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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이사랑의 시>內省의 발현과 애이불상의 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10. 23. 23:01

                                  내성 內省의 발현과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시

                                                                                             - 이사랑의 시

 

                                                                                         나호열 (시인, 경희대 사회교육원 교수)

 

  이사랑은 신예 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시력 詩歷은 길고 단단하다. 벌써 10년을 넘어서는 수주문학상은 신인과 기성을 가리지 않고 오직 작품을 통해서만 기량을 겨루는 문학상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런 까닭에 지난 해 이사랑 시인의 수주문학상 대상 수상은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 이다. 많은 문사들의 선망을 한 몸에 안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선자 選者의 다음과 같은 짤막한 논평은 시인으로서의 이사랑의 저력과 앞으로의 과제를 요약하기에 충분할 것으로 생각된다.

 

 투고한 모든 작품에서 오랫동안 시를 써온 저력이 돋보였다. 시에서 익숙함은 힘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독을 다스리는 변화의 힘을 가진다면 앞으로 좋은 작품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한다.

 

 오랫동안 시를 써온 저력이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시작 詩作의 요의를 일찍이 터득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무리 시대적 상황과 여건이 급격한 변화 속에 놓여 있다고 해도 "시는 산문이 아니다"라는 명제와 "시는 정서의 표현" 이라는 명제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익숙함의 근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익숙함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은 창작에서의 주제와 소재를 다루는 기법 뿐 만 아니라 끊임없이 세계관의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는 도전의식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그래서 일 년이 지난 지금 이사랑의 신작시를 마주한다는 것은 그동안의 詩作의 변모를 훔쳐보는 즐거움에 다름 아닐 것이다. 우선 이사랑 시를 따라가는 여정의 출발점을 11회 수주문학상 대상작인 「바늘 끝에서 피는 꽃」을 감상하는 것으로 삼아보자.

 

청석골의 단골 수선집 늙은 재봉틀 한 대

아마, 지구 한 바퀴쯤은 돌고도 남았지

네 식구 먹여 살리고 아들 딸 대학까지 보내고

세상의 상처란 상처는 모조리 꿰매는 만능 재봉틀

실직으로 떨어진 단추를 달아주고 이별로 찢어진 가슴과 술에 멱살 잡힌 셔츠를

감쪽같이 성형한다

장롱 깊숙이 개켜둔 좀먹은 내 관념도 새롭게 뜯어 고치는 재봉틀

작은 것들은 가슴을 덧대어 늘리고

막힌 곳은 물꼬 트듯 터주고 불어난 것들 돌려 막으며

무지개실로 한 땀 한 땀 땀구슬을 꿰어 서러움까지 깁고 있다

무더운 여름 낡은 그림자를 감싸 안고 찌르륵 찌르륵

희망은 촘촘 재생 시키고 구겨진 자존심은 반듯하게 세워 돌려준다

일감이 쌓일수록 신나는 재봉틀 오늘도 허밍허밍 즐겁다

별별 조각난 별들을 모아 퀼트 하는 밤

바늘 끝에서 노란 달맞이꽃들이 환하게 피어났다

 

  재봉틀로 상징되는 노동은 회한과 절망을 거쳐서 분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오늘의 현상이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구조는 빈곤을 확대 재생산 시키는 왜곡을 일으킨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의 노동은 생계를 유지하거나 부를 축적하는 수단을 넘어서는 놀이의 길을 걸어가기도 한다. 백장선사의 '하루 일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언급은 노동 속에서 삶의 의미를 궁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동 속에 함몰되는 노예의 삶이 있음을 꾸짖는 것이다.

