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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늪과 사막의 상상력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2. 1. 10:45

서울, 늪과 사막의 상상력

  

   

 늪인줄 알면서도 허우적 거리며 산다.서울에서 떠나야지 하면서도 사막 속을 헤어나지 못한다. 낙향 ? 어디에도 발붙일 땅 한 뙈기 없는 것이 나의 처지다. 고향 ? 태어난 곳은 피난지 부산, 대대로 윗대 어른들이 뼈를 묻은 곳은 충청도, 학교 다니고, 결혼하고 애 낳고 지금까지 사는 곳은 서울이다. 빗자루 맨다고 화투짝에서 본 싸리나무를 더듬거리며 온 산을 헤매던 최전방 배고픈 졸병 시절, 땅콩나무가 있는 줄 알았다가 민간인 통제 출입금지 구역 널려진 밭에서 원 없이 땅콩을 캐내어 먹는 감격도 누렸으니 누가 뭐래도 나는 영락없이 서울 촌놈이다. 다행히 아리랑고개 너머 정능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덕택에 도시화되기 직전의 농촌의 일면을 스치듯 알았던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뒤산에는 꿩이 날고 바로 코 앞에 북한산 맑은 물이 쉬임 없이 흘러 논밭을 키웠으니 동네 어른이 돌아가시면 곳집에서 상여 나가는 전통적 두레의 마지막 풍습을 지켜본 세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배밭골 - 북악터널이 뚫리기 전 정능의 마지막 산자락 동네가 배밭골이다- 로 소풍가던 기억, 미아리 고개 넘어  돈암동에서 전차를 타고 한강 인도교에 가서 놀잇배를 타고 바리바리 싸간 도시락을 먹으며 밤풍경을 즐겼던 여름 밤, 짧아서 더욱 소중한 기억들은 급속한 산업화에 밀려 아득히 밀려나고, 지금은 풀이름, 나무 이름, 꽃 이름 하나 제대로 알아 맞히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나이가 되어 버렸다. 풀을 모르면 풀의 세계를 모르고, 나무와 꽃을 모르면 나무와 꽃이 싸안고 있는 공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서로를 품어주고 깃들게 하는 만물일체의 크나큰 품이 없다면 생의 약동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와야 할까!

  

 공동사회(게마인샤프트)에서 이익사회(게젤샤프트)로 변화해 가는 과정은 전통적 농경사회에서 산업화된 도시사회로 전환되는 것과 맞물려 있다. 극과 극이 상존하는 사회, 성공이 있는가 하면 참담한 패배가 있고 길바닥에 집 한 채를 굴리며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부초와 같은 홈리스들이 배회하는 곳, 한 쪽에서는 죽어라 다이어트를 하고, 또 한쪽에서는 맹물도 못 마시고 굶주리는 극단의 상황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삶, 그 어느 쪽에도 편입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숨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낮은 곳으로 눈 돌리기에는 눈물이 메말랐고, 역사와 민족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소시민적인 말초적 존재. 나의 시쓰기는 도시와 농촌, 부유와 빈곤, 지사적 열정과 섬약한 서정 그 사이에서 너무 자주 흔들렸다. 생활의 안락을 위해서는 연민과 동정을 버려야 했고, 인간답기 위해서는 생활을 버려야 했다. 모든 삶은 억압에서 비롯되고 끝난다. 삶의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에 서울, 그 사막은 너무 넓고 늪은 너무 깊다.

  

 낙타는 왜 가시 돋힌 풀들을 씹으며 입 안 가득 피를 맺히게 하는가? 왜 편안한 초원에서 삶을 누리지 못하는가?

  몇 권의 시집을 내면서 내가 통렬히 깨달을 것은 이 늪과 사막을 건너갈 수 있는 힘은 싸늘한 이성이 아니라 눈물 가득한 감성일 것이며 그 감성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시를 시답게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서울의 매카니즘을 부정한다.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더욱 뜨겁게 긍정하기 위해서 서울을 떠나고 싶어한다.


