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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부석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1. 26. 11:58

 

시인과 떠나는 사찰기행④ 문태준 시인의 충남 서산 부석사

[중앙일보] 입력 2012.11.23 03:33 / 수정 2012.11.23 10:57

소가 길게 드러누운 절, 소를 찾듯 나를 찾으란 뜻일까요

 

문태준 시인과 부석사 주지 주경 스님이 충남 서산 부석사 산신각 돌계단을 오르고 있다. 볕이 좋은 길목마다 나무의자가 참 많다. 고요히 쉬었다 가시라는 사찰의 배려다.

“노을 물든 텅 빈 절 / 무릎 안고 졸다 / 소슬한 가을바람 놀라 깨어 보니 / 서리 맞은 단풍잎만 뜰에 차누나.”

경허(鏡虛·1846~1912·한국 근현대 불교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선승) 스님의 시다. 으스스하고 쓸쓸한 공기가 부석사(浮石寺) 마당에 가득하다. 나뭇잎은 꽤 졌다. 빈 가지에 하늘이 내려와 앉아 있다. 대공(大空)은 참 자유자재하다. 바위가 되어 묵중하고, 몰려다니는 낙엽이 되어 흐르고, 새의 울음소리가 되어 경쾌한 탄력이 있고, 예처럼 빈 가지가 되어 조용하고 심심하기도 하다. 나는 경허 스님이 머무르셨던 처소의 툇마루에 앉아 만추를 바라보았다. 경허 스님은 내가 앉아 있는 심검당에 사셨다. 스님이 사셨던 그때의 아궁이와 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방은 지극히 소박하다. 벽과 바닥과 천장, 그리고 그곳을 드나드는 작고 밝은 문이 있을 뿐이다.

심검당은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 지혜의 칼이란 다름 아닌 취모검. 취모검의 날 위에 머리카락을 올려놓고 입으로 불기만 해도 잘린다 했으니 중생의 무명을 베는 예리한 명검 아니겠는가. 스님은 이 심검당에서 제자를 길러냈다. 심검당 옆에는 목룡장(牧龍莊)이 붙어 있다. 용처럼 비범한 인재를 키워내는 곳. 이곳 또한 스님이 많은 선객을 가르쳤던 곳이다. 심검당과 목룡장 현판 글씨는 경허 스님이 직접 썼다. 천뢰가 들이쳤으나 필체는 여전히 부드럽고 활달하다.

 큰 법당인 극락전, 그리고 목룡장·심검당은 나란히 배치되었다. 마치 소가 길게 누운 꼴. 아닌 게 아니라 쇠뿔이 있을 법한 곳에는 여지없이 큰 돌이 무언가를 들쳐 올리듯 솟아 있고, 심검당 아래 약수터는 소 형상에서의 젖가슴 부위로서 신선한 유즙과도 같은 차고 맑은 생수가 차오르고 있다. 부석사 도량 자체가 퍼질러 누운 한 마리 큰 소인 셈이다. 불교에서는 자신의 본래 면목이 부처임을 깨달아가는 구도행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고 있으니 이 부석사가 불교의 종지를 잘 받들고 있는 유서 깊은 절임을 알겠다.

 

부석사 큰 법당인 대웅전과 목룡장·심검당이 길게 누운 소처럼 나란히 늘어서 있다

 부석사라는 현판은 만공 스님께서 직접 쓰셨다. 글씨 끝머리에 ‘칠십옹(七十翁)’이라고 적어 놓았다. 일흔 살의 늙은이라. 그 마음 씀의 소박과 온유와 겸허가 느껴졌다. 만공 스님은 28세 때 이곳 부석사에 왔다. 경허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만공(滿空), 혜월(慧月), 한암(漢岩), 수월(水月) 스님은 모두 경허 스님의 제자였다. 경허 스님은 만공 스님에게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할 것을 권했다. 만공이라는 법호도 경허 스님에게서 받았다. 스승과 제자가 심검당과 목룡장의 긴 툇마루에 곁을 두고 흉금을 터놓고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법희(法喜)가 생겨났다.

 근대 불교의 중흥조로 불리는 경허 스님과 그 제자 만공 스님은 모두 심우(尋牛), 즉 나를 찾을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경허 스님은 “바랑을 지고 저자에 놀며, 요령을 흔들고 마을에 들어가는 것이 실로 일 마친 사람의 경계”라고 했고, 만공 스님은 부처의 몸과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몸과 마음에서 찾아지는 것이라고 했다.

 부석사 주지 주경 스님과 산신각을 향해 돌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규모는 작지만 큰스님들의 법맥이 흐르는 곳입니다. 처음 이곳에 주지로 왔을 때는 도량을 빼곤 모두 가시덤불이었습니다.” 주경 스님의 얘기다. 지금 부석사는 그때에 비하면 규모도 커졌지만 흐트러졌던 도량이 깔끔하게 제대로 갖추어졌다.

 밑동이 굵은 괴목들이 곳곳에 섰다. 가지 너머로 들판과 인가가 내려다보이고 왼편으로는 몽산포가 잡힐 듯 눈에 들어왔다. 툭 트였으나 속세가 멀지 않았다. “비온 뒤 하늘이 한층 맑아졌습니다. 어제는 하늘에 별이 많고 밝아 북두칠성을 못 찾을 정도였습니다.”

