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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한국문학 정책의 방향, 어디로 향할 것인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7. 19. 09:49

한국문학 정책의 방향, 어디로 향할 것인가?

                                                            나호열

 

한국문학의 현주소

 

이 땅에 현대문학이 뿌리를 내린 지 한 세기가 지났다. 우리말이 가진 특수성과 번역체계의 문제로 아직까지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분야와 발맞추어 한국문학의 세계화가 성취될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다고 보여진다.

문학교육의 체계 구축과 생활화가 활착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대학의 문학 관련학과는 넘칠 정도로 개설되어 있고 전국적으로 삼 백여 개가 넘는 문학관련 잡지들, 한국문인협회, 한국작가협회 등의 조직 등은 나름대로의 이슈와 목표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경향 각지의 일간지들이 신춘문예를 통하여 신예작가들을 배출하고 있고 잡지들도 과다하다 싶을 정도의 신인들을 내보내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 창작활동을 지원하고 양성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인프라도 소홀하다고 볼수는 없다. 비록 민간기구로 전환되었다고 하더라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경기문화재단, 인천문화재단, 대산문화재단 등의 법인들은 대규모의 문학지원체제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문학의 현주소는 생산자이면서 공급자인 작가와 시인은 넘쳐 나는데, 수요자인 독자들의 감소라는 공급 과잉이라는 현상에 직면하고 있다는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문학의 위기를 말하기도 하고, 아예 문학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성급한 결론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과거 문학이 담당하고 있던 문화 향수는 영상매체 또는 인터넷 매체로 대체되고 있는 현상을 묵과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문학 자체의 반성과 갱신이 요구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문학과 다른 매체를 혼융함으로서 문학의 영역을 확대하려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를 통해서 지면을 확보하고 독자층을 끌어들이는 시도도 있었고, 아예 인터넷 문학이라는, 컴퓨터의 속성을 이용한 문학 창작의 방법을 개척하는 시도도 야심차게 진행되기도 했었다.

 

어째든 한국문학은 분단국가라는 사회적 특성, 개발로 인한 자연 파괴와 이에 맞서는 생태의 문제, 유블선 儒佛仙으로 대표되는 동양 정신의 보고 寶庫를 지니고 있는 토양 아래서 얼마든지 외연을 확대하고 세계화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한국문학의 활성화와 발전을 위해서는 어떤 정책을 펴나가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분석과 처방은 외형적 발전과 단기적 성과에 급급하지 않고 보다 장기적 안목과 투자를 ㅗㅇ해서 내실을 다져나가는 방향을 잡아나가야 한다고 보여진다.

 

메이저리티와 마이너리티

 

한국문학을 추동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누가 목표와 경향을 설정하고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인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현실을 직시하여 볼 때 문학에 있어서의 주도적인 세력은 대체로 유명대학에서 문학관련 교직을 수행하는 사람들, 출판업을 겸업하고 있는 대형 잡지사들, 언론사들일 것이다. 문학교수들이 배출하는 신진들, 대형 잡지사에서 주목하고 양성하는 작가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작품들을 꼼꼼이 살펴보기에 어려움을 겪는 언론 데스크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볼 때 이와 같은 연결고리는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독자들 또한 문학 작품의 정보를 위와 같은 경로를 통해서 취득할 수 밖에 없으므로, 지명도가 떨어지는 잡지에 발표되는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조차 얻기 힘든 상황일 것이다. 특히 소설과 같은 분야에서는 아무리 좋은 작품을 생산한다고 해도 작품집을 출간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진 출판사를 찾기 힘들고, 홍보 또한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스스로 사라지거나 작품 역량이 떨어지는 예를 수없이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상업주의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 정글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는 것이므로 이에 마땅한 처방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시장원리에 의해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황에서 이조저도 아닌 마이너리티의 존재는 과연 무시해도 좋을 것인가? 언론의 조명을 받고 유명 출판사에 의해 간행되는 시집이나 소설집만이 우리 문학사의 한 면을 차지해도 좋을 것인가?

문학의 저변 확대와 튼튼한 기반 조성을 위해서도 마이너리티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 예술의 속성상 천재적 재능이 필요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라 하더라도 뒤늦게 재능이 분출되거나 작가적 역량이 분출되는 예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보아왔던 터이다. 문학의 생활화와 다양한 수요를 충족시킨다는 차원에서도 문학의 마이너리티를 위한 배려는 반드시 필요하다.