 진화론의 입장에 선 학자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이기주의적 태도를 갖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생존을 돕는 이타주의자들 보다 생존 확율이 훨씬 높으며, 인간의 본성 속에는 완전한 타인보다 자신과 친족에 대한 보호본능이 강하게 작용한다고 주장한다.테레사 수녀같이 전 생애를 몸 낮춰 캘커타의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헤 살다가 간 성인도 기독교 교리에 따라 천당에서의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에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사실로 증명된다 해도 그것은 너무 가혹한 삶의 태도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익명의 삶 속에서 정말 무서운 일은 익명에 편안히 묻혀 자신이 모질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데 있다.


 힘을 주면 부러지기 쉽고

 너무 힘을빼면

 영영 쓰러져 버린다

 광막한 도회지의 한복판에서

 다만 흔들리고 있을 뿐인

 늪 속에 발목을 묻은

 사람들이여        

                   - 갈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는 서로를 긍정하는데 있다. 남거나 모자라거나 보완의 존재로 서로를 의식하는데 있다.

 낙관적인 윤리학자들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이 진리라면 필경 인간은 서로 협동하는 것이 서로의 생존을 보장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러한 성향이 우리의 유전인자 속에 본성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려 한다. 선민의식으로 무장한 극소수의 귀족들, 악다구니 쓰며 쌍욕을 해대는 사람들 모두가 함께 사는 갈대가 아닐까? 흔들리고 있으면서도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망각한 사람들,고 귀하고 우아한 갈대가 있다면 기꺼이 그를 찾아다녀야 하지 않을까.



 서울시민 입니다

 유목민입니다

 뿌리를 내리는 일에는

 정말이지 관심이 없습니다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도 또

 겨울입니다

                      - 자술서



  본격적으로 강남이 개발되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강남으로, 강남으로 터전을 옮겨갈 때, 나는 오히려 서울의  북쪽 끄트머리로 터를 옮기게 되었다.

  웬만한 중소도시의 인구를 훌쩍 넘는 40만명, 12만 가구가 입주한 상계지역은 집 잃고 떠나야 하는 빈민들의 눈물로 얼룩진 자리이다. 길이 없어 청량리에서 짐짝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출렁거리며 들어가야 했던 불암산 자락, 한 쪽은 떠나고 또 한쪽은 개선장군처럼 도도하게 입성하는 모습에서 도시화의 짙은 그늘은 너무 넓었다. 나의 삶과 별개인, 어쩔 수 없이 외면할 수 밖에 없는 무력감은 상계동 연작 80 편으로 그 흔적을 남겼고 시집 <칼과 집>에 20여 편을 수록함으로서 일단락을 맺었지만, 그 때의 열패감은 내 글쓰기의 화인으로 남아 있다.


  한국의 텃새 시리즈가 끝나고 곧이어 사당동,상계동

  철거민 농성사태가 한 장면씩 잘려 나옵니다

  ...중략...

  까치는 일정한 규격의 집을 짓습니다

  위대한 자연의 섭리라고 아나운서는 말했습니다

  욕심을 내어 크게도 작지도 않게 집을 꾸립니다 전세도 없고 월세도 없습니다

  사당동,상계동 지역에는 공룡같은 아파트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 겨울을 지낼 따듯한 보금자리를 달라고 외치며

  철거민들이 돌을 던지는 순간,화면이 바뀌어 버립니다

  도시를 버리지 못하는 텃새들이 먹장구름으로 덮혀있는

  동토의 바깥에서 나는 담배를 태우고 커피를 마십니다

  순전히 자연의 현상이며 남의 일입니다 

                                                           - 텃새



  쉬임 없이 무너뜨리고 새로 짓고, 논밭을 메워 아파트를 또 세우고 지난 몇 십 년 동안의 서울의 변모는 놀라울 정도이다. 지어도 지어도 모자라는 것이 서울인가? 우리는 집에 왜 그렇게 목을 매는가?  자신의 집이 없는 도시생활은 패배 그 자체인가? 나는 가끔 집이 때때로 우리의 무덤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한다.저 단단히 보이는 시멘트 속에 알알이 자리 잡은 모래! 사막의 현현.

