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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불빛에 관한 소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5. 26. 18:08

 

 

먼 불빛에 관한 소고

 

                   - 구도운의 춤을 보고

 

   

  2000년 11월 25일 오후, 대학로에 갔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에도 초봄 같은 온기가 곱게 와 닿는 날, 마로니에 광장은 젊은이들의 춤과 노래가 가득 차 있었다. 그 젊음을 뒤로 하고 나는  문예극장 소극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김현자 무용단의 춤 공연, 3 편의 작품이 준비되어 있었다. 언제였지 하고 머리를 헤집어 봐도 춤 공연을 보러 왔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춤을 좋아한다. 물론 내가 추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춤을 보는 것, 타자의 내면을 훔쳐보는 것.

 

 미묘한 몸의 동작에서 일으켜지는 상징성은 시 쓰기와 다름 없다. 그러나 춤은 시 쓰기보다 더 극적이고 허무하다. 세워지려 하고 세워지려는 순간 무너져 버리는 것, 잠시의 정지도 용납하지 않는 사고의 흐름을 좇아가면서 이윽고 무용수의 일련의 동작들이 조각조각 내 몸으로  전이되고 하나의 의미로 자리잡는 순간 다시 우화되어 버리는 것.

 

 춤 공연을 볼 때 되도록이면 이해를 돕기 위한 팜플렛은 접어두는 게 좋다. 무용수들의 동작과 거친 숨소리의 현장성과 연상을 버무려가면서 얻어지는 상징의 세계를 마스터베이션하는 것이다.

 

 “구도운씨가 누구신가요?” 분장실을 찾아가서 쑥스럽게 물어본다.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만난 적이 없으므로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바로 오늘, 몇 시간 전에야 공연 팜플렛과 두 장의 초대권이 배달되었다.

 

  그리움을 나타낸 작품으로,

 

  어느날.....

  나호열님의 시집('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1999)을 들추었다.

  '먼 불빛'이라는 시가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다.

  내가 알고 느끼고 있는

  인간 실존의 그리움, 슬픔, 아픔이 전해져 왔다.

  그 아픔을 나의 몸짓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 안무자(구도운)의 글 

 

 먼 불빛처럼 그녀가 웃었다. 산곡과 들판을 가로지르는 밤 기차에 어리던 불빛, 붙잡을 수도 없는, 온기도 없는 불빛이 눈동자에 들어오는 순간의 적막함...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답은 자명하다. 호기심 때문이다. 짤막한 한 편의 시가 독자에 의해서 어떻게 해독 된 것이며, 또 그것이 독립된 실체로서, 몸으로 어떻게 재생산되었는지가 궁금한 것이다.

 

 경주 남산,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녘, 정상에 올라 들판 저 너머에서 건너오는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골목의 전신주에 매달린 보안등일지, 아침을 준비하는 부지런한 아낙네의 손길을 비추는 부엌의 불빛일지, 아니면 겨울 그 긴 밤을 어디에선가 다시 돌아와야 할 어떤 사람을 그리워하며 켜둔 촛불일지 모를, 그 불빛이 바람이 불어올 때 마다 가녀리게 눈을 깜빡거리며 다가왔을 때,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불빛이 나의 어딘가를 비추고 태워버릴 것이기에, 성급히 그 불빛을 지우는 행위를 하고 만 것은 아니었을까.

 

 저 불빛이 들판과 개울물과 숲과 길을 건너 뛰어오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눈빛이 들판과 개울물과 숲과 길을 건너 뛰어가 불빛이 되었던 것인가? 어둠은 불빛으로 인하여 더욱 어둡고, 불빛으로 말미암아 향기롭다. 불꽃이 뿜어내는 그 향기는 그리움과, 슬픔과, 아픔과 아픈 실존의 확인이기 때문이다.

 

 

  때늦은 후회처럼 그곳에 가서 바라보는 그대여

  멀고 아주 멀어서 비로소 가까워지는 그리움이여

  세월의 거울 앞에 서듯 눈시울 뜨거워

  그대 앞에 서서 바람 한줄기로 흔들리고 있느니

 

                      - 미완성의 초고 '불빛'

 

 내가 지금 힘껏 보듬고 있는 것은 타자의 몸이지만, 정작 내가 보듬고 싶어하는 것은 몸으로 표현되는 그 어떤 것, 행위를 넘어선 실오라기 하나에 지나지 않는 사랑의 의미 즉 관념이 아니던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고, 음악가, 화가가 되는 까닭은 현실과 현실로 부터 빚어지는 사건들에 무한히 주석을 달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는 까닭이 아니던가, 역설이라도 어쩔 수 없다! 사랑은 늘 부재이다. 욕망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빈 물통을 들고 사랑이라는 신기루를 찾아서 헤매는 일인 것이다. 그리움은 또 무엇이던가, 없는 그대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이다.  부재를 용납하지 못하면서도  그 부재를 뜨겁게 껴안을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불빛이다.

 

 

  무대의 한 쪽 끝에서 무용수는 정지된 상태로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다. 조명은 그의 몸을 빗겨서 하나  만 켜져 있다. 대각선으로 무대를 가로지르려는 눈빛, 정지된 상태로부터 천천히 360도 회전을 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멈추어 섰다가 어둠을 향해서 슬로우 모션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동작한다. 힘겹다. 근육의 힘겨움, 멈추엄 섬과 뛰어감의 반복,십 미터가 될 듯한 거리를 가로질러 다시 어둠 속으로 잠겨드는 몸....

 그의 몸도, 뛰어가는 동작 하나 하나도 눈빛도 숨소리도 모두 검다. 새까맣다. 그 모두가 불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태우지 않고서는 어디론가 달려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달려가도 달려가도 그 닿음의 흔적이 어둠이기 때문이다.

 

 구도운의 춤은 10분이 조금 지나서 끝났다. 십 미터의 거리를 십 분 동안 지나쳐 갔다. 밝은 조명이 들어오고 조금씩 내 몸을 동여매기 시작한 주름살을 아프게 만져 본다.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결코 아프지 않게, 오히려 부드럽게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불빛의 흔적으로, 살아 있는 우리의 몸에 문신으로 새겨져 있다.

 밖으로 나오자 초겨울의 햇살은 이미 사라지고, 불빛들이 고기 굽는 냄새,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에 묻혀 푸른 연기를 내며 흩어지고 있다.

 

 

   먼 불빛

 

 

   먼 불빛 한걸음에 달려와

   내 눈에 들어와

   넘어지고 뒤우뚱거리며

   숨차게 들판과 개울을

   건너오지만

   내 눈에 들어온 그 불빛 때문에

   길을 잃고 만다

 

 

   바로 그 자리에 멈추어 서라

   발길 아쉬운

   손길 애달픈

   미완성의 슬픔 때문에

   영원한 사랑을 오늘 산다고

   먼 불빛은

   혼자 이야기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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