨의

부질없는 기억의

쭈글거리는 허파

창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

더 이상 슬픔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하였다

슬픔이 감추고 있는 바람, 상처, 꽃의 전생

그 무수한 흔들림으로부터 떨어지는,

허공을 밟고 내려오는 발자국은

세상의 어느 곳에선가 발효되어 갈 것이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에게 슬픔은 없다, 오직

고통과 회한으로 얼룩지는 시간이 외로울 뿐

슬픔은 술이 되기 위하여 오래 직립한다

뿌리부터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취기가 없다면

나무는 온전히 이 세상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너는 나무의 눈물이 아니다

너는 우화를 꿈꾼 나무의 슬픈 날개이다

 

백발의 꿈

나호열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리는 꿈을 꾼

그 젊은 날은 얼마나 서러웠는지

지금은 어느새 백발이 되어가는 내가

서러웠던 그 젊은 날을 꿈꾸고 있는 중

 

얼마나 하늘에 가까이 닿아야

만년설을 머리에 인 설산이 될 수 있을까

불화살 같은 햇빛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아무런 말씀도 쓰여지지 않은 백지의 책갈피를

차곡차곡 쌓아올릴 수 있을까

 

덧없는 꿈이지만

백발의 꿈이 차갑게 서러운 것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누군가의 설산이 되는 꿈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

눈발 더욱 거세지는 내 삶의 산정에

깃발 대신 씨앗과도 같은

사랑의 발자국을 깊게 심어주는

그 사람이 오기 전에는

 

 

 

 

나호열

 

씹어주세요

내 몸의 향기와 달콤함이 사라질 때까지

이빨로 자근자근 애무해 주세요

버릴 땐 안녕이란 말은 하지 마세요

애꿎게 재회를 약속하는 것은 쿨하지 않아요

전에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 것도 예의가 아니에요

전생에 나무였다고 말하면 믿으시겠어요

나무의 눈물이 고무라 하면 웃으시겠어요

이 질기고 탄력 있는 몸매는

어쩔 수 없이 숨기지 못하겠네요

이 열등감이 집착이 되네요

이제 이 열등의 이빨로

어디든 붙어드릴께요

당신이 나를 버리는 그 순간

 

껌은 이렇게 해석된다. 잘 안 풀린, 어려운, 잊혀진, 조건이 좋지 않은, 돈을 잘 벌 것 같지 않은 마이너리티.

 

 

 

 

어슬렁, 거기


— 거진에서

나호열

 

빨간 심장을 닮은 우체통엔 방파제를 넘어온 파도가 팔딱거리고

그 옆 딸깍 목젖을 젖히며 그리운 이름을 부르는 공중전화는 수평선에 가 닿는다

신호등은 있으나마나

건너가고 싶으면 건너고 멈추고 싶으면 그만인

언제나 토요일 오후 그 시간에 느리게 서 있는

십 분만 걸어 나가도 한 세상의 끝이 보이는 곳

어슬렁, 거기

집에서 무덤까지 그 사이

 

 

불후의 명곡

나호열

 

세월 이기는 사람 보지 못했다

어느 사람은 늙어 갔고

어느 사람은 낡아져 갔다

 

늙지도 않고

낡지 않을 수 없으나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저 잘 익어갈 수는 있을 듯

 

문득 한 소절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늙음과 낡음이 몸을 섞어

물컹 뒷 맛으로 남는 일

 

독이 오른 가슴에서 쏴아쏴아 술 익는 소리

석류 기어코 터지고 말 때 들려오는

시월의 시린 저 발자국 소리

어떤 말씀

나호열

 

뼈 없는 동물이 되라 하신 이

겨울잠인지 동안거인지

봄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 하신 이

그 닫힌 문을 향하여

신이 사라지고 발이 닳고 닳도록

무작정 걸어 왔으나

쓸데없이 길어진 팔

붉은 혀의 꽃밭 같은 손은 문고리에 닿을 듯 말 듯

봄이 오지 않기를 기도했네

차라리 삭풍에 매 맞는 것이 행복하다고

미치지 않으면 저럴 수 없다

눈사람

말씀 대신 서 있네

 

 

믿느냐

나호열

 

하냥 높은 산에 올라 밑도 끝도 없이 세상을 향하여 외쳤던 그 말

벗에게 귀 간질이며 했던 그 말

그녀에게 일생을 던지며 울먹였던 그 말

도끼로 내려치듯 하늘이 쩌엉쩡 깨지는 어느 날의 우레처럼

그 말을 오늘 듣는다

문 밖에 그 기척

걸레가 된 신발이 끌고 온 길은 세월이 삭제된 테이프처럼

바람이 가득 차 있다

 

믿느냐

진즉 나에게 물었어야 할 그 말

벙어리 폭설로 그 죄를 묻고 있다

강화도, 1월

나호열

 

온통 바람 밭이다

말의 씨앗

한 자리를 맴돌고 있는 발자국들이

이랑 위로 돋아 오르려고

사위를 둘러싼 칼과 채찍 즐겁게 맞아들이는 동안

점점 더 커져가는 내 귀는

오래 전 잃어버렸던 그 말을 번역하려고

허공에 하염없이 그물을 던졌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잠깐 일 만 년이 지나갔다

울컥,

한 마디 문장이 빗장을 여는 듯

기러기 떼 노을을 추운 마을 쪽으로 끌고 가고 있다

 

 

밤에 쓰는 편지

나호열

 

 

먹을 갈아 정갈해진 정적 몇 방울로 편지를 쓴다

어둠에 묻어나는 글자들이 문장을 이루어

한줄기 기러기 떼로 날아가고

그가 좋아하는 바이올렛 한 묶음으로 동여맨

그가 좋아하는 커피 향을 올려 드리면

내 가슴에는 외출중의 팻말이 말뚝으로 박힌다

내가 묻고 내가 대답하는 그의 먼 안부

동이 트기 전에 편지는 끝나야 한다

신데렐라가 벗어놓고 간 유리구두처럼

발자국을 남겨서는 안 된다

밤에 쓰는 편지는 알코올 성분으로 가득 차고

휘발성이 강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가 깨어나 창문을 열 때

새벽 하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푸르러야 한다

맑은 또 하나의 창이어야 한다

오늘도 나는 기다린다

어둠을 갈아 편지를 쓰기 위하여

적막한 그대를 호명하기 위하여

 

낙타에 관한 질문

나호열

 

 

낙타를 보면 슬프다

사막을 건너가며

입 안 가득 피 흘리며

거친 풀을 먹는다는 것이

사막에서 태어나서

사막에서 죽는다는 것이

며칠이고 사막을 건너가며

제 몸 속에 무거운 물을 지고

목마름을 이기는 것이

낙타를 보면 못 생겨서 슬프고

등 위로 솟은 혹을 보면 슬프다

낙타가 나를 본다

낙타가 이상한 낙타를 보고 웃는다

내장된 그리움으로

삶의 사막을 건너가는 것이

얼마나 기쁘냐

갈증을 견뎌내는

오아시스를 향한 눈빛이

얼마나 맑으냐

그래서 나는

낙타의 낙타가 되었다

 

 

 

감포 가는 길

나호열

 

 

누구나 한번은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걸어 보게 된다

나비의 날개짓처럼 이리저리 구비치는

길의 끝을 보았던 기억

그 길의 끝에는 마음을 다하여

기쁨으로 치면 기쁨으로

슬픔으로 다가서면 슬픔으로 울리는 바다가 있음을

꿈꾸듯 살아 왔음을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때 아닌 나비 떼

눈을 크게 뜨고 나니 눈발이더니

다시 한번 감아보니 너울대는 재들

바다 쪽으로 불어 가는 바람 따라

아름답게 사라져 버리는 추억을

데리고 가는 길

 

 

 

가끔씩

나호열

 

 

가끔씩 나는 옷섶에 손을 넣어본다

심장이 뛰고 있는 지

마치 우편함 속으로 손을 밀어 넣을 때

약간의 금속성 차가움 다음에 찾아오는 홍조처럼

팔딱거리는 먼 발자국 소리

 

봄이 언제 단번에 달려오던가

 

보여줄듯 말듯 앵도라져 몇 번 뒷걸음 친 후에

그만큼 애꿎게 한 사내를 불 지르지 않던가

 

가끔씩 나는 심장 속에 손을 넣어본다

 

새 싹이 돋았는지

무슨 꽃이라도 몇 송이 묶어볼 요량으로 더듬어 보다가

불량한 짓거리 들킬 때처럼

화들짝 꼬집어보는 봄날의 꿈

 

이미 가고 없는지

다시 오기는 하는지

 

 

 

벚꽃 축제

나호열

생화야

생화야

살아 있어

잘 봐

떨어지고 있잖아

산화하면서

더 눈부신

더 빛이 나는

벚꽃 나무 아래서

나는 불임의 꿈을 꾼다

 

 

그 밤나무

나호열

 

 

마음을 두고

몸만 떠나오는 것인데

나는 마음과 몸을

그 곳에 두고 왔다

낮에는 속절없이 솟아오르다

밤이면 몸 움츠려

지하의 불빛을 바라보는 그 나무

한 계절을 영글어도 떫은 밤송이

말 먹이로 밖에 못 쓴다는 밤송이

공연히 내 얼굴이 붉어진다

행여 찔릴까 가시 끝을 분지르고

그대 가슴에 흔적 남길까

내 눈물은 뭉툭하고 떫다

지금도 떨어지고 있냐고 묻는 내게

툭툭

툭툭툭 떨어지고 있다는

그 말

그 눈물

두물머리

나호열

 

곧고 푸른 길이 있다

눈여겨 보지 않은 곁길

한번은 큰 맘 먹고 휘돌아가야 하는 길

 

양지녁을 골라 풀꽃 피듯 주저앉은 마을

길가로 가슴을 열어둔 예배당은

퇴락해 가면서도 즐겁다

죄 짓지 않은 사람들

목례도 없이 지나쳐 갈 뿐

돌계단에는 이끼만 푸르다

 

그 길을 간다

가슴 가까이 찰랑거리는 강이 길이다

헝클어지고 뒤틀린 삶을 빗질하고 싶을 때

차단기가 내린다

앞서고 싶으면 앞서게 하고

두 손은 오로지 어깨동무할 때만 필요한 법이라고

스스로 몸 낮추는 강

 

띄엄띄엄 버스는 오지 않고

무엇인가 아쉽게 놓친 듯한 마음일 때

터벅거리며 걸어가 보고 싶은

저 먼 곳

종이 울리는 마을

 

 

다시 시월을 추억함

나호열

 

 

먼 길을 돌아 벼랑 앞에 선 사람아 아느냐,

험한 비탈 비스듬히 발목을 묻은 나무들의 올곧은 마음을

왜 서로 기대지 않고 왜 서로 어루만지지 않고 왜 서로 바라보지 않고

그저 그렇게 하염없이 멈추어 서 있기로 하였는지

묶였다 풀려지는 바람 같은 그 손길, 그 구름, 그 날의 장대비

火傷이 되어 꽃이 피고 잎들이 무성했다

한숨 같은 정적의 香氣 어쩔 수 없이 丹楓들기도 하였지만

먼 길을 돌아 벼랑 앞에 선 사람아 아느냐,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비스듬히 세상을 잡은 나무들의 추억(追憶)을,

온 몸 푸른 상채기. 흘러가는 세월만큼

가슴에 긋는 비수 한 자루 어디 있느냐

 

 

 

산사에서

나호열

 

 

풍경소리에도 자그맣게 흔들리는

달빛이

걸음을 옮기고 있다

 

천 년을 내내 눈 떠 있는

석불의 입술은

앞산 나무들을 흔드는

바람이 되고

싸락거리는 소리

반야심경을 읊으며

냇물로 흘러간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갈림길에서 흔들리는

그믐의 달빛

 

두드릴수록

허물어져 내리는

육신의 모서리를

가을벌레 울음으로 잦고 있는

투명한 목숨줄

달빛을 타오르고 있다

가을 편지 2

나호열

 

 

9월

바닷가에 써 놓은 나의 이름이

파도에 쓸려 지워지는 동안

 

9월

아무도 모르게

산에서도 낙엽이 진다

 

잊힌 얼굴

잊힌 이름

한 아름 터지게 가슴에 안고

 

9월

밀물처럼 와서

창 하나에 맑게 닦아 놓고

간다

 

 

 

 

어떤 말씀

나호열

 

뼈 없는 동물이 되라 하신 이

겨울잠인지 동안거인지

봄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 하신 이

그 닫힌 문을 향하여

신이 사라지고 발이 닳고 닳도록

무작정 걸어 왔으나

쓸데없이 길어진 팔

붉은 혀의 꽃밭 같은 손은 문고리에 닿을 듯 말 듯

봄이 오지 않기를 기도했네

차라리 삭풍에 매 맞는 것이 행복하다고

미치지 않으면 저럴 수 없다

눈사람

말씀 대신 서 있네

 

 

 

참, 멀다

나호열

 

한 그루 나무의 일생을 읽기에 나는 성급하다

저격수의 가늠쇠처럼 은밀한 나무의 눈을 찾으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창을 열어 보인 적 없는 나무

