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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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말걸기 2007

제2부 망월사를 오르다가 비를 만났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2. 6. 11:35

 

제2부

 

망월사를 오르다가 비를 만났다

 

 

 

바람 센 날 / 나호열

 

 

무대 위에 서기도 전에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대본에

그렇게 쓰여 있다

길 없는 길을 걷다가

일층 엘리베이터 앞까지 쓸려온

공수空手

저 낙엽

 

 

 어린 노숙자 / 나호열

 

검은 쓰레기 봉지를 뒤집어쓰고 걸어간다

걸어가는 쓰레기처럼 냄새를 풍기며

사람들 곁을 지나간다

코를 막거나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들 옆을

묵묵히 걸어간다. 짧은 신호등 앞에서 멈추었다가

초록 신호등이 켜지자 다시 걷는 걸 봐서는

그는 아직 정신까지 버리지는 않았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창안을 들여다보다가

키득거리며 손짓하는 제 또래 여학생들을 피해

다시 걷는다

너는 누구냐 지나가는 경찰도 묻지 않는 그

인생이 노숙이라는 것을 너는 아느냐

망막에 눈물을 걸쳐놓으니 너도 참 아름다운 사람

열 다섯 이나 되었을까

제 몸보다 더 큰 가방을 메고

우주 속을 걸어가는 어린 왕자 같구나

낙엽 가득한 쓰레기 포대 속으로 낙엽과 함께 사라지는 너

그런데, 왜 너의 발자국 소리가

내 가슴속에서 쿵쿵거리는 지

나는 알 수 없구나

 

시월의 장미 / 나호열

 

 

고고하다

시월의 장미

시들어 버리지는 않겠다

기다렸다는 듯이

찬 바람을 맞으며

뚝뚝 떨구어내는

선혈

붉음이 사라지고

장미꽃이 남는다

 

내 너를 위하여

담배를 피어주마

야윈 네 가시를 안아주마 

 

   

그 밤나무 / 나호열

 

마음을 두고

몸만 떠나오는 것인데

나는 마음과 몸을

그 곳에 두고 왔다

낮에는 속절없이 솟아오르다

밤이면 몸 움츠려

지하의 불빛을 바라보는 그 나무

한 계절을 영글어도 떫은 밤송이

말 먹이로 밖에 못 쓴다는 밤송이

공연히 내 얼굴이 붉어진다

행여 찔릴까 가시 끝을 분지르고

그대 가슴에 흔적 남길까

내 눈물은 뭉툭하고 떫다

지금도 떨어지고 있냐고 묻는 내게

툭툭

툭툭툭 떨어지고 있다는

그 말

그 눈물

 

 

지옥에서 천국으로 / 나호열

 

 

1층에서 15층으로 이사를 간다

15년을 15층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용케도 견뎌왔다

꼭대기 층에서 내려붓는

세제거품으로 위장한 떗물들

엘리베이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부주의한 발자국 소리들

이제는 더 이상 신경 곤두세울 일 없다

일 없다

더 이상 흙 속으로 파고드는 빗방울 소리와

바퀴 끌리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눈 맞출 일 없다

꿈조차 꾸지 못했던 수직상승의 기쁨이

매일 계속될 것이다

허리 꼿꼿하게 세우고 살았어도

기층민은 서러웠다

아,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 어떻게 하지?

수직으로 상승했다가 수직으로 하강하는

그 허망함은 어떻게 견디어내지?

본의 아니게 깔아뭉갤 14층의 주민에게

미안해 할 일은 과연 없을까?

1층에서 15층 꼭대기로 이사를 간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사를 간다

아니, 아니다

손 뻗치면 우루루 별들이 쏟아져 내리던

동해 바다가 한 눈에 내려 보이던

백복령 고개 위로 이사를 간다

그 길은 아직 구불구불하다

내 마음이 먼저 휘굽어쳐야 용서가 되는

인생의 정점으로 이사를 간다

 

 

그가 서 있다 / 나호열

 

 

군포에서 수원 가는 고속도로에서 비를 만났다

날 뛰는 말처럼 차들은 폭우 속을 뚫고 지나갔다

하이에나 한 마리가 웅크린 채로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온몸에 빗방울이 가시처럼 꽂혀도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성한 생명을 죽음으로 이끌지 않는다