 

 「바늘 끝에서 피는 꽃」이 이사랑 시의 출발점으로 삼아도 좋을 듯 하다는 필자의 소견은 이 시의 話者가 취하고 있는 관찰자로서의 태도, 더 나아가서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만일 이 시의 화자가 재봉틀을 돌리는 당사자로 설정되었다면 보다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데에는 미흡하였을 것이다. 화자는 '장롱 깊숙이 개켜둔 좀먹은 내 관념'에서 처럼 상처를 가진(좀 먹은) 존재이다.「바늘 끝에 피는 꽃」에서의 재봉틀은 소비를 전제로 하는 새로운 제품의 생산이 아니라 세상의 상처란 상처는 모조리 꿰매는 치유와 서러움을 깁는 각성의 도구이다. 말 그대로 수선하는 도구인 재봉틀은 바늘 끝에서 노란 달맞이꽃들이 환하게 피어났다는 결구로 말미암아 기다림의 도구로 한껏 의미의 전환을 한다. 달맞이꽃의 꽃말이 '기다림'이라는 사실을 상기해 보라. 노동의 도구에서 치유의 도구로의 전환도 놀라운데 시인은 한걸음 더 나아가 기다림의 도구로 재봉틀을 승화시키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연상과 상상력은 시인의 중요한 무기이지만 삶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긍정과 희망이 없으면 쉽사리 발화될 수 없는 능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사랑의 시편이 노동의 긍정에서 그 노동 자체를 놀이로 격상시킬 수 있는 근력을 가지게 될 것인지 궁금해진다.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무시할 수 없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세상에 맞서는 태도는 삶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누구는 노동을 노동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그 누구는 노동을 놀이로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개인적 성향, 인식의 능력의 차이로 해명하기에 궁색해질 때 한 편의 시를 읽을 수 있다.

 

폭설이 내렸다

올겨울은 오지게 춥구나

방구들에 불 좀 때라

살다보면 더위도 추위도 한철이다

겨울이 추울수록 이듬해 농사는 풍년이 드능겨

갱아지 닭 새끼 배 골릴까

서둘러 집에 와서 생각하니

마음은 두고 몸만 왔구나

아무리 찾아봐도 줄 게 없어서

쌀 한 푸대 부쳤다

머니머니 혀도 따순밥이 보약이여

발자국 없는 하얀 새벽

백지 위에 쓴다

어. 머 .니

                                  -시, 「어머니 다녀가시고 」전문

 

 많은 시인들이 즐겨 다루는 주제가 '어머니'이다 보니 식상한 듯 눈길이 닿지 않았는데 「어머니 다녀가시고 」는 각별하다. 기존의 상식과 다르지 않은 듯 하면서도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단 이 시의 어머니는 가진 건 없지만 정만은 유독 많다. 주는 것에 익숙한 한국 어머니의 표상 같은 희생의 어머니이다. 그런데 살다보면 더위도 추위도 한철이다/ 겨울이 추울수록 이듬해 농사는 풍년이 드능겨라는 퉁명스런 언명은 부모의 자식 사랑을 넘어서는 삶의 지혜를 던져준다.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험난한 세상을 건너가는데 필요한 인내와 끈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보내 줄 것이 없어서 보낸 쌀 한 푸대보다 머니머니 혀도 따순밥이 보약이여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눈으로 상징되는 순결과 평화의 메시지로 증폭될 때 따뜻한 행복을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폭설이 내렸다는 첫 연의 의미는 단순한 폭설이 아니라 어머니와 화자가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풍요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더 큰 의미망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시인이 노래하는 희망이나 긍정의 미학이 결코 머릿속에서 억지로 끄집어낸 상상력의 집산물이 아니라 가족 간의 관계와 소통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시 「괜찮다」는 세상살이에서 상처받은 자식에게 던지는 유쾌한(?) 화두이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죄 짓고 돌아온 나에게 어머니는 이기려는 용기보다 더 큰 용기는 져주는 것이다 라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비도 맞고 눈도 맞아라/ 죽고 사는 일 아니면/ 넘어져 무릎이 깨져도/ 괜찮다 고 싸늘한 道人처럼 말한다. 「어머니 다녀가시고 」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어머니는 정도 많고 시름도 많은 시골 할머니이다. 자식을 용서하면서도,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라고까지 말하는 넓고 깊은 가슴은 도대체 어디에서 만들어진 것인가? '괜찮다'에 함축되어 있는 오직 수동적으로 길들여진 견딤의 자세는 선천적인 것일까?

