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달 / 나호열
바람이 슬며시 옷자락을 당기듯이 당신을 생각할 때
오래된 구두를 깁고 있는 내 모습이 어른거린다
슬픈 짐승의 가죽 같은 가슴은 피의 더운 색깔을 지워버리고
단단히 동여매었던 이야기는 실밥이 터져버렸다
아직은 걸어야 할 길이 더 남았다는 듯이 내가 깁고 있는 것은
구두가 아니라 구두의 전생
문장이 되지 않는 긴 강을 바라보거나 매듭이 풀리지 않는 바람을
잡아보는 것 그것들이 나에게 기쁨이 되기까지 아니, 잊혀지기까지
얼마나 깊은 뒤안길이 필요했을까
그리하여 가끔 밑창을 뚫고 걸음을 절룩이게 만들었던 구두를 벗어
구두가 껴안았던 못을 경배한다
멀리 간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주 떠나버린 것도 아니었다
생각의 구두점처럼 당신의 발자국은 내 가슴에서 맴돌았던 것이다
낡아서 더 이상 기울 수도 없는 추억은 푸르다
출렁거리는 하늘에 기우뚱 낮달이 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