제 풀에 제 몸을 상한 것들,

잘 났다고 으스대다가 앗차한 것들

나는 그것들을 길에서 끌어낼 뿐이다

절대로 먼저 그들을 헤치지 않는다

나의 포식은 오래 기다림 끝에

오랜 굶주림 끝에 온다는 것을 안다

붉고 푸른 눈빛을 번쩍거리며

병들고 약한 것들

어린 것들을 주시하며

밤 깊어가는 고속도로 한 켠에

견인차 한 대

남의 불행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 / 나호열

 

 

잠이나 자자

쿠숀이 무너져 버렸지만 소파는 늘 아름다운 꿈을 준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따라 나는 그곳에 간다

낮이나 밤이나 꿈을 꾸는 것이 미안해서

오늘은 흰 자막 같은 깃발을 높이 세워두련다

멀리서도 그 깃발이 보이게,

내가 여기 살아있다고 손짓을 하고 있어

바람이 필요하겠지

세찬 바람이 깃발을 깃발답게 만들어 주겠지

그 깃발 바라보고 어디서든 길 잃지 말아라

멀리 가지는 말아라

 

소파가 내게 말한다

너는 너무 낡았어

내가 소파에서 말한다

너는 너무 낡았어

같이 낡아버린 소파와 나는

삐거던 소리를 낸다

부둥켜안을 때 나는

뼈와 뼈가 맞닿는

저 아득한 소리

 

매 화 / 나호열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젊어서 보이지 않던 꽃들이

이제서 폭죽처럼 눈에 보인다

향기가 짙어야 꽃이고

자태가 고와야 꽃이었던

그 시절 지나고

꽃이 아니어도

꽃으로 보이는 이 조화는

바람 스치는 인연에도

눈물 고이는 세월이 흘러갔음인가

피는 꽃만 꽃인 줄 알았더니

지는 꽃도 꽃이었으니

두 손 공손히 받쳐 들어

당신의 얼굴인 듯

혼자 마음 붉히는

천지에 꽃이 가득하다

 

 

당신의 생일 / 나호열

         -군자란 꽃 피다

 

 

언제 온다고 말하고 왔던가

언제 간다 말하고 갔던가

뜨거운 눈맞춤도 없이

살겨운 전별도 없이

기별도 없이

언제 가기는 했으며

언제 오기는 했는가

그래도 어김없이 찾아와서

선한 눈망울을 터뜨리는 것은

내가 살아

살아 있기 때문이더냐

몇 모금의 물과 햇빛만으로

두 다리 제대로 펴지 못하고

한 세월을 견디다가

그저 한 번 웃어주기라도 하는 것이냐

 

생일 밥상 차려 주지 못하는 나에게

괜찮아 괜찮아

눈시울만 붉어지는 꽃

 

 

노 을 / 나호열

 

 

한 걸음 내딛어 그대를 바라보고

또 한 걸음 모두어 발 밑에 엎드리는

一步一拜의 하루

燒身供養하는 한 사내

불을 끼얹고 있다

어제도 죽고

오늘도 죽은 그 사내

아직도 남은 죽음이 있어

눈물 흘리는그 사내

제 몸을 두드려 패는 몽둥이에

얼마나 아프냐고 되묻는 사내

그의 몸에서 모래가 쏟아진다

그 마음에서 모래가 쏟아진다

주먹 한 줌의 그 사내

 

 

망월사를 오르다가 비를 만났다 / 나호열

 

 

비를 만났다

혼자 오르는 산길에서 따가운 질책을 들었다

아무리 맞아도 멍이 들지 않는 목소리

무심히 지나치는 일층의 방 열쇠가

아직 내게 남아 있다

그 방의 주인은 이미 자물쇠를 교체했을까

가끔은 열쇠를 열어보고 싶은 그 방

끈질기게 비는 나를 노크한다

밤늦도록 편지를 쓰고

전화를 기다리고

한 번 피고 다시는 피지 않는 난초의 몽우리에

가볍게 내려앉던 먼지들

온갖 풍상을 겪어낸 나무들

오래 전에 흘러간 물의 기억들

비를 만났다

수없이 복제되는 열쇠들

그러나 젖는 것이 두렵지 않다

내가 열쇠를 버리지 않는 한

그 방에는 당신의 첫 편지가 있다

눈 내리는 오후가 남아 있다

그 방에는 늘 푸른 소나무가 있다

 

