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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가치관과 풍속의 혼돈의 50년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5. 16. 16:21

<자유부인>과 희대의 제비족 박인수 사건:가치관과 풍속의 혼돈의 50년대
8.15해방과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이 휩쓸고 가면서 개막된 50년대는 대중문화사의 맥락에서 본다면 해방 전까지 모든 문화적 가치의 중심이었던 일본 문화를 대신해 미국과 서구의 문화가 빠르게 유입되면서 엄청난 정체성의 혼돈이 빚어진 시기라 할 수 있다.

8.15해방과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이 휩쓸고 가면서 개막된 50년대는 경제적 궁핍과 정치적 혼란, 문화적 혼돈이 극에 달했던 시대였다. “‘아아 50년대!’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논리를 등지고 불치의 감탄사로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던 시인 고은의 토로는 전쟁의 참혹한 역사를 겪은 50년대의 정신적 상실감과 황폐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중문화사의 맥락에서 본다면 50년대는 해방 전까지 모든 문화적 가치의 중심이었던 일본 문화를 대신해 미국과 서구의 문화가 빠르게 유입되면서 엄청난 정체성의 혼돈이 빚어진 시기라 할 수 있다.

춤바람, 댄스홀 열풍을 몰고 온 서양 음악

사회의 가치 기준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면서 벌어지는 정체성의 혼돈은 대중문화 전반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예컨대 이 시기 대중가요의 가사를 보면 빌딩, 스윙, 타이프, 멜로디, 로맨스, 아베크, 카우보이 등 영어 단어들이 불쑥불쑥 들어가기도 하고 목장, 산장, 미사, 성당, 마차 등 이국적 분위기의 단어들이 과시적으로 등장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대전 부르스> <닐니리 맘보> <비의 탱고> <노래 가락 차차차> <기타 부기> 등 제목에서부터 서양 음악의 영향을 직접 드러내는 노래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가요 양식이었던 트로트(뽕짝)를 대신한 서양식 가요의 공통점은 대체로 댄스의 리듬을 가진 춤곡이라는 점이다. 이는 50년대 중후반 사회문제로 대두했던 춤바람과 댄스홀 열풍에 맞닿아 있다. 소설 <자유부인> 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박인수 사건이 세간의 화제를 몰고 왔던 게 이 시대의 일이다.


보수 지식인층의 위기의식을 불러온 통속 소설 <자유부인>

<자유부인> 은 1954년 <서울신문> 에 연재된 작가 정비석의 소설이다. 대학 교수 부인인 주부 오선영이 우연히 대학 동창을 만나게 되면서 젊은 대학생과 춤바람이 나고, 남편 역시 젊은 타이피스트에게 연정을 품는 등 가정 파탄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결국 여주인공이 잘못을 뉘우치고 가정으로 돌아온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이 신문에 연재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서울대 교수 황산덕이 <대학신문> 을 통해 이 소설이 대학 교수를 모독하고 있다는 비난을 퍼부었고 이에 대해 작가 정비석이 <서울신문> 지면에 반박문을 실으면서 <자유부인> 은 일약 사회적인 논쟁거리로 비화하였다. 정비석이 반박문에서 황교수의 글이 ‘소설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이라고 비판하자 황산덕은 다시 <서울신문> 기고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귀하의 <자유부인> 은 단연코 문학작품이 아닙니다. 이러한 내용의 <자유부인> 이 전쟁하는 한국의 신문지상에 연재됨으로써 철없는 청소년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더구나 근거 없이 대학의 위신과 그 대학에 의하여 건설될 민족문화의 권위를 모욕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귀하야말로...문학의 적이요, 문학의 파괴자요,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되는 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른바 막장 드라마가 난무하는 요즘의 눈으로 보면 도무지 싱겁기 짝이 없는 애정행각이 묘사되었을 뿐이고 게다가 결국은 다시 가부장적 질서로 회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소설에 대해 이렇게 심한 비난이 터져 나온 것은, 이 시대 사회적 가치의 혼란상을 보는 보수 지식인층의 위기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불순세력으로 조사받은 자유부인의 작가 정비석