 

상처가 상처를 덮어주고

아픔이 아픔을 위로하며

피눈물이 눈물을 닦아주는 말

괜찮다

                              -시 「괜찮다」 부분

 

  시 「괜찮다」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머니가 건네는 '괜찮다'라는 말씀은 위로와 격려를 넘어서는, 앞 서 산 先生의 말씀인 것이다. 눈물을 마르게 하고 닦아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눈물보다 더 무거운 피눈물이다. 피눈물이 눈물을 닦아주는 말이 곧 괜찮다로 함축되는 외마디 할 인 것 이다. 일방적 가르침이 아니라 교감하는 가운데서 시인은 뜻하지 않은 영감을 축적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힘은 오직 더 큰 슬픔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깨달음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이사랑의 신작 시편은 삶의 辛苦와 분투의 기록이다. 신작시에 질펀하게 깔리는 슬픔과 외로움은 단지 시인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弱者들이 떠안게 되는 기쁨이며 재난일 것이다. 힘센 자들은 더 큰 힘을 얻기 위해 싸우고 약한 자들은 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힘센 자들뿐만 아니라 약한 자들끼리도 싸운다. 그러나 시인들의 슬픔과 외로움의 기록은 세상과의 소통과 화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삼이사들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즉, 시인들이 받아들이는 삶의 七情은 감정의 토로를 넘어서서 이 세상에 유일한, 자신의 존재증명으로 이어진다. 이미 앞에서 이사랑시인의 시적 토대를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각으로 정리한 바 있지만 시인의 오욕칠정은 배설과 영탄적 묘사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다. 가슴보다 머리로 쓰는 시가 범람하는 현장에서 진정으로 가슴으로 쓴 시를 조우하기 힘든 까닭은 잉크 대신 피를 묻혀 시를 쓴다는 정신의 결여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시쳇말로 헐리우드 액션이 횡행하는 가짜 가슴으로 쓴 시들은 말초적 감상을 충족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신의 각성을 일으키는 일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사랑의 신작시들은 繪事後素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繪事後素는 論語 八佾篇에 나오는 구절이다. 文質彬彬 (바탕이 순연하고 예의를 갖춤), 質勝文(바탕이 순연한데, 예의를 갖추지 못함), 文勝質(겉으로 예의는 차리는데 바탕이 순연하지 못함), 文質共薄(예의도 못 차리고 바탕도 순연하지 못함)의 논의에서 보듯이 회사후소는 禮에 관한 이야기이지 시와 직접적 관련을 갖는 논제는 아니지만 그러나 시(?)를 쓰는 사람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인 모두가 文質彬彬의 고봉을 노래하지만 그렇지 못한 불행한 경우도 쉽게 목도할 수 있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회사후소는 인간의 본질과 겉(예의)에 관한 이야기이다. 겉과 속이 다르다면 그것이 참된 인간이 아니라는 뜻에서 사람이 "아름다운 자질이 있은 뒤에야 文飾을 가할 수 있음과 같은 것이다" 라는 해석이 가능하고, 그림을 그릴 때 흰 물감이 제일 뒤에 온다는 해석은 그림을 그리는 데 먼저 색색의 물감으로 모든 형체를 구현하고 제일 나중에 흰 물감으로 그 형체를 명료하게 드러내어 광채 나게 하는 것, 즉 인간의 禮라는 것은 온갖 갖가지 삶의 경험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 최종적으로 그 인격의 완성을 마감한다는 뜻으로도 새겨볼 수 있겠다.

 

  다소 장황해진 느낌이 있지만 위와 같은 논의는 시작에 임하는 시인들의 치열한 의식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이사랑 시인의 신작 시편은 인간을 둘러싼 이전투구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수행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언어의 속성을 알고 修辭의 능수능란함을 애써 감추고 직설적 화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큰 기교는 졸렬함과 같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함정을 간파하고 있다는 증좌이며 시인의 목표가 인간다움 文質彬彬 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홀쭉한 지갑을 들추며

시시각각 허기가 찾아와 물었다

냉장고는 안녕하세요?