 

 

모기에게 / 나호열

 

 

따끔거리면 이미 늦은 것이다

그 화살이 어딘가에 꽂히면

한 점도 안 되는 붉은 피는

너에게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너는 아는가

나의 피는 휘발유다

너의 가슴에서 터지고 말

활활 타오르고 말

불덩이다

밤마다 나는 향불을 사르고

기도한다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의 피에 눈물을 섞고 또 섞는다

 

피와 눈물이 섞여

너를 잠재울 달디 단 술은

될 수 없는가

 

 

가시 

 

그 말이 맞다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아프다

내 가슴을 뗴어내어

너의 가슴에 닿는 순간

가시가 되어야 하는 것을

그래서 네가 눈물 흘리는 것을

 

이번에는 네 가슴을 뗴어내어

나에게 다오

씽긋 한 쪽 눈을 감고

나는 웃겠다

그 말이 맞다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기쁘다

 

 

가인歌人 / 나호열

 

 

그의 노래는 바람이었다

뼈가루처럼 하얗게 흩날리는

눈발이었다

한번도 그는 같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현을 짚어내고 튕기는 그의 손은

손에 있지 않았다

그의 손은 가슴 속에서

절벽을 움켜쥐고 있었다

뚝뚝 떨어져 나가는 살점들

봄이 되어도

꽃 피우는 나무들 옆에

그는 살아 있는 듯

죽어 있었다

죽어도 꼿꼿하게 설 수 있다고

아무도 그의 노래를 들은 사람이 없다

 

 

헌화가 獻花歌 / 나호열

 

강물에

편지를 써 보았나

흘러가는

안녕

그 이름

또는

오늘의 무사함

발자국 소리 들리지 않게

혼자 울어 보았나

 

오늘은 내가 먼저

바다에 닿아

하얗게 솟구치는

갈매기를 바라보느니

 

 

촛불을 켜려고 / 나호열

 

 

양초 한 자루 만들려고

오래 기다렸다

잘 익은 노을을 한 스푼 뜨려고

오래 서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쉽게 부서지는 노을은

아주 부드러운 구름으로 감싸 안아야 하기에

마을을 저만큼 지나쳐 가는

구름의 이름을 오래 기억해야 했다

 

목울대를 치고 오르는 울음처럼

새 싹을 닮은 심지는 쉽게 너울댄다

촛불은 어둠을 더욱 어둠답게 만들고

어둠 속에 바라보이는 얼굴을

꽃으로 만든다

 

촛불을 켜야겠다 오늘은

밤이 더 깊어져야 하겠다

촛불 속에서 태어나는 별들

그 아득한 마을에

오래 서성거려야 하겠다

 

 

말의 눈 / 나호열

 

 

말을 보았다

진눈깨비 내리는 밤의 아스팔트길

미끄러운 비탈길을

추억을 만들어 가는 몇 사람을 싣고

어제 걷던 길을

오늘 다시 걷는다

아침에 걷던 길을

저녁에 다시 걷는다

차라리 말은 길을 끌고 간다

초원을 달려야 할 말들이

노역에 바치는 지푸라기의 하루

말의 눈은 검다

말의 눈은 크다

검고 큰,

기쁨에 바치는 노래보다

슬픔의 기슭에 닿는 고통처럼

터벅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가슴을 밟고 지나간다

파랗게 다시 돋아 오르는

새싹들

검고 큰

그 눈

 

 

쉼 터 / 나호열

 

 

여리고 작은 새일수록 위험하다

날개 돋힌 그날부터 하늘은

경외이며 공포

그들의 비상은

지상에 내려앉기 위한 불치의 고통

부러질 듯

바람에 휘는 나뭇가지 위에서

함께 흔들리는 하루

어린이 놀이터 그네에 흔들리며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작은 새들을 본다

그들은 쉬기 위하여 한결같이

가는 나뭇가지를 잔뜩 움켜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