무엇을 품고 있기에 저렇게 둥근 몸을 가지고 있을까

한 때 바람을 가득 품어 풍선처럼 날아가려고 했을까

외로움에 지쳐 누군가가 뜨겁게 안아 주기를 바랐을까

한 아름 팔을 버리면 가슴에 차가운 금속성의 금이 그어지는 것 같다

베어지지 않으면 결코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신

비석의 글씨처럼 풍화되는 법이 없다

 

참, 멀다

나무에게로 가는 길은 멀어서 아름답다

살을 찢어 잎을 내고 가지를 낼 때

꽃 피고 열매 맺을 때

묵언의 수행자처럼 말을 버릴 때

나무와 나 사이는 아득히 멀어진다

 

한여름이 되자 나무는 인간의 마을로 온다

자신의 몸에 깃든 생명을 거두어

해탈의 울음 우는 매미의 푸른 독경을

아득히 떨어지는 폭포로 내려 쏟을 때

가만가만 열뜬 내 이마를 쓸어내릴 때

나무는 그늘만큼 깊은 성자가 된다

 

 

 

가을이 가고, 그도 가고

나호열

 

 

거리의 끝에서 조등이 걸어온다

하나, 둘, 셋 가슴을 훤하게 비워두고

어둠한 밤길 태우는 종이 냄새

살아 있는 사람만이 울 수 있다

울면서 후르륵 라면을 먹고

울면서 담배를 태울 수 있다

죽음은 죽은 이의 것

왁자지껄한 이 세상의 안부가

자욱한 향불에 가려 가물거린다

어색한 조문객들이 서투르게

서로의 그늘진 얼굴을 숨긴채

무관심하게 떨어지는 나뭇잎을 밟는다

울지 않는 나뭇잎을,

더 세계 밟으면서

저 언덕밑의 조등들,

하늘에 매달린 조등들을

점자로 읽어내고 있다

문장이 되지 않는 몇 줄의 바람을,

남루로 흔들리는 한 생애를,

 

 

겨울 숲의 은유

나호열

 

 

살아남기 위하여

단 하나 남은

잎마저 떨구어 내는

나무들이 무섭다

저 혼신의 몸짓을 감싸는 차디찬 허공

슬픔을 잊기 위해서

더 큰 슬픔을 안아 들이는

눈물 없이는

봄을 기다릴 수 없다

아침에 전해준 새 소리

나호열

 

 

죽지 않을 만큼만 잠을 잔다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죽지 않을 만큼만 꿈을 꾼다

죽지 않을 만큼만 말을 하고

죽지 않을 만큼만 걸어간다

그래야 될 것 같아서

누군가 외로울 때

웃는 것조차 죄가 되는 것 같아서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아, 그러나,

그러나

모든 경계를 허물지 않고

죽지 않을 만큼만 사랑할 수는 없다

누구나 말하지 않는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나는 그 끝마저도

뛰어넘고 싶다

 

 

장미를 사랑한 이유

나호열

 

 

꽃이었다고 여겨왔던 것이 잘못이었다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이 고통이었다

슬픔이 깊으면 눈물이 된다

가시가 된다

눈물을 태워본 적이 있는가

한철 불꽃으로 타오르는 장미

불꽃 심연

겹겹이 쌓인 꽃잎을 떼어내듯이

세월을 버리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처연히 옷을 벗는 그 앞에서 눈을 감는다

마음도, 몸도 다 타버리고 난 후

하늘을 향해 공손이 모은 두 손

나는 장미를 사랑한다

 

고독한 사람

나호열

 

죽어서도 결코

제 힘으로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제가 일으켜 세운 뜻을

바로 그 자리에서 지키며

오직 하늘과 겨루며 살았던

그는 누구일까

 

벼락을 맞은 채로

성장을 멈춘,

썩으면서도 향기로운

대청봉 부근

고사목!

 

다른 용도로 쓰이지 못해

늘 외로운

이 시대의 영웅은

 

 

 

 

황사, 그 깊은 우울

나호열

 

 

오늘도 사막을 건넜다.

신기루처럼 보였다 사라지는 사람들

천국이고 지옥인 사람들 사이에

없는 길 마음으로 끌어가며

먼 서울에는 황사가 내렸다고 한다.

뼈와 눈물과 꽃과 불들이 한꺼번에 화해하며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눈꺼풀 위로

부끄러운 흔적을 남겼다 한다.

몇 날 며칠을 그렇게 바람이 불고

나의 형체를 미세한 모래로 남기는 일

설산에 누가 있어 노을은 저리도 유적하게 깔리는가

세상 밖의 일인 줄 알았더니

아직도 내게는 태워버려야 할 기쁨도 있어

실낱같은 미소를 舍利로 남기며

사막을 건너 가는 나는 행복하다

사막을 집으로 여기며 돌아오는 사람들 보다는……

 

 

인터넷이 가르쳐 준 그리움

나호열

 

 

메일이 없습니다

받은 편지함에는 편지가 없다

받을 편지는 이미 도착했는데

받은 편지함에는 편지가 없다

받을 편지는 이미 읽었는데

몽글몽글 하얀 수국 꽃잎 같은 글씨 보이지 않고

받은 편지함에는 편지가 없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동구 밖으로

길은 가다가 되돌아오고

외진 산 기슭 성황당 돌무더기처럼

켜켜이 쌓여가는 시그널

메일이 없습니다가

매일이 없습니다로 보이고

내일이 없습니다로 흐릿해지더니

제멋대로 하루는 로그아웃된다

메일이 없다는 것은

매일이 없다는 것이고

내일이 없다는 것이라고

나를 로그 인 시키려면

그대가 가르쳐 준

비밀번호가 필요하다

 

 

당신에게 말걸기

나호열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꽃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은

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내 속에는 나무가 살고 있다

나호열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문득 내 앞을 가로막아 서는

저 거대한 침묵이

마지막으로 내가 마주 할 외로움이라면

두 팔로도 껴안을 수 없고

고개 들어도 아득한 그런 외로움이라면

차라리 사랑하기로 했다.

 

네 앞에 서면 말을 배운 것이 부끄러워진다.

천천히 늘어뜨리는 향내 나는 치맛자락처럼

그림자 하가 마당을 덮고

담장 무너뜨리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높은 산을 넘어간다.

 

너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너는 소리내지 않고 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너는 우주의 중심이 어딘지 내게 알려 주었다.

 

이렇게 멀리 서서야 온전히

너를 바라보며

사랑할 수 있다니.

 

 

청동화로(靑桐火爐)

나호열

 

 

이 세상 가장 낮은 땅, 강 하구 뻘밭에 금가고 깨진 청동화로가 가슴에 강과 바다를 가득 품고 있었다.

 

스스로 어떻게 뜨거워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가 말없이 태우던 잿빛 문장이

한번 더 불길로 일어나

그 불길을 누르고 또 누르던

그대의 눈물이 없었다면

뜨겁게 달구어질수록 조금씩 뒤로 물러앉아

뜨개질을 하거나

아주 슬픈 소설을 읽어 가는 눈빛이 없었다면

겨울의 긴 바람, 유리처럼 부서져 내리는

별들이 가슴에 가득 차면

영혼의 깊은 샘물을 길어올리듯이

조심스레 가슴을

말 못하고 태워 버린 재들을 비워주던

그 손길이 없었다면

그러나 싸늘히 식어가는 일은 오직 나만의 일이었기에

조금씩 금가고 깨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설산에서 흘러내리는 강물로 뛰어들어가

스스로 식어가기를 기도했는지 모른다

 

엎드린 채로

지상에서 가장 낮은 땅 끝과

가장 깊은 바다가 시작되는 뻘밭에 누워

지금 청동화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안개

나호열

 

 

언제부터인가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어

그 자리에 놓여진 것들 탐내지 않고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고

부드럽게 감싸안을 줄 아는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어

처음에는 더듬거리고 막막해 하다가

한 걸음씩 고개 숙여 걸어가다 보면

엷은 슬픔의 축축한 옷 안개의 속마음을 알게 되지

껴안을수록 나의 두 손은 허허로운 가슴께로 모두어지고

헤쳐나가면 나갈수록 무겁게 다가서는 생을 사랑하게 되었어

한걸음 벗어난 아득한 벼랑 너머에도

하늘과 땅 밑에도 길이 있음을 눈감고 알게 되었어

 

어떤 하루 · 1

나호열

 

 

한낮은 고단하였다

가도가도 너른 풀밭은 보이지 않았고

멍에는 무거웠다

끝내 풀 수 없었던 밧줄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얽혀져 있었다

쇠방울을 울리며

외양간으로 돌아오는 발굽 아래로

저녁은 부끄러웠다

진통제가 풀리는

밤이 깊어질수록

피로와 뒤섞인 꿈은

더욱 병들어갔다

나는 무엇인가

무엇인가 알기 위하여

더 많은 꿈들이 필요하였고

더 많은 현실이 차용되었다

마지막에 꾼 꿈은

푸른 하늘 비스듬히 내려앉은 언덕에

기대앉은 나의 모습

누군가 액자에 그 풍경을 담아 갔는데

아직도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당신이 물으신다면

나호열

 

그날

어땠느냐고

왜 그 말을 하게 되었느냐고

처음

말을 배우고

글을 배울 때 다가온

세상처럼

갑자기

성경을 읽고 싶어졌다고

 

 

 

가을 편지 1

나호열

 

그대 생각에 가을이 깊었습니다

숨기지 못하고 물들어 가는

저 나뭇잎같이

가만히

그대 마음 가는 길에

야윈 달이 뜹니다

 

 

 

가을 편지 2

나호열

 

구월

바닷가에 써 놓은 나의 이름이

파도에 쓸려 지워지는 동안

 

구월

아무도 모르게

산에서도 낙엽이 진다

 

잊혀진 얼굴

잊혀진 얼굴

한아름 터지게 가슴에 안고

 

구월

밀물처럼 와서

창 하나에 맑게 닦아 놓고

간다

 

 

 

 

세상의 중심

나호열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운

이승과 저승의 어디쯤에

나는 서 있는 것이다

소요의 산 어디쯤에

뉘엿뉘엿 자리 잡은 비탈진 나무들

햇살이 꽂히는 곳이면

어디든 세상의 중심인 것을

나는 성급히 직선을 꿈꾸었다

아니면 너무 멀리 에둘러 돌아 왔다

이빨 빠진 늙은 꽃들 웃는다

중심을 향하여 뿌리를 감추고

알록달록 나들이 왔다고

터진 발을 감춘다

 

 

 

전생(前生)

나호열

 

 

입 다물고 있어

한때는 무엇이었을 쓰레기들

비닐봉지에 몸을 섞는다

3인용 쇼파 하나 비닐봉지 옆에

내버려져 있다

한때는 나도 등나무였던 시절이 있었다

꽃도 피우고 잎도 돋고

바로 서지는 못해도 뜨겁게 사랑할 줄 알았다

너도 버려졌구나

화적떼처럼 달려드는 바람을 어쩌지 못하고

은행잎들 무수히 쇼파에 내려앉는다

아무도 그들이 떠난 곳을 묻지 않는다

모든 쓰레기는 전생을 가지고 있다

약속

나호열

 

먼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

다시 먼 길을 돌아가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그의 신발에 입맞춤 하겠네

힘든 오르막길이었으니

가는 길은 쉬엄쉬엄 내리막길이라고

손 흔들어 주겠네

 

지키지 못할 것이기에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기에

약속은 사전에 있는 것이네

 

그대가 왔던 길을 내가 갈 수는 없으니

돌아가는 것도 그대의 수고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서운할까

그래도 보일락 말락 그만큼 거리에서

그대에게 할 말이 있네

들릴락 말락

꽃이 피었네

 

제비꽃이 보고 싶다

나호열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들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보았다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떠들었다

듣지 않는 귀

보지 않는 눈

말하지 않는 혀

그래도 봄바람은 분다

그래도 제비꽃은 돋아 오른다

뜯어내도 송두리째

뿌리까지 들어내도

가슴에는 제비꽃이 한창이다

 

 

 

쉼터

나호열

 

 

여리고 작은 새일수록 위험하다

날개 돋힌 그날부터 하늘은

경외이며 공포

그들의 비상은

지상에 내려앉기 위한 불치의 고통

부러질 듯

바람에 휘는 나뭇가지 위에서

함께 흔들리는 하루

어린이 놀이터 그네에 흔들리며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작은 새들을 본다

그들은 쉬기 위하여 한결같이

가는 나뭇가지를 잔뜩 움켜쥐고 있다



꽃, 사랑꽃들

나호열

 

잎사귀는 네잎 클로버, 꽃은 패랭이꽃을 닮았다.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국화도 아니고 매운 바람 맞서는 매화는 더더욱 아니고, 뒤에 숨긴 꽃말은 아예 없다. 사랑꽃 이라니, 곰곰하고 궁금하다 물이 있으면, 햇살이 있으면 그저 얼굴 내밀었다가 저녁이면 고개 수그리는, 저게 무슨 사랑 꽃이야! 푼수 같은, 질 줄 모르고 그저 피기만 하는 몸짓들을 바라보면, 향기 없는 것이... 밥 먹고, 잠자고 일어나서 일하는 것들이 죄다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 미련한 저 짓이 수고스러워 보여 이제는 잎 지고 꽃도 떨어지라고 겨우 내내 찬 바람 부는 베란다에 내다 두었다.