  왠지 사는 일이 시큰둥해지고 막막해지면, 노원교를 지나 수락산 바위에 올랐었다. 30년 전의 이야기지만 그 때, 끝없이 펼쳐진 미나리 밭 그리고 노을, 서울에서 의정부로 나가는 유일한 길이 노을빛을 받아 반짝거릴 때 자연은 크고 힘찬 숨을 평화롭게 내뱉고 있었다. 앞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의 소중함.지 금 서울에는 마음 놓고 노을을 펼쳐 놓을 곳이 없다. 시정 제로, 바로 코 앞의 사물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다. 벽과 벽이 우리의 길을 어둡게 만들고 차단해 버린다.



  거대한 감옥이었다

  마음 속에 집을 다스리며 사는 사람들과

  마음 밖 먼 곳에 집을 지으려는 사람들

  아무도 열쇠가 어디에 있는 줄 모른다

  갇혀서 오늘을 산다


                         - 수락산하- 상계동 27


  창동 벌, 그 너른 들은 빽빽한 콘크리트 지붕에 덮혀 질식해 버린 지 오래이다. 방수처리된 각진 지붕들, 사방을 둘러 보아도 곡선이 주는 여유로움과 안온함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아파트 문화는 우리에게 생활의 편리함과 안락함을 제공한다. 안락함을 얻는 대신 우리는 익명성이 주는 편협한 개인주의에 길들여진 자신을 용납해야만 한다. 나는 몸서리친다. 내가 사는 이곳이 사막이다. 체온을 나누는 오르가즘이 없는, 몸이 없는 유령의 땅이 바로 이곳이다.



  낯 선 사람들이 낯설게 살고 있다

  날이 갈수록 낯 선 사람들은

  낯 선 사람들 사이에서

  편안하게 묻히는 법을 배우고

  낯설어져야 하는 잠이 잘오는 병에 걸린다

  앞 집과 뒷 집의,일층과 이층의

  벽들이

  동아건설 창동 공장에서

  실려 나온다 끊임없이

  나는 어디에든

  따뜻한 알을 낳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벽과 벽 사이에

  무관심 사이에

  생전 보지 못한 이상한 동물을

  숨겨두고 싶다


                          - 동상이몽. 상계동 1



  나는 따뜻한 알을 낳고 싶었다.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나누고 보살펴주는 삶을 기대했던 것이 잘못 이었는지 모르지만 무정란인 줄 알면서도 계속 꿈꾸는 것이 희망이 아닌가, 사랑이 아닌가

  몇 년 전 부터 지역 이기주의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고 '우리'라는 예쁜 단어 앞에는 '이익이 부합하는 한'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우리 동네에 서울 곳곳에서 강제로 철거당한 이주민들이 임대 아파트에 입주할 동안 철거민 집단 수용소를 짓는다는 소문이 나자 아파트 주민들은 결사반대를 외치며 농성에 돌입했다.'그들이 들어오면 절도,폭행 등 사건이 빈발할 것이다!' '수준 이하의 아이들이 우리의 소중하고 고귀한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주민대책위원회는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시청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온갖 사람들이 모여서

  휴식과 평화를 즐기는 광장이

  어디 여기뿐이랴

  누구도 함부로 점유할 수 없는

  잠시 머물다 가면 그 뿐인

  이 세상


  시청 옥상 비둘기들이

  우루루 쏟아져 내려와

  모이를 조는 삽화 속에서

  나는 우울하게 기억한다


  평화의 상징이라는 비둘기가

  누구보다도 양보심없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을!


                           - 광장 . 상계동 9


  나는 비둘기들의 스크럼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저지할 수도 없었다.'시위에 불참한 세대는 벌금을 내야 합니다. 같이 사는 동네의 발전을 위해서 힘을 합쳐야 합니다!' 이 이상한 공동체의식 앞에 나는 무엇이고 나의 시는 도대체 무엇인가! 사르트르가 저만치 '내 말이 맞지? 너는 버려진 존재야 메롱'하면서 약을 올리고 일군의 선진 깃발부대가 자아를 해체하라! 자아를 해체하라! 구호를 외치며 다운타운으로 사라질 때 서울은 두뇌는 작고 몸뚱이만 잔뜩 비대해져 멸종해 버린 공룡처럼 기우뚱거리고 있었다

 