갓 구운 빵 냄새를 맡으며 지갑을 열어보면

역시 배가 고프다

돌아와 보온밥통을 열어본다

누렇게 변질되어 까칠한 밥

언제 쌀밥이 그리울 때가 있었던가

다이어트 하는 그들의 밥은 잡곡밥

내 밥은 하얀 쌀밥

골프 치고 수영과 요가를 하는 몸

그와 비례하는 메마른 영혼을 보며

찜통에서 방금 꺼낸 찐빵 같은 얼굴이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시시 때때로 비만한 슬픔이 찾아와

내게 물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너는 왜 뚱뚱하지?

                                     - 시 「비만한 슬픔」전문

 

 이 시는 반어와 역설이 가득한 재기가 번득이는 시이다. 삶의 애환이 서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비만한 슬픔'은 홀쭉한 지갑을 들추며 /시시각각 허기가 찾아와 물었다 / 냉장고는 안녕하세요? 에 표현된 바와 같이 가난으로부터 연유한다. 비만이 두려워 소식을 하며 잡곡밥을 먹어야 하는 부자들과 어쩔 수 없이 소식을 해야 하는 화자의 두 모습은 일견 상반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둘은 다 같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배고픈 처지에 보리밥 쌀밥 가릴 때가 아니므로 빵이나 라면 같은, 탄수화물이 가득한 인스턴트식품을 주식으로 삼는 화자는 역설적으로 몸이 뚱뚱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너는 왜 뚱뚱하지?' 라는 질문은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소비사회의 끝간데 모르게 커져가는 욕망을 가리키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질문인 셈이다. 물질적으로 부자이거나 빈자이거나를 막론하고 자본주의의 포충망에 걸려있는 우리는 형태가 다른 비만한 슬픔에 갇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사랑의 현실 직시는 이와 같이 교조적이지도 않고 투쟁적이지도 않으면서 현장감을 잃지 않은 삶의 진정성을 견지하고 있다.

 

  또한 이사랑의 시편들의 특징을 덧붙이자면 과감한 자기고백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인칭 화자 '나'는 가면 속의 나, 즉 시인과 거리를 둔, 만들어진 화자로 인식하는 경계를 넘어서서 독자로 하여금 시인과 절실하게 마주서 있는 듯 한 생활의 현장으로 이끌고 있다. 나와 어머니( 시「어머니 다녀가시고」, 「괜찮다」), 나와 남자 (시 「남자」), 나와 개( 시 「同病相憐」)와 같은 실물적 관계 뿐 만 아니라 계절과 관념과 같은 무형의 관계(시「등산」)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객관적 사건과 마주치는 정서의 돌출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회 속의 '나'는 盲目의 상태로 살 수가 없다. 피 흘리고 다치고 무너지며 주변인으로 전락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고초를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아집과 편견으로 가득 찬 지식이 위해한 毒인줄 알면서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독배를 마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인은 몽상에 가까운 독배를 마시는 포즈를 보여줌으로서 독자들을 위험한 이해에 빠지게 만드는 정서의 극한까지 밀고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사내가 바람을 잡고 물어봅니다

사람들은 어디로 다 떠난 걸까요

                                          - 시 「 무소식 」첫 연

 

痛覺의 매운 맛을 모르니

아직 배가 덜 고픈 것이다

몸에서 짠맛이 우러나올 때까지

노동을 사야 하나 아니면 삼일만

나를 쫄쫄 굶겨야 하나

                                         - 시 「입맛 찾기」 마지막 연

 

내 무식 앞에서 절대 논리를 버리는

불행하게도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할 남자

                                       

                                        - 시 「남자」 부분

 

친구야 여기쯤, 딱 오 분만

나 산벚꽃 향기에 취해도 되겠니

 

                                        - 시「등산」 마지막 연

 

  필자가 이사랑의 시편에서 뽑아본 구절들은 아무런 장식이 없어도 가슴이 아려온다.「 무소식 」에서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드러내고 있으나 시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진의는 단독자로서의 인간의 고립을 그리고 있는 것이며, 「입맛 찾기」는 살다가 어느 순간 의욕을 잃고 슬럼프에 빠질 때 달아나버리는 입맛을 찾기 위해서 삼일을 굶으면 해결된다는 의식의 호사스러움을 꼬집기도 하고, 「남자」에서는 대놓고 자신은 무식하다고 외치기도 하고 「등산」에서는 오 분만 시들고 싶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이런 시적 장치들은 생활의 신고에 어떻게 응전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며 궁극적으로 시인이 성취해야 할 삶의 덕목이 '사랑' 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멀고 먼 우회의 길일 것이다.

