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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1. 31. 11:42

전북 군산의 일제강점기 조선은행 건물에 들어선 근대건축관에 전시된 강용면 작가의 작품 ‘민족의 함성’. 김구, 유관순, 안중근, 안창호, 윤봉길, 홍범도, 한용운, 이봉창 등 독립유공자와 오천 년 역사에 도움을 준 여러 국가의 인물들 5000명의 얼굴이 있다. 얼굴이 없는 인물도 있고, 부처의 얼굴도 보인다.


근대의 풍경과 오랜 내력이 도시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전북 군산은 요샛말로 하자면, 여행자들 사이에서 가장‘핫(Hot)’한 도시입니다. 식민지 시대의 아프고 쓰린 상처와 좌절, 그럼에도 끝내 놓지 않았던 뜨거운 희망의 시간이 거기 있습니다. 옛 조선은행 건물 안에서 식민지의 시간을 건너온 5000명 인물의 얼굴을 새긴 부조 작품 앞에서 그 시간을 봅니다. 군산을 찾는 관광객들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낡고 오래된 건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오래된 빵집과 음식점 앞에도 길게 줄을 섭니다. 그게 어디 이국적인 풍경에 대한 감상이나 혀끝으로 느끼는 맛 하나 때문일까요. 군산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건 ‘결코 쉽지 않았던’ 시간이 만들어내는 깊이 때문인 듯했습니다.

# 새로운 시선으로 근대의 공간을 보다

20세기 초 군산은 한반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했던 도시였다. 시작은 일제의 식민지배였다. 일본의 요청으로 1905년 개항이 이뤄지고 한일병합을 거치면서 한적한 어촌이던 군산은 일약 조선을 대표하는 무역항이 됐다. 군산에는 각국의 조계지가 들어섰고 서구 문물이 밀려들었다. 일제가 군산항을 한반도 자원을 수탈해가는 창고의 문으로 삼으면서 군산은 근대 도시가 됐던 것이다.

근대 도시 군산의 번성을 얘기하는 건 곧 일제에 의해 자행된 수탈이 얼마나 대대적이었는지를 자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식민지배에 의한 도시의 발전이란 돌아보면 곧 치욕이었으니, 군산에는 ‘영광의 시간’이란 없었다. 남아있던 수많은 적산가옥이 사라지고, 과거의 흔적들이 하나둘 지워졌던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군산이 최근 들어 여행자들에게 조명을 받게 된 건, 새로운 시선 때문이다. 수탈의 공간에서 독립운동과 농민운동의 공간으로 확장됐다. 식민지 시대 압제의 고통을 말하면서, 저항하고 분투한 이들의 삶도 잊지 않았다. 옛 일본식 절에 일본인들의 사죄문이 새겨졌고,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졌다. 수탈의 공간으로만 해석되던 군산의 근대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과거에 대한 애틋한 회상이 곧 ‘식민지를 추억하는 일’이 돼버리고 말았던, 군산의 딜레마는 이것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군산에서 보아야 할 것은 두말할 것 없이 근대의 풍경이다. 군산내항을 뒤로 두고 있는, 이른바 ‘원도심’의 한복판인 장미동에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이 있다. ‘장미동’은 ‘장미꽃’이 아니라 쌀 곳간이라는 의미의 ‘장미(藏米)’에서 나온 이름이다. 군산시는 이곳 장미동을 ‘근대산업유산 창작벨트’로 다듬고 있다. 그러니 군산 여행은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역사를 앞세운 박물관임에도 근대역사박물관은 뜻밖에 재미있다. 흥미로운 전시와 설명이 발길을 붙잡는다. 특히 박물관 2층에 ‘1930년 9월 5일 해 질 녘’의 시간을 뚝 떼어 옛 상점 11개로 재현한 근대생활관이 인상적이다. 쌀 시세를 놓고 선물거래나 도박을 하는 미두장, 인력거꾼의 대기장소인 인력거방, 고무신가게, 술 도매상 등의 상점을 예전 모습 그대로 꾸며놓았다. 박물관에서는 관광객들에게 검정 치마와 흰 저고리, 또는 망토가 있는 학생복과 모자 등을 빌려준다.