 

정부의 문학정책은 메이저리티 중심에서 마이너리티 중심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메이저리티들은 시장 경제 원리에 맡겨두고 예술의 수월성을 담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마이너리티의 발굴과 양성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면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통해서 생활 여력을 확보하고 있는 시인, 작가들에게는 물질적 지원보다는 명예적 지원책을 마련하고 생활여건이 미흡한 시인, 작가들이 작품 의욕을 상실하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창작 지원에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는 단순한 구휼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 지원 프로그램이나 문화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작가지원 프로그램은 그 효율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보여진다. 창작지원을 받기 위한 치열한 응모나 지역 문화센터에 일정기간 상주하면서 문학창작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시도는 또 다른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초래할 위험이 크다. 프로그램 운영이나 교수법을 터득하지 못한 작가들이 일반 대중과 마주칠 때의 문제점은 결코 작지 않다. 결국 그런 여건을 충족할 수 있는 작가들은 소수의 메이저리티에 할당될 수 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모니터링 제도의 도입과 제도화

 

많은 사람들이 현재 시행되고 있는 문학상이나 지원책에 대해서 의문을 갖거나 반감을 갖는 것은 심사의 공정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 것이다. 심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권위를 가지고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연계되어 있는 사람들과의 편파적 이해에 의문을 갖는 것이다.

해마다 시행되는 우수 잡지에 대한 평가, 창작지원 심사 등에 어떤 인사들이 참여하느냐에 따라서 당락이 결정된다는 사실이 불공정하다고 볼 수는 없다. 어차피 예술 창작물의 평가는 정성적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상시적이고 광범위한 모니터링을 시행하기 위한 평가단의 은행제 도입을 시행하고, 이제라도 예술인 DB 작업을 국가적 차원해서 시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제안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각종 응모나 평가에 있어 사안 마다 일회적으로 심사위원단을 선정할 것이 아니라 각 분야의 다양한 위원들을 선임하고 그 때마다 임의로 심사위원을 선정함으로서 나누먹기식, 또는 학연, 지연에 따른 불공적 심사를 불식시키자는 것이다. 아울러서 일 년 단위의 모니터링 위원을 선임하여 각종 매체를 통해서 발표되는 작품들을 살펴보고, 우수 작품으로 추천할 권한을 줌으로서 앞에서 언급한 마이너리티 작가들의 소외된 작품을 조명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가급적이면 모니터링단에는 메이저리티에 속하는 인사들을 배제하고 구휼이 필요한 예술인들을 상시 활동하게 함으로서 그들에게 창작의욕을 불러 일으키고 수월성을 높이는 기회를 제공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둘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두 번 째로 예술인 DB의 구축은 창작 지원이 필요한 시인, 작가들을 선별하고 선택과 집중을 행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정부 차원에서 시행하기 힘들다면 한국예총. 민예총 등 기간 문화예술단체에 용역을 맡김으로서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보체제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사전 지원에서 사후 지원으로

 

해마다 심심치 않게 떠오르는 화제가 문인들의 한 해 수입에 관한 것이다. 한 마디로 문학 작품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이 수 만원 내지 수십 만 원에 불과하여 대다수 문인들이 어려운 생활 여건에 고통 받는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수요는 적고 공급이 많은 상황에서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문학인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인가?솔직하게 말해서 이 땅의 누가 시인들에게 ,작가들에게 글을 쓰라고 명령했는가? 다른 장르에도 해당되는 의견이지만 예술인에게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작품과 빵을 바꾸지 않는다는 영혼의 자유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예술인의 권위는 일반 대중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가시밭길을 유유자적 걸어가는 위엄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묵묵히 걸어가는 예술인, 문학인의 자취인 작품의 평가를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과거와 현재에 시행되고 있는 각종 응모와 추천은 행정편의적이고 권위적이다. 보다 선진화되고 적극적인 문학정책은 찾아가는 지원, 우선 작가로서의 열정과 도전을 거듭하고 있는 작가를 주목하고 그들이 남긴 족적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예술교육의 체계화를 위하여

 

예술교육의 중요성은 지난 오월 서울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회의에서 충분히 검증되었다. 우리나라가 문화대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황폐화된 예술교육을 복원하고 보다 강제적으로 정서함양을 이루기 위한 방안을 채택 도입하는데 있다고 본다.

법이 마련되지 않고, 법을 구체화하기 위한 지원기구가 없어서 예술교육이 황폐해졌는가? 적어도 초등학교, 중학교 교육과정의 예술교육을 현실에 맞게 조정하고 각 장르의 예술인들이 학교 현장에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현재 시행하고 있는 방과후 특성교육이 더욱 전문화되고 현장에 참여하는 예술인들이 자존감을 상실하지 않는 방안도 강구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문학정책이 보다 대중들과 작가들이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장기적으로 시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단기간의 성과나 효율성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