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당신에게 말걸기 2007

제 1부 당신에게 말걸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1. 17. 21:32

 

제 1부 당신에게 말걸기

 

 

 

 

봄, 마곡

 

 

이른 봄 마곡에 가서

마곡의 저녁을 만났다

아직 몽우리조차 움트지 못한 나무들과

칼을 입에 물고 있는 개울물

아직 몸을 곧게 펴지 못한 길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인데

아, 만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목을 매달아야

영혼을 던져야

맑은 솔바람을 내는 종이여

한 번 구비치고

두 번 휘돌아 돌고

끊어질 듯 이어지던

이른 봄 그 작은 신음들

왜 온몸에 소름처럼 돋는 것인지

마곡의 저녁은

왜 눈물 한 방울 만하게

세상을 비추는 것인지

아득하다, 그 봄

 

*春麻谷 秋甲寺라 하였다. 유구에서 새로 뚫린 고속도로 때문에 길을 놓치고 저녁 어스름이 되어서야 마곡에 닿았다. 나이는 연하이지만 늘 존경과 사랑을 보내는 고고학자 김희찬 교수와 불교문화에 조예가 깊은 김용은 박사와 함께 四物을 보았다. 大鐘의 둔중한 울림이 절 아래 마을까지 따라오던 어느 해, 너무 일러 산수유도 왕벚꽃도 보지 못하였던 어느 봄, 그리고 저녁의 기억이다.

 

 

 어느 여배우의 죽음

 

그녀는 이혼녀였다

그녀는 파출부였다

그녀는 바람난 여자였다.

그녀는 우아하게 와인을 마시고

강이 내려다보이는 하우스에서 잠을 잤다

그녀는 버림받았고

그녀는 배반했다

그녀는 재즈를 불렀다

 

그녀 안에 있는 모든 그녀들이

그녀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우울증에 걸린 이혼녀가

우울증에 걸린 파출부를 죽이려고 하고

우울증에 걸린 바람난 여자가

우아하게 와인을 마시는 그녀를 죽이려고 덤벼들었다

우울증에 걸린 배반이

우울증에 걸린 복수를 죽이려 하고

우울증에 걸린 재즈가

우울증에 걸린 그녀의 잠을

그녀의 집을 죽이려고 찾아들었다

그녀는 죽지 않기 위해 모든 그녀들을

우울증을 죽여 버렸다

 

스물 다섯의 젊은 여배우는

우울증에 걸린 이 세상을

몸에 매달았다

우울증이 소문처럼 이 세상을 맴돌았다

 

 

칼에게 묻다

 

옆구리가 터진 치약처럼

지구의 바깥으로 밀려나는 느낌

몸을 누르면 언제나 엉뚱한 곳으로

하혈하는 슬픔이여

그믐밤 표지판 없는 길을 걸어

문득 만나게 되는 새벽

몸의 바깥은 서늘한 물기로 가득하고

얼마나 많은 몽유의 시간은

시펴렇게 물의 칼날을 세웠던가

몸에 베인 마음들 뒷길로 돌아

무디게 날을 부수고 또 부수었는데

이제는 바람이 되어 완강하게

죄 없는 나뭇잎과 꽃잎들을 떨구어 내는 몸이여

더는 갈 수 없는 끝에 닿으면

솜사탕처럼

솜이불처럼

녹거나 풍화될 것인데

슬픔은 아직도 견고하다

뿌리가 깊다

  

 

 7번 국도

 

 

북행,

밀려 내려오는 바람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밀려오는 외로움도 저와 같아서

저절로 눈시울 뜨거워지고 살이 에인다

남하하는 새떼들 묵묵히 하늘가를 스치고 난 후

한 마디 울음소리가 가슴에 서늘할 때

오른쪽 팔목을 잡는 바다

끝끝내 따라온다

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는 공의 바다

옆구리 쪽으로 통증이 기운다

관동팔경의 몇 경을 지나왔나

절벽에서 꽃을 따던 신라 할배

백 보 바다로 나아가 보니

흩뿌리는 눈보라가 저 홀로 마을을 지나고 있다

 

