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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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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3. 7.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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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시대의 연극 위기인가? 축복인가?

 

                                                                                                                                                       나 호 열

 

 

 영국하면 우리는 세익스피어를 떠올리고 내용은 알지 못해도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리어왕, 맥배드, 오델로, 햄릿을 외어낼 수 있을 만큼 세익스피어는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이다. 세익스피어의 탄생지 스트레드포드 어폰에이본은 세익스피어가 살았던 17세기 잉글랜드의 건축물을 재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년 내내 세익스피어의 연극을 볼 수 있는 관광 명소로 우리나라에도 일주일 정도의 일정으로 이곳을 둘러보는 관광 패키지 상품이 선보이고 있을 정도이다. 캐나다 토론토 근교에도 스트레드포드 어폰에이본을 본 딴 타운이 연극 공연의 메카로 명성을 날리며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런던의 웨스트엔드지역의 피카딜리 서커스에는 왕립극장을 비롯한 50여 개의 연극 공연 극장이 자리잡고 있어 세익스피어의 작품은 물론 아가사 크리스티의 ‘쥐덫’ 등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다양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게 남의 나라의 풍경에 취해 있다가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면 왠지 모르게 썰렁하고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인구 일 천 만 명을 자랑하는 서울에도 수많은 연극 공연장이 있기는 하다. 서초동의 예술회관, 장충동 남산 기슭의 국립극장, 광화문 한복판의 세종문화회관 등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대형 공연장들은 너무도 엄숙하고 조용해서 凡人들은 쉽게 들락거려서는 안될 것 같은 권위를 풍긴다. 발걸음을 옮겨서 신촌 언저리나 대학로에 들어서면 분위기는 급변하여 젊음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수많은 소극장들에서 공연되는 작품 포스터와 손님을 찾는 몸짓들이 활기를 불어넣는다. 서울연극협회(한국연극협회 서울시지부)에 가입한 극단이 어림잡아 160개가 넘고 가입회원이 이 천명을 넘는다고 하니 연극활동의 기반은 그리 취약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국립극장이나 예술회관 등은 상업성을 염두에 둔 대형 뮤지컬의 활용도가 높은 편이고 대학로를 중심으로 하는 소극장은 현대적 감각과 일상적 삶에 밀착된 공연에 치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전봇대에, 덕지덕지한 담에 공연 포스터를 붙이는 젊은이들. 티켓판매소에서, 지하철 입구에서 손님을 찾는 연극 지망생들을 지나칠 때마다 가슴으로는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오르고, 머리 속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가는, 상반되고 묘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오늘, 우리의 연극계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일 것이다.

 

 순수예술의 기반이 취약한 까닭이 순수예술이 지닌 생태적 숙명인 자본의 억압과 상업주의와의 대립 때문에 그렇고, 대중들의 외면에서 비롯된 것이 비단 연극 분야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혹독한 시련이 언제 그칠 것인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하는 자괴감에서 그렇다. 많은 젊은이들이 신분의 수직상승을 꿈꾸며, 스타를 꿈꾸며 영화나 방송국 주변을 맴돌고 있는 형국에 연극판에 뛰어든 일군의 젊은이들이 한편으로는 가엾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있어 기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소극장은 비좁고 그래서 불편하다. 비좁고 불편해서 가기가 꺼려지고, 비좁고 불편해서 아무렇게나 가기가 편하다. 우리의 연극은 아무래도 그 활력과 기반을 소극장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은 나와 같은 연극에 문외한만이 용감하고 유쾌하게 떠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나라에서 소극장이 출현한 것은 1968년의 일이었다. 극단 에저또가 을지로4가 언저리 건물을 개조하여 이동식 의자 4, 50개를 배치하고 1968년 6월초 개관기념 공연으로 신진 극작가 윤조병(尹朝柄)의 「건널목 삽화」를 무대에 올렸고 이어서 몇 개의 작품을 공연했다. 그곳에서 2년여 동안 활동한 에저또는 1973년 5월 18일부터 6월 7일까지 극단 가교, 동인극회, 작업, 예인극장, 극예, 현대극회, 에저또, 민예, 실험극장, 방주극회 등 10 여 개 신인들의 창작극과 몇 편의 번역극을 선보였던다..

