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당신에게 말걸기 2007

제4부 또 다시 숲에 와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2. 14. 10:01

 제4부

또 다시 숲에 와서

 

 

꽃, 사랑꽃들

 

 

   잎사귀는 네잎 클로버, 꽃은 패랭이꽃을 닮았다.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국화도 아니고 매운 바람 맞서는 매화는 더더욱 아니고, 뒤에 숨긴 꽃말은 아예 없다. 사랑꽃 이라니, 곰곰하고 궁금하다

   물이 있으면, 햇살이 있으면 그저 얼굴 내밀었다가 저녁이면 고개 수그리는, 저게 무슨 사랑 꽃이야!

   푼수 같은, 질 줄 모르고 그저 피기만 하는 몸짓들을 바라보면, 향기 없는 것이... 밥 먹고, 잠자고, 일어나서 일하는 것들이 죄다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 미련한 저 짓이 수고스러워 보여

이제는 잎 지고 꽃도 떨어지라고 겨우 내내 찬 바람 부는 베란다에 내다 두었다.

 

   아, 천지에 가득한 저 꽃,

   세상 어둡고 매서워

   이제는 영영 사라져버린 줄 알았는데,

   동토를 비집고 나오는 저 푸른 손

   발그스름 펼쳐 보이는 저 얼굴

   세상의 즐거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기, 겨울이  

 

 

 

잘 있지요?

 

말없음표처럼 기러기 떼가

 

하늘에 빗장을 지르고 있다

 

잘 있지요?

 

 

 

 

 

 

 

 

매일 나는 사라진다

길 위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도 없이

지워진다

가끔은 내가 보고 싶을 때

우체통 앞에 서 있는 나를

어제의 책상에 엎드려

편지를 쓰고 있는 나를

호명하고 싶을 때

길은 강으로 흐르고

누군가를 향해 떠내려가고 있다고 생각될 때

나는 숲에 닿는다

저 수많은 나무들

봄이 오는데도 지난 가을의 이파리를

떼어내지 못하는

곧바로 허리 펴지 못하고 굴신하는

성급히 옷 벗어던졌다가

꽃샘추위에 얼어붙어 있는

저 수많은 나는

문득 그대가 바라보는 창가에 가득한

숲이 되기 위하여

이곳에서 사라져

새벽이 오기 전까지 바다를 건넌다

광야를 달린다

사람이 사는 땅이라는

그곳을 향하여

 

 

 

구부림에 대하여

 

  

이제 그만 걸으라고

이제 그만 무릎 꿇으라고

관절통이 왔다

씨앗을 가득 품고

하염없이 바람을 기다리다

제 발 밑에 눈물을 떨구고 마는

풀꽃들이 그것 봐 그것 봐

까르르 웃는다

꼿꼿함의 불편함

구부리지 못하면 한 걸음 내딛는 일

이리 힘든 것을

나는 걷고 싶다

나는 무릎 꿇고 싶다

 

 

 

 

 

혼자만의 식사

 

   

사람들 빠져나간 자리에

갯벌 위에 내려 앉는다 조용히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철새처럼

밥을 먹는다

초원 식당에서 정좌한 채로

도를 닦는다

영양을 좇던 하이에나들이 빙 둘러 서서

주둥이에 피를 묻힌 채로 식사를 즐기는 모습이

저 푸른 초원 위에 펼쳐지고

풀들은 조금씩 사라지고 풀을 뜯는 소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풀밭에 눕는다

음식이면서

침대이면서

화장실인 저 초원의 풍경을

꾸역꾸역 입 안으로 가져간다

그리움이 씹히고

울음을 삼킨다

2인분의 식사를 혼자 시킨다

 

 

 

 

 

먼 훗날

 

 

이 세상의 모든 슬픈 이야기가

이 세상의 외로움 사람들이 다

내 속에 있는 것 같다

앞으로 달려가는 줄 알았는데

한걸음씩 뒷걸음 쳐 온

세월의 그림자

숲은 적막하다

당신이 창가에 서 있을 때

직진 차선을 놓치고 좌회전 차선에

깜박이를 켜고 서러워 할 때

당신의 마음 속을 걸어 나온 발자국들은

숲으로 숨어 들었다

공연히 죄스럽거나 서러울 때

어깨 기대어주지 못하고

손 잡아주지 못한 서러움으로

나무들은 키를 세우고

속으로 속으로 운다

나이테는 정확히 심장을 겨누고

우표가 되지못한 나뭇잎들만

세상을 어지럽힌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당신 뒤의 숲

조금씩 울울해지는 숲이

먼 훗날

당신이 문득 뒤돌아볼 때 까지

숨 죽이고 있다

벌 서고 있다

 

 

 

 

 빨 래

 

  

