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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벼림과 불확정성의 시학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2. 24. 00:39

정신의 벼림과 불확정성의 시학

박 진 희

1.

 

나호열 시인은 30여 년의 오랜 시력(詩歷)을 지닌 중견시인이다.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후 1989년 첫 시집 『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청맥, 1989)를 상재했으며 2015년에는 그의 열다섯 번째 시집 『촉도』를 발간했다. 30년 동안 열다섯 권의 시집을 꾸준히 펴낸 셈인데, 양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시적 성과의 측면에서도 그는 명실공히 한국 문단의 대표 시인이라 할 만하다. 그의 시는 실존적 삶에서 존재의 근원에 이르기까지, 비루한 일상에서 사회 구조에 이르기까지, 시적 소재나 주제에 있어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을 뿐만 아니라 사유의 깊이 또한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호열의 가장 최근의 시집 『촉도』(시학, 2015)는 이러한 면모를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촉도』에서 그의 시는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그것 너머의 것을 사유하고,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되 그 시선이 주변화된 존재나 사물에서 출발하는 양상을 보인다. ‘촉도’란 말 그대로 촉으로 가던 매우 험난한 길을 일컫는 것으로 그의 시에서 그것은 불화의 세계를 표상한다. 이러한 인식과 시의 경향은 금번에 발표된 신작 시편들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아니 신작 시편들에서만이 아니라 시인에게 있어 세계는 늘 ‘촉도’일지도, ‘촉도’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이 능동적으로 ‘촉도’를 호출하고 있으며, 그곳에 머무르고 횡단하되 발길은 그 너머의 또 다른 ‘촉도’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신작시에서 ‘촉도’의 세계는 ‘사막’으로 표상되고 있다. 척박하고 험난한 공간이라는 점, 불화의 세계를 표상한다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지만 ‘촉도’가 소외된 존재들의 공간으로 주로 현실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면 ‘사막’은 타자의 질서와 욕망에 길들여지지 않는 정신의 세계를 표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질적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잘 드러내고 있는 시가 「토마스네 집」(『시와 시학』 2007년 봄호)이다.

 

배부른 개가 되기를 거부한

늑대가 그립다

숲에서 버림받고

외톨이인지 떠돌이인지

눈 안에 가득 푸른 눈물을 담은 늑대가

가끔

아주 가끔

내 영혼의 유배지에서 울고 가는 것을

그저 완성되지 않은 문장으로

부끄러운 상처를 더듬을지라도

기꺼이 굶주림마저 나눠 가지려던

마음이 그리워지면

어느새 사막이 내게로 왔다

버림받은 늑대가 왔다

 

                     -「토마스네 집」전문

 

 

시적 자아가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배부른 개가 되기를 거부한 늑대”이다. ‘개’와 ‘늑대’는 모두 자아 혹은 정신의 표상으로 그 차이는 길들여짐의 여부에 있다 하겠다. 즉 주어진 질서와 학습된 욕망의 흐름에 순응하여 사는 것이 “배부른 개”의 삶이라면, ‘늑대’의 그것은 주체로서의 고유한 단독성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에 저항하는 삶이 될 것이다. ‘늑대’가 “숲에서 버림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숲’은 ‘배부른 개’가 목줄을 하고 주인이 이끄는 대로 다녀야 하는 공간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늑대’가 이 공간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위험한 존재에 해당함은 물론이다. “숲에서 버림받”은 ‘늑대’와 등가의 관계에 있는 공간이 ‘사막’이다. 자유로운 대신 굶주림과 불안, 고독을 감내해야 하는 세계가 바로 ‘사막’이 표상하는 바인 것이다.

