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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시티즌citizen에서 네티즌netizen으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3. 11. 10:25

                         시티즌citizen에서 네티즌netizen으로

                                                                                나호열

 

 아데이만투스가 그 때 중간에 끼어들면서 한마디 하였다.

 

「이것 보세요, 소크라테스님, 만약 당신을 향해서 이렇게 항의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즉 국민을 전연 행복하게 해주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개인 탓으로만 돌리고 있다. 말하자면 행복하지 않은 게 자기 탓이라는 거지요. 국가란 사실상 국민의 것이기는 하지만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는 단맛이 하나도 없다. 다른 지배자들처럼 땅을 자기 것으로 해서 가질 수도 없고 튼튼하고 큰 집을 지을 수도 없으며, 그 밖에도 신들에게 개인적으로 재물을 바칠 수도 없고, 귀한 손님이 와도 제대로 접대를 할 수도 없다고 항의한다면 말이지요. 또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계속 항의할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소유물로 통칭되는 금은金銀 등의 모든 것은 가질 수 없고 오직 용병 傭兵처럼 국가를 지키는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이 등신과 같은 신세가 되어 있다고 항변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말하는 것 이해가 가네, 그렇게 항의하기도 하겠지.」이렇게 나는 대답하였다.

 

「그 뿐이 아니겠지. 그 사람들은 자기가 밥만 얻어먹는 일꾼 같다고도 하겠지. 그러니까 먹고 지내는 일 외에는, 보수를 받을 수 없어, 자기 돈을 들여 여행도 하지 못하고 또 기생이 있는 술집에 드나들어 술을 마시고 그녀들과 어울릴 수도 없고, 그 밖에도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처럼 돈을 전연 쓸 수 없다고 말일세. 자네가 한 항변 속에도 이 같이 허다한 내용이 모두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의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 자네는 어떻게 변명해야 좋다고 판단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계속 검토해 나가면 어떤 말로 답변해야 좋을지, 해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네.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지, 그러나 우리들이 세운 국가 안에서는 어느 한 계급만이 그렇게 행복하게 살 수는 없는 것이지. 모든 국민이 다 그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특히 이와 같은 국가에서 가장 정확하게 정의를 발견할 수 있으며, 반대로 가장 나쁘게 통치되고 있는 나라에서는 부정의 不正義를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들이 계속 관찰해 나가는 동안에, 처음 우리들이 탐구해 오던 그것을 판결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네. 우리는 이제 우리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한 나라를, 소수인을 특정 지어 그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 전체가 행복한 상태에 놓이도록 국가를 이끌어 나가야 하네. 그 반대의 경우의 국가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고찰해 보기로 하고 말일세....중략... 결국 이렇게 종합해 말할 수 있지. 국가 수호자를 임명하는데 있어서 그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행복이 주어지도록 주의를 기울일 것인지, 혹은 그 국가 전체에 주의를 기울여 마침내는 그 국가 전체에 행복이 생겨나도록 할 것인가를 잘 검토해서, 그들 수호자나 또는 협조자들을 억압해서라도 우리들이 명하는 일을 실행해 나가도록 해야하지. 한편 기타 국민들에겐 가능한 한 자기 직분에 뛰어나도록 타일러서 그 결과로 국가 전체가 번영하고 옳은 정치가 베풀어지도록 제 나름의 위치에서 그 본질상으로 용서될 수 있는 방법으로 행복에 참여케 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이천 오백 년 전,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아테네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인구가 적은 도시 국가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국가』에 묘사된 국가의 형태는 현명한 철인이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고 능력에 따라 나뉘어진 각 계층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다함으로써 국가와 개인간의 조화를 이루는 이데아를 표명하고 있다. 독약을 마시고 죽어간 소크라테스의 운명은 바로 국가의 이데아를 신봉하는 그의 열렬한 의지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산업혁명이후 경제의 이념으로서의 자본주의, 정치적 축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시민사회로 이행되었다. 시민사회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신봉하고 국가중심사회를 지양하고 세계주의를 지양한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도 개인은 전체 속에 부분으로서 존재할 때 비로소 그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회주의 경향이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와 같은 국가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주장들이 시민사회를 위협하는 요소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어째든 시민의 개념은 신분 계급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확장하려는 의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 수는 없을 것이다.

 

 로크가 주장한 바 시민은 사회계약에 의해서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 그들의 권리의 일부분을 통치자에게 이양하고 재산과 생명의 보장을 약속 받는다. 이러한 근대사회에서의 국가라는 전체와 시민이라는 개인의 영토는 20세기 후반 특히 1990년대 이후 전자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다시 한 번 자리바꿈을 하게 된다. 컴퓨터의 진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 디지털의 개념은 아날로그의 미분화 未分化된 공간과 시간을 잠식하고 가상공간 cyber space를 만들어냄으로서 새로운 국면으로 시민사회를 탈바꿈 시켰다.

 

 컴퓨터를 도구로 하고 인터넷이라는 연결통로를 가지게 된 인간은 더욱 철저한 개인주의 cosmopolitanism을 밀고 나가며 기존의 NGO 활동에 폭발력을 가중시켜 기존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무력화 無力化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바야흐로 네티즌으로 불리우는 가상공간 속에서의 권력은 전방위적으로 그 위력을 드러내고 있다. 이미 그 위력은 정치활동을 비롯한 전 영역에서 입증된 바 있거니와 방송 연속극의 스토리를 좌지우지하여 주인공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힘이 네티즌들에게 주어지는 현상도 볼 수 있다. 네티즌들은 가상공간 속에서 게릴라처럼, 익명으로 활동하면서 그들의 의도를 표출하고 관철해 나가고 있다. 역으로 이런 네티즌들의 성향을 간파하여 네티즌 자체를 시뮬레이션화 함으로써 여론을 조작하거나 왜곡시키는 역기능도 드러나고 있다.