제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아무 것도 태우지 않으면서

타오르는 노을을 봐

잎이란 잎 다 버리고

의연하게 버티어 서는

나무들을 봐

때를 지우고

얼룩을 빼는

저 거룩한 가을날의

빨래질

 

 

 

 

 

 

사랑한다

 

 

 

누가 처음 그 말을 가르쳐 주었을까

나는 누구에게 그 말을 처음으로 전해 주었을까

어둡고 습기 찬 곳으로

무릎을 꺾고 허리를 구부려야 보이는

낮은 사람들 사이에

한 알의 씨앗을 소중히 심듯이

그날에, 눈물은 한없이 맑아져 갔던가

누가 처음 그 말을 가르쳐 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구에게 처음으로 그 말을 전해 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회오리바람 몰아치는 높은 나무 가지

둥지를 남겨두고 떠나버린 새는

어디에 있는지

바람에 귀를 씻고

침묵으로 눈을 닫는다

 

 

 

 

 

 

 

 

 

또 다시 숲에 와서

  

 

숲에 오면 나는

공연히 눈물이 나는 것이다

주소가 없어

부쳐지지 못한 한 뭉치 소포처럼

웅크린 저 소나무가

낯익다

여기 꼼짝하지 말고 있어

날은 어두워지는데

총총걸음으로 사라져버린

엄마를 기다리다

혼자 어른이 되어 버린

나는 소나무와 함께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다

스러지지 않으려고

바람에 맞서 뼈마디 굵어진 일이나

동구 밖으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한 채

짧은 여름 키 세운 기다림의 저 눈길이

못내 그리운 것이다

나이는?

이름은?

우리는 아무에게도 접속되지 않은 채

그렇게 눈시울만 붉게

서로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고백

 

 

걸어가면서도 그는 죽어 있었다

살아 숨 쉬면서도 죽어 있었고

잠들어 있어도 죽어 있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였지만

별을 바라볼 때만 그는 살아 있다

너무 멀어 손길만 길어지는

편지를 쓸 때만 그는 살아 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홀연히 나타나는 그리움과 맞설 때

그 그리움이 그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는 백 년을 죽고

하루를 산다

 

 

 

 

 

 

얼굴

- 봉감 모전 오층 석탑

 

 

   아무도 호명하지 않았다. 까마득하게 오래 전부터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를 맑은 물가에 나아가 홀로 얼굴을 비춰보거나, 발목을 담궈 보다가 그 길 마저 부끄러워 얼른 바람에 지워버리는 나는 기댈 곳이 없다. 그림자를 길게 뻗어 강 건너 숲의 가슴에 닿아보아도 나무들의 노래를 배울 수가 없다

  나에게로 가는 길이 점점 멀어진다. 떨어질 낙엽 대신 굳은 마음의 균열이 노을을 받아들인다. 늘 그대 곁에 서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깨에 기댄 그대 때문에 잠깐 현기증이

일고 시간의 열매인 얼굴은 나그네만이 알아본다. 흙바람을 맞으며 길을 버린 그대가 하염없이 작다.

 

 *봉감 모전 오층 석탑: 경북 영양군 입압면 산해리 봉감마을 밭 가운데 서 있는 模塼 탑이다. 모전 탑이란 벽돌처럼 돌을 쌓아올린 탑으로 목조탑의 형식에서 석탑으로 이행되어가는 중간 과정으로,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밭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은 다른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높이 약 11미터, 산해리로 가는 2번 국도에서 약 1킬로미터를 승용차나 도보로 걸어가야 한다.

 

 

 

 

 가을 음악회

 

 

   열 네 살인가 다섯인가 그 때 부터 시작된 가을이 여태 계속 되고 있어요

   집은 불타고 말없이 종적 감추신 아버지 아직도 소식 주시지 않고

   그 해 가을 학교 강당에서는 음악회가 열렸어요

   브라스밴드가 경쾌한 페르시안 마켓을 연주할 때

   맨 뒷자리 높은 곳에서 큰 북을 둥둥 울렸던 것이 바로 나였어요

   가보지 않은 페르시아의 시장과 이국인들의 활기찬 발걸음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하듯이

   가볍게 햇살을 퉁겨내듯이

   한 손으로 북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마지막 장단을 골라내었을 때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를 내는 것 이었어요

   그 다음 차례는 독창이었는데 그 연주자도 바로 나 였어요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띨까 다시 걸어도 되 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불 타 버린 우리 집,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다시는 그 집에 갈 수 없어

   평생을 마음속에서 서성거린 그 집 앞을

   왜 나의 목소리는 그렇게 슬퍼질 수밖에 없었는지요

   아까보다 더 큰 환호는 왜 스산한 귀뚜라미 울음으로 내게들려 왔는지요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형제들과 함께 즐겁게 언덕길을 내려갔는데요

