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당신에게 말걸기 2007

제3부가까이 앉아서 이야기 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2. 9. 10:19

 

 

제3부

가까이 앉아서 이야기 하다

 

 

 

 

 

 

 

꽃이 늙다니!

그런 일이

조화 속에 말없이

숨죽이고 있다니!

 

발자국

 

 

 

마현에서 분원리로 건너오는 불빛이

흩날리는 꽃잎처럼 서러울 때

걸음을 멈추어 선 강물

얼어붙은 가슴 위로

흩뿌리는 눈은 쌓이고 또 쌓였다

살얼음이었을까

가만가만 다가가지 못하는 저 너머로

이번에는 분원리에서 마현으로 넘어가는 불빛이

그예 눈물을 참지 못하고

발자국 몇 개 서성거리며 되돌아왔다

말뚝을 박아도

넓게 넓게 그물을 던져놓아도

뒤돌아보지 않고 흘러가 버릴 것들은

그만하구나

오늘은 깊은 울음 내려앉는 듯

순결했던 그 눈도

작은 발자국들도 함께 몸을 섞어

풀린 강물에

갈대들만 무성하게 투신하고 있구나

갈대답구나

 

 

홀로인 것들

 

 

숲을 빠져나와

혼자 서 있는 소나무

어스름 하늘에

반짝이는 샛별

정류장에 혼자

오래 서 있는 사람

밤늦도록

혼자 껌벅이고 있는 네온사인

 

그저 만리 밖을 향하여

흐르는 물에

나는 닳도록

손을 씻는다

 

 

뒷모습

 

 생명의 중심을 향하여 파고드는

가시가 있다

숨 쉴 때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다가서는 그림자

가시를 꺼내기 위하여

한 생애를 헤집을 수는 없겠지

묵묵히 가라

너는 뒷모습이 아름다우니

밖으로 가시를 돋게 하지 마라

충혈 된 눈으로

등대는 밤바다를 지키다가

가끔은 안개에 울음을 섞기도 하더라

누군가 네 뒤를 좇고 있구나

묵묵히 가라

 

 

의자

 

 

의자를 보면 슬프다

애써 고통을 참아내는저 자세

생 마리 성당

돌바닥에 무릎 꿇고

고개 숙인 채

오래 기도하던,

초승달 아니면 그믐달처럼

휘인

오랜 시간 혼자 있어 외롭고

또 하나의 외로움으로 내가 얹히면

그 무게로 더욱 외로운 의자

나도 기도를 배우고 싶다

그 전에 나는 얼마나 많은

하루살이 꽃들의 이름을 외워야 하나

아무도 앉지 않아도 의자는 무너져 가고

바람이 지나가도 의자는 무너진다

숲으로 건너가는 네 발 짐승의 꼬리처럼

여름 해는 얼마나 긴 그림자를

채찍으로 휘두르나

의자는 딱딱하다

딱딱할수록 나는 경건해진다

 

 

공산성公山城에서

 

평생을 땅 파는 일에 투신한 고고학자와 공산성에 오른다

멀리 내다보는 일이 꼭 앞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와 굽을 등을 바라볼 때 파묻힌 것들의 숨결을 듣는

수없이 많았던 그의 屈身을 생각한다

감나무에 매달린 감들이 익을 대로 익어 툭툭 눈물 떨어지던

초겨울 오후에 공산성 꼭대기에 올라 그대를 바라본다

높은 곳에 오르면 더 잘 보일 것 같아서 까치발을 들었지만,

높은 곳에 올라야 그대가 잘 보인다는 말은 거짓이다

고고학자의 꿈은 될 수 있으면 땅을 파헤치지 않는 것이라고

그가 말한다 문득, 그가 몇 백 년 전의 비바람이 묻은 기와조각을

다시 풀섶에 내려놓듯이

내 가슴에 깊이 그대를 내려놓을 때, 그대가 내 눈에 창으로

다가선다

익을 대로 익어 툭툭 떨어지는  햇살이 아름답던 초겨울 오후

 

 

 

*2002년 11월 말, 공주로 역사탐방을 갓다. 고고학자 김희찬 교수(경희대학교)의 안내로 사학자, 불교미술연구가, 국문학자, 시인 등 28명의 탐방객들은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공산성을 시작으로 무령왕릉, 공주박물관, 계룡산 갑사를거쳤다. 공산성은 백제가 한성을 고구려에게 뺴앗기고, 어쩔 수 없이 남하하여 천도한 후 약 60 여 년 간 수도로 삼았

던 곳이다. 금강은 공산성을 지키는 垓字(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성둘레를 감싸는 장애물)의 역할을 했다던가, 날은 청명했지만 마음은 우울한 날이었다.