 

 

‘부석사’ 현판. 근대 불교 중흥을 이끌었던 만공 스님의 글씨다.
 빈 가지 위에 시선을 얹어놓고 있는 내게 주경 스님이 말을 보탰다. “부석사에는 나무의자가 참 많군요.” 나의 질문에 스님이 답한다. “몸이 쉬어야 마음이 쉽니다. 앉을 자리를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곳을 찾아오는 분들은 최소 1시간 이상 절에 머물다 가십니다. 오래 체류하시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볕 잘 드는 곳에 놓아둔 의자에 앉아 속세에서 데려온 마음의 근원을 돌이켜 보고 잠잠해졌을 것이다. 경허 스님께서 평소 강조하셨던 ‘정정(靜淨)’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정정(靜淨) 두 글자를 잊지 말라. 맑은 것은 보리요, 고요한 것은 열반이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들이 지팡이를 짚으며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목에는 긴 염주를 걸었다.

 산신각에는 중앙에 산신을, 우측엔 선묘 낭자를, 좌측에는 용왕을 모셨다. 선묘 낭자를 모신 까닭은 부석사 창건 설화에 선묘 낭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의상 스님을 흠모했으나 사랑의 고백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바다에 몸을 던진 이가 선묘 낭자다. 의상 스님은 이곳 도비산 중턱에 절을 지어 선묘 낭자의 혼을 위로하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절 짓는 것을 방해했고, 그러던 어느 날 공중에 큰 바위가 떠 큰소리로 호통을 치며 사람들을 물러가게 했다. 이후 바위는 훌쩍 날아가 절에서 바로 보이는 바다에 떠 있으면서 절 짓는 공사를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이 돌이 물 위에 떠있다고 해서 ‘부석(浮石)’이라 불렀고, 절 이름도 ‘부석사(浮石寺)’라고 지었다. 주경 스님이 손을 들어 멀리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곳에 있는 것이 부석입니다. 어느 해에는 부석사의 약수가 뚝 끊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상해서 어른들께 여쭸더니 부석이 있는 곳에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르니 함께 가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갔더니 누군가가 부석이 있는 터에 무덤을 썼던 것입니다. 무덤을 옮겼더니 다시 약수가 솟아났습니다. 저 부석과 이 절은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석사는 도비산(島飛山) 중턱에 있다. 간척이 되기 전까지 서해 바닷물이 이 도비산 아래까지 이르러 차고 밀려나갈 때에는 육중한 산이 마치 움직이고 날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을 터. 어쨌든 도비(島飛)와 부석(浮石)이라는 말이 매우 역동적으로 들렸다.

 부석사는 산사음악회와 한문학당, 템플스테이로도 유명하다. 산사음악회가 열린 지 올해로 16년째나 되었다. “절 마당에 전깃불을 끌어오고 합판을 깔아 시작한 음악회가 이제 지역의 축제가 되었습니다. 지난달 산사음악회에는 이해인 수녀님이 다녀가셨습니다.”

 한문학당은 여름과 겨울에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방학기간에 연다. 템플스테이는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도비산과 천수만 주변의 생태환경을 함께 살펴보면서 이 산빛 물빛의 생명세계가 한 몸이라는 것을 참가자들은 깨닫게 된다. 특히 탐조 체험은 인기가 많다.

 “암컷과 수컷, 어린 개체와 성장한 개체를 다 볼 수 있습니다. 주로 먹이 활동하는 것을 망원경을 통해 보게 됩니다. 새들에게도 각각의 이름이 있고 저마다 모양이 있습니다. 인간 세계와 다를 바 없지만, 참으로 평화로운 교호(交好)의 풍경입니다.”

 주경 스님이 말을 이었다.

 

 

“부석사 템플스테이는 참가하는 분들에게 편안한 휴식과 즐거운 체험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차를 마시면서도 다른 생각을 합니다. 차를 마실 때에는 차만 마셔야 합니다. 그것이 집중입니다. 집중하느냐 못하느냐가 도인과 보통 사람의 차이입니다. 일 잘하는 사람은 집에서는 집의 일을 하고, 회사에서는 회사의 일을 합니다. 마음이 집중하고 고요해지면 듣고 있으면서도 듣지 못하던 것을 듣게 되고,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곳에는 봄이 되면 야생화가 지천입니다. 손톱보다 작은 야생화는 풀숲에 주저앉아야 보입니다. 그럴 때에야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던 것을 비로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경 스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 나서 나는 빈 의자에 좀 더 앉아 있었다. 무연한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나의 마음을 측량할 생각도 버리고서. 쓸쓸한 가을바람과 뒹구는 붉은 낙엽, 흰 바위와 푸른 소나무, 날아가는 새들 속에 묵묵하게 앉아 있었다. 침묵으로 이 모든 움직임을 허락할 뿐이었다. 이 한적함이 고마울 뿐이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머리를 끄덕이며 늘 졸고 있네. / 조는 일 외에 별일이 없어 / 조는 일 외에 별일이 없으니 / 머리를 끄덕이며 늘 졸고 있네.” 이렇게 시를 지은 경허 스님의 한 소식이 해조음처럼 사무쳐왔다.

글=문태준(시인)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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