   지금까지 그렇게 큰 무대에 서 본 적도 없었는데요

   우리 엄마는요 그 시간에 술시중 드는 주모였는데요

   젓가락 두드리며 창가 부르는 색시들 닥달하는 주모였는데요

   지금도 그 가을 밤은 끝나지 않고 페르시안 마켓과 그 집 앞과

   귀뚜라미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와 윙윙대는 바람소리만

   완성되지 않은 악보에 헝크러져 있는데요

 

 

 

 

 

 

메밀꽃 필 무렵

 

 

스물 넷 젊은 병사는 밤이면 막사를 나와 강가로 보초를 서러 갔다네

죽도록 사랑한다던 여자는 편 지 한 통으로 죽음을 대신하고

소리죽여 흐르는 강물에 수 천 통의 편지를 쓰고 또 썼다네

잠들어 악몽에 시달리는 것 보다

아직 젊어 해독할 수 없는 풀벌레의 울음과

아직 젊어 껴안을 수 없었던 바람과

부동의 나무들과 함께

아무런 이야기도 나눌 수 없는 적막 속으로

수 천통의 편지는 쌓여만 갔는데

눈 감으면 떠오르는 얼굴 때문에

눈에 눈물을 담고 어둠을 바라보는 것이 더 나았는지도 몰라

스물 넷 젊은 병사는 밤이면 막사를 나와 강가로 보초를 서러 갔다네

영원토록 변치 말자던 여자는 편지 한 장으로 순간을 증명하고

지나간 추억처럼 또렷하고 영롱한 별들을 향해 빈 방아쇠를

당기도 또 당겼다네

눈 부릅떠도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을 바에야

아직 젊어 용서할 수없는 이별과

아직 젊어 녹여낼 수 없는 그리움을

그믐날 어둠으로 덮어버리는 것이 차라리 나았는지도 몰라

이제는 더듬거리며 막사를 나와 어둠을 향해 가는데

저기 수 만개의 등불이

바람 불면 꺼질듯 꺼지지 않고 환하게 돌아 오르는 것을

잊어버리자던 수 만개의 별들과 달이

메밀꽃 여린 숨으로 매달려 있는 것을

스물 넷 젊은 병사는 울면서 바라 보았네

또렷이 이별과 그리움을

제 홀로 피워낸 너른 메밀꽃밭으로 가슴에 받아 들였네

 

 

산다는 것은

 

누구도 본 적 없고

누구도 만난 적 없는 그가

이미 태어났느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가

이 세상에 있다

한 마리의 양도 키우지 않으면서

나는 서투른 양치기가 되었고

꽃 이름, 풀 이름 하나 외우지 못하면서

나는 어설픈 園丁이 되었다

가진 것 없어 욕심내지 않았으나

저 궁휼한 하늘이 내 것이 되고

서늘하게 머리맡을 지나가는 바람을

나의 역사를 새길 두루마리로

몇 필 욕심을 내었다

 

나무인지, 풀인지, 사슴인지, 구름인지

아니면 미리내 너머에 홀로 빛나는 작은 별

 

이름을 적고, 얼굴을 그리고 목소리를 담아둘

이 세상은 아직 어둡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을 불러 모으는 새들의 유적한 지저귐

호수에 한 뜸한 뜸 새겨지는 조각달의 발자국

후두둑 새벽의 정수리를 치고 가는 소나기의 눈빛

 

그 모든 것이 經典이다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고 난 후

그는 이 세상에 있다

그가 커 갈수록

이 세상은 넓고 깊어진다

 

 

가스페를 아십니까?

 

 

하늘을 향해

그 아무 것도 아닌 허공을 향해

팔을 내뻗는

무엇을 움켜쥐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주먹을 내뻗는

플라타너스 가지들을 뎅겅뎅겅

잘라낼 때

이 도시에는 일기예보보다 먼저

봄이 시작되는 것이다.

 

가스페를 아십니까?

이 말은 가스페는 어디로 갑니까?

또는 가스페에 가보았습니까?

털 깎인 양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에게 묻는다

가스페 레스토랑, 가스페 카페, 가스페 모텔,

가스페 안경점...

길가에 서 있는 내가 잘못이다

물어도 대답할 수 없는 가스페

이 세상의 긑이면서 시작인

바다를 향하여 세 개의

하얀 그네가 흔들리는 곳

 

 

 

 

 

 

 

겨울 밤

 

 

열기를 식히려고

밖으로 나오니 마치

검은 늑대 같다

커엉컹 달을 향해

마른 울음 삼키니

젊은 시절 일기 한 구절이

뒷목을 후려친다

울지 말아라

어디선가

흰 내출혈의 바람이

소문만 무성하게 퍼뜨리고 간다

열기가 식으니

마치 도둑고양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