 

아, 천지에 가득한 저 꽃,

세상 어둡고 매서워

이제는 영영 사라져버린 줄 알았는데,

동토를 비집고 나오는 저 푸른 손

발그스름 펼쳐 보이는 저 얼굴

세상의 즐거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애불을 찾아서

나호열

 

 

표지판 일러주는 대로 걸었다

길 따라 마음은 가지 않았다

높은 곳

더 높은 곳으로 향하는

마음 속에서

조용히 자세를 세우는

나무들

죽은 듯 살아라

살아도 죽은 듯 하라

숨죽여 뿌리는 깊어지고

둥글어지고

머리와 멀어지는

아득한 깨우침

낮게 사랑하라

 

 

내 마음의 벽화․1

나호열

 

 

내 마음의 벽화는

말하자면

거실 한 쪽 벽에

못 박혀 있는

동양화 액자와도 같은 것이다

있어도 없는 듯 하다가

가끔 눈길이 가면

푸른 하늘

마을로 가는 오솔길

밭가는 농부와 소

텅 빈 여백과

먹빛만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듯이

내가 어디 있나

길 잃고 두리번거릴 때

여기 있어 하면서

내 마음에 못 박혀

당신이 손짓하는 것이다

 

 

 

 

 

 

내 마음의 벽화

나호열

 

 

글을 모르는 사람이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 말인 줄 아는 사람이 그림을 그린다

말이 바람인 줄 아는 사람이 그림을 그린다

나는 글을 안다, 그림이 말이 아닌 줄 나는 안다

말이 바람이 아닌 줄 나는 안다

그러므로 그 벽화는 내가 그린 것이 아니다

내게 말을 걸고

쪽지를 건네주고

바람에 펄럭이는 그 벽화는

어두워져야 보이고

비바람 몰아쳐야 보이고

내가 혼자 먼 길 갈 때 보인다

그러므로 그 벽화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말해 줄 수 없다

그 벽화가 기쁘다

그 벽화가 슬프다

그 벽화가 까르르 웃고

그 벽화가 젖은 울음을 운다

벽화의 주인은

벽이다

나를 감싸주는

그 벽!

 

 

 

 

내 마음의 벽화․3

나호열

 

 

얼 만큼의 깊이로

마음에 못을 박아야할 지 모른다

그림 하나를 걸어두려고

못질은 계속되지만

완강하게 밀쳐버리는 그 무엇이 있어

튕겨 나오는 작은 불꽃들

마음 아프게 못질을 하지 않으면

걸 수 없는 그림이 있어

미소짓는 그 눈빛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나는, 알아 나는 알아

멀찌감치 빗겨 서서 바라보는 그림이 있어

무엇이 그를 미소 짓게 하였는가

무엇이 그를 그윽한 눈빛으로 가득 차게 하였는가

 

그림을 걸고 싶다

바다를 향하여

너른 초원을 향하여

그러기 위해서 나의 마음은

전생이 나무였을 벽이 되어야 한다.

 

 

 

 

 

 

 

내 마음의 벽화․4

나호열

 

 

상하다

손에 온기가 남아 있다

누군가가 잡아주었던 향기

이상하다

모래 부서져내리는 가슴에

밤 길잡이 별이 달려 있다

이상하다

오래 전에 떠나왔던 나의 방에

누군가가 다녀갔다

선지자들은 왜 벽에 대고 기도를 했을까

잡을 수 없는 이데아는 등 뒤의 햇살

저 너머에 있고

벽에 너울대는 제 그림자를 그토록 지우려 애썼을까

나는 벽에다 인사를 한다

안녕, 나는 오랫동안 슬픔에 대해 이야기 했다

안녕, 만난 적이 없는데 왜 수없이 작별해야 하는가

안녕, 잡을 수 없는 벽이 손을 내민다

안녕, 나는 벽에 등을 기댄다

벽 속에서 길이 열리고 다시 눈이 내린다

벽 속에 문이 있다

안녕, 나는 벽 앞에 무릎을 꿇는다

가장 낮은 자세로 두 손을 올린다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추운 봄밤

나호열

 

 

높은 나뭇가지 위의 가계가 위태롭다

고개 수그려야 보이는 지상의 먹이

수직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보다

하강은 괴롭다

바람은 늘 나를 먼 곳으로 떨구어 놓기에

이불을 끌어당기니

이불이 내 몸보다 더 춥다

 

 

 

 

 

어떤 산(山)

나호열

 

 

그대는 내 몸 속에 산다. 낭떠러지, 하염없는 늪 되돌아

올 길 아예 버리고 내 몸 흔들릴 때마다 깊은 소쩍새 울

음소리만 들린다. 얼마나 깊은 산인지 차마 그 이름 부르

지 못하고 포르릉 작은 날짐승이 되어 보아도 이내 헤매

이는 마음만 정처가 없어 발자국인지 날갯짓인지 모를

은행잎 갈잎만 발밑에 쌓인다.

우두커니 그 어디에서 바라보아야 하는가 肉脫하지 않

으면 보이지 않을 산, 그대. 누가 아름다움을 내게서 보고

간다면 그것은 그대를 닮아가고 싶은 내 마음뿐이리라.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창작과비평사

 

 

 

꽃 피고, 꽃 지고

나호열

 

 

꽃이란 꽃을 다 좋아할 수는 없지만

꽃이란 꽃이 죄다 아름다운 것은

피거나 지거나 그 사이가

생략되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을 하나의 얼굴로도 충분히

물의 깊이로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꽃 같은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물 흐르듯 같이 흘러갈 수 있을까

 

 

안개꽃, 꽃 안개

나호열

 

 

한아름의 꽃을 안개라 하고

안개 그 앞에서는

꽃이라 우겨대는

이쁜 사람들 틈에

꽃을 보아도

꽃으로 보이지 않고

불현 듯 내 앞에 서는

안개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갑자기 시력이 떨어진

그 틈에

눈물이 떨어진다

꽃이 되기 위하여

안개가 되기 위하여

소금기 머금은 눈물이 가득한

빈 화병

꽃다발을 든 사내

나호열

 

 

시든 꽃을 든 사내가

네거리 고장난 신호등 앞에 서 있다

꽃이 저렇게 말라가며 검게 변하는 것은

햇살이 너무 강렬하거나

그가 너무 오래 걸어왔기 때문이다

저 보라색 꽃다발은 지금

사내의 팔에 담겨 있지만

그는 들판을 헤매며 자신의 치장을 위해

꽃을 꺾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달려가야 할

달려가서 얼싸안아야 할

소중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는 매일 시든 꽃을 꺾어

네거리 신호등 앞에 선다

그의 팽하고 깊숙한 눈은

영혼의 가파른 계단 밑으로 열려 있다

그의 눈에서 새어나오는 붉은 신호등

나는 본다 그가 걸어왔던

다시 걸어가야 할 방은

그을음으로 가득한 등잔 속이다

눈물을 태우면 천사의 옷자락이 타들어 가는

향기가 새어나온다

나는 본다 그가 숯 검덩이가 되어가면서

등잔 심지를 태우는 것은

그림자 가득한 자신의 얼굴을

누군가에게 보여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바람으로 달려가

나호열

 

 

달리기를 해 보면 안다

속력을 낼수록 정면으로 다가서서

더욱 거세지는 힘

 

그렇게 바람은 소멸을 향하여

줄기차게 뛰어간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나의 배후는 바람으로

바람으로 그대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달리기를 해 보면 안다

소멸을 향하여 달려가는 바람과 멀어지면서

나 또한 잠시라도 멈추어 서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싶지만

앞으로 떠밀어내는 힘 때문에

더 멀리 달려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풀썩 무릎 꺾고 주저앉기 위하여

거친 숨 몰아쉬며 그대 이름 부르기 위하여

세상에는 그렇게 어딘가를 떠나온

도착해야할 집들을 잃은

꽃들이, 나무들이

바람으로

바램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촛불을 켜다

나호열

 

 

밝고 맑은 날에는 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둡고 길 잃어 힘들어질 때

저는 비로소 당신 곁으로 달려가

당신의 발 밑에 엎드리는 작은 불빛입니다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저는 예비합니다

밝고 맑은 날에도 저는 영혼의 심지를 올려

어둡고 비바람 치는 날이 오지 않기를

사랑의 촛대 위에 눈물을 올립니다

 

 

 

 

떠난다는 것은

나호열

 

 

그리웁다는 것은 그 무엇이 멀리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행하면서도 등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등 돌린 채로 등 돌린 채로

아무리 불러봐도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웁다는 것은 아직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대가 있어 아름다운 세상 곁에

나도 가만히 서 있어 보고싶다는 것이다.

 

 

 

강가에서

나호열

 

 

내가 난다. 거기 누구? 잠시 멀어졌다가 이내 돌아오는 풀 냄새. 무엇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 머물겠다고 뿌리내리려는 생이 꿈틀거리며 울고 있다는 것이다. 더듬거리는 손에 정적이 잡혔다가 저만치 안개로 달아나 버리고 훅, 흐느낌처럼 물비린내가 난다. 살아, 꿈틀거리는 살냄새. 그물을 뚫고 나오는 비릿한 달빛, 멀리 돌아와 가 닿은 포근한 가슴에 등으로 달아 두고 벙그는 꽃잎의 마음을 읽는다. 짧은 생을 마감하는 고추잠자리의 꿈을 지웠다가 다시 허문다.

 

 

 

 

황사, 그 깊은 우울

나호열

 

 

오늘도 사막을 건넜다.

신기루처럼 보였다 사라지는 사람들

천국이고 지옥인 사람들 사이에

없는 길 마음으로 끌어가며

먼 서울에는 황사가 내렸다고 한다.

뼈와 눈물과 꽃과 불들이 한꺼번에 화해하며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눈꺼풀 위로

부끄러운 흔적을 남겼다 한다.

몇 날 며칠을 그렇게 바람이 불고

나의 형체를 미세한 모래로 남기는 일

설산에 누가 있어 노을은 저리도 유적하게 깔리는가

세상 밖의 일인줄 알았더니

아직도 내게는 태워버려야 할 기쁨도 있어

실낱같은 미소를 舍利로 남기며

사막을 건너가는 나는 행복하다

사막을 집으로 여기며 돌아오는 사람들 보다는 ……

도솔암 가는 길

나호열

 

 

뚜두둑 목 부러지는 동백도 아니 보고

그리운 상사화 아직도 피지 않아

발길 또 서운해지려 합니다

 

마음눈 맑지 않으면 바위 속으로 무너져 버리는

마애불 찾지 못하여 못내

서운해지려 합니다

 

동백도, 상사화도 마애불도 너의 마음 속

비결처럼 숨어있다고

그립고 사무치는 일 조금은 서운히 남겨두는 것이

사는 기쁨이라고

 

저만큼 올라오는 산객이

모른 척 지나가며 일러줍니다

 

 

 

사랑은

나호열

 

 

사랑은

꽃이 아니다

꽃 지고 난 후의 그 무엇

사랑은 열매가 아니다

열매 맺히고 난 후의 그 무엇

 

그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이 지상에 처음으로 피어나는 꽃

이 지상에 마지막으로 맺히는 열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가랑잎의 힘

나호열

 

 

동짓달

불씨 없는 화로에

어쩌자고

내려 쌓이는 것이냐

하늘을 우러르게 하던

시퍼런 지폐의 위용

다 어디다 버리고

가볍게 한 해를

마감하는 것이냐

겨울 밤 찬 공기를

북북 그어대며

이 가슴으로 낙하하는

찢어버릴 수도

태워버릴 수도 없는

가랑잎이여

세월을 묵비하는 탯줄

나는 안다

휴지조각보다 못한 네가

나무 한 그루를

높이 키 세웠음을 나는 안다

햇빛과 천둥과 세찬 비바람이

네가 키워낸 어느 나무의

힘이었음을

활짝 편

네 거칠어진 손을 보고 안다

 

 

 

 

나는 물었다

나호열

 

 

나는 물었다

나무에게, 구름에게 꽃에게

흐르는 길이며 강물에게

그들은 말하지 않고

조용히 몸짓으로 보여주었다

일인극의 무대

굴뚝이 연기를 높이 피워 올렸다

절해고도 표류자의 독백처럼

표정이 없는 희망이 되는

사전에 없는 어휘가 되는

물음들

아직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

나는 본다

나무의, 구름의, 꽃의, 흐르는 길과 강물의

커져가는 귀를 본다

귀는 물음표를 닮았다

 

 

 

 

 

눈부신 햇살

나호열

 

 

아침에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눈뜨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해맑은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아무도 오지 않은

아무도 가지 않은

새벽길을 걸어가며

꽃송이로 떨어지는

햇살을 가슴에 담는 일이 행복이다

 

가슴에 담긴 것들 모두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마음 아팠던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 행복이다

 

 

 

노새의 노래

나호열

 

 

그때가 그립다.