 

‘숲’에 정주하고 있을 때, 즉 “배부른 개”로 살아갈 때 시적 자아의 ‘영혼’은 ‘유배’되고 만다. 시적 자아가 “기꺼이 굶주림마저 나눠 가지려던 마음”, “배부른 개가 되기를 거부한 늑대”의 정신을 되돌이킬 때, 그것들을 절실하게 그리워할 때 이 ‘영혼의 유배지’에 ‘늑대’가, ‘사막’이 온다. 이때 비로소 시를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시인으로서 견지해야 할 정신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저 완성되지 않은 문장으로/부끄러운 상처를 더듬”는다는 것은 시를 쓰는 행위의 비유일 터이다. 나호열의 시쓰기는 끊임없는 성찰과 부끄러움, 수치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늑대’나 ‘사막’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결국 현실의 자아에 대한 성찰에서 연원하는 것이며,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해 시인은 능동적으로 정신의 허기와 불안, 고독 등을 포회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막’에 대한 동일한 감수성은 「비가 悲歌」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한 번도 불러지지 않은 그 노래는

슬픔이 불길처럼 흘러간 후에

강물보다 더 우렁우렁 눈물 쏟아낸 다음에

끝내 불러보지 못한 이름이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길을 지우고 난 후에

사막 같은 악보를 드러낼 것이다

슬픈 사람은 노래하지 않는다

외로워서 슬픈가

슬퍼서 외로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어디쯤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리는 듯

슬픈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부르는 그 노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비가 悲歌」전문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지만 그 ‘노래’는 “아직 한 번도 불러지지 않”았다. “슬픈 사람은 노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슬픈 노래는 “슬픈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불러야 하는데 “그 노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즉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는 끝내 불러지지 않을 노래라는 것이다. ‘알고’ 있지만 불러지지도, 태어나지도 않은 노래라는 점에서 이 또한 실체가 아닌 정신의 층위에서 운위되어야 할 문제임을 유추할 수 있다.

이 ‘노래’의 ‘악보’는 “슬픔이 불길처럼 흘러간 후에/강물보다 더 우렁우렁 눈물 쏟아낸 다음에/끝내 불러보지 못한 이름이/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길을 지우고 난 후에”야 드러날 것이라고 한다. 이 악보 또한 드러나지 못할 운명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끝내 불러보지 못한 이름”은 그 흔적도, 그에게로 이르는 ‘길’도 다 지워졌기 때문에 영원히 부르지 못하는 이름으로 남게 된다. 그러므로 ‘슬픔’은 결코 “불길처럼 흘러”가 버리지 못하고, 눈물 또한 쏟아냄을 통해 카타르시스로 승화될 수 없는 경우에 놓이게 된다. 슬픔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속될 것이며 눈물은 쏟아지는 대신 고여 있게 될 것이다. 슬픔이 지나간 후에야 드러나는 악보인 까닭에 이 악보는 끝내 드러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봄눈의 내력」이라는 시편에서도 이와 동일한 구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미 늦은 작별의 인사처럼

눈은 내린다

저 멀리 아득하게 휘어져 사라진

길의 뒷모습에 가닿는 낮은 목소리

이제서야 가슴에서 뛰쳐나온 그 말은

무작정 걷는다

하얀 꽃송이 같은 그 말은

하염없이 둥글기만 한 그 말은

벙어리의 가슴을 가진 그 말은

오래 머물러야 할 당신의 웃음 뒤에서

피기도 전에 진다

끝내 불씨를 감춘 눈물이 된다

-「봄눈의 내력」전문

 

이 시에서 ‘봄눈’은 “이미 늦은 작별의 인사”로 은유되고 있다. 봄기운에 쌓이지도 못하고 녹아버리는 눈을 애달프게 그린 시이다. 이 “작별의 인사”는 ‘하얀 꽃송이’처럼 여리고 ‘하염없이’ 순하며 ‘벙어리의 가슴’처럼 애달프기만 하다. ‘그 말’은 ‘당신’이 “저 멀리 아득하게 휘어져 사라진” 뒤에야 “가슴에서 뛰쳐나”온다. 그러고는 “오래 머물러야 할 당신의 웃음 뒤에서/피기도 전에” 지고 만다. 결국 ‘작별’의 말은 전해지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끝내 불씨를 감춘 눈물”로 남게 된다. “끝내 불러보지 못한 이름”(「비가」)과 같이 전해지지 못한 “작별의 인사”는 마음속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더욱 아프게 각인되어 두고두고 뜨거운 ‘눈물’로 흐르게 될 것이다.

