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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성의 시> 풍경으로 들어가는 독법讀法 혹은 탐미의 기록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10. 14. 23:46

풍경으로 들어가는 독법讀法 혹은 탐미의 기록

 

                                                          -  김경성의 <<와온>>에 붙여

                                                                                                                           나호열 (시인)

 

따스하게 눕기

 

 

 김경성의 『와온 臥溫』을 읽는다. '와온'은 남도 끝자락 순천만 바닷가의 풍광이 아름다운 마을이어서 몇몇 시인들이 눈물나게 그 정경을 옮겨 놓기도 하였지만, 나는 '와온'의 뜻풀이 그대로 '눕고', '따스한' 느낌으로 가슴에 얹고 싶어진다. 시집의 길머리에 올려놓은 「와온 」은 시집을 관통하는 비릿하고 구불구불한 길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고 시인이 마지막으로 닿고자 열망하는 마음의 고향이기도 할 것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그래서 시인이 결행하는 여행은 새로움과 경이로움의 성지를 찾는 물음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 체득한 경전을 더욱 굳건히 다지는 확인의 길, 순례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와온』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풍경은 정 靜에서 동 動을 찾고 동에서 정을 찾는, 다시 말해서 나무나 꽃, 폐허나 탑과 같은 정물에 가까운 대상에서 생명의 움직임을 읽어내고, 강이나 바람, 새와 같은 유전 流轉의 동력 속에서 고형의 본질을 모색하는 교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리라. 먼저 시 「와온臥溫」을 읽어보기로 하자.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으니

멈추는 곳이 와온臥溫이다

일방통행으로 걷는 길 바람만이 스쳐갈 뿐

오래전 낡은 옷을 벗어놓고 길을 떠났던 사람들의 곁을 지나서

해국 앞에서도 멈추지 못하고

세상의 모든 바람이 비단 실에 묶여서 휘청거리는

바람의 집으로 들어선다

눈가에 맺힌 눈물 읽으려고

나를 오래 바라봤던 사람이여

그 눈빛만으로도 눈부셨던 시간

실타래 속으로 밀어 넣는다

흔들리는 것은 바람만이 아니다

흘러가버린 시간의 날줄에 걸쳐 있는

비릿한 추억, 삼키면 울컥 심장이 울리는 떨림

엮어서 갈비뼈에 걸어 놓는다

휘발성의 사소한 상처는

꼭꼭 밟아서 날아가지 못하게 하고

너무 깊은 상처는 흩어지게 펼쳐 놓는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집

네 가슴 한껏 열고 들어가서

뜨거운 기억 한 두릅에

그대로 엮이고 싶은 날이다

 

 

 시인에게 있어서의 '와온'은 바람의 집으로 인식된다. 바람이 상징하는 삶의 허무와 부질없음, 사라짐 또한 무無로 되돌아 갈 것이 틀림없지만 역설적으로 그 무 無가 차지할 공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도 성립가능한 추리이므로 결국 이 세상에서 사라지거나 소멸하는 존재는 없다는 화엄 華嚴의 의미로 확장된다. 흘러가버린 시간의 날줄은 유형의 갈비뼈로 치환되고 그런 까닭에 휘발성이라는 개념도 날아가 버리지만 흩어지게 펼쳐놓을 수 있는 물질로 현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해체하는 시인의 눈은 광대무변한 이 세상의 어느 곳이라도 가닿을 수 있는 근력을 생성하게 하고 그 어느 곳에 있던, 어떤 사물을 대하던 두려움 없이 기꺼이 껴안고 말을 나눌 수 있는 동무가 되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시인과 마주하는 대상은 몇 개의 성질과 속성으로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혼융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오욕칠정도 하나하나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보듬고 기대고 있는 따스함의 분자일 뿐이다. "아프게, / 제 속의 것 다 드러내 보이는/ 송진 같은/ 저수지의 속길 - 시 「저수지의 속길」" 마지막 부분이나 "무언가를 담고 있었던 것이나, 떠나고 난 자리에는/ 왜 저리도 깊은 주름이 새겨지는 것인가 - 시 「견고한 슬픔 1」"첫 부분처럼 아픔과 진득한 송진, 떠남과 주름의 대립적 이항 二項마저도 "왜, 너의 가슴속으로 들어간 것들은 모두/ 가루가 되거나, 즙이 되거나/ 덩어리 하나 없이 그렇게 다 부서져 버리는지 몰라 -시 「맷돌」 첫 부분에서 토로하는 바대로, 기쁜데도 왠지 슬퍼지고, 슬픈데도 왠지 기쁨이 충만되는 정서의 물결을 이루게 한다. 마치 눈물의 성분이 어떤 경우에도 짠 맛이 나는 것처럼, '와온'은 살아 숨쉬는, 이미 소멸해버린 그 모든 것들을 따스하게 포용하는 시인의 본성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바람처럼 걷다