 

  시인은 화려하고 정밀한 수사를 버리고 직정적인 현실의 토로를 마다하지 않는다. 비유가 사라진 자리에 우직하게 어머니가 보여주는 무한의 '사랑' 을 세워놓는 것으로도 넉넉해지는 것이 이사랑 시의 根基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哀而不傷을 설파했다. "슬퍼하되, 슬픔의 결과로 말미암아 현실을 회피하거나 슬픔 자체에 무너지지 않은 상태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라"고 말이다. 이사랑의 시편들은 슬픔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면서 그것들을 체화하려는 옹골찬 의지가 도처에 표명되고 있다.

 

  그래서 보기에 따라 이사랑의 시편들은 단순한 자기고백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시 「괜찮다 」에서 보이는 인내와 관용의 세상살이는 구체적 상황이 전개되지 않음으로써 과정이 생략된 죽은 경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사랑의 시편들이 가지는 가장 큰 덕목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삶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이 어디인가를 알고 있고, 그 지점에 다다르기 위한 수행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를 이미 체득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보자.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가난을 헤쳐나가기 위해 분발을 거듭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고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느 사람은 화해를 청하고 어느 사람은 투쟁을 선택하기도 할 것이다. 범박하게 말해서 기계화된 세계구조에서 시를 욕망한다는 그 자체가 抒情일 수 있다. 이 서정의 범주 안에서 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정서의 폭은 그리 넓지 않을 것이다. 영탄과 자기비하, 분노와 체념이 시인이 택할 수 있는 몇 가지의 통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사랑 시인은 이 모든 통로를 배제하고 애이불상의 성취를 목전에 두고 있다고 보여진다. 시편에 드러난 그의 슬픔과 가난과 외로움은 시적 장치의 진위 여부를 막론하고 자기결정의 과정이지 극복의 대상은 아니다. 가난도, 슬픔도, 외로움도 즐길 수만 있다면 꽃이 되고 순백의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경전이 될 수 있음을 시인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사랑 시인이 추구하는, 실천에 옮기고 싶어하는 시론의 실체이다.

 

갈대의 노래

 

이곳 라이브콘서트에 입장하시는 분들은

보관소에 머리와 입은 맡겨두시고

가슴과 귀만 갖고 들어오시오

부드러운 바람이 연주하고

갈대가 부르는 청청한 이 노래는

태고 적 바람인가 나의 바람인가

하늘을 향해 푸른 촉촉 부리를 내미는

뼈 속을 비운 수만 수천 저어새들

날을 세워도 서로 상처내지 않고

죽어서도 죽지 않고 꼿꼿이 서서

평화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허공에 푸른 촉촉 부리를 내미는

뼈 속을 비운 수만 수천 저어새들

평화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바람의 결을 응시하고 있는 저 왜가리

고요 앞에선 말 한 마디도 소음이겠다

생음악이 물결처럼 흐르는 공연장에

경청하며 귀를 씻는 허공

 

  이번 신작 시편을 관통하는 본류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세상과의 불화를 이겨내는 소통과 관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갈대의 노래」는 서정과 노래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의 첫 머리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시를 다듬어가고 시인 자신의 메시지를 형상화하는 능력의 뛰어남이 시인의 장도를 창창하게 기약할 것임은 틀림없지만 그런 능숙함의 틀에 안주하게 될 때의 위험도 시인이 감내해야할 과제임을 뚜렷이 보여주는 시가 「갈대의 노래」인 것이다.

