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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진관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1. 26. 11:51

 

시인과 떠나는 사찰 기행 ② 장석남 시인의 북한산 진관사

[중앙일보] 입력 2012.09.21 03:50 / 수정 2012.09.21 03:50

어머니 태반 속 같은 평화로운 터, 하루라도 묵고 싶다

 

진관사 대웅전 앞마당. 주지 계호스님(오른쪽)이 송이돌솥밥을 푸자, 송이향이 온통 진동을 했다. 절에서 담근 김치며 제피·가구나무 여린순·산초열매 장아찌가 정갈했다. 오른쪽 쟁반은 연근조림(맨 오른쪽)과 도토리전병말이다.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진관사 초행길에 나는 나귀를 이용했었다. 젊고 점잖은 나귀였다. 씰룩거리는 허술한 안장 위에 책보 하나를 얹고는 느리게 무학재를 넘었었다. 500여 년 전이었다. 또 한 번은 가마를 메고 왔었다. 그때는 종이었다. 오늘은 땅 밑에 난 길로 철마를 타고 간다. 녹번을 지나고 불광, 연신내를 지나면서 아름답고 거룩한 이름들이다 생각한다. 불광(佛光)이라….

삼각산진관사(三角山津寬寺)는 서울의 서쪽에 있다.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는 저녁나절 나는 내 그림자를 밟으며 그 절에 당도했다. 내 그림자를 밟으며 걷는 일은 나를 다독이는 것인가? 내 속으로 깊어지는 것인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일러주는 현상인가?

솔 향기가 반겼다. 좀 더 오르자 물소리가 지난 밤의 강수량을 뽐내며 마주한다. 우리나라 모든 명찰을 감싸는 물소리 형제들 중 하나다. 웃음이 절로 난다. 청량하고 거침없는 물소리가 불러낸 웃음이다. 나는 웃음이 나듯 절로 왔구나!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도심의 끈적임과 먼지를 털어낸다. 마음에서 이런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나는 거침없고 싶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이. 이성에 걸리지 않는 사랑같이. 죽음에 걸리지 않는 삶. 뚜벅뚜벅 그러한 걸음걸이이고 싶다.

 

1 응선스님이 장독을 슬쩍 들여다봤다. 올 초 담근 매실고추장이 가을볕에 알싸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2 절을 휘돌아 옥수 같은 물이 흐르는 진관사계곡. 고즈넉한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3 진관사에서 운영하는 찻집 ‘보현다실’. 안마당에 오래된 능소화나무가 세월을 더하고 있었다.
4 진관사 연근조림은 연근을 잘 삶아 무척 부드럽다. 간장·조청에 조려 잣가루를 뿌렸다.

대웅전에 이르는 길에 구수하게 다듬은 판돌을 깔았다. 다듬은 손길의 자국들이 아직 남은 그 판돌에서 나는 이 절의 내력을 생각했다. 고려 때는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한 국찰(國刹)이었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태조가 다섯 번이나 행차하며 거행하던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의 근본 도량으로 되었다는 내력이다.

“조선 태조는 1397년 고려 왕실의 원혼을 위무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59칸의 수륙사(水陸社)를 짓고 수륙재(水陸齋)를 거행하였습니다. 수륙재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餓鬼)들에게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풀어서 이들을 구제하는 불교 의식이죠. 진관사는 982년 자운율사 스님이 수륙재를 복원한 이래로 수륙도량의 명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총무 법해(法海) 스님의 간결한 해설이다. 이 길, 홍제루에서 대웅전으로 향하는 길 위에 왕의 겸손한 걸음을 얹혀 본다.

진관사는 서울을 둘러싼 네 개의 명찰 중 하나라 한다.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 그리고 바로 여기 서편의 진관사다.

서쪽은 소멸의 방향이다. 해가 그쪽으로 지고 또한 달이 그렇게 넘어가니 우리네 죽음도 그쪽으로 가리라 옛날의 우리들은 생각했다. 서방정토라는 이름도 그것에서 나온 것이리라. 모든 소멸은 우리들로 하여금 오래도록 턱을 괴게 만든다. 우리는 소멸의 고통 때문에 땅과 하늘을 번갈아 쳐다보며 긴 숨을 풀어 놓고는 하지 않던가.

