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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시 속의 생활, 생활 속의 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9. 11. 16:58

시 속의 생활, 생활 속의 시

 

나 호 열

 

 

언제부터인가 『소요문학』의 ‘시 속의 생활, 생활 속의 시’ 의 글귀가 낯익어졌다. 글쎄, 언제였던가? 강의 시간에 불쑥 던졌던 화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소요문학 자체에서 만들어낸 다짐일지도 모른다. 아무려면 어떤가! 새해를 맞이하면서 뭔가 새로운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으로 생각을 굴려보다가 금방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이 화두를 글감으로 삼아 보고자 한다.

 

어떤 일이든 기초가 중요한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땅 파기도 없이. 밑바닥을 다지는 일 없이 세워지는 건축을 사상누각이라 하지 않던가? 그래서 우리는 문학을 하기 전에, 시를 쓰기 전에, 수필을 쓰기 전에 문학이 무엇인가? 시가 무엇인가? 수필이 무엇인가? 그 정의를 찾는 일에 골몰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좀 더 궁극적인 질문, 예술은 무엇인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질문들에 속 시원하게 대답해준 선인들은 없었다. 바로 이 점이 예술을 창조적 행위로 자리매김하게 해주는 단초이다. 이미 정의가 내려졌다면, 그 공식대로 짜맞추기만 하면 된다면 우리에게는 몇 사람의 예술가만 존재하면 그만 일 것이다. 오히려 정의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정답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작업은 의미를 가진 행위가 될 것이며, 그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창작의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 욕망을 靈感이라고 하자. 내 앞에 주어진 세계가 내게 말을 걸어올 때의 떨림을 아름다움이라고 하자. 그래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떨림’을 문학의, 시의, 수필의 첫 걸음이라고 소박하게 정의를 내리자. 그것은 한 마디로 驚異 또는 경이로움이다.

 

1, 생활 속의 시

 

일상생활 속에서 ‘~ 시 같은’, ‘~ 시처럼’ 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쓴다. 그러나 이 말 처럼 애매모호한 말은 없다. 속으로 들어가 안개 같은 이 말을 축약한다면 ‘아름다움’ 이라는 더 애매모호한 미궁으로 얼버무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감각기관을 통해서 받아들여지는 喜怒哀樂의 총체이다. 우리는 어디서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을 장악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지저귀는 새의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 鳥籠을 만들고, 비단잉어의 유연한 몸놀림을 감상하기 위하여 연못을 파듯이 글밭을 만들어 우리는 여러 가지 꽃씨들을 심는 것이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 행위는 결코 생활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살아 숨쉬기 때문에, 세상은 하나이지만, 그 세상을 음미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밥 먹고, 잠자고 배설하는 이 일상생활이 창작의 주제이고, 소재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생활의 규칙을 만든다. 그것은 상식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고, 도덕, 또는 윤리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상식, 도덕, 윤리를 따르는 생활은 우리를 편안한 안식의 상태로 우리를 이끈다. 모든 것이 편안한 것이다. 이 평안한 상태는 미지에 대한 그리움을 감소시키고. 아름다움을 정형화 시킨다. 생활 속에 자리잡은 秘意를 지나쳐 버리게 하고, 도식화된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것이 감동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만든다.

 

생활은 창작의 모태이며, 사유의 근원지이다. 생활 속에서 시, 다시 말하면 생활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는 것은 현미경으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상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상식의 커튼 뒤에 숨은 ‘의미의 배후’를 찾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소요문학 회원 여러분은 문학이 ‘배워서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터득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문학은 지식과 기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의 맑음과 세밀함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또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의미의 확산이라는 ‘상상력’의 영토를 확장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알 것을 이미 알아버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과 기술은 마치 강을 건너가기 위해서 필요한 배처럼 우리가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이다. 강을 건너가면 배의 용도가 페기 되는 것처럼 훌륭한 글을 쓰고 난 후에는 지식과 기술은 남루에 불과하지만 그 누가 훌륭한, 좋은 글을 썼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생활 속의 시’가 뜻하는 바는 글의 소재나 주제가 지식과 기술에 있는 것도 아니고, 상식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며, 상상력의 촉발이 발명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상식 속에 머무르는 자신의 속물성, 지식과 기술의 우월함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우쭐거림, 겉과 속이 다른 미시여구의 글을 내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생활 속의 시’가 함의하는 바일 것이다. 인간사의 희노애락에서 버둥거리는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아파하는 글에서 우리는 생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미 道人이 되어버린 초월과 명상을 흉내 내는 글들은 참담한 동어반복의 잘못을 거듭 드러낼 뿐이다.

 

 

2. 시 속의 생활

 

‘생활 속의 시’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시 속의 생활’을 유지할 수는 없다. 앞서서 시를 문학 전반, 또는 아름다움, 경이로 의미를 한정해 놓았으므로 굳이 산문과 대별되는 개념으로서의 시를 생각하지는 말자. 우리는 왜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표현의 세계에 몸 담구기를 마다하지 않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존재. 티끌 한 조각 같은 자신을 이 세상에서 의미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한 분투이다. 表現 expression은 속에 감추어져 있던, 억눌려 있던 욕구의 분출, 드러냄이다. 그러므로 문학에서의 발언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목소리를 들려주는 행위이다. 동물세계에서, 다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은 울음소리를 듣고 자기 새끼를 정확하게 찾는 어미들처럼,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의 목소리를 찾아낼 수 있는 독자를 갖는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창작의 고통과 두려움은 이것에 있다. 자신의 목소리를 누가 알아줄 것인가?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 흔히 우리가 개성, 독특함이라고 말하는 창작의 기쁨은 이렇게 오래 기다리는, 그 기다림을 인내하는 내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杜甫는 이백과 쌍벽을 이루는 시인이었지만 살아 생전에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쌓지는 못하였다. 유행과 시류에 눈치를 보며, 적당히 바람에 편승하는 작가들은 현세에는 그럴듯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 그럴듯함은 한 세대를 넘지 못한다.

‘시 속의 생활’ 은 이렇듯 자신의 존재를 글로써 이 세상에 드러내고자하는 열망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생활 속의 시’가 현미경을 자신의 심상에 구비하는 일이라면 ‘ 시 속의 생활’은 망원경을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놓는 것을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밤하늘의 별로 올려다 놓는 일, 망원경으로 과거를, 먼 미래를 조감하는 일은 어떤 값어치를 가지는 것일까?

우리의 옛 성인들은 ‘先知後行’. ‘知行合一’의 경지를 놓고 경합했다. ‘앎이 있어야 실천이 있다’라는 것과 ‘앎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 는 것이 어떤 의미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가? 이 두 명제의 경중을 가리는 일은 부질없다. 그렇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이 두 명제는 결코 가벼운 화두는 아니다. 적어도 지식과 기술을 갖추고 있어야 표현할 수 있으며, 자신의 표현은 자신이 체득한 것을 밑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미에서 이 두 명제는 글쓰는 사람들의 금과옥조가 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가수가 된 사람과 단지 노래가 좋아서, 노래 속에서 생의 의미를 찾는 가수의 의미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