 

  어느 시인은 갈대를 여성성을 함축한 숨죽이고 울고 있는 수동적 존재로 인식하였으나 이 시에서의 갈대는 희망과 염원을 가진 저어새로 치환함으로써 비상과 자유를 한껏 고조시키는 절묘한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다. 갈대도 새들도 다같이 '뼈 속이 비었다'는 치밀한 관찰과 갈대 밑 흙탕물 속에서 자라나는 물고기들, 그리고 그 물고기를 낚아채기 위하여 바람의 결을 응시하는 왜가리의 집중 속에서 시인은 먹고 먹히되 서로를 증오하는 법이 없는 자연의 섭리와 그 아름다움을 정갈하게 그려내고 있다.

 

  시가 산문과 다른 까닭이 무엇인가? 산문이 빽빽한 메시지의 전달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시는 메시지를 아끼고 충분한 여백을 남겨둠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그 나머지 여백을 채우도록 하는 넉넉함을 지향한다. 이런 까닭에 이미지와 메시지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감정의 낭비를 억제한다는 것은 오랜 숙련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갈대의 노래」는 메시지와 이미지 사이의 균형을 갖춘 전범으로 자리매김하는데 부족함이 전혀 없다.

 

  이사랑 시인은 이번 신작 시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도약의 전환점에 서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상세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각 시편들은 주제와 소재에 따라 형식의 다양성이 드러나고 있음은 시의 정형에 고착되지 않으려는 시인의 각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각 시편들이 시인의 일관된 세계관과 주체성을 투영하고 있으면서 제각기 다른 맛과 향기를 뿜어내기 위해서는 각각의 시들이 유기적이면서도 독립적인 관계성을 담보로 해야 하는데 이사랑의 시편들은 탄력을 가진 긴장감을 돋우고 형상화에 성공함으로써 시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랑의 시>

 

어머니 다녀가시고

 

폭설이 내렸다

올겨울은 오라지게 춥구나

방구들에 불 좀 때라

살다보면 더위도 추위도 한철이다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이듬해 농사는 풍년이 드능겨

갱아지 닭 새끼 배 골릴까

서둘러 집에 와서 생각하니

마음은 두고 몸만 왔구나

아무리 찾아봐도 줄 게 없어서

쌀 한 푸대 부쳤다

머니머니 혀도 따순밥이 보약이여

발자국 없는 하얀 새벽

백지 위에 쓴다

어. 머 .니

 

괜찮다

 

목구멍까지 화가 치밀고 올라와도

이기려는 용기보다 더 큰 용기는 져주는 것이다

괜찮다

어쩌다 한 번은 지청구도 들을만한데, 다독다독

한숨이나 걱정거리를 단번에 녹여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말

괜찮다

비도 맞고 눈도 맞아라

죽고 사는 일 아니면

넘어져 무릎이 깨져도

괜찮다

상처가 상처를 덮어주고

아픔이 아픔을 위로하며

피눈물이 눈물을 닦아주는 말

괜찮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죄 짓고 돌아온 나를

안아주며 용서하는 어머니

 

비만한 슬픔

 

홀쭉한 지갑을 들추며

시시각각 허기가 찾아와 물었다

냉장고는 안녕하세요?

갓 구운 빵 냄새를 맡으며 지갑을 열어보면

역시 배가 고프다

돌아와 보온밥통을 열어 본다

누렇게 변질되어 까칠한 밥

언제 쌀밥이 그리울 때가 있었던가

다이어트 하는 그들의 밥은 잡곡밥

내 밥은 하얀 쌀밥

골프 치고 수영과 요가를 하는 몸

그와 비례하는 메마른 영혼을 보며

찜통에서 금방 꺼낸 찐빵 같은 얼굴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시시 때때로 비만한 슬픔이 찾아와

내게 물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너는 왜 뚱뚱하지?