 

 

 김경성의 시들을 다른 측면에서 읽어보면 여행의 기록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규방 閨房에 있으면서 언제 그렇게 많은 길을 걸어갔던 것인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적도 아프리카에서 고산의 티벳까지, 실크로드를 품에 안은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덧무늬 토기가 낙엽처럼 밟히는 폐사지까지 시인의 눈길, 발길이 닿은 곳들이 질펀하게 깔린 시편들은 무한천공에서 외롭게 빛나는 밤하늘 별처럼, 산사의 처마 끝에 매달려 바람을 기다리는 풍경처럼 독자들을 환상과 경이로운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여행의 기록이라고 말했지만, 김경성의 여행은 유람과 새로운 소재의 발굴에 목적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그의 여로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서서 생명의 아름다움과 연기 緣起를 확인함으로서 삶의 역경과 곤궁함을 상쇄하려는 긍정적 세계관의 분투에 바쳐져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는 緣起觀은 새로울 것도 없지만 시인의 토로에서는 현실감을 가진 이미지로 도드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시「날카로운 황홀함」은 화순 운주사 와불에 대한 이야기지만 "운주 와불을 보려면/ 와불 옆에 있는 소나무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중략) 그 자리에 오래 서 있는 지 여백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라고 적시함으로서 이것과 저것이 서로 둘러싸는 경지, 혹은 여백 읽기가 한 대상을 알아가는 한 방도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법은 시집 『와온』전편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수사 修辭로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감정의 과잉이 없이도 에둘러 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기도 한 것 이다. 어떤 현상의 배후를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뿌리로 굴착해 들어가는 시편들은 마치 켜켜이 퇴적되고 매몰된 트로이 유적이 품은 연대가 다른 각각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현장에 마주 서 있는 듯한 황홀감마저 느끼게 하는 것이다.

 

 

동박새가 동박새를 부르는 소리는 붉다

소란스러운 동백 숲, 가만히 있지 못하겠다

황홀한 제 몸 열어서 동박새의 부리를 담는

동백, 상처 난 자리에

붉은 혀를 대어보니

달큰하고 끈적거리는 심장의 맛 가슴을 할퀸다

잉잉거리는 꿀벌들의 소리 폐 깊숙이 파고드는

무위사 동백 숲,  붉은 그늘이 너무 무거워 빠져나갈 수 없다

발에 밟히는 동백꽃 향기에 미끄러져서 그만, 붉은 꽃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내 몸 가득 꽃이 피었는지

동박새 긴 부리를 내 몸에 대고 쪼아대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꿀벌들

음모를 꾸미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먼데 몸에 붙은 꽃 너무 붉다

 

극락보전 뒤 동백 숲 동박새 소리, 풍경 흔들어대며 붉은 그늘 끌고 온다

 

                                                                                    - 시 「붉은 그늘」전문

 

 

 붉은 그늘이라니!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동박새 울음소리가 붉어 동백이 붉은가? 동백이 붉어 이 모든 만물이, 모든 몸과 마음이 붉어지는가? '붉음'으로 혼연일체가 되는 생명의

환희가 소름끼치는 시를 읽는 독자들도 장작불처럼 후끈 달아오르는 당혹감에 빠지지는 않을런지 자못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이 김경성의 시편들은 유무형의 사물들을, 관념들을 의인화하고 때로는 동일성을 추구하면서 회통의 영지를 넓히는 탐미주의자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탐미 眈美는 시인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취향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선험적 先驗的으로 구비하고 있는 덕목을 찾아가는 행위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 말은 즉,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나 현상은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가지며, 그 가치는 존재와 존재가 마주치는 순간에 섬광처럼 번지는 열락같은 것으로 이것을 온전히 포착하여 받아 적는 일이 시인의 과업임을 천명하고 있지는 않은지 궁구할 필요도 제기될 것이다.