  주인이 없는 유목민의 도시, 사막과 늪으로 연결된 열탕과 같은 이 서울은 그래도 삶과 사랑을, 그리고 인간을 배워야할 탄금대와 같은 절대절명의 땅, 희뿌연 공해의 하늘을 지붕삼아 감옥이면서 학교인 도시, 천국이면서 지옥인 신기루 속에서 나는 열심히 쳇바퀴를 돌린다. 어디에도 내가 뿌리 내릴 수 있는 낙원은 없다. 나는 화해하고 싶다. 교통지옥과 스모그를 그만 용서하고 싶다



  오늘도 사막을 건넜다

  신기루처럼 보였다 사라지는 사람들

  천국이고 지옥인 사람들 사이에

  없는 길 마음으로 끌어가며

  먼 서울에는 황사가 내렸다고 한다

  뼈와 눈물과 꽃과 불들이 한꺼번에 화해하며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눈꺼풀 위로

  부끄러운 흔적을 남겼다 한다

  몇날 며칠을 그렇게 바람이 불고

  나의 형체를 미세한 모래로 남기는 일

  설산에 누가 있어 노을는 저리도 유적하게 깔리는가

  세상 밖의 일인 줄 알았더니

  아직도 내개는 태워버려야 할 기쁨도 있어

  실낱같은 미소를 사리로 남기며

  사막을 건너가는 나는 행복하다

  사막을 집으로 여기며 돌아오는 사람들 보다는 .....


                                                   - 황사, 그 깊은 우울


  일 년이면 서너 번 사대문 안으로 들어갈 만큼 나의 생활은 서울이 주는 번잡함과 조금은 거리를 두고 있다. 조금씩 공해에 밀려 병들어 가고 있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풍광 아름답기로 으뜸인 대학에서 생활 한지  이십 년. 나는 이곳에서 행복하게도 사람과 자연을 그리워하는 법을 배우고 그 열정을 꺼트리지 않고 앞으로 내가 노래해야할 인간에 대한 신뢰와 그나마 남은 자연을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것'으로 방목하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계절을 바꿔가면서 피어나는 여러 꽃과 울창한 숲에 깃드는 새들의 몸짓에서 느껴지는 적막과 평화를 회복할 수 있음에 나는 감사해 한다. 변화가 미덕인 이 거대도시에서도 눈 돌리면 바로 저기에 그대로 서 있는 북악을 바라볼 수 있음을 감격해 한다.


  며칠 전 미당 생가에 다녀왔다. 길은 넓어지고 다리가 놓여져 한결 가기 편해진 곳, 미당이 노래했던 질마재의 신화는 사라지고 그 신화 속의 사람들도 가고 없다. 그렇지만 그 곳에는 의연하게 쓰러져 가는 미당의 생가와 살구나무와 백 년 넘은 가죽나무가 있다. 팔 십을 바라보는 미당의 아우 서정태 시인이 서 있다.'자유롭기 위해 이 곳에 혼자 삽니다. 그런데 영 편치가 않네요. 어디 가려고 해도 개 밥 주는 일, 난초 물 주는 일이 마음에 걸려 죽기 전 까지는 자유롭기 힘든게 사람 사는 일 아니겠어요. 이제 형님(미당)기념관 짓는 일 마무리 짓고 생가를 복원하는 게 남았을 뿐이지요'

 상전벽해라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힘이 된다. 위안이 된다

 '겉만 멋지게 새로 짓지 마세요. 저 때절은 툇마루 그대로 놔두시고 시름시름한 저 살구나무도 베지 마세요.저 처마 밑의 새 둥지도 그냥 놔두시고요'

 나는 늪과 사막을 지나서 무성하게 펼쳐진 갈대밭을 머리 속에 가득 집어 넣는다. 서울, 그 넓고 넓은 인간들의, 혼자이면서 여럿인 갈대숲!



  여기 이 자리에 그대가 서 있었고, 저기 저만큼 그 때,그대가 걸어가고 있었다.....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여, 체온이 닿지 않는 사랑은 쓸쓸하다. 함께 가기로 했던 곳 그 어디인가

  튼튼한 기둥이기를, 비바람 막아줄 벽과 지붕이기를 우리 약속하지 않았던가, 추억한다는 일은 이미 길이 없다는 것, 따뜻하게 어루만져줄 손길을 기다리며 조금씩 어깨 낮추는 집이여,사랑이여


                                                      - 모양성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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