 

 

 그 신호등은 나를 서게 한다

 

산으로 들어서는 그 길목에 신호등이 생겼다

파란 불이 들어와도 건너가는 이 없고

붉은 불이 들어와도 멈춰서는 이 없는

신호등은 저 혼자 붉어졌다, 노래졌다 파래진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파란 신호등이 들어와도 서고

붉은 신호등이 와도 멈추어 선다

어느 날은 울컥 쏟아지는 눈물 같은

바람이 저 혼자 달려가고

요즈음은 산에서 날려 보낸 낙엽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가다

제풀에 주저앉기도 한다

내 앞을 지나가는 저 무상한 것들

손길 한 번 주지 않고 휘적거리는 저 것들

정작 내가 힘주어 브레이크를 밟는 것은

멈추어 서야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멀리 돌아와

내 가슴에 호수로 고이는

그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冬  柏

 

찬 서리 기운을 받아야 붉어진다지

남들과는 한 자리에 어울리기 싫어한다지

한꺼번에 무너지고 만다지

어디 그것이 남의 마음이던가

한 밤을 새워

못내 부끄러워 눈 들어보니

아, 저기

수평선 저 너머에 작은

점점 커지는 불덩이가

동백 꽃 봉오리가

푸른 꽃대에 받쳐져 올라오더니

울컥울컥 붉어지더니

수 만 송이의 동백꽃으로 찬란히

떨어지더니

해 뜨지 않은 곳 그 어디에 있으랴

 

 *추암은 강원도 삼척시 바닷가에 솟아 있는 바위이다.

 

 

휴지, 그 넋두리

 

목을 치고 오르는 울음을 뱉으려고

휴지를 뽑으려다

얄팍해진 마음 한 장이 먼저

튀어 나온다

고운 향기

그러나 불에 약한 그대 마음에

더러운 이 눈물을 훔칠 수는 없지

휴지통엔

날 것으로 버린 한숨

통째로 뜯어버린 영혼이

가득하다

아침이 오면 휴지통 같은 나를 끌고

황량한 먼 도시로 떠나야 하는데

길이 미끌미끌하다

마음이 꾸불꾸불하다

 

 

목소리

 

전화기,

무량한 생각의 틈에서 귀뚜라미가 운다

뚝뚝뚝 비 소리

눈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풀들이

꽃 대신 저울음을 키웠구나

운다 라고 말했지만

쓸쓸쓸 풀섶에 기대어 꾸역꾸역 토해내는

갈 가을 가아을

내 마음에 걸어놓은 고운 사진 한 장이

붉게 물들어

온 산을 불태우고 혼자 걸어가는 저 소리

길게 기일게 목이 메이는

전화기

 

너의 눈, 8월

 

너의 눈

그 노을 속으로

노을의 소멸 속으로

맨 발과

맨 몸으로

걷다가 무릎 꺾는다

지리산 노고단

천 오백 미터 그 가슴에

사람과 사람의

마을과 마을을 벗어날 때

길다워진다

찬 이슬 내리고

비바람이 왔다가 가는

팔월이 있다

원추리 노랗게

노랗게 흔들리다

팔월이 가기 전에 몸을 사룬다

너의 눈

그 속에 가득했던 향기는

 

 

바람 소리

 

온 몸과 온 마음으로 통과해야만

분쇄기의 낮은 구멍으로 세월의 흔적이 드러난다

외로움을 배우고 외로움이 지나가고

그리움이 오고 시장기가 지나가고

뼈로 우뚝 선 이정표를 바라보는

눈이 밝아진다

읽거나 듣거나 외국어는 어렵다

아무래도 나는 풀밭 가까이에

낮은 의자에 앉아

푸르게 돋아 오르는 잔디의 귀와

그 풀섶에 숨어 있는 토끼풀을 바라보다

덮는다, 서문도 읽기 전에 두꺼운 책은 삭아간다

겉가죽부터 피의 냄새가 사그러 들고 있다

 