 

 

달의 의미

 

 한 때 시인은 예견자이거나 시대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 각광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범인 凡人들이 무심코 넘어가거나

예측하지 못하는 시대적 징조를 예민한 촉수로 들추어내어 범인들로 하여금 각성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선지자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이다. 아니면 한 때의 사조로 치부해 버려도 그만일 테지만 여전히 개인의 낭만적 감성과 유미적 唯美的 취향이 결합한 형식주의 시관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에 디지털시대의 도래와 맞물려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적 경향이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는 형국이기도 하다. 어째든 다양한 포즈와 색깔로 문학이 외면당하고 시가 죽어가는 역경을 헤쳐나가는 이 땅의 시인들이 이룩한 시적 성취는 격려와 위로를 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다소 장황하고 진부한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꺼내어 보는 것은 오늘의 시인들이 이러한 여러 갈래의 조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자신만의 목소리와 색깔을 찾는데 주저하고 있는 딜레마에 봉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김경성 시인의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시집 『와온』에 드러난 바의 소회는 그 어떤 경향의 그늘에도 속하지 않음으로서 '외롭다'는 사실에 있다. 불교적 상상력에 기댄 작품들이 산견되고 있지만 그러한 작품 속에서도 노장 老莊의 생각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고 때로는 서구적 취향마저 드러나는 복합성을 띄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런 복합적 사유가 시인의 정체성을 흩트려 놓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시인의 독특한 강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눈치빠른 독자는 이미 알아채버렸겠지만 시집『와온』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상징은 '달'의 이미지이다. 「달의 궁전」, 「달의 뒤편 1」, 「달의 뒤편 2」, 「붉은 달에 기억」등 달을 소재로 삼은 시편은 나무나 바람과 같이 빈번히 등장하는 소재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편수에 속하지만 시인이 의식하고 있던 아니던 간에 시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중요한 기제임은 틀림이 없다고 보아진다. '달'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서구의 전통에서 '달'은 불길함, 변덕스러움으로 표징되는 반면에 북반구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풍요와 극즉반 極則反의 자연 변화의 상징물로 생활 속에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상용하는 양력 陽曆보다 달의 변화에 절기를 맞춘 음력陰曆이 농경문화에 더 실용적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기울면서 차오르고, 차오르면 다시 야위는 달의 무한한 반복성은 난관과 신고 辛苦를 이겨 나가게 하는 에너지였던 것이다. 흥망興亡과 길흉 吉凶이 오가는 삶에서 달은 기원의 상징이고 발복의 피난처였던 것이다. 시인의 심상에 달은 모든 존재를 비추고 감싸고 위로하는 너끈한 힘을 가진 피난처이기도 하며 구원을 염원하는 사원이기도 한 것이다. 그 한 예를 시「달의 궁전」를 감상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하자.

 

처음부터 높은 곳에 달의 방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해찰 하는 사이 달은

나무 우듬지에 걸터앉아 호시탐탐 우리 근처를 배회했던 것이다

날개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철근 콘크리트 기둥을 나무 모양으로 세우고

수백 채의 집을 지어 달의 방을 만들었다

비밀번호를 몰라도 방으로 들어가는 법을 아는 달은

지금도 몸 굴리거나 몸 열어 여러 개의 방을 삼키면서

사람들을 끌어안는 것이다

가장 높은 꼭대기의

집 한 채,

다른 집보다 한 뼘은 더 깊은 방에 사는 그가

보름날 금실로 짜 넣은 달그림자 접어놓고

달의 문을 열어 내 손에 열쇠를 쥐어주었을 때

솜털 세운 달의 가슴 부풀어 올라

물오른 나무도 덩달아서 향기 분질러대며

열꽃 같은 꽃망울 터트렸다

문을 열고

쏟아져 나오는 달빛

삼키며 달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달의 궁전은, 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닳아버린 달의 안쪽이 다시 커지는 만큼의 시간이거나

먼 곳까지 빛의 그물 드리워 달의 몸이 작아질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

달의 문짝 너머로

부풀어 오른 달의 가슴이 보이는

그의 방이 달의 궁전이다

 

 