튼튼한 어깨 위에 그대를 싣고

가자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며

사랑은 아름다운 노역이라고

믿었던 그때가,

 

생각은 무겁고

갈 곳이 막막한 노인처럼

캄캄함 과거에

뒷발질을 해 본다

 

어디에도 우마(牛馬)가 갈 길은 없다

눈길

나호열

 

 

녹고 다시 얼어붙은 빙판길을

오늘은 내가 간다

네가 넘어지지 않으려고 잡았던

나무 가지를 오늘은 내가 잡고

네가 뒤우뚱거리며 엉덩방아를 찧었던 그 자리

나도 덩달아 미끄러지며

네가 힘들어 하며 혼자 걸어갔던 눈길을

오늘은 내가 혼자 걸어간다

언제 우리가 손 한 번 따스히 잡아 보았던가

 

눈 몇 송이 눈물로 떨어지고

눈 몇 송이 꽃으로 피어나고

 

 

 

 

 

 

약력

나호열

 

 

그리움으로 피었다 지는 꽃

살아온 흔적 중에 빛나는 일만 적으라 하네

높은 지위

남에게 자랑하여 고개 숙일만한 일들을

요약해서 적는 것이 약력이라네

나이 들면서 자꾸 뒷 쪽을 바라보는 것은

덧셈보다 뺄셈에 능숙해지는

바람을 닮아가기 때문이라네

바람이라고 적을 수는 없네

떠돌이였다고 말할 수는 없네

태어난 그 날부터 지금까지

먼지처럼 쌓였다 사라져버린

그 수많은 날들을

나는 축약할 수가 없다

기억나지는 않으나

밥 먹고 잠들었던

잠들었다 부시시 깨어나던 동물의 날들을

나는 버릴 수가 없다

 

나는 약력을 쓰네

꿈이 꿈인 줄 모르고

꿈속을 헤매다가

꿈속에서 죽어서도

죽은 것인지 조차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 마디로 줄여서 약력을 쓰네

 

 

 

 

눈빛으로 말하다

나호열

 

떠나보지 않은 사람에게

기다려 보지 않은 사람에게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잔뜩 움켜쥐었다가

제 풀에 놓아 버린 기억이 없는 사람에게

독약 같은 그리움은 찾아오지 않는다

 

달빛을 담아 봉한 항아리를

가슴에 묻어 놓고

평생 말문을 닫은 사람

눈빛으로 보고

눈빛으로 듣는다

 

그리움은 가슴 속에서 피어나는 꽃

 

그저 멀기만 하다

멀어서 기쁘다

 

 

 

모란꽃 무늬 화병(花甁)

나호열

 

한 겨울

낟알 하나 보이지 않는

들판 한 가운데

외다리로 서서 잠든 두루미처럼

하얗고 목이 긴

화병이 내게 있네

영혼이 맑으면 이 생에서

저 생까지 환히 들여다보이나

온갖 꽃들 들여다 놓아도

화병만큼 빛나지 않네

빛의 향기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구문 반의 발자국 소리

바라보다 바라보다 눈을 감네

헛된 눈길에 금이 갈까 봐

잠에서 깨어 하늘로 멀리 날아갈까 봐

저만큼 있네

옛사랑도 그러했었네

 

 

 

눈물이 시킨 일

나호열

 

한 구절씩 읽어 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만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꽃짐

나호열

 

자전거 한 대가

소실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긴 언덕길인지 비틀,

기우뚱거리며

너른 들판이 얹혀져 있는지

등짐이 가득하다

이 세상 향기로운 꽃 모두

빛깔 고운 꽃 모두

기쁨과 설렘을 건네주러 가는

저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노동인가

소실점 속으로 아득히

비틀거리며 기우뚱거리며

노을을 가득 지고 가는

저 생生이 궁금하다

 

 

 

 

  

 

 

늙어간다는 것

나호열

 

어느 물길을 거슬러 오르나봐

강원도쯤

강원도하고도 정선쯤

정선하고도 아우라지쯤 가닿으려나 봐

한동안 머물렀던

양수의 기억

그 끄트머리 어디쯤에서

하늘의 치마끈이 풀렸는지

그 물빛

그 내음이 흠씬 물들어 있나봐

 

몸을 웅크린 저 조약돌들

나보다 먼저 거슬러 올라온 연어 떼들인 듯

 

여생(餘生)과 후일(後日)이 같은 뜻이라는 걸

문득 바라보는

아우라지의 저녁쯤

 

 

수오재(守吾齋)*를 찾아가다

나호열

 

마음에서 발이 자란다

어디든 가 보자고

어디든 여기보다 못하겠느냐고

마음에 발이 수없이 돋아나도

그러나 마음은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고

나무가 된다

봄이면 몸서리치는 꽃으로 울고

여름이면 무성히 창문을 열어 놓다가

가을이면 메마른 눈물을 발등에 죄 없이 덮고 덮는다

마음은 채찍 같은 마파람을 맞으며 겨울의 긴 꿈을 꾼다

마음은 결국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비가(悲歌)

나호열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한 번도 불러지지 않은 그 노래는

슬픔이 불길처럼 흘러간 후에

강물보다 더 우렁우렁 눈물 쏟아낸 다음에

끝내 불러보지 못한 이름이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길을 지우고 난 후에

사막 같은 악보를 드러낼 것이다

슬픈 사람은 노래하지 않는다

외로워서 슬픈가

슬퍼서 외로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어디쯤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리는 듯

슬픈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부르는 그 노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동행

나호열

 

새벽인지

저물녘인지

수묵 한 문장으로 흘러가는 하루

 

낮에는 얼굴 마주 볼 새 없이

그물코를 깁다가

뉘엿뉘엿 어스름이 질 때

모두들 집으로 돌아갈 때

사내는 노를 젓고

아내는 강심에 그물을 던진다

 

백로가 던진 그림자에 놀라

잉어가 튀어 오르고

잔 물결이 몇 개의 획으로

다가오는

 

하루치의 사랑이면

서로의 깊은 가슴이

넉넉한 그물이 되는

저 묵언의

일필휘지!

 

 

 

휘다

나호열

 

강가에 살다보니

수런거리는 강물의 소문을 엿듣고 싶었나 보다

자꾸만 물기슭에 어깨가 허물어져

저 멀리 내려간 강물은

소식 한 장 없지만

한 번은 무작정 떠나보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자꾸 자꾸 몸이 기울어

이제는 눕고 싶은 나무

 

언젠가는 베어져

그루터기만 남을 테지만

청춘의 꿈은

아직은 푸르게

버리지 않았다

 

 

 

 

 

 

 

 

 

 

 

 

봄눈의 내력

나호열

 

이미 늦은 작별의 인사처럼

눈은 내린다

저 멀리 아득하게 휘어져 사라진

길의 뒷모습에 가닿는 낮은 목소리

이제서야 가슴에서 뛰쳐나온 그 말은

무작정 걷는다

하얀 꽃송이 같은 그 말은

하염없이 둥글기만 한 그 말은

벙어리의 가슴을 가진 그 말은

오래 머물러야 할 당신의 웃음 뒤에서

피기도 전에 진다

끝내 불씨를 감춘 눈물이 된다.

 

 

촉도(蜀道)

나호열

 

경비원 한 씨가 사직서를 내고 떠났다

십 년 동안 변함없는 맛을 보여주던 낙지집 사장이

장사를 접고 떠났다

이십 년 넘게 건강을 살펴주던

창동피부비뇨기과 원장이 폐업하고 떠났다

내 눈길이 눈물에 가닿는 곳

내 손이 넝쿨손처럼 뻗다 만 그곳부터

시작되는 촉도

손 때 묻은 지도책을 펼쳐놓고

낯선 지명을 소리 내어 불러보는 이 적막한 날에

정신 놓은 할머니가 한 걸음씩 밀고 가는 저 빈 유모차처럼

절벽을 미는 하루가

아득하고 어질한 하늘을 향해 내걸었던

밥줄이며 밧줄인 거미줄을 닮았다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 퇴로를 끊어버린 촉도

거미에게 묻는다

 

 

 

수인선(水仁線)

나호열

 

수평선을 달리는 협궤열차

소래, 원월, 군자, 원곡, 고잔, 일리, 사리, 야목, 어천

어디에 내려도 아름다운 마을들

발목까지 차오르는 바다를

내리고 타고 내리고 타고

소금기 묻어 보석처럼 들어박히는 사람들

마음에서 마음으로

갈매기 낮게 날며

부리로 물어다가 저만큼 옮겨놓는

수인선,

굴렁쇠 굴리듯 불씨를 뿌리며

해가 그 위를 밀려가고

고무줄처럼 팽팽해진 바람이

수평선을 놓아 버린다

 

 

 

 

모텔 아도니스

나호열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은

소년도 아니고 청년도 아닌

다가서면 누구나 붉음으로 물들어 버릴 것 같은

길가의 저 사내 때문에

신호등이 없어도 멈칫 서게 되는

비밀 하나를 감추고 가을을 지나간다

 

비밀은 나눌 수 없는

혼자만의 것

잘 익은 와인의 속내를 닮은

마지막 잎새가 되는 것

사랑이란 오해의 바람 한 줄

누군가의 영혼에 잠시 닿았다

사라지는 물결 몇 마디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고

연꽃이 져 가는

그와 같은 비밀을

나누어주고 있는 저 사내

 

하루

나호열

 

그 편지는 어김없이 내 앞에 놓여져 있다

발신인이 없는 편지는 수상하다

나는 한 번도 그 내용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

되돌려 보낼 주소가 없으므로 투덜대다가

아예 그것을 잊어버리기로 한다

집요하게 달려드는 흡혈귀처럼

날카로운 송곳니가 밀봉의 틈새로 언듯 비치기도 한다

장독대에 정한수에 내려앉은 시린 그믐달 같기도 하다

손을 집어넣으면

금새 바스라져 없어져 버릴것 같아

뜯지 못하는 편지

보고싶은 유년의 거울이

깊은 우물속에 담겨져 있을 것 같은 출렁거림

나의 생애는 헤아릴 수 없는 낙엽과

햇살로 가득찬다.

수없이 피고 졋던 꽃들과 새들의 지저귐

내가 버렸던 편지는 눈보라가 되어

나보다 먼저 눈물을 밤길에 밝힌다

어차피 해독할 수 없는 것이라면 더 잊어야 할까

먼 길을 더 멀리 돌아가는 튼실한 신발 한 컬레일까

평발인 나는 오래 걸을 수가 없다.

 

 

 

금서(禁書)를 쓰다

나호열

 

 

그날 밤 나를 덮친 것은 파도였다

용궁 민박 빗장이 열리고

언덕만큼 부풀어 오른 수평선이

내 몸으로 쏟아져 들어 왔다

빨래 줄에 걸린 집게처럼

수평선에 걸려 있던 알 전구가

몸의 뒷길을 비추었다

상처가 소금 꽃처럼 피어 있는 뒷길은 필요 없어

거칠지만 단호하게 일회용 밴드는 말을 막았다

두껍기는 하나 알맹이가 없는 책은

온통 상처를 감쌌던 일회용 밴드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아무도 읽기를 바라지 않는 나는 금서이다

상처를 어루어 만져 줄 네가 필요하다는 말은

달콤한 만큼 거짓말이다

거짓말이 가득한 책

온 힘을 다해 부둥켜안았던 파도는

날이 밝자 저만큼 물러가 있지 않은가

 

몸을 떠난 상처는 또 무엇을 그리워해야 하는 지

해는 뜨기도 전에 졌다

 

불타는 시(詩)

나호열

 

 

맹목으로 달려가던 청춘의 화살이

동천 눈물주머니를 꿰뚫었는지

눈발 쏟아지는 어느 날 저녁

시인들은 역으로 나가 시를 읊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

장미가 피고 촛불이 너울거리는 밤

누가 묻지 않았는데 시인들의 약력은

길고 길었다

 

노숙자에게 전생을 묻는 것은 실례다

채권 다발 같은 시집 몇 권이

딱딱한 베개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둠한 역사 계단 밑에서 언 손을 녹이는

불쏘시개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늘이 내리시는 무언의 시가

발밑에 짓이겨지는 동안

가벼운 재로 승천하는 불타는 시가

매운 눈물이 된다

 

아, 불타는 시

 

 

 

 

운동 후기(運動 後記)-

― 노동이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

나호열

 

몸에서 화약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 것은

그해 시월 때문이다

놀이와 노동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늘 힘이 모자랐다

낙하하는 포탄의 작열과

가지에서 떨어지는 벚꽃의 아우성이

피와 살의 힘

나는 빗나간 화약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들이 진 만큼

또 수 없이 많은 꽃들이 피어났던 까닭에

우리는 놀이와 노동의 근친을 잊었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홍조 그 부끄러움은

무거운 짐을 나르는 한 사내의 불끈거리는

팔뚝의 힘줄을 볼 때 더하다

 

앞으로 밀고, 잡아당기고, 위로 올리고

걷고 뛰면서

나는 한 사내를 이기고 싶다

누가 노동이 자유롭게 한다고 했는가

짐승의 시간이 초식의 슬픔을 잘게 부술 때

땀은 화약 냄새를 짙게 풍긴다.