 

 

눈부셨던, 침묵했던

 

 

꽃이 꽃으로 완성되는

순간을 나는 보았다

무릎 꿇고

당신이 기도할 때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았다

당신이 사라지고

당신이 보였다

 

 

나비의 꿈

 

 

연못 속에 발을 담구고 있다가

제 얼굴 들여다 보고 있다가

날개를 활짝 펴 날아가려는데

슬며시 얼어붙은 수면은

발목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렇게 몸만 두고 떠나온

꿈이 꽃으로 남는다

 

 

*부용정: 창덕궁 후원에 있는 정자

 

 

그 섬

 

변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길을 배워야 한다

인생이 귀찮으면 그저 앞으로 나아가라

문득, 깨끗이 다려진 식탁보처럼

하늘이 그윽하게 맑다

그 섬은 그 별이다

몇 등급으로 빛나는 소멸인지 그것은

後生에게 물어볼 일

가을을 예감하는 나뭇잎들이 수런거린다

빨리 죽여줘

몇 시간째 나무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더러워진 식탁보를 갈아야겠다

머그 잔, 가슴이 얇은 접시

이미 식어버린 차, 말라버린 레몬의 향

잠시 햇살이, 검은 햇살이 꿈틀거린다

자동세탁기 속에 들어가기 전에 바다는

먼지들을 떨구어낸다 눈물처럼,

눈물은 입을 막은 채 웃는 침묵 같다

새벽에 참회가, 탈수기가 굵은 빗방울을

간헐적으로 떨군다

쓰레기차는 어디서나 예의가 없다

날이 밝기도 전에 뒷문에 엉덩이를 디민다

나는 나의 뒷문을 본다

나갈 수는 있어도 되돌아 올 수 없는 저 문

생각을 닦아낸 휴지처럼

더러워진 새의 깃털이 저기 떨어져 있다

 

 

 

인디고 Indigo 책방

 

요크데일, 인디고 책방 2층 창가에 앉아 있다

저 멀리 윌슨 역에 서성거리는 그림자들 조합되지 않은 기호

들 같다

401 익스프레스웨이와 다운타운으로 들어가는 길

나는 고개를 돌려 길을 되짚어야 한다

길을 되짚으려면 시선은 가지런한 서가에 아프게 가 닿는다

저 미지의, 뚜껑을 열기 전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책들

제목이 먼저 와 닿거나

표지가 예뻐 손이 먼저 가거나

선택되기 위해서 직립한 책들을 보면 공연히 가슴이 시리다

너무 쉽게 읽어버린 책들

너무 어려워 팽개쳐버린 책들

그 책들을 바라보면서 그를 생각한다

얼마나 두꺼운 내용을 읽어내고

우리는 이승을 마감하는 것일까

나는 사랑이란 이미 씌어진 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표지만 있을 뿐 목차도 서문도 스스로 써내려가야 할

속이 빈 책이 어디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물끄러미 서가를 바라본다

내가 찾는 책은 제목도 저자도 없는 책이다

책을 바라보면 그가 바라보인다

그는 커피를 마신다, 크림을 많이 넣고

설탕을 거의 넣지 않는 나는 그가 마시는 설탕 두 개에

크림을 넣지 않은 그의 커피 맛을 생각한다

이윽고 나는 이층 계단을 걸어 내려온다

나는 그의 책이다 그의 책이 되기 위하여 나는 좌회전 깜박이

를 켠다

그는 401 위스트를 타고 떠났고

간르은 비가 그의 목소리를 재생시키고 있다

인디고의 붉은 불빛이 동백꽃 같다고 그는 생각할 것이다

 

 

모든 자물쇠는 숨통을 가지고 있다

 

 