주지 계호(戒昊) 스님이 절 마당에서 밥을 푸신다. 마침 사찰음식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무쇠솥에 뜸 들인 밥이다. 밥처럼 서글프고 동시에 기쁜 물건도 없으리라.

“‘식(食)이 약(藥)이다’라는 마음으로 대합니다. 예전부터 절집에서는 밥을 잘하면 복을 많이 모으고 찬을 잘하면 지혜가 길러진다고 보았지요.”

민간에서도 밥을 먹을 때 그 사람의 복을 가늠하고는 했다. 그러나 찬을 만드는 일이 지혜를 기른다는 말씀은 처음이다. 되새기니 일상의 소소한 일이 구도의 한 방편일 수 있겠다. 각 재료의 타고난 맛과 향, 영양까지도 조화롭게 새 질서 안에 위치시키는 일이 찬을 만드는 일인 것이다. 그것은 인(因)과 연(緣)의 시연이기도 하다. 게다가 지극한 사랑과 정성 없이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지혜로운 삶의 자세가 그와 같으리.

나는 원주 응선(應善) 스님을 따라 산사 음식 만들기 프로그램에 어중된 객으로 참여해 보기로 했다. 칼을 들어 썰며 요령을 배운다. 손가락들을 모아 고르게 해야 한다. 불을 알아야 한다. 부치는 일에 불의 크기가 맞지 않으면 이미 실패다. 볶을 때 젓는 주걱의 각도까지도 아는 이와 모르는 이는 다르다. 빚는 일에도 색깔이 맞아야 하며 빚는 손끝의 힘 조절 또한 간단한 일이 아니다. 터지거나 찌그러진다.

그 음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마디마디에 환한 식물성 기쁨이 모여든다. 그런대로 마치고 입에 넣어보기까지 한다. 돼지 창자에 텁텁한 술을 마셔대는 일이 다반사던 이 처량한 입맛에 솔바람 맛이 들어가니 큰 도약(跳躍)이다. 왜 산사에 오는지, 산사의 음식을 입에 넣어보면 마음이 어디로 훌쩍 건너뛰는지 생각해 본다. 나는 한번 제대로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를 기약했다.

기약하고 찬간을 나서는데 들어설 때는 보이지 않던 장독들이 눈이 들어왔다. 그렇다. 마음이 바뀌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는 법. 저녁 어스름을 항아리의 든든한 어깨마다 실었다. 금강 소나무 그림자들이 그 언저리에 어른댄다. 저들의 장맛에는 봄이면 송화 가루도 스밀 것이지만 이 어스름의 소나무 그림자와 솔바람 소리도 스밀 것이다. 그것은 맛보다는 사색에 가까울 것이다.

참배객도 거의 빠져나가고 고적한 저녁이 깔리기 시작할 때 대웅전을 지나 나한전 쪽으로 흘러가본다. 부부일 듯 고요히 앉아 있는 중년의 남녀가 밖에서는 들리지 않도록 독송하고 있다. 앞에는 교복 차림의 아이 사진이 놓여 있다. 무엇을 기원하시는가. 마룻바닥에 맨 발목이 닿아 있다. 갑자기 노을 같은 슬픔이 깔린다.

“이곳은 청학포란(靑鶴抱卵)형의 명당이라 해요. 이 절은 어머니의 태와 같은 데고 빠져나가는 계곡은 탯줄이 이어진 형상이라 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거닐어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긴 금남의 집이지만 시를 쓰신다니 언제 하루 이 아래 보현당에 묵으시고 아침 기운을 느껴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리처드 기어라는 미국 배우도 서울에 왔을 때 둘러보고는 감탄을 하시던데, 좋은 인연터입니다.”

진관사는 비구니 스님들이 사시는 절이다. 세속의 입장에서는 마음의 어머니들이다. 그들이 낳는 자비를 생각하며 하산했다. 하산 직전 나는 법해 스님의 전화번호를 받아 입력했다. 나중에 문자메시지를 한 번 쳐 볼 생각이다. 나는 나로부터 해방된 평화의 태반 속에 하루라도 묵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글=장석남(시인)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장석남 1965년 인천 출생. 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해 미당문학상·김수영문학상·현대문학상·김달진문학상 등 주요 시 문학상을 수상했다. 한양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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