 

지금 내가 들어 올리는 것은

0 그램의 허무

깊은 날숨이다.

 

* 폴란드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 정문에 아치로 걸려 있는 문구이다.

 

참, 멀다

나호열

 

한 그루 나무의 일생을 읽기에 나는 성급하다

저격수의 가늠쇠처럼 은밀한 나무의 눈을 찾으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창을 열어 보인 적 없는 나무

무엇을 품고 있기에 저렇게 둥근 몸을 가지고 있을까

한 때 바람을 가득 품어 풍선처럼 날아가려고 했을까

외로움에 지쳐 누군가가 뜨겁게 안아주기를 바랐을까

한 아름 팔을 벌리면 가슴에 차가운 금속성의 금이 그어지는 것 같다

베어지지 않으면 결코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신

비석의 글씨처럼 풍화되는 법이 없다

 

참, 멀다

나무에게로 가는 길은 멀어서 아름답다

살을 찢어 잎을 내고 가지를 낼 때

꽃 피고 열매 맺을 때

묵언의 수행자처럼 말을 버릴 때

나무와 나 사이는 아득히 멀어진다

 

한여름이 되자 나무는 인간의 마을로 온다

자신의 몸에 깃든 생명을 거두어

해탈의 울음 우는 매미의 푸른 독경을

아득히 떨어지는 폭포로 내려 쏟을 때

가만가만 열뜬 내 이마를 쓸어내릴 때

나무는 그늘만큼 깊은 성자가 된다.

 

 

변검(變臉)의 하루

나호열

 

구둣발에 밟히지 않으려고 지렁지렁 땅속으로 기어다니다

 

무엇에 홀린 듯 무슨 새싹이라도 되는 듯 지상으로 올라와

용트림하다가

번뜩 눈을 뜨니 원래 나는 눈이 없었다

숫컷 공작처럼 온갖 문양의 날개를 펼쳐 보이겠다고

스스로 다리 난간을 넘어 갔으나

앗차! 몸이 무거워 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아 당겨주기를 바라는 허튼 수작으로

내가 진심을 다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당신은 이런 화두를 던졌던가

쌓이면 오라

길을 덮었던 수많은 세월의 낙엽

소리 없이 내렸던 폭설이 그 위를 다시 밟고 난 후의

더듬더듬 발걸음을 내딛을 때 나는 사그락 소리

그 두렵고 안타까웠던 그 소리 터지는 순간

 

와르르 눈물 대신 쏟아지던 모래의 얼굴

 

 

경계

나호열

 

안경을 잃어버렸다 세상이 뿌옇게 흐려지고 안과 밖의 경계가 신기루처럼 멀리 휘날렸다 헛디딘 말들이 곳곳에 붉은 신호등을 걸었다

 

앞을 못 보는 농부가 밤에도 논으로 나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몸이 졸리면 밤이지 캄캄하기는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궁금한 것은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걷고 달리고 밀어올리고 당기고 구부리고 펴고 운동기구 앞에서 하는 일들이 몸에서 연두 빛 새 잎이 돋아 오르는 듯 하다고 하자 바로 그것이 한밤중 논에서 벼들이 하는 일이라고 가볍게

받아쳤다

 

안경은 그까짓 흐리고 어두운 세상을 더욱 확실하게 흐리고 어둡게 각인하는 일 그 눈 먼 농부처럼 눈을 버리고 귀를 얻어 볼까 손전등 없이도 밭두렁 논두렁이 두런거리는 소리 살아있는 것들의 숨소리 그 거친 숨소리 가득한 들판으로 달려가 볼까

 

헛도는 러닝머신 위에서 신나게 길을 잃고 지금은 안경 벗은 꿈을 꾸는 중

 

 

칼과 집

나호열

 

 

어머니는 가슴을 앓으셨다

말씀 대신 가슴에서 못을 뽑아

방랑을 꿈꾸는 나의 옷자락에

다칠세라 여리게 여리게 박아 주셨다

(멀리는 가지 말아라)

말뚝이 되어 늘 그 자리에서

오오래 서 있던 어머니,

 

나는 이제 바람이 되었다

함부로 촛불도 꺼뜨리고

쉽게 마음을 조각내는

아무도 손 내밀지 않는

칼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멀리 와서

길 잃은 바람이 되었다

어머니,

영혼까지 독도에 산골하고

나호열

 

쓸데없는 일에 목숨 거는 일처럼

허망한 일이 어디 있으랴

한참 일할 나이에

아니 한참 생의 즐거움을 맛볼 나이에

힘도 없으면서

빽도 없으면서

그들은 왜 독도를 지키자고 목청을 높였는가

그러다가 왜 정말로 목숨을 버려야만 했는가

그러나 쓸데없다고 다들 외면하는 일에

목숨 거는 일처럼

위대한 일은 없다

정치가나 사업가나 학자들 보다

쓸데없는 일에 청춘을 불사르고

목매다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밝아졌다는 것을

두꺼운 역사책 어느 구석에도 이름 없는

그들 때문에

세상이 맑아졌다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바람이 되어

구름이 되어

이 세상에 가득한 이들이여

독도에 가면 모두가 새가 된다고

영혼까지 독도에 묻은 두 사람이여

 

 

나호열 ┃1953 ∼ 현재 ┃ 시인의 여러 자료

 

나호열 시인과의 대담

 

 

Q : 먼저 대담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평소에 자주 동양적 사유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선생님께서 추구하는 동양사상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요?

 

A : 질문 내용이 포괄적이라서 답변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답을 드리기 전에 몇 가지 먼저 정의를 내려야 할 것 같은데요, ‘동양 ’이란 개념에 대해서 말씀 드려야 할 것 같군요.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적 구조는 서양인들이 사용한 개념이죠. 지리적으로 따져보면 터키, 사우디아라비아도 아시아 즉 서양인의 관점에서 보면 동양이죠, 종교적으로도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등 많은 종교의 근원이 동양인 셈인데. 이런 경우 서양과 동양의 경계는 모호해 집니다. 우리가 서양문명이 기독교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고 할 때 동양사상이란 구분이 모호해지지 않을까요? 제 말씀은 오늘날의 동양의 개념은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 즉 서양인이 스스로 변별되는 특성, 서양인들이 스스로 규정한 문화인의 대척점에서 미개, 야만, 그래서 정복되어야 마땅한 그런 개념으로 동양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기독교 사상이나, 이슬람을 동양사상의 범주로 넣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할 것 같고, 그래서 우리가 동양사상이라 하면 상식적으로 불교, 유교, 노장 사상, 아, 거기다가 힌두사상과 넣어야 하겠지요. 저는 동양사상을 이야기 할 때 전제해야 할 부분은 이런 사상들이 농경을 기반으로 둔 환경에서 잉태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위자연을 설파한 노자나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외침을 바로 새길 여유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현대문명은 소비를 기반으로 하는 산업화의 매커니즘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 전에 말씀 드린 바대로 어느 사상을 막론하고 농경사회의 기본적인 아이템은 관조, 절제, 생태주의적 생활태도 등으로 공통적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즘 유행하는 생태주의나 여성주의도 따지고 보면 이런 사유를 바탕으로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질문의 요지는 딱 부러지게 공자냐, 석가모니냐, 아니면 노자, 장자냐 이런 답변을 기대하신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한 마디로 좋은 답변을 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Q : 그러면 질문 방향을 약간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선생님께서는 전공이 철학인데, “ 철학적 사유가 시에서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가?” 이렇게 말씀 드리면 답변하시기가 쉬울까요?

 

A : 답변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요. 왜냐하면 또 철학이 무엇인가 정의를 내려야 할테니까요. 간단히 말해서 항구적 진리를 추구하고 논리적 사유를 정립하는 학문을 철학이라고 한다면 칸트가 말한 바대로 철학은 철학 그 자체를 배울 수는 없고 그저 철학하는 방법을 배우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여튼 논리가 배제된 인간의 사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다 보니까, 철학적 사유는 문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축이라고 느낍니다. 역으로 철학적 사유 안에도 예술적 상상력이 함유되어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지요. 전공이라고는 하지만 딱히 이것이 내 전공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없네요. 공맹을 주로 공부했지만 눈길이 더 가는 것은 불교적 사유지요. 그렇다고 경전을 섭렵한 것도 아니고 불교의 인식론이나 논리는 정말 현란할 정도로 치밀합니다. 매력적이지요. 종교는 위안이고 마음의 위탁을 위해서는 종교가 필요하지요. 그러나 학문적 차원에서는 문제가 달라지거든요. 불가에서는 욕망을 버리라고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요. 차라리 욕망을 줄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이 더 현실적이지 않은가요? 아직도 저는 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즉, 내세와 현세, 인간과 신, 비움과 채움...그러면서 인간을 포함한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철학적 사유가 아닐까요?

 

Q : 그럼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시의 조건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A : 시를 비롯해서 문학, 나아가서 예술의 정의는 계속 확장되어가거나 변모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정의는 지난 것이지요. 그러나 지난 것을 모르고 새 것이 어찌 나오겠습니까? 문제가 너무 확대되어가는 것을 피하려면 시의 경우로 국한해서 말씀드려야겠네요. 어찌 보면 우리나라는 참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이 될 때가 있어요 수많은 문학 잡지( 잘 팔리지는 않지만) 그 문학잡지를 통해서 등단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수많은 시인들, 그들이 발표하는 수많은 시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는지 모르지만) 시집들, 그 틈에서 어떤 때는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어요. 자신들의 작품이 엉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잣대가 있으면 얼마 좋을까요? 이현령비현령이지요. 보는 각도에 따라서 좋은 시의 기준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잇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좋은 시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시는 체험에서 우러나오되 내성(자기성찰)이 깃든 시, 논리적 구조가 튼튼한 시, 뚜렷한 언어감각으로 미적 성취를 이룬 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Q : 언젠가 선생님이 ‘파괴의 시학’을 말씀 하셨는 데요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가요?

 

A :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파괴라는 단어는 끔찍하면서도 신선한 의미지요. 모방에서 시작해서 창조의 기쁨을 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재주가 출중한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저와 같이 둔재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전범을 찾고 끊임없이 닮아가려는 노력을 해야겠지요. 어떤 사람은 모방의 완성도 없이 끝날 테고, 어떤 사람은 모방을 넘어 창조의 길로 가기도 하겠지요, 정말 예술인이라 한다면 예술적 성취를 이룬 후에 그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길, 이전의 자신의 성취를 파괴하고 도전을 감행하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명성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 명성을 오래 유지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닐까요? 저는 작고한 김춘수 시인의 태도를 존경합니다. ‘무의미 시’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저는 김춘수가 언어활동의 무의미성의 교두보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알면서도 부딪쳐 보는거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야 말로 오늘의 시인들이 깊이 새겨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름을 내는 데는 열심이지만 일단 명에나 명성을 얻게 되면 그 다음에는 지지부진이죠. 시인이 되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지요. 나는 왜 시를 쓰는가? 필생의 업으로 삼을 만한가? 를 따져보아야 기성을 뛰어넘고 기존의 이론을 넘어서는 파괴의 욕망이 분출되는 것 아니겠어요?

 

Q : 타 문인들과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A : 저는 제 스스로 생각해도 묘한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의 폭이 그리 넓지 않습니다. 성격도 그렇지만 굳이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안듭니다. 문학판에서도 저를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학연, 지연,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기도 하지만 그만큼의 부작용, 정실에 좌우되는 불합리한 처사가 생겨나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요. 선생님께서 제가 정중동의 시인이라고 하셨는데. 듣고 보니 그런 구석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문학을 누구에게 보이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놀고 즐기고 싶어서 합니다. 물론 그 다음에는 같이 공유 하는 거죠. 제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요. 저도 시를 가르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문인들과의 교류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왔는데 이제 와서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아참, 얘기가 딴 데로 흘렀네요. 생각해 보니까 문단생활을 거의 하지 않은 것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네요 80년대 등단을 하고 여러 어른들을 모셨지요, 조병화 선생님이라든가... 그런데 문학판에 들어가 보니 파벌도 있고, 상을 주고 받는데도 문제가 많더라구요. 그 당시만 해도 시인이란 일반인들과는 뭔가 다른 구석이 있어야 한다고 나름대로 생각했어요. 왕자병이라고 할까요? 글은 그러듯 한데 행동이 따라가지 못하면 무슨 소용 있겠어요. 평소 지론이 ‘예술은 사기다’라고 생각하는데 (백남준도 그런 말 했죠)그래도 그렇지 자신은 현세적으로 무지 탐욕적인 사람이 시에서는 고상한 척 하면 그건 위선이지요. 한 마디로 문단이라는 데가 있을 데가 못되더군요. 몇 년 쉬었어요. 80년대에는 부부 시인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제 아내는 국문학 전공이고 저 보다 훨씬 빨리 등단을 했었죠. 그런 아내도 절필하겠다고 그러더군요(지금까지도 글을 안 씁니다). 그러다가 제가 봉직히고 있는 경희대학교로 김재홍 평론가가 국문과 교수로 부임하셨어요. 어떻게 아셨는지 저를 만나고 싶어 하셔서 뵙게 되었지요. 저보다는 대여섯 살 연배이시지만 문단에서는 까마득히 높은 분이시지요 다시 공부하고 시를 쓰라는 격려에 힘입어 오늘까지 왔습니다. 그 분이 아니었다면 지금은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가고 있겠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삶에는 분명히 전환점이 있고 그 전환점에는 나릉 어여삐 보아주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김재홍 교수님에게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Q : 예술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줄 아는데 활동의 내용은 무엇인가?