삽날조차 허락하지 않는 동토

그 얼음 속에서

파랗게 숨대롱을 밀어 올리는

새싹들을 보면

아무리 굳게 닫힌 절망의 문에도

열쇠가 있을 것 같다

가두어 두어야 할

숨겨놓아야 할 것이 많음이

어찌 부끄러움이 아니랴

날카롭게 부딪치는 육중한 열쇠꾸러미

가쁘게 뛰어갈수록 요란해지는

물음표와 같은 저것들을

죄다 버리고만 싶구나

어디에 있느냐

이 한 몸 열쇠가 되어

문을 열면 아! 거기

푸르게 펼쳐진 초원으로 달려올

그 사람은

 

 

제비꽃이 보고 싶다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들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보았다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떠들었다

듣지 않는 귀

보지 않는 눈

말하지 않는 혀

그래도 봄바람은 분다

그래도 제비꽃은 돋아 오른다

뜯어내도 송두리째

뿌리까지 들어내도

가슴에는 제비꽃이 한창이다

 

 

길은 저 혼자 깊어간다

 

직선으로 달리는 길이 뚫리고

길눈 어두운 사람만이 그 길을 간다

어깨가 좁고

급하게 꺾어들다가

숨차게 기어 올라가야 하는 그 길은

추억같다

쉴 사람이 없어 폐쇄된 휴게소

입구의 나무 의자는 스스로 다리를 꺾고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들이 길을 메운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참을성 있게 그길은 저 혼자 깊어져 간다

저 혼자 적막을 채우고

그 길은 이윽고 강이 된다

그 길을 가 보고 싶다

사랑이란 어깨를 부딪치며 피어나는

이름 모를 풀꽃

굴곡진 길을 돌고 돌아야 얼굴 보여주는

수틀에 얹혀진 안개

멀리 멀리 돌아서 보면

직선으로 달려갔던 그 길도

알맞게 휘어 도는 것을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그 길을

오래 터벅거리며

걸어가고 싶다

노래 부르고 싶다

 

 

 

 

귀소歸巢

-鳳停寺

 

바람에게 길을 묻는 일이나

바람의 얼굴을 보려고 헤매는 일이

온몸을 앞으로 내밀어 넘어질 듯한

저 오랜 소나무의 몸짓만큼 쓸쓸 하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잔가지들을

허공을 움켜쥐기 위하여 뻗었던 것은 아닐까

極樂보다 大雄보다

더 극락 같은, 더 대웅 같은 소나무 아래서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이 한 없이 맑은 적요 속에서

나는 눈물로 흐드러진 꽃잎을 건네주고 싶다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넘어가던 새가

파르르릴리 파르르리리 그 울음만

때 아닌 낙엽처럼 발자국으로 떨어지는 것

바람은 저만큼 가고 풍경소리만 뒷모습이 그윽하다고

그립고 그리워서 또 그리운 그대에게

나 지금 일주문 앞에 서 있다고

그대 앞에 서 있다고

 

*봉정사 : 경북 안동 서후면 천등산 자락의 신라 고찰, 영화<달마가 동쪽으로 간 뜻은?><동승> 촬영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문하기도 했다. http://www.bongjeongsa.org

 

 

 

春  香

 

목울대를 차고 오르는

이 초록빛 눈물을 어쩔 수 없다

말의 독이 가득 퍼진

침묵은 평생 읽어야할 편지

햇살처럼 새 한 마리

높은 산을 넘어 간다

 

 

Guest Room GS3

 

누군가 머물다 간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열쇠를 비틀면 딱딱한 빵 같은 풍경 속에

나그네는 잠겨버린다

그 누군가의 흔적은

새로운 나그네가 도착하기 전에

완벽하게 닦여져 나갔을 것이다

이 방은 많은 상처를 안고 있다

걸레질에 밀려나간 사람의 냄새

소독 알콜처럼 빛나는 조명등이 서늘하다

이 방은 완벽한 여행자를 원했다

수건 하나 조차 걸려 있지 않은 옷걸이

검은 비닐로 싸인 휴지통은 하품하듯 비어 있다

이 방은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다

여행자들은 15개 항목의

Guest Suite Policies를 읽는다

떠날 때 보증금을 깎이지 않기 위해서

모든 손길이 조심스럽다

나는 이 밤

이 방의 손을 찾고 있다

그래도 따뜻한 손은 있을 것 같아서

손 잡고 잠들고 싶어서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