시인은 이처럼 그의 여러 시에서 슬픔을 ‘끝내’ 해소되지 않을 무엇으로 남겨두고 있다. 이러한 시적 의장은 ‘사막’이 표상하는 시정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용한 시 「비가」에서도 ‘사막’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의 악보를 “사막 같은 악보”라 표현한 것이 그것이다. ‘사막’은 ‘배부른 개’가 아닌 ‘굶주린 늑대’의 공간이었다. 정신의 허기와 불안, 고독이 지속되는 시혼(詩魂)의 표상이 ‘굶주린 늑대’요 ‘사막’인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이 시의 “사막 같은 악보”란 슬픔의 해소를 끝끝내 유보하는 정신, 이로 인해 불러지지 않을, 태어나지 못할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영원히 간직하게 될 시인의 시심(詩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서 발이 자란다

어디든 가 보자고

어디든 여기보다 못하겠느냐고

마음에 발이 수없이 돋아나도

그러나 마음은 한발자국도 나서지 못하고

나무가 된다

봄이면 몸서리치는 꽃으로 울고

여름이면 무성히 창문을 열어 놓다가

가을이면 메마른 눈물을 발등에 죄 없이 덮고 덮는다

마음은 채찍 같은 마파람을 맞으며 겨울의 긴 꿈을 꾼다

마음은 결국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수오재 守吾齋를 찾아가다」전문

 

위 시의 시적 자아의 마음 또한 불화의 세계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디든 가 보자고/ 어디든 여기보다 못하겠느냐”는 대목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서정적 자아의 ‘마음’은 ‘여기’에서 한발자국도 나서지 못”한다. “몸서리치는 꽃으로 울고”, “메마른 눈물”을 흘리며 “채찍 같은 마파람을 맞”고서라도 ‘마음’은 ‘이 자리’, 즉 그 ‘어디’보다도 ‘못한 여기’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이처럼 결핍의 세계, 불화의 세계에 머물고자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 시의 제목에서 간취되는 바와 같이 ‘수오(守吾)’, 즉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배부른 개”로 남지 않기 위한, 시정신을 벼리기 위한 방법적 의장이 바로 불화의 세계에서 쉽게 합일로 나아가지 않는 것, 끝끝내 불안과 결핍, 슬픔과 굶주림을 포회하면서 한발씩 꾹꾹 눌러 나아가는 걸음이기 때문이다.

 

3.

 

전설한 바의 의미가 나호열의 시를 비극적이거나 어두운 성질로 규정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나호열의 시는 어느 한 방향으로 확정지어지지 않는다. 긍정과 부정, 희극과 비극, 현실과 초월, 개인과 사회·구조 등등이 혼융되어 있거나 맞물려 있다. 그 경계에서 능숙하게 긴장과 이완을 조율하는 까닭에 그의 시는 여러 방향에서 해석이 가능하며 역설적 감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금번에 발표된 신작 시편들의 특징 중 하나가 소멸이나 상실의 이미지가 부각되고 있다는 점인데 그럼에도 시적 분위기가 비극적이거나 허무감에 경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사안이다. ‘종점’이나 ‘양로원’(「서 있는 사내 ․ 3」), ‘소실점’(「꽃짐」), ‘사막’(「토마스네 집」) 등과 같은 공간적 배경이나 ‘슬픔’과 ‘외로움’(「비가悲歌」), ‘작별’(「봄눈의 내력」), ‘늙음’(「늙어간다는 것」), ‘허물어짐’(「휘다」) 등등 소멸이나 상실에 관련된 이미지는 거의 모든 시편들에서 확인되고 있을 만큼 주조적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소멸·상실의 이미지를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이미지의 경계를 무화시켜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정서를 발현케 하는 것이 신작 시편들에서 보이고 있는 특징인 셈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시편「서 있는 사내 ․ 3」를 들 수 있다.