이 때의 소극장 운동은 미국의 브로드웨이와 오프 브로드웨이 개념의 대립으로 비견하기는 어렵다. 해방 이후에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일천한 우리나라의 현대 연극이 대중성과 계몽성의 완전한 활착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뚜렷하고 강력한 오프 브로드웨이적인 개념의 연극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당시의 상황은 오늘날과 같이 영화나 방송 드라마 등 영상, 방송매체의 발전이 뚜렷하지 못했고 군사독재 정권의 검열이 엄중했던 시대적 상황에서 우리의 소극장 운동은 ‘젊은 연극’을 표방하는 신세대들의 새로운 존재 확인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이후 에저또 소극장은 자본력의 한계와 대중의 호응의 미약, 그에 따른 운영의 실패로 문을 닫게 된다.

 

 이후 1976년에 이르러「에저또」창고극장은 「三一路倉庫劇場」이란 새 이름으로 재개관하게 된다. 대지 40평에 건평 31평 무대 16평인 이 地下 소극장은 벤치스타일의 좌석으로 유휴遊休공간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1백명 정도가 관람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이원경(연출가)씨가 운영을 맡아 신인양성, 자료수집 및 보관, 그리고 사이코드라마의 연구개발을 위한 「연극연구소」의 附設을 계획하고 또한 판소리에도 관심을 가지고 특히 젊은층에 대한 보급에 힘쓰겠다고 포부를 밝혔으며 극단「자유극장」의 「대머리 여가수」를 첫 공연작품으로 올렸다.

이원경은 극단 운영의 동인제 시스템을 과감히 버리고 PD시스템제를 받아들였다. 동인제 시스템이 한 극단에 배우를 소속시킴으로써 한정된 연극 인구의 폭넓은 활용을 저해하여 궁극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나 창조성을 제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PD 시스템제는 작품의 성향과 필요에 따라 배우 및 스텝이 자유롭게 작품을 구현하는 시스템으로, 우리나라 소극장 체제가 상업주의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순수성을 지켜나가는 한편,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촉매제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1970년대 초반 대학에 발을 디딘 청년들에게 연극은 광활한 세계의 문을 여는 창문이었으며 드높은 이상으로 한걸음 올라서는 천국의 계단이었다. 청계천에서 남산 방향으로 가로막혀 있던 산동네가 통째로 헐리고 퇴계로와 을지로를 교차하는 삼일로가 개통되었다. 마침 삼일로 창고극장은 명동을 순례하는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었다.

 

 삼일로 창고극장은 시설미비의 미비로 몇 차례 폐관위기를 넘기고서 개성파 배우 추송웅秋松雄의 데뷔 15주년 기념 공연으로 프란츠 카프가의 소설「어느 학술원에 제출된 보고서」를 <빠알간 피이터의 고백>으로 각색 개명하여 1인극 무대를 올렸다. 이 모노드라마는 당초 열흘로 예정되었으나 공연을 급히 한달로 연장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으며. 추송웅이나, 이 연극에 대한 언급이 없으면 캠퍼스에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개막 보름만에 예매표가 1만장이상이 팔리는 신기록, 연기생활 15년 만에 쨍하고 해뜬 추송웅은「빠알간 피이터의 고백」을 혼자 제작, 기획, 연출, 장치, 연기까지 1인 5역을 해내었던 것이다. 객석 1백30석도 안 되는 삼일로 창고극장 무대에 올려지자 첫날부터 관객이 장사진을 이루어 개막 3시간 전부터 만원, 되돌아가는 관객이 입장객보다 많은 이변을 낳았다고도 한다. 수입면에서도 추송웅은 단 1 개월여 만에 1천 3백 만원의 수익을 올림으로써 제작비의 10배 이상을 벌어들였다. 즉 서울공연 32일 동안 1만 3천명 이상의 관객과 1천 3백만원 상당의 수익을 올려 모노드라마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던 것이다. 「빠알간 피이터의 고백」은 1969년부터 1972년 3년에 걸쳐 명동에 있던 카페 테아트르에서 週 1회씩 1백 회 공연을 가졌던 金東勳 1인극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뚝이」가 세운 1만명 입장기록을 쉽게 무너뜨렸다.

추송웅은 연극배우로서도 스타가 될 수 있으며, 작품의 완성도에 따라 대중의 호응을 받을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이후 많은 1인극들이 뒤를 이었으며, 소극장 운동의 정점을 이루는데 그의 역할이 컸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쉽게도 더 넓고 깊은 세계를 펼쳐 보이지 못하고 일찍이 세상을 떠났지만, 추송웅은 50년대를 넘긴 중년층에게 연극의 즐거움과 기쁨을 알게 해준 연극의 전도사였다고 볼 수 있다.