전북 군산의 금강 하굿둑 위를 날아가는 가창오리떼. 그 옆으로 기러기의 모습도 보인다. 지금 금강 하구에는 가창오리 15만 마리가 와 있어 해 질 무렵 금강 변으로 가면 하늘을 뒤덮으며 군무를 펼치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 근대 도시의 중심을 걷다…건축 여행

근대 도시로 가는 여행은 곧 건축 기행이다. 근대역사박물관 옆에 옛 군산세관 건물이 있다. 군산에 남아있는 근대건축물 중 가장 오래됐다. 1908년에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수입해온 벽돌로 지어졌다. 서양 고전주의 양식의 독특한 외양보다, 낡은 목제 문틀과 문 손잡이처럼 작은 것들에 눈이 간다.

박물관 옆에는 옛 조선은행과 나가사키18은행도 있다. 두 곳 모두 식민지 시절 수탈의 첨병 역할을 했던 곳들이다. 조선은행은 근대건축관으로, 나가사키18은행은 근대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근대건축관이 된 조선은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독립과 관련 있는 인물 5000명의 얼굴을 새긴 조형물이었다. 윤봉길, 김구, 홍범도, 유관순…. 수많은 얼굴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 자신이 믿는 것에 바쳤던 삶이 이리도 많았음이 새삼스럽다.

이 두 곳의 은행 말고도 근대역사박물관 주변에는 새로 쓰임새를 얻은 일제강점기 건물들이 있다. 1930년대 수탈한 쌀을 보관하던 조선 미곡창고 건물은 공연장이 됐고, 일본인의 무역회사였던 미즈상사 건물은 카페가 됐다. 광복 이후 나이트클럽 등으로 사용됐던 적산가옥은 갤러리로 탈바꿈했다.

여기서 길 건너편 쪽이 적산가옥들이 즐비한 월명동과 신흥동 일대다. 바둑판식으로 정비된 신흥동 골목 안쪽에 일본인 포목상이 살던 ‘신흥동 일본식 가옥’이 있다. 가까운 곳에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배경이 됐던 ‘초원사진관’도 있다. 본래 차고였던 곳을 사진관 세트로 만들었다가 촬영 후에 철거했는데, 영화 팬이 몰려들자 군산시가 사들여 다시 복원해놓은 곳이다.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도 여기서 멀지 않다. 동국사는 조계종 사찰이지만 본래 일본의 한 불교종파인 ‘조동종’의 사찰로 지어진 것이다. 절 한쪽에 일본 조동종 종무총장이 보내온 ‘참회와 사죄의 글’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 일본의 억압으로 고통받은 아시아인에게 사죄하고, 가해자의 입장에서 포교했던 해외전도의 과오를 사죄한다는 내용의 글이다. 비석 앞에는 지난해 8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한 소녀가 조국을 바라보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다. 소녀상은 붉은 털모자와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는데, 이른 아침 흩날린 눈발이 맨발 위에 쌓여 있었다.

▲ 이른 아침 군산 경암동 철길에 눈이 내렸다. 경암동 철길은 한때 제지회사를 오가던 기차가 다녔다. 열차 운행이 중단된 후에도 관광객들이 철길 골목의 독특한 풍경을 찾아온다.

# 이성당…관광객들을 길게 줄 세우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빵집 ‘이성당’이야말로 군산을 찾는 여행자들로부터 가장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곳이다. 빵집 앞에 길게 늘어선 줄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이쯤이면 이성당은 한낱 빵집이 아니라 여행자들이 좇는 ‘문화코드’의 징표로 읽힐 정도다. 그러므로 빵집 얘기가 좀 길어지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이성당 앞에서 드는 몇 가지 의문, 빵이 맛있다기는 하지만, 그게 이렇게 줄을 세울 정도인지. 이성당의 무엇이 이렇게 긴 줄을 만들 정도로 특별한 것일까.

이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다. ‘이성당’은 광복되던 해인 1945년에 문을 열었다. 71년의 역사. 그런데 ‘이성당 100년’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성당의 시간에다 1910년부터 일본인이 운영하던 화과자집 ‘이즈모야(出雲屋)’의 역사를 덧대면 100년이 넘는다는 얘기다. 이즈모야란 일본 시마네(島根)현의 소도시 ‘이즈모(出雲)시’의 지명에서 따온 것. 거기 살다가 태평양 전쟁의 와중에 아들의 군 징집을 피해 이주해온 일본인이 군산에 연 화과자집이 이즈모야였다.