 

종점이 멀지 않은 정류장에

버려진 그림자 펄럭이네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떨어질 때를 놓친 나뭇잎처럼

망설이다가

저만큼 눈길을 흘려보내는

한 시간째

가야할 곳이 없다는 안도와

기다릴 것이 없다는 막막함이

곧추 서 있는

희망 양로원 쪽으로

해는 얌전하게 신발을 벗고 들어서고 있다

 

                          -「서 있는 사내 ․ 3」전문

 

‘종점’이나 ‘양로원’, ‘버려진 그림자’와 ‘떨어질 때를 놓친 나뭇잎’ 등등 시적 배경이나 대상들을 열거해보면 이 시는 늙고, 저물고, 버려지는, 그리하여 마지막을 향해 내리닫는 존재들의 향연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시적 분위기는 체념이나 허무의 정서로 흐르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표층적 표정은 그러해 보이기도 한다. “종점이 멀지 않은 정류장”, “버려진 그림자” 등은 ‘양로원’에 대한 정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상관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로원’을 둘러싸고 있는 이러한 암울한 정서는 작품 후반에 가면서 희석되고 있다. “가야할 곳이 없다는 안도와/기다릴 것이 없다는 막막함이” 양립하고 있는 공간이 ‘양로원’이며 ‘양로원’의 이름이 ‘희망’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물론 반어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해’가 ‘지는 것’이 아니라 “양로원 쪽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묘출에서 반드시 반어적 의미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서 있는 사내”는 이와는 ‘저만큼’이라는 거리를 상정한 채 “눈길을 흘려보내”고 있는 인물이다. 버스 타기를 망설이다 보내며 “한 시간째” 눈길을 주고 있는 것을 보면 ‘사내’와 ‘양로원’의 심적 거리가 그리 멀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저만큼’이라는 거리에서 ‘사내’는 아직 “가야할 곳”과 “기다릴 것”이 ‘있는’ 존재로 유추해볼 수 있다.

‘사내’는 ‘서’ 있다. 어딘가를 향해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는 시기는 지났고 그렇다고 ‘종점’에 다다른 것은 아닌, ‘안도’와 ‘막막함’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잠시 멈추어 ‘서’ 있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가 “떨어질 때를 놓친 나뭇잎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그의 시선에 비친 ‘지금 여기’와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인생의 ‘종점’은 쓸쓸하기도, 막막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리 암울하지만도 않다. ‘희망’이라는 시어와 ‘양로원’ 안으로 들어서는 ‘해’로 인해 안온하고 따스한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익숙하지는 않은 이 복합적이고도 중층적인 이미지의 발현은 그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시적 의장이다.

 

자전거 한 대가

소실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긴 언덕길인지 비틀,

기우뚱거리며

너른 들판이 얹혀져 있는지

등짐이 가득하다

이 세상 향기로운 꽃 모두

빛깔 고운 꽃 모두

기쁨과 설렘을 건네주러 가는

저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노동인가

소실점 속으로 아득히

비틀거리며 기우뚱거리며

노을을 가득 지고 가는

저 생 生이 궁금하다

 

                  -「꽃짐」전문

 

위 시는 제목부터가 ‘꽃짐’이다. 또한 “이 세상 향기로운 꽃 모두/빛깔 고운 꽃 모두/기쁨과 설렘을 건네주러 가는/저 모습”이라는 묘사나 “얼마나 아름다운 노동인가”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나듯 이 시의 표층적인 분위기는 감정의 절제 없이 매우 경쾌하고 예찬적이며 표현 또한 직접적이다. 그러나 평탄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긴 언덕길’의 등장이라든가 반복해서 묘사되고 있는 ‘비틀거리고 기우뚱거리는’ 행위는 초반에 전경화되어 있던 아름답고 향기로운 심상에 균열을 가져오는 장치가 되고 있다. 또한 이 자전거가 “노을을 가득 지고”, 궁극적으로는 소실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물고 사라지는, 즉 소멸을 함의하고 있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풍성하고 싱그럽고 아름다운 이미지에 “비틀거리고 기우뚱거리”는 불안정함, 저물고 사라지는 적막함이 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마지막 행 “저 생이 궁금하다”는 대목에서도 드러나듯 이 시 또한 「서 있는 사내 ․ 3」와 같이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생의 뒷모습을 그리고 있다. ‘양로원’이나 ‘종점’ 등의 쓸쓸하고 암울한 이미지가, ‘양로원’에 ‘해가 들어서는’ 마지막 장면으로 인해 희석되고 있는 것이 서 있는 사내 ․ 3」라면, 위 시는 ‘꽃짐’의 곱고 향기로운 이미지가 ‘비틀거리고 기우뚱거리며 소실점 속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희석되고 있다.