 어디 그 뿐인가? "오래된 탑이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것은/ 탑의 가장 높은 찰주 끝에 달빛이 걸렸거나" - 시 「달의 궤적」 부분, "달의 뒤편도/ 푸른 이끼보다 더 은은한 것들로 덮여있어/ 지느러미가 달린 말들이 파닥거리고 있을까" - 시「달의 뒤편. 1 」부분, "방파제 너머 포장마차 / 연탄불 화덕 위에 석쇠 달구어져 벌겋다 /반쯤 타다 만 달 덩어리 아직 식지 않았는지/ 불그레한 얼굴 가리지 못하고 흐린 구름 끌어다 놓았다" -시「붉은 달에 관한 기억」 부분에서처럼 고개 들어 우러러보는 신앙적 대상물이 아닌 바로 우리 삶에 놓여져 있는 광물 鑛物이거나 언어이거나 음식물로 자연스럽게 환치되는 것을 목도하게 됨으로서 내재적 심상의 확장을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물활론이나 토테미즘의 성향이 아닌, 시인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서 이룩한 소중한 성과로 보여지는 것이다.

 

 

시의 진정성

 

 그렇다고 해서 시집 『와온』을 통하여 시인의 성취를 성급히 가늠할 수는 없다. 치밀하고 내밀하게 사물과 현상의 속살 깊숙이 들어가서 결 고은 생명의 숨소리를 듣고 그 아름다움을 받아 적는 시인의 독법은 충분히 아름답고 독창적이지만 의도적으로 생활을 배제하거나 은폐하고 있는 듯한 시편은 '떠남'에 중심추를 놓으므로서 구체적 현실을 놓치고 있다는 취약점을 노정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지나친 회고와 퇴행이라는 함정을 피해 나가는 것이 앞으로 시인이 극복해야 할 과제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시 「실크로드」는 앞으로 시인이 건너야 할 현실과의 대결을 감당할 의지를 보여주는 전환점에 놓여 있는 시로 주목할만 하다.

 

 

신당동 집 아래층 양복공장

실크로드에서 카펫을 짜던 사람이 있다

새벽부터 시작되는 재봉틀 소리

사막으로 돌아갈 길의 지도를 그리고 있다

 

안개 걷히지 않은 새벽 여섯 시

낙타를 타고 먼길 떠나는 사람의

손끝 아린 비단 실

씨실 날실 그가 걸어갈 길의 무늬를 그린다 

온종일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던 길

돌아보면 발자국은 바람에 지워져 있었다 

밤새 짜던 카펫 속 길,

모퉁이에 앉아 마시는 박하차처럼

마음 끝에 걸리는 알싸한 실타래는

다음 날 새벽이 오도록 멈추지 않는다

길을 벗어나지 못했다

 

재봉틀 소리를 타고 실크로드를 걷는다 

샹그릴라는 멀지 않다

                                                    - 시 「실크로드」전문

 

 

 경쾌한 리듬과 현실과 환상을 적절히 직조하면서 노동의 고단함과 그 고단함 속에서 새롭게 열려가는 길을 희망하면서 '실크로드'라는 교류와 '샹그릴라'라는 이상향의 행복한 접점을 간구하는 시인의 눈길은 앞으로의 시작詩作에 든든한 주춧돌이 될 것임을 믿는다.

아무리 시가 허구fiction이고 상상력에 기대어 있다 하더라도 머리 만으로, 손끝으로 쓴 시와 자신의 삶을 대치시키고 투영하면서 가슴으로 쓴 시는 그 격이 다르지 않겠는가.

 

 글을 마무리하면서 주마간산으로 『와온』을 읽은 것은 아닌 지 두려움을 느낀다. 이 길지 않은 글은 시인과『와온』의 그림자를 짐작해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깊은 속살은 독자들이 더듬고 아로새겨야 할 여백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같은 길을 가는 동도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김경성 시인은 시의 진정성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고 있는 든든함이 가득한 사람이다. 아는 만큼, 느끼는 만큼 주어진 대상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을 줄 아는 세밀함과 진지함, 자신의 삶과 그것들을 아프게 버무리는 진정성이 우뚝해 보여서 한층 더 기쁨이 크다.

부디 시집 『와온』을 출발점으로 삼아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돌진하는 패기가 북돋아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