처음에는 찹쌀을 튀겨낸 과자를 팔았는데, 나중에 도쿄(東京)에 유학을 보낸 큰아들이 빵 굽는 기술을 배워오면서 승승장구했다. 빵을 배달하는 삼륜차까지 갖고 있었다니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즈모야가 문을 닫고 난 뒤에 개업한 이성당은 제과점주들이 밀가루며 설탕을 공급받기 위해 만든 삼성상사가 모태였다. 이성당은 번창했다. 문 연 지 3년 만에 이즈모야 빵집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다 이성당 주인이 1960년대 초반, 서울로 올라가면서 지인에게 경영권을 넘겨주었고, 그게 대를 이어져 내려오는 게 지금의 이성당이다. 최고 인기 품목은 단팥빵과 야채빵. 300여 종에 달하는 빵 중에서 단팥빵과 야채빵은 구워져 나오기 바쁘게 팔려 나간다. 팥소가 듬뿍 든 졸깃한 단팥빵과 양배추, 당근, 양파로 꽉 찬 야채빵을 한입 베어 물면 ‘과연…’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이성당의 단팥빵과 야채빵의 명성이 군산 밖으로까지 알려진 것은 2006년부터다. 밀가루 대신 쌀을 이용해 차진 빵을 만들어내면서 입소문을 탔다. 이성당은 다양한 빵을 연구하고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쌀 빵은 만들기가 쉽잖아 거듭된 실패 끝에 일본 니가타(新潟)현의 ‘겐리치’ 제과점에서 기술을 전수받아 지금의 빵을 만들 수 있었다. 다시 처음의 질문. 왜 이성당 앞에 줄을 서는 것일까. 그 대답은 ‘오래된 역사의 명성에도 안주하지 않고 연구와 혁신으로 새로운 빵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빈해원… 500명을 한꺼번에 먹이다.

군산에서 사람들을 길게 줄 세우는 음식은 이성당의 빵만이 아니다. 내로라하는 짬뽕을 내는 중국음식점들이 여럿이다. 어디든 바다를 끼고 있는 지방에는 짬뽕으로 이름난 중국집이 하나쯤은 있는 법. 그런데 군산은 그 수준을 넘는다. 다른 도시에 아예 ‘군산 짬뽕’이란 상호가 내걸릴 정도다.

군산에 중국음식점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건 6·25전쟁 직후였다. 6·25전쟁의 와중에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인천의 화교들이 집단으로 피란 배를 타고 남하했다. 그렇게 닿은 곳이 군산이었다. 군산에 정착한 화교들은 중국음식점을 열었다. 토박이들은 당시 문을 열었던 이름난 중국집 이름을 기억했다. 동해루, 평화원, 태화루, 쌍설루…. 그중 하나가 지금까지 문을 열고 있는 중국집 ‘빈해원’이다. 본래 빈해원은 인천에 있었다. 광복 전에 중국 산둥(山東)성에서 건너온 이가 문을 열었다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군산으로 옮겨왔다. 빈해원은 1970년대 중반 2층짜리 단독건물을 지었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스무 개가 넘는 방을 갖춘 빈해원은 한 번에 500명이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지금과 비교해도 어마어마한 규모다. 빈해원은 창업주 자손들이 간짜장과 탕수육의 명성을 이어받으며 그 건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내부 수리를 위해 잠깐 문을 닫고 있다.