 

  연극의 존재는 인간의 실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연극의 기원은 祭儀의 풍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중대회(國中大會) ․영고(迎鼓) ․동맹(東盟) ․무천(舞天) 등 기록에 나타나 있는 여러 고대 제의는 가무백희(歌舞百戱)를 연행(演行)하였다고 전해지는 바 무용과 음악이 分化되기 전의 제의가 연극 속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연극이 원시충동 깊숙이 자리잡은 신비적 경험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은 연극의 본질인 ?생생한 감동?의 성질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듯 제의에서 춤과 몸짓은 본질적 요소를 이루었고 주문(呪文)이 단순한 소리에서 꽤 복잡한 내용의 이야기를 꾸며가면서 극적인 꾸밈새를 갖추어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의 내용은 제의가 갖는 공동체적(共同體的) 성격 때문에 집단이나 종족이 공유하는 성질의 것이어야 했고, 그들의 집단적 무의식에 깊이 뿌리박은 것이라야 했다. 여기에서 신화(神話)가 발생했고, 신화는 연극이 가장 먼저 얻게 된 드라마의 내용이었다.

 

 먼 옛날 그리스의 민중들은 풍요의 신 디오니소스의 신상을 들고 폴리스의 외곽에서 중심부로 행진했다. 그 축제에는 관객과 놀이패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 음유시인이 디오니소스의 탄생과 모험담을 모은 전설의 줄거리를 설명하고 중간 중간에 시를 읊었다. 이 음유시인이 연극의 첫 번째 배우였다. 그리스의 삼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는 이 배우의 수를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렸고 소포클레스는 코러스를 12명에서 15명으로 늘렸다. 에우리피데스는 영웅의 이야기를 소소한 일상적 고뇌로 주제를 바꿈으로써 더 폭넓은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아테네 귀족들은 올림푸스 신을 믿었고 민중들은 디오니소스 신을 숭앙했다.

민중과 귀족의 반목, 올림푸스와 디오니소스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연극의 궁극적 목적이었으며 민중들은 적의 침입을 관망할 수 있는, 한 쪽이 넓게 터진 극장에서 신의 음성을 듣고 배우를 통해서 민중의 염원을 신에게 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중했던 연극의 榮華를 오늘에 되찾기에는 힘들어 보인다. 현대인들은 ‘신을 버렸고’(니체), 관념 속에 떠도는 이미지들을 재현하는 기술을 습득했다(컴퓨터그래픽을 위시한 디지털 기술력). 매트릭스적 상황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삶의 은유와 상징을 말과 언어에서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한 영상이나 그 영상을 넘어선 회화적 이미지를 선호한다. 이러한 까닭에 오늘날의 연극은 다른 장르, 특히 영화가 가지고 있는 유연성과 대중성과 경합을 벌이는 일에는 손을 들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연극이 음악과 만나고, 춤과 어우러지는 등 연극의 영역을 확대 심화시키는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컴퓨터와 찰라적 영상에 몰두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붙잡아 두기에는 역부족인 듯이 보인다. 현대인 특히 젊은 세대들은 관중의 입장에서 - 마치 원형극장에서 접신을 기다리는 그리스 민중들처럼- 기다리는 일에 조급증을 낸다. 그들은 차라리 컴퓨터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가상의 세계에 들어가 적을 무찌르고 왕국을 건설하는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이런 마당에 연극이 수행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될까? 교과서적인 이야기지만 연극의 중요한 요소는 관객이다. 이 관객은 앞서 말한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관망자가 아니라 무대에서 활동하는 배우와 같이 호흡하고 배우와 대결하는 긴장을 연출하는 또 하나의 배우이다. 상징으로 가득 찬 무대를 바라보면서 순간 순간 스쳐 지나가는 동작과 대화에서 빚어지는 삶의 상징들을 짚어내는 역할이 관객이라는 배우가 수행해야할 역할이고 그 역할을 수행할 때 하나의 연극은 비로소 완성된다.

 

 소리 소문도 없이 인구에 회자되는 연극들이 적지 않게 상연되고 있다. 그 연극들은 디지털 기술에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음향이나 조명,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적 영상이나 자막등의 운용에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다른 장르의 예술보다 연극은 디지털 시대의 즐거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유일한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www를 보면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가? world wide web이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현대인에 틀림없다. www는 세 명의 여성을 뜻하는 서울의 어느 곳에서 공연되고 있는 연극의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