 

무소식

 

사내가 바람을 잡고 물어봅니다

사람들은 어디로 다 떠난 걸까요

찔레꽃 지고 다시 유월

초록 초록 뻐꾸기가 울어

산야가 초록으로 물들어 갑니다

뻐꾸기 소리 따라간 여자는 돌아오지 않고

익모초 같은 삶을 쓰다 저문 하루가

그믐달 같습니다

아프지 마오

어느 땅이든 뿌리내려 살아만 주오

저녁 무렵 헝클어진 사내를 바람이 빗겨줍니다

나는 멍하니 길 따라 흐르는 차들을 바라보고

지빠귀는 소식을 재잘거립니다

빈 벤치에 나뭇잎 한 장 핑그르르 떨어집니다

 

입맛 찾기

 

계절 탓만도 아닌데

몇 날 며칠을 입맛 찾으려 헤매고 있다

쑥갓 오이 곰취 향기를 씹어본다

입이 쓰다 영 돌아올 기미가 없다

생각다 못해 재래시장을 찾아 간다

돌미나리 돌나물 원추리 달래

새콤달콤한 초고추장에 쓱쓱 비벼

눈으로 먹는 맛이 제법 쌉쌀하다

살기 위해 약으로 맛으로 먹는다면

視覺이나 味覺만 찾는 나는

痛覺의 매운 맛을 모르니

아직 배가 덜 고픈 것이다

몸에서 짠맛이 우러나올 때까지

노동을 사야 하나 아니면 삼일만

나를 쫄쫄 굶겨야 하나

 

남자

 

이런 남자랑 살고 싶다

저 달이 네모네 세모네 해도 그래 맞아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태평인 남자

하지만, 세상 불의 앞에서 용감하고

늘 약자의 편이 되며 끝내 죽음 앞에서

사랑과 목숨을 맞바꿀 남자

내 무식 앞에서 절대 논리를 버리는

불행하게도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할 남자

내가 쓴 시를 나보다 더 좋아하고

세 잎 속에 숨어있는 네 잎 클로버 찾듯

가슴 속에서 보물을 찾고 있는 남자

나만 바라보다 꽃 핀 것도 몰랐다는

이런 푼수 같은

 

등산

 

북한산 오르막 길,

뒤 따라가는 걸음이 천근이다

얼마나 더 가야 정상에 닿을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조금

시간을 따라 봉우리에 올라보니

인천 앞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올려만 보며 살다가 내려다 본

빌딩숲과 고층 아파트 숲

발 아래 있다

한 발 두 발, 앞으로

발을 옮기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삶의 거리에서

무릎 관절이 삐그덕거리며 말을 한다

오르막길 보다 내리막길이 더 힘들다

친구야 여기쯤, 딱 오 분만

산벚꽃 향기에 취해도 되겠니

 

갈대의 노래

 

이곳 라이브콘서트에 입장하시는 분들은

보관소에 머리와 입은 맡겨두시고

가슴과 귀만 갖고 들어오시오

부드러운 바람이 연주하고

갈대가 부르는 청청한 이 노래는

태고 적 바람인가 나의 바람인가

하늘을 향해 푸른 촉촉 부리를 내미는

뼈 속을 비운 수만 수천 저어새들

날을 세워도 서로 상처내지 않고

죽어서도 죽지 않고 꼿꼿이 서서

평화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바람의 결을 응시하고 있는 저 왜가리

고요 앞에선 말 한 마디도 소음이겠다

생음악이 물결처럼 흐르는 공연장에

경청하며 귀를 씻는 허공

 

同病相憐

 

산책 길에서 만난 애완견 한 마리

마주친 눈빛이 젖어있다

퀭한 눈 바짝 마른 몰골로 꼬리를 흔들며

천천히 뒤 따라 오라는 듯

나도 잘 아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다

너도 가슴에 상처를 품었구나

얼마나 더 걸어야 슬픔의 끝에 닿을까

얼마나 더 외로워야 외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음만으론 마음에 닿을 수 없는 너는

내 전생의 엄마였을까 자식이었나

지나가던 누가 개뼈따귀 같은 말을 던지고 간다

- 야, 니 엄마 따라가

차라리 눈이나 맞추지 말 걸 -

그렇다,

낙엽 한 장도 책갈피에서 시가 되고

돌멩이 하나도 만지작거리면 빛이 나고

꽃마리 한 송이도 눈길이 닿을 때 핀다

서로 바라보며 애잔한, 그것이 사랑이다

드디어, 食口 하나가 생겼다

 

                                                                  * 2010년 <<수주문학>> 발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