빈해원이 역사 쪽에서 최고라면, 맛으로 최고로 쳐주는 중국집이 이성당 길 건너편의 중국집 ‘복성루’다. 허름하고 작은 식당인데도 점심시간이 되기 전부터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선다. 복성루 짬뽕의 매력은 센 불로 볶아서 내는 이른바 ‘불맛’이다. 군산에는 짬뽕으로 이름난 중국음식점이 곳곳에 있다. ‘수송반점’이 그렇고, ‘지린(吉林)성’도 못지않다. 여기다가 외지 사람들에게 좀 덜 알려진, 그래서 줄이 짧은 집 한 곳을 보탠다. 군산시청 부근의 서원반점. 군산의 지인이 ‘이곳마저 외지인들에게 알려지면 우리가 못 먹게 된다’며 손사래를 치더니, 식당 외관 사진을 찍고 있는데 막 밥을 먹고 나온 손님들도 똑같은 얘기를 했다. 여기는 짬뽕도 좋지만 그보다 한 수 위가 잡채밥이다. 맛으로 보나 양으로 보나 엄지손가락을 세울 만하다. 일요일과 월요일은 쉬고, 문을 여는 날도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딱 4시간만 장사를 한다.

군산의 명소 몇 곳 더. 한반도의 근대는 기차와 함께 시작됐으니 군산에도 기차와 관련된 명소가 없을 리 없다. 하나가 간이역인 임피역. 2008년 여객취급이 중단되면서 퇴역한 역인데, 낡은 톱밥 난로를 떠올리게 하는 과거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도심의 주택가 사이로 400m쯤 이어지는 경암동 철로도 여행자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한때 제지회사를 드나들던 기차가 다녔는데 운행이 중단된 뒤에도 낡은 철길과 철길에 바짝 붙여 지어진 2층 건물들의 독특한 풍경을 보러 관광객들이 들른다.

여기다 군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빠뜨리면 안 될 것 중 하나가 바로 금강하구에서 만날 수 있는 가창오리의 군무다. 금강 하구 쪽에 지금 가창오리 15만 마리가 와있다. 해 질 무렵이면 가창오리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데, 내비게이터에 ‘나포면 옥곤리 955-14’를 입력하고 가면 거기서 거대한 무리를 이뤄 낙조의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나는 가창오리를 만날 수 있다.




군산 가는 길=군산 근대건축의 흔적을 찾아보는 여정이라면 근대역사박물관이 중심이 된다. 서해안고속도로 군산나들목에서 내려 706번 국도를 타고 가다 고봉교차로와 호덕교차로를 차례로 지나 21번 국도로 갈아탄다. 경암교차로에서 비응항, 새만금방조제 방면으로 우회전하면 째보선창 삼거리를 지나서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이다. 박물관 바로 뒤가 군산항이다. 여기서 장미갤러리, 미즈 커피, 군산 근대건축관, 군산 근대미술관 등을 모두 도보로 돌아볼 수 있다. 근대역사박물관 입장료는 2000원. 근대미술관과 근대건축관 등은 500원이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군산의 구도심 중심에 ‘항도 호텔’(063-445-4151)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총독부 영빈관으로 쓰던 건물인데 광복 후에는 미군 정보기관이 사용하다 이후 호텔이 됐다. 군산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숙소다. 주차장으로 삼은 자그마한 정원 주위에 심어진 굵은 향나무만 봐도 그 내력이 짐작된다. 이승만 전 대통령도 군산을 방문했을 때 여기서 묵어갔다. 지난해 연말 객실 리뉴얼을 마치면서 깔끔하게 단장됐지만, 시간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건 좀 아쉽다. 항도 호텔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위치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부터 히로쓰 가옥과 초원사진관, 빵집 등 군산의 대표적인 관광지를 모두 도보로 돌아볼 수 있는 자리에 있다. 한 곳 더 추천하라면 1930년대 당시 건축 원형을 살린 ‘고우당’이다. 일본식 다다미방에서 묵어갈 수 있는 인기 있는 일본식 숙박체험관인데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이다.

군산은 인기 있는 맛집이 워낙 여러 곳이다. 꽃게장과 회, 생선국 등을 곁들인 백반을 1만2000원에 내는 ‘한주옥’(063-443-3812)이 관광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집이다. 내항의 군산회집(063-442-1114)은 오랜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집. 다양한 곁들이 음식을 함께 내는 모둠회가 1인 3만∼4만 원 선이다. 항도 호텔 앞의 경선옥(063-442-3337)은 아욱국과 콩나물국 딱 두 가지만 한다. 이른 아침에 문을 여니 아침 식사에 딱 좋은 집이다.

군산=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6년 1월 20일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