 

A : 예총이란 곳이지요. 민예총 들어보셨지요? 민족작가회의 들어 보셨지요? 그런 단체의 반대편에 있는 단체라고 보시면 되겠지요. 한 마디로 보수단체지요. 오십 년 가까이 된 전국적 규모의 단체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흠도 있습니다. 진보라는 말 자체가 호감이 가는 세상이지만 또한 보수도 필요하지요. 엉터리 진보보다는 참된 보수가 밑거름이 된다는 신념이 있지요. 보수단체가 생리에 맞아서가 아니라 보수라고 하는 단체를 보다 전향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보수의 개혁? 저는 예술의 이데올로기화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문학이면 문학이지 노동문학, 통일문학이 따로 있습니까? 4. 5년 전에 발을 디뎠는데 지금은 그곳에서 정책연구위원장을 하면서 예술세계 라는 월간지 주간을 맡아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난 3년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지역문화위원을 하게 되기도 하였구요. 흔히들 문화의 시대라고 하지 않나요? 지역문화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게 되더군요. 재미있습니다. 저의 문학 활동에는 별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지만요.. 또 하나는 인터넷에 관련된 이야기인데 십 년 전 즘부터 인터넷문학신문이라는 사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경영상의 어려움도 많지만 그보다는 문인들이 컴퓨터에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홈페이지를 구축할 때 시창작 사이버 강좌를 개설했었습니다. 한 때는 등록인원이 천 명을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물론 무료 강좌지요. 그 수강생 중에 십여 명이 등단과정을 거치고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보람이 매우 큽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시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Q : 마지막으로 문학, 특히 시를 쓰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가요?

 

A : 글 쓰는 일을 기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재주만 가지고 글 쓰려는 사람도 많고요. 살만 하니까 여가로 글 쓰겠다는 사람도 있구요. 돈과 명예를 얻어 보겠다고 투신하는 경우도 있지요. 두 가지 경우다 우리가 나무랄 수 있는 성질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 수행되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미에 대한 열정이 없어서도 인 되겠구요. 기본이 튼튼해야 됩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그렇지만 스스로 터득하는 기본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마침 새로 나온 제 시집에 서문으로 쓴 글이 있는데. 보탬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절망을 통과하지 않은 희망이 지리멸렬하다는 것을 안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갖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이 나의 절망이고 그 절망 끝에서 시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믿는데서 희망이 샘솟는다. 평정을 얻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평정을 얻기 위해서 시를 쓴다. 그런데 나는 또 묻는다. 시란 무엇일까?

 

쉬운 시의 어려움

나호열 시인, 문학평론가

 

 

시인들은 쉬운 시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독자들 또한 어려운 시를 선호하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명시(名詩)라 일컬어지는 많은 시들,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집들의 대부분은 낭송하기에 알맞은 가락과 누구나 쉽게 해독할 수 있는 언어로 짜여 져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시인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쉬운 시'의 매력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이 ' 쉬운 시'의 명제는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생각거리를 파생시키고 있다는 점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인구에 회자되는 소월의 '진달래 꽃'이나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천상병의 '귀천'이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우선 독자들의 일차적인 정서를 충족시켜 줍니다. 일차적인 정서라고 함은 우선 시에 나타난 의미가 독자들의 감성 내용과 일치된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恨'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단순한 관념이 시에 표상되므로 서 문학예술의 두 기능인 '배설'과 '정화' 또는 '교훈의 전달'이라는 목표에 부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위에 열거된 시들은 결코 그러한 일차적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의미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는 중층 구조를 내포하고 있음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말은 발화자인 시인의 의도와 독자가 체험한 내용이 일치되거나 독자가 직접 체험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와 유사한 추체험의 형식으로 전이되는 것 이상의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님의 침묵'에서의 '님'이 한 개인의 사랑의 대상이면서 그 이상의 존재 의미로 확대할 수 있으며 확대된 상태에서의 시의 구조 또한 그 논리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시는 분명히 로고스의 세계가 아닌 파토스의 세계에서 진행되므로 시인의 상상력은 비논리적인 직관에 연유함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언술과 달리 시라는 틀에 얹힌 언술은 질서정연한 상상력의 통로를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내용과 형식의 조화라는 큰 틀에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 님의 침묵'은 하나의 연시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으며 불교적 세계관의 인식 배경을 놓고 읽어도 그 다양한 의미는 결코 훼손되지 않습니다.

 

시는 일반적인 진술과는 달리 언어에 옷을 입히는 행위입니다. 시인이 겪어낸 삶에서 우러나는 시의 향기는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쉬운 시'는 그러므로 삶을 벼려내는 시인의 정신이 현실과 부딪치면서 일으키는 섬광과도 같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한 편의 시에는 고스란히 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태도가 담겨져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외면상으로 평 이한 구조와 평범한 진술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면서 시가 함의하는 의미의 내포가 큰 시야말로 진정한 '쉬운 시'의 반열에 오른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시 한 편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꿈꾸듯 편지를 쓴다①

 

이민 간 친구에게

짝사랑했던 그에게

가슴 저리도록 그리운 어머니에게②

 

요란한 자명종 소리에 아침은 깨고③

 

남편의 성으로 바뀌어버린 그녀에게

가을의 전설이 되어버린 브래드 피트에게

인명구조견이 되어서라도 찾아낼 것만 같았던 어머니에게④

 

세 통의 편지를

한 통만 부친 채⑤

 

이 시는 습작기에 있는 분의 <아침을 맞으며>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매우 잘 짜인 구조와 명료한 메시지가 도드라지면서 쉽게 읽혀지는 시입니다. ①과③, ②와④처럼 대구법을 사용하여 그리움의 대상을 점층적으로 묘사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는 기법은 예사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하루 중에 밤은 안식뿐만 아니라 꿈 꿀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며, 시간인 셈이지요, 그러나 그리움의 대상에게로 향하는 날갯짓은 인위적인 자명종 소리에 깨이는 아침과도 같이 무엇엔가 끌려가는 현대인의 고독한 심상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⑤에서와 같이 마음속에 써 내려간 편지는 부치지 못하는 무위의 행위로 그쳐 버리고 만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꼼꼼하게 살펴보기로 합시다. ②에서의 친구, 그. 어머니는 현실적으로 나에게서 떠나버린 존재들입니다. ②는 내게 인식된 대상들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데 ④에서는 부재의 상태를 명료하게 하는 구체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이민 간 친구'는 이민을 감으로 해서 '남편의 성으로 이름이 바뀐' 상태이며, 짝사랑의 대상인 그는 영화 '가을의 전설' 에 나오는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처럼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존재이며 '그리운 어머니'는 내가 인명구조견이 되어서라도 찾아야할 대상으로 변화된 듯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②의 진술에서 ④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서 본다면 ②에서 ④로 진행 되는 필연적 구조가 생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②와④는 'A는 B이다'로 지칭되는 은유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A와 B의 의미망이 유사한 관념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을의 전설' 같은 막연한, 즉 가을이라는 심상과 전설, 이라는 심상의 결합에 있어서의 적합하지 않은 유추가 시의 멋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 시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맹점은,- 이 점은 많은 시인 지망생 여러분이 시적 진실과 사실의 관계를 혼돈 하는데서 발생하는 문제인데- 시에 있어서의 순수성을 시의 내용과 사실과의 일치에서 찾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 시의 작자는 실제로 세 통의 편지를 쓰고 그 중 한 통의 편지를 실제로 부쳤는지 모릅니다. 부쳐진 한 통의 편지는 누구에게 보낸 것일까 하고 글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갖게 하는 것도 아주 재미있는 시의 트릭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한 통의 편지를 부쳤다는 사실로 인하여 이 시가 가지고 있는 일상의 고립감이나 허무감은 반감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결국 한 통의편지도 부치지 못했다든가, 부치긴 했는데 그 편지들이 수신인 불명으로 되돌아 왔다든가 하는 결말을 보여주었다면 더욱 큰 감동을 전달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이 시는 한 편의 시가 결코 많은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는 좋은 작품일 수 있으나 누구나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 이상의 의미를 모색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시인의 현실인식의 한계를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복숭아 꽃빛같이

아무 생각 없이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복숭아 꽃빛만 같이

 

사랑은 꼭 그만큼에서

그 빛깔만 같이

 

- 장석남의 <뻐꾸기 소리>

 

이 시는 아주 평 이한 어휘와 단순한 어조로 아주 쉽게 읽혀질 것 같이 보이는 시이지만 이 시의 올바른 감상을 위해서는 몇 단계의 유추의 단계를 지나가야 하는 시입니다. 현대시의 조류에 있어서 시에서의 주제와 소재의 분류 같은 의도적인 시 해석의 도구를 배제하는 경향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주제와 소재를 찾아보기로 합시다. 이 시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소재는 무엇일까요? 복숭아꽃? 뻐꾸기 소리? 그렇습니다. 이 시의 모티브는 뻐꾸기 소리입니다. 시인은 뻐꾸기 소리를 듣습니다. 어느 산에서 우는 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뻐꾸기 소리는 사랑의 실체이기도 하면서 사라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뻐꾸기 소리는 어느덧 창호지에 복숭아 꽃빛으로 물듭니다. 시인은 창호지 문 안쪽에서 차단된 저 쪽 세계의 메시지를 분홍 복숭아 꽃빛으로, 그림자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뻐꾸기 소리 - 창호지 안에서 듣는 나 - 나에게서 발화되는 뻐꾸기 소리의 관념 - 복숭아 꽃빛 - 그림자로 어리는 창호지를 바라보는 나와 같은 의식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을 보여주면서 사랑을 뻐꾸기 소리로 뻐꾸기 소리는 복숭아 꽃빛으로 변화시키는 상상의 질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사랑'이라는 관념을 소리로 빛깔로 치환시키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의 관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상식으로부터 빗겨 서 있는 시인의 태도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사유의 깊이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감상 방식은 이 시를 읽어내는 많은 통로 중에 하나에 불과할 것입니다. 만일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다른 방식의 시 읽기를 주장하신다면 바로 그 순간에 이 시는 좋은 시로 평가될 수 있는 덕목 하나를 갖추고 있는 셈이 될 것입니다.

 

다도(茶道)는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즐기기에는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합니다. 한 잔의 녹차를 마시는 방법 중에 하나는 인스턴트 녹차를 마시면 될 것입니다. 끓는 물에 봉지 하나만 넣으면 쉽게 우리는 차를 즐길 수 있습니다. 차를 마신다는 행위에 있어서는 다도를 배우고 절차를 따르고, 다기를 준비하는 등의 번거로움은 불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기를 씻고 배열하고, 물을 적당한 온도로 끓이고 우려내는 행위를 거듭하면서 마시는 차에는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배어 있게 마련입니다.

 

'쉬운 시' 는 눈으로 쉽게 읽히고 가슴에 금방 와 닿는 시가 아닙니다. 시의 내용이 독자에게 쉽게 동의를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려낼수록 깊은 향을 풍기는 차처럼 오래 가슴에 담아두고 되 내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재생산시키는 시를 많은 시인들은 쓰고 싶어 합니다

 

 

 

 

넉넉한 슬픔의 자화상

나호열 시인, 문학평론가

 

 

꿈이 있을 때,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거리를 취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반성할 수 있다. 꿈이 없을 때, 인간은 자신에 대해 거리를 가질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 갇혀버려 자신의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짧은 글에서 김현은 문학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식을 통렬히 반박하고 있다. ‘문학’의 의미는 끊임없는 정의내림에 의해서 변화하고 있으며 그 정의내림은 문학이 지니고 있는 기능의 일부분만을 부각시킨다는 난점을 가지고 있음을 그는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오랫동안 몰두해 왔던 ‘무엇을 쓰는가?’의 문제와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를 다같이 가짜문제로 치부해 버리고 나니 그가 내린 결론이 위의 인용한 글이 된다. 꿈이 없을 때 인간은 즉자적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 꿈은 절망을 증거하면서, 꿈은 인간 부재의 현실을 치유한다. 그렇다면 작가나 시인은 그 꿈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가?