 

약력

 

그리움으로 피었다 지는 꽃

살아온 흔적 중에 빛나는 일만 적으라 하네

높은 지위

남에게 자랑하여 고개 숙일만한 일들을

요약해서 적는 것이 약력이라네

나이 들면서 자꾸 뒷 쪽을 바라보는 것은

덧셈보다 뺄셈에 능숙해지는

바람을 닮아가기 때문이라네

바람이라고 적을 수는 없네

떠돌이였다고 말할 수는 없네

태어난 그 날부터 지금까지

먼지처럼 쌓였다 사라져버린

그 수많은 날들을

나는 축약할 수가 없다

기억나지는 않으나

밥 먹고 잠들었던

잠들었다 부시시 깨어나던 동물의 날들을

나는 버릴 수가 없다

나는 약력을 쓰네

꿈이 꿈인 줄 모르고

꿈속을 헤매다가

꿈속에서 죽어서도

죽은 것인지 조차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 마디로 줄여서 약력을 쓰네

 

 

 산을 오르다

 

산을 오르다 보면 알게 됩니다

가파른 언덕을 만나면 절로 고개 수그려지고

때로는 누구나 땅을 기어야 한다는 것을

높거나 낮거나 산은

땀 흘리며 가는 산은 산이라는 것을

 

산을 오르다 보면 알게 됩니다

날짐승, 들짐승 잡초 한 뿌리, 풀 한 포기도

넓은 품으로 받아주는 산은

정작 자신의 몫은 하나도 없는 산은

산이라는 것을

 

산을 오르다 보면 알게 됩니다

멀리서 잘 보이던 산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모습 보이지 않고

오르막 내리막 그 길이 하나라는 것을

그저 산은 산이라는 것을

 

오늘 그 산은 매화 한 송이 피웠습니다

푸른 쪽물 하늘이 뚝뚝 떨어지는

센 바람 사시사철 불어대는

그 봉우리는 매화나무 한 그루를 키웠습니다

 

향기는 바람에 실어 어느 그윽한 마을의

책 읽는 가난한 선비에게 봄을 알리고

정작 매화꽃에는 향기가 없습니다

종이 제 몸을 때려 울리는 종소리를 끝내 잡지 않듯이

매화는 자신의 향기를 붙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산을 만났습니다

매화를 만났습니다

꿈인 듯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그 너머에 늘 그렇게 서 계십니다

변함없이 서 계십니다

 

 

*경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은사이신 황문수 교수님의 정년 퇴임식 때 올린 시

 

백지

 

백지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백지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뿐이다

 

네가 외로워서 술을 마실 때

 

나는 외로움에 취한다

 

백지에 떨어지는 눈물

 

한 장의 백지에는 백지의 전생이 숨어 있다

 

숲과 짐승들의 발자국

 

눈 내리던 하늘과 건너지 못하는

 

강이 흐른다

 

네가 외로워하는 것은 그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만

 

네 옆에 내가 갈 수 없음이 외로움이다

 

그러므로 나는 숲에다 편지를 쓴다

 

길에다 하염없는 발자국에다 편지를 쓴다

 

백지에는 아무 것도 없다

 

눈만 내려 쌓인다

 

 

눈부신 햇살

 

아침에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눈뜨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해맑은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아무도 오지 않은

 

아무도 가지 않은

 

새벽길을 걸어가며

 

꽃송이로 떨어지는

 

햇살을 가슴에 담는 일이 행복이다

 

 

 

가슴에 담긴 것들 모두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마음 아팠던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 행복이다

 

 

 

숲에서 기적소리를 들었다 / 나호열

 

