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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의 시 흘러갔다 / 장성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3. 31. 21:40

추천이유

어디쯤 가고 있을까

 

장성혜

 

올 일월 중순에 동해로 기차여행을 다녀왔다. 수도계량기가 터지도록 추운 날이었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잠까지 설치고, 청량리발 동해행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함께 떠난 친구 넷은 태백이 황지였을 때 그곳에서 학교를 다닌 오랜 친구들이다. 그때 우리가 서울로 오기 위한 관문이었던 청량리역에 백화점이 들어섰고, 그곳을 떠난 우리는 이제 프로필에 손주 사진을 올리는 나이가 되어있다. 순식간에 사십 년이 흘러가 버렸다. 좌석을 돌려놓고 마주 앉아 낡은 앨범을 펼치듯 옛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겨울 바다를 보기 위해 밤 기차를 타고 청량리에서 강릉까지 갔던 기억도 꺼내본다. 그 시절 발이 시리도록 추웠던 무궁화호가 생각보다 아늑하고 따뜻해서 낯설었다. 말없이 흐르는 강을 지나 산을 뚫고 달려가는 기차는 우리를 낯선 풍경 속으로 데려간다. 원주를 지나자 눈 덮인 산봉우리가 보이고, 눈밭에 선 겨울나무들이 우리를 반기지만 다가오는 풍경들은 낯설어서 서러웠다. 역방향으로 앉아 캔맥주를 마시며 제천을 지나고 영월을 지나간다. 달리는 기차의 쇳소리가 멈출 수 없는 세월의 바퀴소리로 들려온다. 사북을 지나고 정암터널을 지나도 그토록 나를 절망하게 했던 검은 강과 검은 지붕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카지노가 불러들인 호텔들과 고층아파트가 서울근교를 옮겨다 놓은 듯했다. 추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역이지만 아버지가 가족들을 서울로 보내고 혼자 계시던 곳이었다. 슬픔처럼 눈이 쌓여 있던 저탄장도 보이지 않는다. 검은 강과 검은 길이 사라지고 추억도 폐광이 되었다. 태백역에는 눈사람 탈을 쓴 사람들이 눈꽃축제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었다. 차창에 얼굴을 대고 내다보아도 기억속의 집과 길은 흔적조차 없다. 화면에 비가 내리던 극장도 흘러가고, 운동장이 검은 학교도 흘러가고, 청량리행 기차 안에서 만났던 눈썹이 긴 남학생도 흘러가고, 그 많던 바람도 흘러가고, 서럽게 서 있던 역도 흘러가고, 역전에 있던 집도 흘러갔다.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살던 곳을 지나 우리는 옛친구와 겨울 바다가 기다리는 동해로 갔다. 지난해 동해로 내려간 친구는 주말마다 일출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추암해변을 찾는다고 했다. 날마다 다른 모습으로 해는 뜬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듯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 한 편의 시는 옛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눈물겹다. 돌아보면 소금기둥으로 서 있는 초로의 사내에게서 이제는 절망하지 않아 절망스러운 내 모습이 비쳐진다. 추암해변에서 두 팔 벌리고 찍은 사진 속 나는 누구일까, 사진 속 나보다 긴 그림자를 앞세우고 촘촘한 세월의 그물을 뚫고 흘러갔고, 적빈으로 사라지기 위해 오늘도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추천시

 

흘러갔다

 

나호열

 

나는 흘러갔다

낮이나 밤이나

비오는 날이나

바람 부는 날에도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를 만나지 못하고

영원히 나는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나는 흘러갔다

촘촘한 세월의 그물을 뚫고

赤貧으로 사라지기 위하여

이렇게 흘러가는 것인가

서럽게 서 있던 역이 흘러갔다

그렇게 완고하게 서 있던 집들과

나무들이 흘러갔다

길이 흘러가고

고통이 흘러갔다

 

 

문득 흘러갔던 초로의 사나이가

 소금기둥으로 서 있다

 

나호열 1953년 충남 서천 출생. 1986년 《월간문학》등단. 시집 『촉도』『눈물이 시킨 일』외.

장성혜 경북 봉화에서 태어났으며 1977년 <강원일보>(시) 신춘문예. 2002년 계간 ?리토피아? 로 등단

 

- 계간 시와 산문 2017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