사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문단에 얼굴을 내민 사람이 있다. 그가 김정열이다. 그를 알게 된 것은 10년이 넘었지만, 그가 가슴에 시를 품고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그는 오랫동안 우리나라 입법부의 한 켠, 험난하고 말 많고 탈 많은 우리니라 정치권의 한가운데 서 있었고, 한 번은 그의 고향에서 선거에 출마했었다는 풍문도 듣고 있었던 터이었으므로 어지간히 세파에 단련된 사람쯤으로 단정해 버렸었는데, 막상 그가 한 번 읽어보라고 가져온 시들은 그의 털털하고 넉살 좋아 보이는 인상 속에 감추어졌던 예민하고 따사로운 그의 내면을 눈물겹게 보여주었다. 거의 반 평생을 그가 몸담았던 정치와 문학은 그 간극이 매우 크다. 정치는 대중이라는 현실적 존재를 대상으로 현세의 빵과 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문학은 정치에 비해 퇴행적이고 비현실적일 수 밖에 없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문학은 정치보다 꿈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넉넉하다. 아마도 이러한 점을 그는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지 않았을까? 민중 또는 대중이라는 실체, 그 실체의 희망과 부질없음, 그 수 많았던 사람들과의 조우와 부대낌, 증오와 연민이 자연스럽게 한 몸을 이루면서 잠재되어 있던 휴머니스트의 풍경들이 시로 표출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시편에 드러나는 사건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삶의, 보잘 것 없고 사소한 것들이며 그 사건에 등장하는 사람들 또한 우리와 같은 장삼이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남루로 펄럭이는 우리의 삶과 그 삶의 결을 이루는 수많은 아픔과 슬픔은 그의 시에서 새로운 희망으로, 새로운 기쁨으로 재탄생한다. 그의 시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김현의 짤막한 글을 인용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김정열이 이미 문학의 핵심적 요소를 꿰뚫고 있다는 안도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꿈을 이야기한다는 것, 그것은 꿈이 따뜻하게 감싸안고 있는 절망과 아픔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꿈을 꾸는 행위 자체가 시를 쓰는 일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비현실적이고 유용하지 않은 글쓰기를 통해서 시인은 스스로를 반성한다. 시인은 시라는 거울을 통해서 시인과 꿈과 독자를 고스란히 포섭해낸다.

 

시가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정의 내릴 때 김정열의 시는 오히려 그 반대편. 체험 속으로 침잠한다. 사물과의 대면에서 빚어지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라든가, 예지의 발현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김정열의 시는 너무나 투박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그가 다루고 있는 사람이나 사건 속에서 그는 과거에 체득한 삶의 진실성을 재현해내는데 성공한다.

 

 

해 떠오르는 바다 희망을 가르쳐 주었고

노을이 지는 바다 낭만을 가르쳐 주었고

달빛 흐르는 바다 그리움을 가르쳐 주었다

 

파도 부서지는 바다 분노를 가르쳐 주었고

쓸쓸히 비오는 바다 우울을 가르쳐 주었고

캄캄한 칠흑의 바다 절망을 가르쳐 주었다

 

넓게 펼쳐지는 바다 용기를 가르쳐 주었고

갈매기 훨훨나는 바다 설렘을 가르쳐 주었고

붐비는 여름바다 오히려 고독을 가르쳐 주었다

 

이웃들이 떠나는 바다 이별을 가르쳐 주었고

해녀들 물질하는 바다 인내를 가르쳐 주었고

고깃배 불켜진 바다 기다림을 가르쳐 주었다

 

어린 시절 늘 가까운 곳에 지켜 서 있던 바다

멀리 있어도 인자한 푸르름으로 다가오는 동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항상 묻고 있는 나의 스승이여

 

—「동해 나의 스승」전문

 

그는 동해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1950년대에 태어난 그는 대부분의 우리 중장년들이 겪었던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시 「아버지의 장갑」에 드러난 바와 같이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에 참전하여 손가락 하나를 잃고 슬하의 6남매를 키우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돈이 있어야 원호대상자가 되는데 그도 되지 못하고, 그래도 참전의 추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장승」이나 「어머니의 불빛」에 술회되고 있는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신 어머니의 삶이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는 곳이 동해인 것이다. 바다는 그의 심성을 바르게 해주고, 세상을 포용하는 넓은 가슴을 가지게 해 주었으며, 세상의 질곡을 한탄이나 분노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삶의 원천이 되게 하여 주었다.

 

그의 시는 이렇게 1950년대로부터 출발하여 새 천 년을 넘어서는 반세기를 아우르고 있다. 그 50 년 동안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 7,80년대의 군부독재시절의 풍경들, 90년대의 IMF와 같은 경제적 혼란과 남북간의 이데올로기 충돌, 미국 체류중에 경험했던 이민자의 고통 등 그가 겪었던 시대의 아픔과 민중이라는 거대한 힘을 날줄로 한다면,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 그의 자식들, 고향사람들, 동창들, 살겨운 이웃들과의 개인간의 소중한 만남을 씨줄로 엮어 우리가 앞으로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되묻게 하고 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시인으로 하여금 사랑을 느끼게 하여줄 뿐 만 아니라 그 사랑을 어떻게 되돌려 주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존재들이다. 일일이 그러한 예를 다 열거할 수는 없겠으나 그 일부분을 제시해 보기로 한다.

 

세상 많은 오염에/물들지 말라고... 세상의 불의를 보면 /칼날같은 용기로 나서라고/깃을 세우고 /안타까운 일엔/마음 쉽게 구기지 말라고/구석구석 주름을 편다// 아침이면 아내는/경건히 다림질하며/조용히 기도하고 있다

 

- 시 「아침기도」부분

 

 

때로는 너무 신선하고 또 너무 뜨거워서 /사랑은 쉬이 시들고 쉬이 식어버리지만/그대에게서 기쁨으로 받은 고귀한 사랑은/절제된 온도로 그대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 시 「냉장고 연가」3연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밤/ 인천공항에 내리기 전 서울시내를 내려다 본다/ 전깃불 네온사인 찬란한 서울은 온통 보석함/ 우리 서로 자주 미워하고 시기하며 실망하고/희망이 없다며 체념으로 대하는 일상의 삶도/다시 보면 저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이다

 

- 시 「서울 밤 상공에서」 전문

 

세상은 보기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학문적 통로를 통해서 세계관을 구성하기도 하고. 연속적인 삶의 체험을 통해서 독특한 세계인식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경계하여야 할 것은 섣부르게 허무를 노래하거나 경직된 교조주의의 음성으로 삶의 교훈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은 목적지에 이르는 여러 방향들을 무뚝뚝하게 보여주는 존재인지 모른다. 요즈음의 시인들에서 보이는 우연적인 해체와 파편화된 자아나, 과정을 무시하고 쉽게 도달해 버린 높은 경지의 시들에서 값싼 향수의 역겨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우리의 삶을 스스로 희화하고, 가볍게 증발시킴으로서 종국에는 시가 하나의 지적 유희로 떨어져 버리게 하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시가 가슴 속에서 분출하는 영감과 직관으로 그 빛을 발한다고 해도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형식과 기준이 있어야 한다. 김정열에 있어서 그 형식과 기준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신뢰에서 비롯된다. 앞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가난하지만 돈독한 가족애로 뭉쳐진 환경 속에서, 바다라는 위대하고 장엄한 자연의 소리 속에서 김정열이 배우고 키워온 것은 바로 ‘사랑’ 이었다. 그 사랑은 그의 몇 편의 시에서 나타나는 가족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착일 수도 있고,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일수도 있을 것이다.

 

 

도로공사 중

타일을 드러내고 파낸 옆에는

부드러운 흙이 쌓여있다

무거운 타일과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난 뒤

싱싱한 흙의 속살 드러난다

우리 마음에도 찌꺼기

조금만 걷어내면

서로 위로하고 사랑할

저런 싱싱한 마음속살 있음을

우리 모두 잊고 사는 것이다

모르는 채 잊고 사는 것이다

 

—「도로공사장에서의 단상 」 전문

 

그의 정의에 의하면 마음의 찌거기를 걷어내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다. 마음의 지꺼기란 불교에서 말하는 三毒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마음의 찌꺼기를 거두어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풍경을 만나게 된다. 아파트 경비원 최씨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고, 그것도 모르고 찐빵 한봉지를 사서 경비원에게 주려던 아내, 식은 빵을 먹으며 느끼는 회한조차 사랑이다.

 

 

산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무래도/ 금방 식어버리는 빵의 온기 같은 것/혼자 뭔가 아는부끄러움으로 상기되어/붉어지다 곧 사라지는 저녁노을 같은 것/

 

—「식은 빵을 먹으며」 마지막 연

 

혼자 뭔가 아는 부끄러움으로 상기되는 상태는 우리 산다고 하는 것 /빈 병을 지나며 울리는/작은 바람소리일 뿐이랴 - 「어느 부음을 듣고 」마지막 부분처럼 타인에게 충분한 관심을 나누지 못했을 때 느끼는 슬픔이다. 또한 「휴대폰이 묻는다」라는 시에서 너는 누군가로부터 /연락 받을 때마다/벅찬 기쁨으로 설레어/온 몸을 이렇게 떠는 /사랑을 한적이 있는가 /이렇게 온몸을 떠는 - 신기(神氣)의 상태까지 상승적으로 전이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 능동적으로 타인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로 인한 일체의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인간’이른 보편적 실체에 살겹게 다가서는 기쁨인 것이다.

 

 

그렇다고 쉽게 기죽지 말고

부디 힘을 내라 서영아

본시 어둠이란 없는 것이다

다만 빛이 없기 때문이다

그 빛은 가끔 더디 오기 때문에

때로는 오래 기다려야 한다

 

— 「빛과 어둠」마지막 연

 

시인이 만나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삶은 슬픈 표정을 지니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삶은 고달프며 배신과 증오가 잡초처럼 돋아오르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그 슬픔이나 고통이 어둠 때문이 아니라, 어둠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빛이 더디 오기 때문이라는 각성은 김정열이 거두어들인 소중한 수확이자 시학이 아닐 수 없다. 낙원에의 꿈을 안고 미국 땅에 당도하여 공사판을 전전하는 한 이민 노동자의 슬픔은 결코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 슬픔은 또 다른 슬픔으로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기쁨의 디딤돌이 된다는 시인의 인식은

아름다워서 슬프다.

 

김형, / 저는 미시시피로 갑니다/ 소떼를 몰고 대륙을 횡단했던/키우보이들의 굳은 각오로/저는 미시시피로 갑니다

 

— 「 미시시피로 가는 이별」마지막 부분

 

물에 젖을 때 마다/ 굳센 결의로 /다시 살아나는 다리/ 새로 태어나는 잠수교여

 

—「잠수교」 마지막 연

 

오랫동안, 틈틈이 나는 김정열의 시를 읽었다. 이번에 상재하는 그의 첫 시집은 반세기에 걸친 한국사와 가족사로 얽혀 있다. 세상을 향한 그의 시선은 따뜻한 눈물로 가득차 있고, 그러면서도 가끔은 격앙된 목소리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가 오늘의 정치를 이야기할 때, 한국을 떠나 이웃나라에서 한국을 들여다 볼 때, 그의 목소리는 일방적인 주장으로 함몰되기도 한다. 그의 목소리가 한 쪽으로 기운다고 해서 작품의 질이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아래 인용한 시는 남북분단과 외세에 의한 굴곡진 우리의 현대사를 그린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시인 자신의 체험이 반성적 구도로 짜여져 있어 산문화된 단점을 넘어 시의 울림은 결코 작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판문점 회상

 

1983년 여름 친구로부터 판문점 가는

귀하고 귀한 티켓 한 장 받았습니다

한미무슨협회 회원에게만 주는 것을

모파상이 쓴 진주 목걸이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파티티켓을 구한 것처럼

어렵게 손에 넣고는 무척 기뻤습니다

성분을 파악한다는 신원조회를 위해

미리 본적과 주소도 적어보냈습니다

날이 화창한 6월 어느 토요일 오후

광교 부근에서 출발한 우리 버스는

구파발 지나 통일로를 달렸습니다

몇 번인가 검문검색 통과하고 난 뒤

갑자기 여행사 전무라는 사람 일어나

오늘 이렇게 여행하게 된 것은 다

군사정전위원회 회장인 미국 장군이

특별히 배려한 것이라고 하며

그분 사인한 공문을 보여주었습니다

감사의 뜻으로 박수를 보내자고 하여

부끄럽게 부끄럽게도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더니 작은 모자 하나 돌리면서

성의를 표시하자며 모금을 했습니다

전달되는지 묻지도 않고 응했습니다

판문점 거기도 내 나라 우리 땅인 데

가는 길이 그렇게 그렇게 어려웠습니다

박수도 쳐야 하고 성금도 내야 했습니다

지금 2000년 근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판문점 아직도 내 나라 우리 땅인 데

가는 길 변함없이 멀고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몇몇의 작품은 우국충정이라는 주제의식이 상승하여 시적 정서를 해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투신시대」,「 도문기행」,「 능내리 강가에서」,「철원에서」,「심양에서는 잠을 이를 수가 없다」등의 시들은 주제의 무거움과 대결하는 시인의 정신적 긴장이 다소 풀어져 있어 작품의 밀도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떨어지고 있는데, 이는 시작법의 변용과 실험을 통해서 충분히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열의 시는 대화와 산문성의 문체로 독자들에게 편안하고 따뜻한 가성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을 가졌다. 이는 한편에서는 시작에 있어서 단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나친 산문화는 언어의 압축이라는 시의 고유한 측면을 사상시키므로서 시에 있어서 메시지의 기능이 이미지의 기능을 압도하는 난점을 유발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체험과 반성이라는 시학의 두 축을 사랑의 시선으로 아우르는 김정열만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을 바탕으로 튼튼한 언어의 성을 쌓는 것이 김정열의 과제로 남는다.