 

 디지털의 생명은 속도와 정보의 엄청난 집적과 전파에 있다. 우리나라가 IT의 강국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디지털의 핵심 요소인 반도체 산업의 선진화와 국가생존 전략으로 인터넷 산업이 채택된 데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 인구의 급증은 우리의 생활 양식을 바꾸고 의식을 바꾸며, 세대간의 의사 소통 간격을 훨씬 넓게 벌려 놓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네티즌은 멀티즌multizen으로 진화하고 있다. 즉, 문자와 정지화상을 주요 도구로 삼는 네티즌과는 달리 멀티미디어로 무장한 시티즌은 화상 채팅, 모바일 뱅킹, 동영상 메일 송수신 등 쌍방향성을 갖춘 초고속의 공간 속으로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일전에 한국을 방문했던 보들리야르는 강남의 테헤란로와 강북의 인사동을 한 시간 동안 이내 남짓 이동하면서 초현대와 전근대의 풍경을 경이롭게 관찰했다고 술회했다. 초현대와 전근대가 공존하는 도시, 천 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물결처럼 흘러가는 이 익명성은 사이버 스페이스를 더 넓게 확산시키면서 인간과 인간을 격절시키는 불안한 그림자로 너울대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제 '느림의 미학'을 외치면서 아날로그의 시대로 되돌아가자는 호소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루소의 주장만큼 허망하다. 독배를 마시고 죽어가면서도 국가의 위대함을 찬탄해마지 않았던 소크라테스의 아테네는 분권화된 지방자치단체만큼 위대하지 않다.

 

 우리는 세계의 어느 나라도 경험하지 못한 디지털 시대의 최전방에서 전진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디지털이 가져다 준 혜택을 누리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서서히 퍼져가는 독약을 마시고 있는 꼴이다. 동전의 앞 뒷면 처럼 약과 독을 한꺼번에 들이키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어느 빌딩의 사무실을 들어가 보아도 벌집처럼 칸막이가 쳐진 자신의 영역 속에 개인 컴퓨터를 꿀단지처럼 모셔놓고 암호를 입력하

고 해킹 방지 프로그램을 작동한다. 또 한 켠에서는 그런 개인 컴퓨터를 제어하고 감시하는 또 다른 컴퓨터가 노동 생산성을 저해하는 일체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 현실과 가상세계를 혼동하게 하는 입체화된 게임프로그램, 접속된 네트 網에서 사실과 환영을 주고 받는 환타지가 공간을 확장하고 해체하면서 사실과 진실의 경계를 허물고 탈주와 유폐의 場이 사실은 하나의 울타리 속에 있음을 망각하게 한다.

 

 우리는 지금 속도의 경쟁에 몰입해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감춤의 욕망만큼 비례하는 몰래 들여다보기의 욕망이 존재를 불안하게 만든다. 영화관에서, 지하철에서 끊임없이 울려대는 휴대전화의 소음, 전파의 그물에 갇히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얼굴이 전혀 낯설지 않은 우리들은 국가의 이데아를 신봉하거나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인간성의 발현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민사회와도 멀

리 떨어져 버린 '창 없는 모나드'이다.

 

사람들 사이에 오래 서 있으나

누구를 기다리는 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 그는 보이지 않는다

속에 무엇이 있나 하고 궁금해하는

따뜻한 손은 찾아보기 힘들다

쓰다 버린 폐지

구겨버린 전단지

휴지와 담배꽁초

쉬임없이 매일 생산되는

버려야 할 것들

그 누구도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다

기다림이 익고

그리움이 물들고

눈물이 포도주가 되는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 우체통이

어느 날 이름을 바꾼다

사람들 사이에 쓰레기통이

섬처럼 떠 있을 뿐

 

  위의 시는 필자의 「우체통이 그립다」라는 시이다. 어느 날 부터인가 우리의 주위엔 공중전화 부스가 하나 둘 씩 사라지고 우표를 붙이고 풀로 밀봉을 한 편지를 주고 받는 일에 어색하게 되었다. 이메일이나 컴퓨터 메신저 프로그램은 수만 킬로 미터 떨어진 사람과 실시간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통신료를 지불하지 않고도 얼굴을 보면서 채팅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낭만 가득했던 우체통에 쌓이는 것은 쓰레기고 담배꽁초이다. 듣고 싶은 음악이나 영화는 mp3 등의 도구로 얼마든지 다운받아 즐길 수 있고, 같은 취미를 가진 동호인이나 이성을 인터넷을 통하여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리하여 정작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기다림과 그리움이다. 속도의 맛에 취해 버린 젊은이들은 인생의 기나긴 여정을 기다리지 않고 자살을 택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그리움이라는 오작교를 건널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디지털의 혁명은 다른 말로 바꾸면 휴머니즘에 대한 반역일 수도 있다. 좀 더 사실에 가까운 재현의 욕구는 더 큰 환타지와 이미지를 열망하게 하고 더욱 강열한 자극에 반응하도록 욕망을 사육한다. 디지털이 가져온 노마드의 유령은 애국심을, 민족을,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오직 분자화된 개인을 떠돌게 만든다. 이 나라가 싫으면 저 나라로 이민을 가면 그 뿐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아데이만투스가 따지듯이 질문한 개인의 행복 추구에 대해서 오늘날의 소크라테스는 어떤 답변을 내놓을지 못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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