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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과 예술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8. 25. 16:17

장인과 예술가

                                           나호열

 

 

 우리는 종종 장인과 예술가를 혼동해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장인이나 예술가나 다 같이 어느 특정한 분야에 특정한 재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해도 무방하겠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장인과 예술가는 층위가 다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분야에 능숙하고 세련된 물건을 만들어 내었을 때 匠人이라고 칭한다. 우리 주변에서 장인이라 일컬어지는, 옛것을 재현하고 보존하고 그 형태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를 장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장간에서 만들어내는 칼이나 낫을 예술품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다 하더라도 생산된 칼이나 낫이 실생활에 유용하다 하더라도 그 칼이나 낫을 예술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듯이, 희소성과 더불어 창조성이 겸비되어 있지 않으면 예술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인의 경지에서 예술가의 경지로 나아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예술가 스스로는 창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희소성과 창의성이 결여되어 있을 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칼이나 낫 정도의 가치를 지닌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장인이 예술가보다 낮은 수준의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 오해하지말기 바란다. 고려청자나 백자를 만든 陶工들은 장인인가? 아니면 예술가인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어떤 기능의 숙련도에 따라서 장인과 예술가의 반열은 뒤바뀔 수 있다는 점만 기억해 두기로 하자.

 

 

 어떤 재능은 타고난 것일 수도 있고 후천적 훈련과 학습에 의해서 발전될 수도 있다. 흔히 천재라 불리워지는 사람들은 훈련이나 교육을 통하지 않고도 영감에 의해서 고도의 기능을 발휘하거나 작품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진 천재성은 우리가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를 보여주기도 하고 새로운 미학적 과제를 우리들에게 부담스럽게 내놓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름들에게 도덕성을 따지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문제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들이 생각한 것, 그들의 생각을 표현해 낸 일체의 창작품은 도덕적 가치로 환산하거나 인간성의 문제로 환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이에 관련된 논쟁이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사람에게는 생산된 작품이 생산자와 밀접한 관계에 있으므로 총체적인 판단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되어질 수도 있으며 다른 편에서는 작품과 생산자와는 전혀 별개의 상태라고 주장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거론하고 있는 이런 문제들은 물론 이 글의 주안점이 아니다. 글의 요지가 지나치게 확대되거나 비약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특정한 분야, 문학, 그 중에서도 시 쓰기에 한정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표현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것, 이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자신을 증명하고픈 욕구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런 욕구가 강열하다고 해서 모두 작가나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글쓰기의 능숙함. 자신이 의도하는바를 표현할 수 있는 숙련이 필요한 것이다. 선천적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별도의 교육이 없이도 이 과정은 뛰어넘거나 약간의 교육 정도로도 넘어갈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약간의 재능을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확대시키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훌륭한 작품을 쓰고 작가, 시인으로 성장해 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함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육에 기꺼이 임한다. 글 쓰기의 방법론을 배우고 수사법을 익히며 글쓰기의 기능에 집착한다. 말하자면 장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일생에 한 번 겪고 넘어가야 하는 紅疫처럼 이 단계를 무시하고서는 창조자, 예술가의 경지에 결코 올라설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엄밀하게 말해서 예술가라고 할 수 없는 얼치기 예술가들이 우리 주변에는 허다하게 많다. 수제 빵과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빵은 무엇이 다른가? 인스턴트 음식과 집에서 손수 만들어 먹는 음식은? 프로그래밍된 자동화 공정을 통해서 만든 제품에서 우리는 손맛을 찾을 수 없다. 사람의 공력,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집중과 정성은 기계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글쓰기의 방벌론과 수사법은 하나의 샘플에 불과한 것이다. 새로운 글쓰기의 방법론과 수사법을 터득하는 과정을 깨닫는 것이 예술가로 탄생하는 첩경이면서 애로가 되는 것이다.

 

 

 " 첨삭지도나 퇴고는 불필요한 것인가?"라고 물을 때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한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서 불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작품의 전체적인 얼개에 대해서 손질을 하는 것이 작품을 쓴 사람의 입장에서는 깨닫지 못하는 사항이므로, 좋은 의미로 졸탁할 수 있지 않느냐하는 것이 질문의 요지라면 다시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다. "한 작품에 대해서 첨삭을 행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작품의 의도가 훼손되는 것이오."

퇴고란 주제의 흔들림 없이 마지막 손질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큰 주제를 뒤엎어버릴 수도 있는 퇴고라면 그 글의 진정성 마저도 의심스러워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뜻을 깊게 헤아릴 수 있는 작품들을 주변에서 만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잘 쓴 글이라고 해서 좋은 작품이라고 섣불리 말 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흠결을 찾아보기는 어려우나 기성품의 냄새가 나는 경우, 자신이 어렵게 더듬어가면서 이루어낸 경지가 아니라 책에서 얻어들은 지식으로 포장되어 있는 경우, 한 시대의 경향을 약삭빠르게 따라가면서 흉내를 내는 경우, 자신의 체험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그 체험의 반성과 숙고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에는 훌륭하거나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나 작가들에게 그들이 생산해 낸 작품과 동일화를 요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에로틱한 글을 썼다고 해서 그 작가나 시인을 에로틱한 인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마땅치가 않다. 작품의 내용이 고상하고 도덕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작가나 시인이 그러하리라는 추측 또한 옳지가 않다. 한 마디로 작품과 작가는 별개임이 분명하다. 작품의 이해와 감상에 있어서 작가나 시인의 생애를 대입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작품은 좋은데 작가나 시인의 생활이 그에 반한다고 해서 비난을 퍼붓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좋은, 훌륭한 작가나 시인은 어떻게 탄생하는 것인가? 잘 쓴 작품을 넘어서 훌륭한 작품에는 작가나 시인의 고뇌가 담겨져 있다. 철학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정답을 찾을 수 없는 우리 삶에 있어서 끊임없이 부정하고 회의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몸짓을 부벼대는 작품이 좋은 것이며 세간의 평판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고발하고 반성하는 작가나 시인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담화를 언급해 보겠다. 최근에 우리는 법정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 같은 종교지도자를 잃었다. 그 분들은 우리와 같은 범부들에게 어떤 삶이 아름다운 삶인지 일러주신 분들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들의 생애를 폄훼하는 일도 있다. 말과 행동이 그들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그들은 인간의 삶을 살다 가신 분들이지 하느님이나 부처님은 아니었다. 그 분들은 인간으로서 절대신을 향해서 한걸음씩 다가갔던 분들이지, 살아있는 부처나 하느님은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이 부족한 인간임을 깨닫고 완성을 향하여 치열한 구도를 행했던 본보기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불완전한 자신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예술가, 시인이나 작가들에게 가장 큰 수행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