발자국 소리가 행여 덫이 될까봐

가만가만 천천히

신호등도 없고

기억해야 할 번지도 없는

모든 목숨들의 보금자리

숲은 점점 겨울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먹고 먹히어도 슬픔이 없고

죽어도 장례식이 없는

서로의 집이며 무덤인 이 숲은

살면 죽어야 한다는 더딘 약속을

하나씩 보여주고 있다

새로이 태어나는 들꽃의 발자락에

어제의 나뭇잎은 썩어가고

내일을 향해 가는 열매는

단단한 눈물로 맺혀 있는 곳

혼자 걷기에는 정적이 무서워

징검다리 건너듯 둘이 걸어야

숲은 조금씩 길을 내 준다

흐린 하늘이 빠진 냇물 속으로 오래

고개 숙인 오리들과

그 누구의 억센 손아귀도 마다한 채

사라지는 냇물

너무 오래 살아 등피 벗겨진 참나무와

참나무가 키우는 청설모와

거룩한 가을의 소멸을 향해 합장한

갈대 무리와

그 모든 것들이 소리를 낸다

발걸음을 멈추어도

우리는 자꾸 어디론가 떠나고 있는 것 같아

오랫동안 포옹을 풀지 않았다

숲은 다시 한 번 기적을 길게 울리고

그럴수록 맞잡은 영혼은

사슬처럼 단단히 묶여졌다

 

 

공에 대한 질문 / 나호열

 

하나 나가고

둘 나가고

셋 나가고

나하고 같이 늙어

맞먹는 개하고

둘이 남아

햇볕 쪼이고 있다

식탁의 빈 밥그릇

뭐 떨어지는 게 없나

쪼그리고 앉은 개

방금 어느 분이 공을

말씀 하셨단다

하니

그 말을 알아듣고

바람 빠진 공을 입에 물고

돌아온다

아이고, 이 귀여운 개야 하고

말을 하니

그 사람이 들여다보라고 한

내 마음 사막 저 편에서

푸른 멍 대신 멍멍멍 소리가

멈추지 않는 기침으로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운 옛집

 

나는

나의 옛집이다

 

이른

봄 나무

얼굴에

꽃 피지 않고

잎 올리지 않고

펄럭이는 그것

 

견인이동통지서

 

나를 끌고 가겠다는 그를

기다리고 있다

오십 년 째

 

 

추운 봄밤

 

 

높은 나뭇가지 위의 가계가 위태롭다

고개 수그려야 보이는 지상의 먹이

수직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보다

하강은 괴롭다

바람은 늘 나를 먼 곳으로 떨구어 놓기에

 

이불을 끌어당기니

이불이 내 몸보다 더 춥다

 

 

당신에게 말 걸기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곷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은

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세상이 싫어 산에 든 사람에게 산이 가르친다

떠들고 싶으면 떠들어라

힘쓰고 싶으면 힘을 써라

길을 내고 싶으면 길을 내고

무덤을 짓고 싶으면 무덤을 지어라

산에 들면

아무도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 않는다

제 풀에 겨워 넘어진 나무는

썩어도 악취를 풍기지 않는다

서로 먹고 먹히면서

섣부른 한숨이나 비명은 들리지 않는다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바람의 문법

물은 솟구치지 않고 내려가면서

세상을 배우지 않느냐

산의 경전을 다 읽으려면

눈이 먼다

천 만 근이 넘는 침묵은

새털 보다 가볍다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죽어서 내게로 오라

 

 

헌츠빌 가는 길

 

나는 기억한다네

지금껏 지나왔던 길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

눈감고도 훤히

바라볼 수 있다네

지금껏 지나왔던 길이

내 몸을 묶었던 오랏줄이었다면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부드럽게 풀려나가는 실타래 같을 것이네

더 멀리 가보려고 발버둥치는

더 빨리 닿으려고 마음 졸이던

그곳은 어디에도 없다네

오르막이면 어떻고 내리막이면 서운할텐가

가는 길은 있어도 오는 길이 없는데

애써 표지판은 기억하지 말게

이미 헌츠빌을 지났나? 그렇게 물었지

그대의 마음은 오른쪽으로 휘어도는데

그걸 놓칠까봐 두려웠었지

길은 바람이고 강이야

굴뚝이고 구름이야

그것들이 내 마음 속에서 살아 숨쉬는 한

저녁 식탁에서 내가 좋아하는

그대가 끓여주는 맛있는 스프를 먹을 수 있어

나는 오늘도 그곳으로 가고 있어

길이 헝클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걷고 있어

그대도 촛불이 되어 사뿐히 걷고 있나?