언제나 새로운 출발은 설레임과 두려움을 수반한다. 보다 깊은 성찰과 시를 구성하는 방법론의 탐구는 김정열의 시 세계를 한층 높은 반열로 이끌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탐욕을 멀리하고 청정한 마음의 들판을 가꾸기를 원한다. 분쟁을 멀리하고 화합과 평등의 세계를 찾아가고자 한다. 시인은 어둔 밤길의 등불이 되기도 하고 천상에서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기도 한다.

오늘의 시인들이 노래해야 할 것들, 오늘의 독자들이 가슴에 담고 싶어하는 순수의 세계가 여기 한 편의 시에 오롯이 담겨져 있다.

 

아미쉬 마을에서의 명상

 

뉴욕에서 차로 세 시간 남쪽 펜실베니아 주

랑카스터 시 동쪽에 아미쉬 마을이 있습니다

티브이(TV)도 없고 전화도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어요

이곳에는 학교도 8 학년까지만 있습니다

농사짓고 집안 일만 배워도 충분하답니다

검은 옷 입은 남자들과 케이프 쓴 여자들이

차도 아닌 마차를 타고 다니는 시골입니다

오늘도 다우존스지수는 기록을 갱신하고

쇼핑으로 뮤지컬로 뉴욕은 대만원이었고

애틀랜틱 시티는 도박으로 밤이 모자라고

워싱턴정가는 새해예산으로 시끄러웠다죠

석유가 나오는 큰 유전을 발견해놓고서도

슬며시 덮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는

조상의 믿을 수 없는 일화도 간직하고 있는

아미쉬 사람들 그저 소박하게 사는 모습으로

욕심을 줄이며 사는 게 힘들지 모르지만

그게 오히려 알차고 행복하게 사는 거라고

 

조용하지만 큰 울림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시론(詩論)]

 

 

시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나호열 시인, 문학평론가

 

 

광릉수목원에 갔었다. 겨울이 막 삭막한 도시에 불청객처럼 찾아온 어느 날 이었다. 각양각색의 나무들이 운집한 숲은 적막하였으나 그곳 또한 생명의 싸움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메타세콰이어와 같은 활엽수들은 잎들을 떨구고 선정에 든 듯하였으나 침엽수들을 여전히 바늘 같은 푸른 잎들을 내밀고 있었다. 나무들이, 숲들이 얼마나 치열한 생존 경쟁을 하는지 보려면 겨울이 되어야 한다는 숲 해설가의 설명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참나무에 자리를 빼앗긴 메타세콰이어는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었고, 어린 엄나무는 온 몸에 가시를 박아 제 몸을 추스렸다. 피톤치트를 내뿜는 전나무 숲 아래에는 풀들이 자라지 않았으니 인간들의 건강에 그리 좋다는 피톤치트는 사실 그 나무들이 해충과 풀들의 접근을 회피하려는 방어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숲에도 생노병사가 있어 이제 혈기가 돋는 젊은 숲이 있는가 하면 세월 따라 늙어 쇠퇴해가는 숲도 있으니 저마다의 본능과 재주를 다하는 뭇 생명들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광릉수목원에는 나무와 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원숭이와 같은 잡식성 동물이 있는가 하면 고라니 같은 초식성 동물도 있었고,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최상위 포식자 호랑이도 있었다. 그러나 내 눈과 강열하게 마주친 것은 늑대였다. 세간의 비아냥과는 상관없이 음흉하게 보이는 푸른 눈빛이 내게는 아름다운 보석과 같았다. 날렵하게 균형 잡힌 몸매와 우울이 배인 회색 털은 도도하기조차 하였다. 그러나 늑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른 습성을 가진 동물이다. 날카로운 이빨로 무장하였으나 비정해 보이지 않고, 호랑이처럼 이기적인 단독자로 살지 않는다. 언제나 가족애로 뭉쳐서 집단을 이룬다. 짝을 지으면 평생을 같이 살고 암늑대가 먼저 죽어도 숫컷은 자신의 반려를 잊지 않고 자신의 생을 마칠 때에는 암늑대가 숨을 거둔 곳에서 굶어죽기도 한다. 그래서인가!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어느 가수가 새롭게 발표한 ‘늑대’ 라는 노래를 거듭 듣는다.

 

우~우! 사람이 아름답다는 명제와 고독한 늑대의 아득한 거리야말로 내가 평생 동안 궁구했던 숙제였음을 나는 안다. 나무들 간의 치열한 자리다툼과 경쟁의 아우성은 들리지 않고, 동물과 곤충들의 먹이사슬에는 증오가 없는데 사람과 사이에 들끓는 아귀다툼과 온갖 협잡을 견디지 못해 숨어들어간 것이 ‘시’라고 하는 소도(蘇塗)이다. 아직도 내게 있어서의 인간은 꽃보다 아름답지 않으며 늑대의 가족애와 같은 관계의 건강성을 담보하지 못한 위험한 동물이다. 이런 생각이 인간적 성숙을 방해하고 스스로를 고독하게 한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에 나는 더욱 외롭다. 그러므로 나의 시 쓰기는 당연히 인간과 사회에 대한 환멸과 불신으로부터 벗어나서 따뜻하고 긍정적인 세계로 귀환하려는 것임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일찍이 오규원이 그의 시「용산에서」읊었듯이 나의 시에는 근사한 이야기도 없고 따라서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생 生의 증언 밖에 없다.

 

나는 가끔 ‘용산’을 생각한다. 남루하게 떠나고, 남루하게 도착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떠돌던 역사와, 과거를 알 필요도 물을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 기계적 욕망에 몸을 섞는 붉은 골목길과 그 길을 지나쳐야만 도착할 수 있었던 강변의 우리 집을 떠올릴 때면 근사하지 않은 생을 뒤엎는 환상을 꿈꾸던 청춘의 시절을 떠올린다. 불현듯 펜을 잡고 밝고 아름다운 그래서 융단처럼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노래가 되는 시를 써보고 싶어진다. 시대가 변하고 삶의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도 시는 여전히 노래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소통이 이 시대의 트랜드가 되어 있어도, 소통의 전제가 되는 유통(流通)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시를 잘 써야 한다든가, 좋은 시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 그런 유통 말이다. 의식적으로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문단의 은둔자가 되고 주변인이 되었다. 그 대신 나는 무아 무아(無我)와 진아(眞我) 사이를 헤매는 삶의 모순을 증언함으로서 편견과 잘못된 신념으로 얼룩진 사유를 합리적 사유로 인도하는 즐거움을 얻게 되었다.

 

합리적 사유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합리적 사유를 요약한다면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시가 언어로 이루어진 구축물이고 시를 어루만지는 자를 시인이라고 할 때 그 인(人)은 언어를 속이지 않고, 언어를 속이려는 욕망을 제어하고자하는 분투를 거듭하고 있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꾸밈이 없는 자신의 삶을 절차탁마하는 자가 시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꾸밈이 없는 자신의 삶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이 또 얼마나 지난(至難)한 일인가! 수치를 무릅쓰고 초라하고 비루한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얼마나 몸서리치는 일인가!

 

한 때 나는 시론이 없는 시인을 하찮게 생각한 적이 있다. 짧은 생을 살아가면서 이 거룩한 세계의 진면목을 바라보는 수단으로서의 시론은 마땅히 시인이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반듯한 시론을 지니고 있지 못하면 시인이 아니라는 주장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싶다. 누구나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듯이, 인생에는 정답이 없듯이,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명제를 체득하는 길은 무수히 많음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린 까닭이다.

 

끝끝내 시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현대시에 있어서의 슬픔의 역설적 힘

― 나호열의 시「타인의 슬픔」에 관하여

박진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슬픔이 사라진다면 어떠할까. 기쁨만이 가득한 세계일까. 행복이 지속되는 세계일까.

 

2015년 여름, <인사이드 아웃 Inside Out>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개봉되어 큰 인기를 끈 바 있다. 기쁨, 슬픔, 소심, 까칠 등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의인화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가 함의하고 있는 주제 또한 이러한 질문과 동궤에 자리한다. 기쁨은 긍정적 감정으로 행복에 연결되고 슬픔은 그 대척되는 지점에 자리하는 부정적 감정으로 불행에 연결된다는, 일반적 인식을 두고 과연 그러한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의 대립을 떠나 전통 서구 사상에서는 아예 감정 내지 정서 자체를 이성과 대립되는, 이성에 의해 통제되어야 할 가치하위의 것으로 고려해 온 것이 사실이다. 정서가 이성보다 열등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고, 정서의 본성과 힘에 대한 진의를 탐구했던 이가 스피노자이다. 스프노자에게 있어 정서란 단순한 느낌이나 감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적 변용과 물리적 변용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 다시 말해 이성의 영역과 신체적인 영역에 모두 상호관련성을 가지는 것에 해당한다.

 

정서에 대해 의미 있는 논의를 전개했던 스피노자 또한 슬픔을 부정적 감정으로 분류했다. 코나투스, 즉 인간 존재를 보존하고자 하는 힘을 감소시키는 감정이라는 이유에서다. 코나투스를 증진시키는 기쁨의 정서는 쾌감이나 유쾌함으로, 그 반대의 경우인 슬픔의 정서는 고통이나 우울함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도는 언뜻 보아도 너무 단선적인 분류로 느껴진다. 스피노자 사상의 보다 전체적인 틀 속에서 살펴야만이 그 진의가 드러날 것이나 여기서 길게 설명할 일은 아니다. 범박하게나마, 보다 완전한 행복을 위해서는 ‘고귀한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스피노자의 메시지를 기억하면 그만이다. 스피노자는 그의 주저 『에티카』에서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라고 했다. 진정한 기쁨에 이르는 길, 더 나아가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란 힘들고 드물지라도 끝내 고귀한 것을 향해 나아갈 때 열리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슬픔은 오히려 진정한 기쁨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의 극복을 통한 자아 고양의 측면도 그 의미 중 하나일 것이나 가장 큰 의미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찾아진다. 타자로 인한 슬픔, 더 구체적으로는 타자의 고통으로 인한 슬픔이 그것이다. 시인들이 그토록 슬픔에 천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시란 근원적으로 존재에 대한, 세계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사랑하는 대상의 고통이나 슬픔에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어떻게 슬프고 시름차지 아니하겠”느냐던 백석의 언표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백석은 시인을 일컬어 “슬픈 사람”,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혼”으로 규정한 바 있다. 바꾸어 말하면 시인이란 슬픔의 대상이 만물에 이르는 존재라 할 수 있겠다. 성속귀천을 떠나, 생명의 유무를 떠나 모든 존재에 이르는 슬픔을 포회하고 있는 것이 시인의 혼이라는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슬프지 않을 일도 시인이라면 슬퍼할 줄 알아야 한다는, 아니 슬퍼하게 된다는 뜻이다. 맨 처음 울기 시작해 맨 마지막까지 우는 존재가 시인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시인은 누구보다도 슬픔에 예민한 존재이며 또 그러한 시인의 슬픔은 넓고도 깊은 것이다.

 

 

문득 의자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의자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으므로

제 풀에 주저앉았음이 틀림이 없다

견고했던 그 의자는 거듭된 눌림에도

고통의 내색을 보인 적이 없으나

스스로 몸과 마음을 결합했던 못을 뱉어내버린 것이다

이미 구부러지고 끝이 뭉툭해진 생각은 쓸모가 없다

다시 의자는 제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다

태어날 때도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슬픔을 너무 오래 배웠던 탓이다


- 나호열, 「타인의 슬픔 1」전문

 

‘제 풀에 주저앉은 의자’는 몸과 마음이 무기력해져버린 존재의 은유로 읽을 수 있다. “견고했던” 존재가 무너져 내린 이유는 “타인의 슬픔을 너무 오래 배웠던 탓”에 있다. 그렇다면 “타인의 슬픔”이란 어떤 의미일까. 타인으로 인한 슬픔일까, 혹은 나의 슬픔이 되지 않는, 다시 말해 공감할 수 없는 타인만의 슬픔인 것일까. “너무 오래 배웠던 탓”이라는 시구에서 그 의미를 간취해 보면 “타인의 슬픔”이란 진정한 ‘나’의 슬픔이 아니라 무한경쟁의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서 학습된, 혹은 주입된 슬픔이라 해석해 볼 수 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라는 라캉의 언표와도 일맥상통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욕망 대상은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조작된 결핍에 의한 것이다. 경쟁적으로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자신의 욕망 대상으로 오인하며 살아간다는 의미다. 그러한 거짓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거듭된 눌림에도 고통의 내색을 보”이지 않으며 더욱 자신을 채찍질해가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타자의 욕망’,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 앞에서 겪게 되는 슬픔 또한 진정한 자신의 슬픔이 아닌 ‘타인의 슬픔’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