나호열의 시는 이처럼 인식의 층위에서든 이미지의 층위에서든 어느 한 방향으로 확정지어지지 않는다. 하나에 이질적인 다른 하나가 틈입해 들어와 기존에 구축되어 있던 질서를 흩뜨린다. 하여 예상되던 현상이나 이미지를 비껴 새로운 차원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끌고 간다. 이를 전언한 바와 같이 이항 대립적 구도에서 벗어난 불확정성으로 설명할 수도, 역설적 감응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다성성이 의미의 확장과 정서의 깊이를 담보하는 장치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모호하고 애매한 의미는 그것의 본질 속으로 더 깊이 탐구해 들어가는 통로가 되고 있고, 상충되는 이미지는 서로의 그 심상과 정서에 깊이를 더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러한 불확정성, 역설적 감응은 그의 시에서 ‘사막’과 ‘늑대’로 표상되는 긍정을 위한 부정의 정신, 다시 말해 통합과 합일의 세계를 지향하는 데 있어 불화의 세계, 그 임계에서 끝끝내 합일을 유보하는 시정신에서 연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

 

지금 우리 사회는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이 글에서 굳이 제4차 산업혁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 요체가 서로 다른 차원 내지 영역의 융합을 통한 혁명, 새로운 차원의 창조에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사실 진보라든가 발전이라는 개념은 카오스로부터 질서의 확립, 더 나아가 각 분야의 세분화와 전문화의 과정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성에 대한 맹신이라든가 산업 발전 이전, 인류 사회는 유기적 통합의 상태였다는 의미다. 근래 들어 자주 회자되는 통섭이니 융합이니 하는 용어들이나 하다못해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를 통합한다는 교육 정책에 이르기까지 그 흐름에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이를 다시 근원으로의 회귀라고 한다면 무리한 억측일까.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나호열 시의 다성적 이미지는 의미가 깊다고 생각된다. 이분법적 구도에서 어느 한 쪽에 대한 선택이나 판단을 강요받고 그것을 내면화 해온 현대인에게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의미는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하다. 그러나 진실은 그 모호함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사물을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대상의 형상이 달라지듯 대상이 내포하고 있는 성질이나 의미는 복합적이고 다성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의 총합이 그 대상 자체라고 할 수도 없다. 사물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생(生)의 문제에 있어서야.

금번에 발표한 나호열의 신작들은 인생에 대한 관조와 사유를 담고 있다. 인생에 대한 반추가 아니다. 그의 시선은 독특하게도 ‘여생일지 후일일지’(「늙어간다는 것」) 모르는 미래를 향해 있다. 생의 절정기를 넘어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어느 즈음에 서서 ‘여생’ 혹은 ‘후일’에 던지고 있는 그의 시선은 웅숭깊다. 고독과 슬픔, 결핍, 불안에 혼재되어 있는 희망과 따듯함 그리고 아름다움, 그의 시에서 발현되고 있는 이 불확정적이고 다성적인 감수성은 바로 ‘사막’이고자 ‘배고픈 늑대’이고자 치열하게 자아를 벼리는 그의 시정신에서 발로하는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진희

문학평론가, 저서로 『유치환 문학과 아나키즘』, 『문학과 존재의 지평』 등이 있음. 현재 대전대학교 강의전담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