 

 

나는 전생에 나무였다

 

 

우뚝 서 보기로 했다

등대처럼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적빈의 손이라도 흔들고 싶었다

그러나 등대의 다른 이름이

바람인 것을 나는 몰랐다

똑바로 서 있었는데

등이 휘었고

해를 바라보다

눈이 멀었다

이제는 마음이 가기 전에 먼저 몸이

절벽 쪽으로 다가서고 있다

참고 있는 눈물은

그 무엇도 태울 수 없고

악착같이 뿌리는 질기게

눈 먼 희망을 뿜어 올리고 있다

발광은 붉다

도난방지의 경고음이

온 몸 구석구석에 자물쇠를 채운다

평생, 나무는 불임의 꿈을

제 몸에 매장한다

 

 

내 속에는 나무가 살고 있다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문득 내 앞에 가로막아 서는

저 거대한 침묵이

마지막으로 내가 마주할 외로움이라면

두 팔로도 껴안을 수 없고

고개 들어도 아득한 그런 외로움이라면

차라리 사랑하기로 했다

 

 

네 앞에 서면 말을 배운 것이 부끄러워진다

천천히 늘어뜨리는 향내나는 치맛자락처럼

그림자 하나가 마당을 덮고

담장 무너뜨리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높은 산을 넘어간다

 

 

너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너는 소리내지 않고 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너는 우주의 중심이 어딘지 내게 알려주었다

 

이렇게 멀리 서서야 온전히

너를 바라보며

사랑할 수 있다니!

 

 

 

 

 

 

 

 

 

 

 

 

 

 

 

먼 여행

 

 

북국北國의 해는 짧다

힘겹게 붙잡고 있는 길이

진통제의 느슨한 풀림처럼

고통 속으로 녹아드는 오후

세월을 이길 수는 없어도

참아낼 수는 있는 것

어제는 밤새 모닥불의 환영을 보았고

새벽에는 폭포에서 쏟아져 내리는

새들의 날갯짓을 들었다

눈 덮힌 숲으로 휘어들다가

길은 어느덧 저만큼 하늘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고 있다

아직 저 하늘은

좀 더 내가 바라보아야 할 희망

오늘은 이만 여기서 무릎을 꿇는다

내일도 북국北國의 새벽은

차고 시릴 것인가

 

 

 

 

 

 

 

 

 

 

 

 

 

 

 

 

 

 

 

 

 

엘리베이터

 

 

또 누군가 무겁게 영혼을 들어 올리고 있나보다

마그마가 들끓는 소리

깊은 밤을 헤매며 산 하나에 가득 차는 발자국소리

북의 살을 찢으며 흘러나오는 공허의 하얀 피

일층과 십 오층 사이

무덤과 천국의 그 사이

마치 내 목에 걸린 올가미

상승과 추락의 오르가즘을

누가 조종하고 있는가

이 도시가 키우고 있는 그 짐승이

이제는 내 머리를 밟고 지나간다

그 짐승은 울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짐승은 육식성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무정란의 생각을 낳는다

밤이면 나는 피가 당긴다

 

 

 

 

 

 

 

 

 

 

 

 

 

 

 

 

 

 

 

 

 

 

 

前 生

 

 

입 다물고 있어

한때는 무엇이었을 쓰레기들

비닐봉지에 몸을 섞는다

3인용 소파 하나 비닐봉지 옆에

내버려져 있다

한때는 나도 등나무였던 시절이 있었다

꽃도 피우고 잎도 돋고

바로 서지는 못해도 뜨겁게 사랑할 줄 알았다

너도 버려졌구나

화적떼처럼 달려드는 바람을 어쩌지 못하고

은행잎들 무수히 소파에 내려앉는다

아무도 그들이 떠난 곳을 묻지 않는다

모든 쓰레기는 전생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