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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슬픔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6. 8. 10:38

현대시에 있어서의 슬픔의 역설적 힘

박 진 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슬픔이 사라진다면 어떠할까. 기쁨만이 가득한 세계일까. 행복이 지속되는 세계일까.

2015년 여름, <인사이드 아웃 Inside Out>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개봉되어 큰 인기를 끈 바 있다. 기쁨, 슬픔, 소심, 까칠 등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의인화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가 함의하고 있는 주제 또한 이러한 질문과 동궤에 자리한다. 기쁨은 긍정적 감정으로 행복에 연결되고 슬픔은 그 대척되는 지점에 자리하는 부정적 감정으로 불행에 연결된다는, 일반적 인식을 두고 과연 그러한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의 대립을 떠나 전통 서구 사상에서는 아예 감정 내지 정서 자체를 이성과 대립되는, 이성에 의해 통제되어야 할 가치하위의 것으로 고려해 온 것이 사실이다. 정서가 이성보다 열등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고, 정서의 본성과 힘에 대한 진의를 탐구했던 이가 스피노자이다. 스프노자에게 있어 정서란 단순한 느낌이나 감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적 변용과 물리적 변용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 다시 말해 이성의 영역과 신체적인 영역에 모두 상호관련성을 가지는 것에 해당한다.

정서에 대해 의미 있는 논의를 전개했던 스피노자 또한 슬픔을 부정적 감정으로 분류했다. 코나투스, 즉 인간 존재를 보존하고자 하는 힘을 감소시키는 감정이라는 이유에서다. 코나투스를 증진시키는 기쁨의 정서는 쾌감이나 유쾌함으로, 그 반대의 경우인 슬픔의 정서는 고통이나 우울함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도는 언뜻 보아도 너무 단선적인 분류로 느껴진다. 스피노자 사상의 보다 전체적인 틀 속에서 살펴야만이 그 진의가 드러날 것이나 여기서 길게 설명할 일은 아니다. 범박하게나마, 보다 완전한 행복을 위해서는 ‘고귀한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스피노자의 메시지를 기억하면 그만이다. 스피노자는 그의 주저 『에티카』에서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라고 했다. 진정한 기쁨에 이르는 길, 더 나아가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란 힘들고 드물지라도 끝내 고귀한 것을 향해 나아갈 때 열리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슬픔은 오히려 진정한 기쁨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의 극복을 통한 자아 고양의 측면도 그 의미 중 하나일 것이나 가장 큰 의미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찾아진다. 타자로 인한 슬픔, 더 구체적으로는 타자의 고통으로 인한 슬픔이 그것이다. 시인들이 그토록 슬픔에 천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시란 근원적으로 존재에 대한, 세계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사랑하는 대상의 고통이나 슬픔에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어떻게 슬프고 시름차지 아니하겠”느냐던 백석의 언표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백석은 시인을 일컬어 “슬픈 사람”,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혼”으로 규정한 바 있다. 바꾸어 말하면 시인이란 슬픔의 대상이 만물에 이르는 존재라 할 수 있겠다. 성속귀천을 떠나, 생명의 유무를 떠나 모든 존재에 이르는 슬픔을 포회하고 있는 것이 시인의 혼이라는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슬프지 않을 일도 시인이라면 슬퍼할 줄 알아야 한다는, 아니 슬퍼하게 된다는 뜻이다. 맨 처음 울기 시작해 맨 마지막까지 우는 존재가 시인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시인은 누구보다도 슬픔에 예민한 존재이며 또 그러한 시인의 슬픔은 넓고도 깊은 것이다.

문득 의자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의자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으므로

제 풀에 주저앉았음이 틀림이 없다

견고했던 그 의자는 거듭된 눌림에도

고통의 내색을 보인 적이 없으나

스스로 몸과 마음을 결합했던 못을 뱉어내버린 것이다

이미 구부러지고 끝이 뭉툭해진 생각은 쓸모가 없다

다시 의자는 제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다

태어날 때도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슬픔을 너무 오래 배웠던 탓이다

- 나호열, 「타인의 슬픔 1」전문 (『타인의 슬픔』, 연인M&B, 2008.)

‘제 풀에 주저앉은 의자’는 몸과 마음이 무기력해져버린 존재의 은유로 읽을 수 있다. “견고했던” 존재가 무너져 내린 이유는 “타인의 슬픔을 너무 오래 배웠던 탓”에 있다. 그렇다면 “타인의 슬픔”이란 어떤 의미일까. 타인으로 인한 슬픔일까, 혹은 나의 슬픔이 되지 않는, 다시 말해 공감할 수 없는 타인만의 슬픔인 것일까. “너무 오래 배웠던 탓”이라는 시구에서 그 의미를 간취해 보면 “타인의 슬픔”이란 진정한 ‘나’의 슬픔이 아니라 무한경쟁의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서 학습된, 혹은 주입된 슬픔이라 해석해 볼 수 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라는 라캉의 언표와도 일맥상통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욕망 대상은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조작된 결핍에 의한 것이다. 경쟁적으로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자신의 욕망 대상으로 오인하며 살아간다는 의미다. 그러한 거짓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거듭된 눌림에도 고통의 내색을 보”이지 않으며 더욱 자신을 채찍질해가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타자의 욕망’,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 앞에서 겪게 되는 슬픔 또한 진정한 자신의 슬픔이 아닌 ‘타인의 슬픔’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