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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가난함 / 나호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11. 12. 01:33

 

 

글쓰기의 가난함 / 나호열

 

 

국가기관이던 옛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민간기구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전환된 지 7년이 지났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1기 위원 40여 명 중의 일원으로 예술창작 현장과 예술정책 의 일선에서 3년 여를 보낸 이력으로 예술인 복지에 관련된 여러 토론회와 자문회의에 참여했었다.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으로 관심이 촉발되기는 했지만 예술인 복지 향상을 위한 방안은 그 이전부터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 우여곡절 속에 예술인 복지법이 공포되고 올해 11월 18일부터 법의 효력이 발생되게 되어 있지만 예술인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고 품격을 인정받는, 이제 수 만 리 먼 길의 첫 걸음을 딛게 되었다는 것이 정확한 현실일 것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출범함과 동시에 예술인 지위 향상에 관한 여러 논의가 진행되었지만 막상 예술인의 정의와 범위를 확정하는데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노동부, 통계청 등 정부기관에서조차 예술인의 분류가 상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집단 창작에 참여하는 스텝들 또한 예술인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 상황은 입법의 방향을 잡는데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그 범위를 예술인 54만명(한국고용정보원, 2008년 기준)으로 잡고, 예술인 복지법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예술인을 ▲공표된 예술 활동실적 ▲예술 활동 수입 ▲저작권(저작인접권) 등록 실적 ▲국고‧지방비 등의 보조를 받은 예술 활동 실적 중 하나의 요건만 충족하면 되는 것으로 정리한 것이 성과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2013년도 사업예산 335억 원이 70억 원으로 대폭 삭감되고 예술인 복지재단의 설립기금 200억 원도 전액 삭감되어 예술인 복지법에 기대를 걸었던 많은 예술인들의 어깨를 무겁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술인 복지법의 시행이 문학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장기적으로 볼 때 예술인 복지법은 문학인들에게도 미미한 햇살이 될 수 있겠지만 단기적으로는 훈풍으로 작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나라의 시인, 작가들은 대부분(전업작가를 제외하고) 직업을 가지고 있고,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이는 충분한 원고료가 지급되지 않는 망연자실한 현실에 일찌감치 적응한 까닭도 있고, 문학 시장 자체가 협소한 까닭에 문학으로 입신양명하겠다는 절실함을 체념한 안타까움의 소산일지도 모른다. 이 생각을 뒤집어 보면 이야기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어느 사람은 여가나 놀이로 창작활동을 할 수도 있을 것이며, 또 어느 사람은 필생의 업으로 글쓰기에 매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양자 兩者의 태도를 놓고 우열과 경중을 따질 수는 없겠으나 창작물의 영속성 永續性은 창작에 임하는 태도 여하를 떠나서 분명한 잣대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경제적 재화로 환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호구지책이 되지 않는 문학은 그 나름대로 의의가 있는 것이다. 노래 부르는 일이 좋아 가수가 된 사람과 돈을 벌기 위해 가수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같은 무대에 서도 그 마음가짐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예술은 예술 행위 자체가 합목적일 때 권위와 위엄을 스스로 쟁취한다. 고래로 좋은 작품은 궁窮함에서 태어나고 그런 까닭에 글 쓰는 사람은 필시 곤궁에 빠질 수 밖에 없다고 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글쓰기와 빈궁함은 아무 연관이 없으며 타고난 재주가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가와 놀이로 글을 쓰던, 재주가 있어 글을 쓰던, 현실에 발분 發憤하여 절차탁마의 정서를 명주실 잣듯 이끌어내던 간에 집단의 야만성에 항거하는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거나 자아 속으로 깊이 침잠하여 들어가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거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추함을 미적으로 승화하려는 의지야말로 문학인이 가져야 할 덕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인, 작가의 곤궁은 이와 같은 덕목의 미흡을 자각하는 데에 연유하는 것이지 예술인 복지법과 같은 제도로서 구휼 救恤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전업 시인 부부는 일정한 직업 없이 가사를 꾸려간다고 한다. 자식들의 양육에 바둥거리고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 앞에 표표히 서 있으나 그들이 꿋꿋이 서 있는 힘은 세속적 욕망을 최소화하려는 또 하나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글쓰기의 가난함을 깨닫지 못한 채 쓸데없이 먼 길을 걸어온 듯한 열패감을 또 어찌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