<자유부인> 은 54년 1월부터 8월까지 연재되었는데 소설 연재가 끝나자 이 신문의 가판 부수가 5만여 부나 줄었다고 한다. 또 단행본으로 발매 되어 14만부가 팔려나가 우리나라 출판 사상 처음으로 10만부를 넘긴 베스트셀러로 기록된다. 이 작품은 1956년 한형모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그 해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기도 했다. 영화 역시 소설 만큼이나 논란을 불러왔는데, 특히 주인공 오선영과 대학생 춘호의 키스 장면, 오선영과 한 사장의 포옹 장면이 문제가 되어 상영 전날까지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고 결국 네 군데 정도를 잘라낸 다음 상영 허가를 받았다. 요즘도 가끔 영화 채널을 통해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당대의 사회상과 풍속도를 담고 있으면서 여성의 성적 욕망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맘보 음악에 맞추어 사교춤을 추고 무희의 춤을 구경하는 캬바레 장면은 지금 보아도 놀라울 만큼 파격적이다. <자유부인> 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지만 56년도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 을 뛰어 넘는 작품은 없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이다.
한 가지 더. <자유부인> 에 대한 논란은 단지 도덕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정비석은 당시 치안 기관에도 불려가 ‘이북과 관련이 없는지’ ‘불순 세력의 공작비를 받은 게 아닌지’ 추궁받았다고 한다. 이북에서 <자유부인> 이 남조선의 부패상을 그린 교양 자료로 사용되었다는 이유였다.

온 나라를 뒤흔든 희대의 제비족 박인수 사건

<자유부인> 논란이 있던 한 해 뒤 1955년 6월에는 이른바 ‘박인수 사건’이 터졌다. 박인수라는 청년이 해군 장교를 사칭하고 댄스홀을 돌며 여대생을 포함한 70여명의 여인을 농락했다는 사건이다. 한국 최초의 제비족 사건인 셈이다. 피해자 가운데 다수의 여대생이 포함되어 있고 게다가 70이라는 숫자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이 사건은 뜨거운 사회적 관심사가 되었다. 피의자 박인수가 법정에서 “내가 만난 여성 중 처녀는 미용사 이모씨 한 사람밖에 없었다”는 진술을 하면서 이 사건은 여성의 정조 관념을 둘러싼 논란으로 비화하였다. 이 사건의 1심 재판에서 박인수는 공무원사칭 부분만 유죄가 인정되었고 이른바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담당 판사는 기자들에게 ‘정조라고 하여 다 법이 보호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에 비추어 가치가 있고 보호할 사회적 이익이 있을 때 한하여 법은 그 정조를 보호하는 것이다’라고 소감을 말한 바 있다. 이른바 ‘법은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는 문장으로 축약되어 두고두고 회자된 발언이다. 이 판결은 엄청난 논란을 낳았고 결국 항소심을 통해 박인수는 1년형에 처해지게 된다.

시대를 반영하는 진한 절망과 허무의 그 시절의 노래들

<자유부인> 논쟁과 박인수 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50년대 전후 한국 사회의 한 풍경을 보여주는 풍속화다. 성 관념과 풍속의 변화, 여성에게만 정조와 순결을 강요하던 사회 윤리와 여전히 강고하게 버티고 있는 가부장적 질서 그리고 춤바람과 댄스홀로 상징되는 미국 문화의 급속한 유입과 가치관의 혼란이라는 풍경이 그 속에 들어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혼란스러운 향락의 풍경 아래 깔려 있는 절망의 그림자이다.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운 전후의 피폐 속에서 사람들은 아주 쉽게 순간의 향락에 몸을 던졌다. 사교춤 바람으로 표현되는 향락적 사회 풍조는 전쟁을 겪은 후의 폐허와 가난, 절망을 애써 잊고 싶어 하는 대중의 심리를 반영한다. 사교춤은 미국 문화의 상징이었고 미국은 물질적 풍요와 쾌락의 상징이었다. 그 물질적 풍요와 쾌락은 오랜 식민 체험과 동족상잔을 겪은 한국의 대중에게 도달하고 싶은 이상의 세계였지만 그런 이상은 단지 환상일 뿐임이 분명했다. 향락 그 자체를 찬양하고 있는 그 시절 노래들에서 오히려 진한 절망과 허무를 느끼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피었다가 시들으면 다시 못 올 내 청춘
마시고 또 마시어 취하고 또 취해서
이 밤이 새기 전에 춤을 춥시다
부기우기 부기우기 부기우기 부기우기 기타 부기

<기타 부기> (1957, 김진경 작사, 이재현 작곡, 윤일로 노래)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화란춘성 만화방창 아니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노래가락 차차차> (1954, 김영일 작사, 김성근 작곡, 황정자 노래)




김창남의 대중문화  <KB레인보우인문학>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